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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7. 21. 화요일

도비공







0.


주류 경제학이 과학이 아니라는 지난 글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반론을 올렸는데, 대체로 그들의 입장은 과학적 방법론으로 분석하는 학문이 어째서 과학이 아니냐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그 부분에 대해 잠깐만 언급하고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과학적인 방법론,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획득한 가장 뛰어난 인식체계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어떤 사건의 발생하는 원인, 즉 한 사건의 인과관계를 추론하며 가장 만족할만한 해답이 나올 때까지 고민하는 경향을 지닌 동물이다. 인과관계의 추론은 과학적 사고방식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지만, 비슷한 추론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적당한 선에서 추론하기를 멈춘다. 이를테면 누군가 이런 추론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세월호 유가족들이 보상금 준다는데도 왜 자꾸 농성하지? 에이, 아무래도 종북 좌파들이 뒤에서 바람 집어넣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다시피 인과관계를 추론해서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고 그것이 과학이 된다는 것은 천만부당한 일임을 알 수 있다.


과학은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모든 자료를 검토하고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는 결론이 나왔을 때 비로소 그것을 이론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정립된 이론도 새로운 증거가 등장해 기존 이론의 타당성이 흔들리면 언제든지 기존 이론을 폐기한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과학의 이론들은, 적어도 그 순간까지는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게 된다. 중요한 것은 과학의 이론은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신학도 그들 테두리 내에서는 권위를 지니겠지만, 신학과 과학은 형이상학적인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라는 중대한 차이를 지닌다. 어떤 사람이 어떤 문제에 대해 사유하다가 어느 순간, ‘모르겠다. 신의 뜻인가 보다.’라고 더 이상의 사유를 멈추는 순간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사이비 신학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류 경제학은 경제 현상에 대한 비판자들의 문제제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초월적인 시장 조절자를 상정하고 그것에 대해 누가 문제제기를 하든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데이터를 들이대도 그들의 태도를 바꿀 수 없다.



1.


경제학이 과학을 표방한 이상 경제 모형을 만들어 현실 경제를 설명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맨큐는 이렇게 설명한다.



경제학에서도 현실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모형을 사용한다. 경제학의 모형들은 대부분 그래프와 방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략) 이 책에서 다루는 여러 가지 경제현상을 모형을 통해 공부하다보면 알겠지만, 모든 경제모형은 일정한 가정을 전제로 만들어져 있다.(강조는 필자) 마치 물리학자가 조약돌이 낙하할 때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듯이, 경제학자들도 분석하고자 하는 현상과 직접 관련 없는 세부사항은 없는 것으로 가정한다. 물리학이나 생물학, 경제학의 모든 모형은 현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현실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맨큐의 경제학-



현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현실을 단순화한다는 주장에는 전혀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단순화하지 않고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지적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따라서 모형을 만들어 현실을 이해하려 하는 것 자체는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있으며, 굳이 과학이 아니라도 인간은 이미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방법을 통해 세상을 분석하고 이해한다.


그러나 문제는, 모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맨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정한 가정을 전제’해야 하는데, 그 전제가 타당한가의 여부라 할 수 있다. 타당하지 않은 전제를 바탕으로 한 모형은 아무리 정교한 그래프와 방정식을 동원했다 하더라도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월드 와이드 웹 초창기에 ‘버터 바른 빵과 고양이를 이용해 무한 동력을 만드는 방법’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외국에서 그 내용을 바탕으로 광고를 찍은 영상이 있기에 소개한다.





‘1. 버터 바른 빵을 떨어뜨리면 항상 버터를 바른 면이 바닥에 떨어진다. 2. 고양이는 항상 발바닥으로 착지한다. 3. 이 성질을 응용해서 고양이 등에 토스트의 버터 바르지 않은 면을 밀착해 튼튼하게 동여맨 뒤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토스트의 버터 바른 면과 고양이 발바닥의 서로 바닥에 닿으려는 성질이 충돌하여 회전운동이 발생한다. 4. 이 회전 운동으로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지금은 그 사이트를 못 찾겠지만, 당시 ‘와이스트’라는 사이트에서는 이 내용을 소개하며 동력을 얻는 과정을 제법 그럴싸한 물리학 방정식으로 설명했던 기억이 있다.


