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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7. 16. 수요일

그냥불패 타락한아기사슴






편집부 주



이 글은 그냥불패에서 납치되었습니다.








글을 쓰기 앞서 행여나 이걸 읽을 사람들을 위해 나에 대한 몇 가지를 짚어주려고 한다.



0. 이게 다 임병장 때문이다,라고 돌리고 싶지만 사실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다. 


1. 본인은 현재 군인이다. (13.07.23 ~ 15.04.22)


2. 20살이 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비만이 아닌 적이 없었다. (현재는 173 cm 72 kg)


3. 과거에 10여 년 간 왕따를 당했다. (유치원 1년 + 초등학교 6년 + 중학교 3년)


4. 고등학생 때 아웃사이더였다. (말이 아웃사이더지, 왕따다. 정신승리용이니 상관치 말자.)


5. 대학에 붙자마자 필자는 다이어트 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 (100 kg → 68 Kg)


6. 9살 때 처음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초, 중, 고, 대학 4차례의 과거형으로 끝낸 고민과 군인으로서의 자살이라는 현재진행형 고민을 아직 하고 있다.


7. 왕따 가해자들을 죽이지 못한 것을 내 인생 최대의 한으로 남기고 있다.


8. 요즘 부대에서 총을 주지 않는다. 쏜다면 별을 향해 쏘리라?!?


9. 요즘 들어 원한을 갚지 않으려는 생각은 하는데, 생각에 그칠 뿐이다. 물론 갚으려는 생각 또한 생각에 그칠 뿐이다.


10.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스스로가 대견하고 감사하다.


11. 왕따를 당한 기억을 끄집어 내려고 최대한 노력했지만 완벽한 파일이 아니었고, 손상된 파일이었다. 조각난 파일을 하드디스크 조각 모음을 하듯이 최대한 복원해 보려고 했지만 읽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12. 자살하지 못한 것은 내가 왕따 가해자들을 하나도 못 죽이고 가는 게 서럽고 억울해서이다.


13. 임병장 사건을 병사 개인의 문제로만 몰아가는 이 나라와 정부에 대해서 똥꼬 깊쑤키 글로 관장시키려 한다.


14. 내 인생을 정리하자면, '나쁜 놈이 휩쓸고 가니, 당한 놈이 나쁜 놈 행세를 하더라'인 거 같다.


15. 게임과 성인물, 그건 필연이었다.


16. 왕따를 당했을 때, 모든 곳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결국 난 좌절해야 했다.


17. 대학에 가서는 마치 그런 일을 격지 않은 듯이 살았지만, 쉽지 않았다. (이렇듯 왕따 당한 걸 제대로 치유하지 못해 트라우마와 상흔을 가진 자는 인간관계 형성에 미숙아가 된다.)


18. 태어나서 20살까지의 삶을 부질 없이 보냈음을 인정하고 필자는 본인을 정신적 연령 2살 정도(현재나이 - 20