주류 경제학이 시장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의 상호작용을 가장 중요시한다면, 당연히 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은 인간의 본성과 시장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장에서는 주류 경제학이 가정하고 있는 인간관이 실제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맨큐의 경제학’에서는 ‘경제학의 기본 원리 3 : 합리적 판단은 한계적으로 이루어진다’라는 항목에서 인간의 판단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대체로(강조는 필자)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가정한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독자 여러분은 경제이론을 공부하면서 기업들이 직원을 몇 사람이나 고용해야 할지, 제품을 몇 개나 만들어 이익을 최대화할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소비자들도 주어진 소득과 가격 조건 아래서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 상품과 서비스의 구입량을 주어진 가격 조건 아래서 최대의 만족을 얻기 위해 상품과 서비스의 구입량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중략) 경제학자들은 이와 같이 사람들이 이미 하고 있는 행동이나 가지고 있는 현재의 계획을 조금씩 바꾸어 적응하는 것을 한계적 변화(marginal changes)라고 부른다. 여기서 한계적 변화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의 맨 끝부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뜻한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한계적 변화의 이득과 비용을 비교해서 현재 진행중인 행동을 바꿀 것인지 판단을 내릴 것이다. (중략) 합리적인 사람은 어떤 의사결정에 따른 한계 이득이 한계 비용보다 더 클 때에만 그 대안을 선택할 것이다.

-맨큐의 경제학-


주류 경제학은 ‘한계적 변화’라는 개념을 동원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한다. 소비자의 행동을 설명할 때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네이버 캐스트)’을 활용한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우리 일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패턴이다. 가장 유명한 짜장면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우리가 배가 고플 때 식당에서 시킨 짜장면의 첫맛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러나 한 젓갈 한 젓갈 먹는 양이 늘고 포만감이 생기면 처음의 감동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로 바뀌게 되고 완전히 위장이 가득차게 되면 더 먹으라고 권해도 쳐다보고 싶지 않은 상태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재화나 서비스를 이용할수록 만족감이 떨어지는 현상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 한다.


생산자의 행동을 설명할 때는 ‘수확체감의 법칙'(네이버 상식사전)이 주로 쓰인다. 수확체감의 법칙이란 자본과 노동 등 생산요소를 추가로 투입해 나갈 때 어느 시점이 지나면 새롭게 투입하는 요소로 인해 발생하는 수확의 증가량은 감소한다는 것이다. 가령 박정희 대통령 당시 한국 경제는 워낙 심하게 낙후되었기 때문에 고속도로 하나만 깔아도 엄청난 일자리 창출이 가능했고 경기가 활성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 규모가 일정 정도 성장한 오늘날에는 고속도로 하나 정도 새로 까는 수준으로는 전체 경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칠 수 없다. MB 시절 온 나라의 강바닥을 다 파헤쳤지만 여전히 불경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수확 체감의 법칙의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두 법칙은 현실에서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는 이론으로서 이것 자체의 타당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중력법칙과 같은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고 얼마든지 예외는 찾을 수 있다. 그것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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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주류 경제학에서는 모든 인간이 한계효용체감의 법칙과 수확체감의 법칙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가정지어 버린 점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인간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라고 표현하고, 흔히 ‘합리적 인간 가설’이라고도 부른다. 앞으로는 편의상 이 표현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물론 많은 경우 인간의 소비 패턴이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소비 패턴이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따른다’와 ‘인간이 의식적으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활용하여 소비를 한다’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물론 우리는 경험적으로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으면 질린다는 것을 잘 알긴 하지만, 몇 젓가락 째부터 질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을 바탕으로 소비한다는 가설은 완전히 넌센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수확체감의 법칙 역시 마찬가지이다. 합리적인 경영자는 무조건 시설 투자를 늘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수확체감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기업이 시설 투자를 늘릴 때에는 수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끊임없는 내부 회의를 거치지만, 실패로 끝나는 경우도 무수히 많다. 만약 기업인들이 어느 시점부터 수확체감현상이 발생할지 정확히 알고 행동한다면 아마도 ‘부도’나 ‘도산’같은 단어는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한계효용체감의 법칙과 수확체감의 법칙은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이 그 법칙을 이해하고 그것에 의거해 행동한다고 가정하는 순간 매우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궤변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게 행동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존재라 부를 수밖에 없다. 비유하자면 ‘투수들은 공을 던질 때 중력 방정식을 응용한다’라는 말처럼 터무니없다.


이와 같은 주류 경제학의 ‘합리적 인간 가설’은 일찍부터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도모노 노리오’의 <행동 경제학>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으므로 인용으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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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경제학이 전제로 하는 인간상인 경제적 인간은 인지나 판단에 관해 완전히 합리적이며, 의지가 굳고, 오직 자신의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중략) 우선 ‘합리적’이란 말부터 따져보자. 도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일상적인 또는 사전적인 사용법으로 합리적이란 말은 이성적, 논리적, 손익계산의 교묘함 등을 뜻하지만, 경제학에서는 합리성이라는 말에 상당히 한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우선 자신의 기호(취향)가 명확하며, 거기에는 모순이 없고 항상 불변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호를 토대로 자신의 효용(만족)이 가장 커질 수 있는 선택대안(예를 들면 상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타당하고 납득이 가는 가정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은 상당히 엄격한 조건이다. 쇼핑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모든 상품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고, 진열된 상품이 어떻게 편성되어 있는지를 고려해야 하고, 그 상품을 소비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용을 재빨리 계산하고, 효용을 최대화할 수 있는 상품 편성까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의사결정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입수하는 일은 비용으로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모든 정보를 입수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분석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예를 들면 백화점에는 20만 점 정도의 상품이 진열된다고 한다. 모든 상품의 리스트를 손에 넣는 일은 혹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상품 각각에 대해 소비를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용을 계산하는 일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시오자와 요시노리(경제학자)에 의하면, 초고성능 슈퍼컴퓨터를 사용하더라도 가장 적합한 해답을 찾는 데 상품 수가 10가지일 때에는 0.001초로 끝나지만 30가지일 때는 17.9분이 걸린다고 한다. 상품 수가 40가지이면 12.7일로 늘어나고, 50가지일 경우에는 놀랍게도 35.7년을 들이지 않으면 계산이 끝나지 않는다. 슈퍼컴퓨터로도 이 정도니 일반인들이 계산을 한다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뿐인가. 경제적 인간은 언제라도 커피와 홍차 가운데 어느 쪽이 좋다고 명확히 말할 수 있고, 취향은 시간이나 상황에 따라 변해서도 안 된다. 커피와 홍차에 대한 취향이 아침과 밤에 다르다든지, 어제는 커피만 10잔 마셨으니 오늘은 홍차를 마시겠다는 식은 배제된다. 더욱이 의지가 강해서 금연이나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젊었을 때부터 담배는 피우지 않고, 다이어트를 하게 만드는 지방분이나 당분 같은 것은 과잉섭취를 하지 않는다. 경제적 인간은 애초부터 금연, 금주, 다이어트라는 단어와는 인연이 없다.


경제적 인간은 지각, 주의, 기억, 지론, 계산, 판단 등 뇌나 마음이 실행하는 인지작업에 관해서는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일단 결심한 것을 반드시 실행하는 초월적 자제력을 갖춘 의지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슈퍼맨이지 않는가.


경제적 인간에 대해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쾌락과 고통의 번개 계산기’라고 말했다. 허버트 사이먼(Herbert Alexander Simon)은 ‘전지전능한 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정의하면서 ‘전지전능한 모델은 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모델이라면 모를까…. 인간의 마음을 나타내는 모델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도모노 노리오, <행동 경제학> - 


물론 인간이 항상 불합리한 행동만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합리적 인간 모델’이 완전히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간은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소비에 있어서는 대단한 합리성을 보여준다. 회사 업무용 컴퓨터를 구입하려는 사장이 지름신에 빠져 불필요한 고사양 컴퓨터를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경제학자들이 보기에 흐뭇할 정도로 가격 대 성능비를 따지게 된다. 피부에 맞는 화장품을 고르는 여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잘못 고르면 두고두고 피부 트러블을 일으키기 때문에 샘플을 발라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정보를 점원에게 물어보면서 신중히 선택한다. 하지만, 이처럼 몇몇 경우에 합리성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 행동의 전체인 것처럼 판단하는 것은 커다란 오류이다. 주류 경제학이 상정하는 ‘합리적 인간 모델’의 허점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다.



합리적 인간 모델은 과시적 소비를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과시적 소비 행태를 신랄하게 지적한 경제학자는 소스타인 베블런이었다. 그는 1899년 저술한 ‘유한계급론’에서 유한계급(자신이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부유층)에게서 두드러지는 소비의 양상은 남들에게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자각 없이 행해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들은 과시적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노동을 회피하고 자신들이 거느린 하인들에게도 생산적인 일을 시키지 않았다. 19세기 말 미국에는 그런 유한계급들이 주최하는 개 파티가 종종 열리곤 했다. 일반 노동자들은 구경도 하기 힘든 호화로운 음식으로 가득 찬 파티장에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개들이 하인의 손을 잡고 입장한다. 개들은 곧바로 테이블 위로 뛰어 올라가 잔뜩 차려진 음식을 먹어치우고 구경하는 주인들은 배를 움켜잡고 웃는다.


합리적 소비와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는 과시적 소비의 핵심은 ‘낭비’이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재화를 낭비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함으로써 자신이 다른 사람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이런 과시적 소비의 행태는 어쩌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미국 서북부 지역의 인디언들에게 있었던 포틀라치 풍습은 과시적 소비가 인류의 초기 역사부터 존재했을지 모른다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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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의 추장이 외부 부족을 초청하는 잔치를 벌인다. 추장은 그 날을 위해 추종자들과 함께 오랜 기간 동안 노동이나 사냥 등을 통해 재화를 마련한다. 그리고는 잔치에 초대된 참가자들에게 그 예물을 모두 나누어준다. 이것이 포틀라치의 기본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순수하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나는 이렇게 많은 재물을 불태워도 아무렇지 않다’라는 선언과 함께 쌓아놓은 예물을 태워버리는 형식의 포틀라치도 존재한다.


합리적 인간 모델에 대한 베블런의 강력한 비판에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학 교과서에 ‘베블런 효과’라는 항목을 간략하게 추가해 놓는 정도로 대응을 마쳤다. 베블런 효과란 일부 사치품의 경우 가격이 올라도 수요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과시적 소비는 단지 사치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중의 하나라 해도 무방하기 때문에 과시적 소비의 행태는 사실상 모든 계층에서 일어난다. 다만 유한계급들의 과시적 소비는 워낙 스케일이 크고 충격적이기 때문에 눈에 잘 띌 뿐이다. 짝퉁 유행 현상, 맛집 기행문을 올리는 블로거, 최근 유행했던 ‘허니 버터칩’ 구입 인증샷 올리기 열풍 등, 과시적 소비의 개념을 도입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우리 주위에서는 너무나 흔하게 일어난다. 이것은 인간은 한계 이득이 한계 비용보다 클 때에만 행동할 것이라는 가정에 어긋난다.



합리적 인간 모델은 충동적 소비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의 소비 행동 양식 중 과시적 소비 못지않게 발견되는 행태는 충동적 소비이다. 충동적 소비를 의미하는 인터넷 신조어 ‘지름신’이라는 단어는 젊은 층에서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검색창에서 지름신을 입력하면 ‘지름신 강림, ‘지름신 발동’ 등의 제목을 달고, 자신에게 전혀 맞지 않는 옷을 사 입는 것에서부터, 큰마음을 먹고 구입한 고가의 런닝머신이 어느새 빨래 건조대로 전락했더라 등의 온갖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담긴 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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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은 인간의 행동양식을 파악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서 심리학 연구의 대부분은 이 충동 현상을 다루고 있다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케인즈는 인간의 심리를 경제학에 도입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합리성에 의해서만 시장이 움직인다기보다는 그가 ‘야성적 충동’이라 부른 인간의 비합리성 역시 시장을 움직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야성적 충동이 단순히 충동구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케인즈는 기업가의 모험적인 투자 역시 야성적 충동으로 판단했고 사실상 시장은 그러한 야성적 충동이 이끌어 나간다고 주장했다)


이미 기업들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충동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아차렸고 충동을 이끌어낼 수 있는 다양한 마케팅 방법을 개발해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TV광고이다. 기업들은 30초짜리 광고에서 자신들의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한계 이득이 한계 비용보다 크다는 것을 구질구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쁨, 공포, 슬픔 등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자극해서 지갑을 열도록 자극할 뿐이다. 물론 케이블 TV에서는 자신들의 제품의 우수성을 십여 분간에 걸쳐 설명하는 방식의 광고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주로 생필품이나 보험 등, 비교적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 만약 인간이 충동적 소비를 하지 않는다면 당장 홈쇼핑 채널들은 줄줄이 도산할 것이고 쇼핑 호스트들은 제일 먼저 실업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갈수록 승승장구한다. 경제학의 합리적 인간 모델로는 이러한 충동적 소비를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주류 경제학은 마케팅에 대해서는 아예 다루지 않고 세상에 없는 경제 활동인양 치부해버린다.



합리적 인간 모델은 중독성 소비를 설명하지 못한다


앞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을 설명하며, 반드시 인간 행동이 이 패턴을 따르는 것은 아니고 ‘예외는 있다’라고 언급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외가 ‘중독’으로서, 모든 종류의 중독자들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 가지 재화나 서비스만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주류 경제학자들도 한계효용 체감법칙이 중독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것은 앞서 참고자료로 인용한 네이버캐스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은 중독 현상을 예외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고(자신들의 학설에 위배되는 현실을 예외로 치부하고 건너뛰는 것은 경제학자들의 전형적인 문제 대처법이다. 진짜 과학에서는 예외적 현상이 계속 발견되면 이론을 바꾼다) 합리적 인간 모델에 대해서만 계속해서 논의를 진행해나간다. 그러나 중독 현상은 결코 특별한 사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적어도 하나 정도의 대상에 중독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알코올이나 니코틴, 마약류처럼 사회적으로 나쁘게 인식되는 대상들에 대한 집착 현상만을 중독이라 부르는 언어 습관 때문에 모든 인간이 중독자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처음 느꼈던 음악의 감동을 잊지 못해 결국 그 길을 걷게 된 뮤지션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는 음악 중독자라 할 수 있다. 환거래를 하며 이득을 볼 때 짜릿함을 느끼는 트레이더의 심리상태와 고래가 나타나면 흥분하는 ‘바다 이야기’ 중독자의 심리상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강의실에서 열심히 한계효용 체감법칙을 설명하는 경제학자 역시 그가 경제학을 공부하며 느꼈던 지적 만족감에 중독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아마도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확률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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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든 대상에 중독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마 인간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 이상 중독되는 대상이 있고, 특히 고차원적인 사고를 요하는 대상일 경우에는 중독의 정도가 심한 경향이 있다. 바둑은 대단히 복잡한 수 읽기와 형세판단, 다양한 변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해 초심자들은 배우는 과정에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단 중급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엄청난 중독성을 보인다. RPG 게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해 상호작용하는 RPG의 세계는 이미 하나의 세계와 다름이 없고 그것에 빠져든 사람 중에는 몸에서 건강 이상 신호를 보내도 무시하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다. 속된 말로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본 사람은 없다’라는 표현이 중독을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서술일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 인간 모델은 이 현상을 설명하는 것에 무능하다.



인간의 합리적 판단에는 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


누군가가 팔굽혀펴기 동작을 완벽하게 한 번 시범을 보였다고 가정하자. 그가 하나를 완벽하게 해냈다고 해서 백 개, 이백 개 계속해서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하나를 완벽하게 해내면 몇 백 개가 되든 완벽하게 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이론을 전개하는 사람들이다. 경제학 대중서에는 합리적 인간의 사고방식에 대해 이해하기 쉬운 사례를 들어주며, 이와 같이 인간은 합리적인 경제생활을 한다라고 스리슬쩍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예로 든 팔굽혀펴기의 사례와 같다. 하나를 완벽하게 했다고 해서 계속해서 지치지 않고 해낼 수는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오류를 논리학에서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 부른다. 이것에 대해서는 앞서 인용한 ‘행동 경제학’의 지문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새롭게 언급하지는 않겠다.



합리적 인간 모델은 인간의 본질적인 어리석음을 설명하지 못한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정부의 초저금리 정책의 영향으로 부동산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자 월가의 금융권에서는 기발한 대출 상품을 고안해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상승 추세가 계속된다면, 집을 살 여력이 없는 저소득층에게 주택 구매 자금을 대출해주고(당연히 이들은 이전까지는 은행의 대출 자격을 획득할 수 없었다), 그렇게 구입한 주택을 담보로 장기간에 걸쳐 대출금을 상환케 하는 금융상품이었다. 담보가 있는 사람에게 대출한다는 것이 금융권의 상식이었으나 담보 구매 자금을 먼저 빌려주는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리고 그 대출을 바탕으로 일반인들은 설명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각종 파생상품들을 개발했다. 그러나 2004년 들어 미국 정부가 저금리 정책을 철회하자 주택값은 급격히 떨어졌고 이자부담이 커진 대출자들은 원리금을 갚지 못하기 시작했다. 2007년도 이르러 연체율이 20%로 급상승하자 서브 프라임 모기지 회사인 뉴 센트리 파이낸셜(New Century Financial)이 파산신청을 내는 것을 시작으로 리만 브라더스와 같은 미국의 거대 투자은행들이 줄줄이 파산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2000년대 후반을 떠들썩하게 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이다.


주류 경제학은 인간의 합리성을 무한히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인간으로 이루어진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합리적인 인간도 가장 어리석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월가의 금융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두뇌회전이 빠르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이고 그에 따라 연봉도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그들이 개발한 각종 파생상품은 평균적인 지능을 지닌 사람들은 그런 상품을 고안해내기는 커녕 모델을 들여다봐도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정교한 파생상품을 개발했지만 주택 가격이 항상 오르는 것은 아니고 언제든 하락할 수도 있다라는 매우 기초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실 기업을 망치는 주범은 무능한 직원보다는 대체로 그 기업에서 가장 유능한 직원일 경우가 많다. 무능한 직원은 정책을 기획하는 책임 있는 위치에 오르기 힘들고, 많은 경우 중간에 도태되는 경향이 있다. 기업의 정상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유능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판명된 직원들이 포진하고,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기업의 미래를 좌우할 정책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런 정책이 반드시 현실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오히려 당시에는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정책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는 대단히 어리석은 결정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신규 시장에 진입하기보다 기존 필름 시장을 고수하기로 결정한 코닥은 기업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된다. 하지만 당시 경영진의 판단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디지털 카메라의 화질은 필름과 비교할 수 없이 조악했기 때문에, 코닥의 경영진은 사람들이 이런 장난감 같은 카메라로 중요한 사진을 남기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의 시점에서 그들의 판단은 나름 합리적이었지만 디지털 카메라의 기술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화질이 개선될 것이라는 점은 고려하지 못했다. 그들이 여전히 필름 시장에 주력하는 동안 디지털 카메라는 시장을 장악했고 131년 전통의 코닥은 2012년 파산보호신청을 해야만 했다.


인간에 대해 가장 후하게 평가하는 것은 경제학뿐이고, 전통적으로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합리성보다는 어리석음에 주목해왔다. 니체는 인간을 무리동물의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종족, 초극되어야 할 어떤 존재라고 선언했다. 사실 합리적 인간 모델보다는 니체의 독설이 현실의 인간을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아인슈타인은 ‘세상에는 무한한 것이 두 가지 있다. 우주와 인간의 어리석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자에 대해서는 확실히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무엇보다 합리적 인간 모델 따위를 만들고는 경제학을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어리석음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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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주류 경제학이 상정하고 있는 ‘합리적 인간 모델’은 사방에 구멍이 뚫린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모델에 불과하다. 그러나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주류 경제학이 그런 비판에 대응하는 방식은 앞서 인용한 ‘맨큐의 경제학’의 지문에서처럼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라는 구절 앞에 ‘대체로’라는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절대 과학 용어가 될 수 없는 부사를 하나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무엇 때문에 이 어이없는 개념을 고수하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어도, 앞서 인용한 네이버캐스트의 기사를 통해 약간의 힌트는 얻을 수 있다.



뷔페에서부터 화폐까지 경제활동을 하며 느끼는 인간의 만족감을 수치로 표현한 것을 경제학에서는 ‘한계혁명’이라고 부른다. 이 한계혁명은 경제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모든 상품의 수요를 가격이나 소비자의 소득, 선호에 따라 함수로 표현할 수 있게 됐고, 마찬가지로 공급함수로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즉 인간의 모든 경제활동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네이버케스트 -



과학자 놀이가 하고 싶었던 경제학자들에게 한계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하나의 사건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소위 과학자가 수학 공식 하나 사용하지 못하면 모양새가 떨어지는 법일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비판을 듣더라도 한계적 사고에 기반한 ‘합리적 인간 모델’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비틀어서 말하자면 ‘얻은 것은 방정식이요, 잃는 것은 모든 것이다.’라고나 할까.


물론 주류 경제학도 이 문제에 대해 나름의 방어는 하고 있다. 서두에서 인용한 맨큐 역시 이에 대해 ‘마치 물리학자가 조약돌이 낙하할 때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듯이, 경제학자들도 분석하고자 하는 현상과 직접 관련 없는 세부사항은 없는 것으로 가정한다. 물리학이나 생물학, 경제학의 모든 모형은 현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현실을 단순화하는 것이다.’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학이 현실 경제를 설명하기 위해 없는 것으로 가정해버린 요소들이 조약돌이 낙하할 때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점이다. 심하게(혹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게 할 모든 요소를 다 생략해버린 지경이라 할 수 있다. 이 정도에 이르면 경제학이란, 이미 과학의 영역을 벗어난, 좋게 말하면 판타지의 세계이고 악의적으로 말한다면 사기꾼의 논리에 불과하다.


기체 분자의 성질을 하나의 모델로 단순화하면 모든 기체의 대략적인 성질을 파악할 수 있다. 아마도 여기에서 착안해서 주류 경제학은 인간을 일정한 성질을 지닌 원자로 취급하고, 원자들의 성질을 연구하면 전체 경제 현상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원자가 아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도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복합적인 화합물이다. 이것을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원자처럼 단순화해 ‘합리적 인간 모델’을 만들어낸 것 자체가 주류 경제학의 오류이고, 첫발을 잘못된 길에 디딘 이래 계속해서 현실과는 관련 없는 미로 속을 헤매는 것이 주류 경제학의 현주소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인정해 주더라도, 즉, 인간에 대한 주류 경제학의 단순화를 우리가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는 남아 있다. 주류 경제학이 닮고 싶어 하는 과학의 모델은, 현대의 과학이 아니라 19세기 무렵의 낡은 과학 모델이라는 점이다.


과학이 경이롭게 발전해가던 19세기의 과학자들은 그때까지의 성과를 토대로 인간이 모든 우주의 비밀을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낙관을 품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학자가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이다. 그는 1814년 ‘만약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뉴턴의 운동법칙을 이용해,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가설을 고안한다. 후대의 작가들은 가설 속의 존재를 ‘라플라스의 악마’라 이름 붙였고, 초기 조건을 알면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있다는 사고를 오늘날 라플라스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라플라스 세계관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수명을 다하게 된다. 20세기 초반의 과학자들은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측정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만약 어떤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전자가 있다고 추정되는 곳에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러나 전자는 빛의 파장에 접촉하는 순간 운동을 시작한다. 그래서 측정자는 전자의 운동량은 측정할 수 있지만 위치는 측정할 수 없는 상황을 접하게 된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통해 현대 과학은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느 곳에 전자가 있을지 없을지는 정확한 측정값이 아니라 확률을 통해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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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알 수 있으리라는 라플라스의 믿음과 상반되는 내용이다. 당시에는 많은 과학자들이 불확정성의 원리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고 반론을 제시했지만 오늘날에는 정설로 인정받고 있다.


경제학자들이 만들어낸 인간의 모델은 인간의 행동을 최소로 단순화하고 그 행동을 관찰하면 시장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으리라는 라플라스적인 기대에 의해 출발했지만, 정작 그 발상의 기초가 되는 라플라스의 악마는 오늘날 물리학에서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다. 그 모델을 고수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 이외의 학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우물 안 개구리들의 지적 태만에 불과하다.


얼마 전에 하버드와 스탠퍼드 대학에 동시에 입학 허가를 받은 것으로 세상의 주목을 끈 '천재 소녀'가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 뭔가 경제적인 유인이 있었으리라 생각은 하지 않고, 다만 남의 주목을 끌기 위해 하나둘씩 거짓말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본인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오늘날 주류 경제학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딱 그러하다. 경제학 초기의 거장들은 언제나 국가의 전체 경제가 관심사였지, 말도 안 되는 인간의 합리적 본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경제학을 과학이라 생각한 적도 없었고, 본인 의견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을 꺼린 적도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한계적 변화’라는 요상한 개념을 고안한 이후로 경제학은 일종의 기만술로 변질되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논쟁을 벌일라치면 어떤 초기 값을 입력해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만 나오도록 마사지를 거친 미분 방정식을 들이대면서 상대를 무지렁이 취급을 해왔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경제학은 점점 우리 일상생활에서 체감할 수 있는 현상은 단 하나도 설명하지 못하고, 바늘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서 있을 수 있는가를 논하던 스콜라 철학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하면 국가가 얼마나 발전할지 침 튀기던 경제학자들은 지금 다 어디로 숨었는가?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역사의 진보에 역행하는 구석기 인류 취급하던 인간들은 론스타가 우리나라에 끼친 해악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이, 오래된 장판 걷어내면 갈 곳 잃어 우왕좌왕하는 바퀴벌레들 같은 존재가 오늘날 주류 경제학자들의 실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런 바퀴벌레들을 숙성, 배양하는 존재들이 장막 뒤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도비공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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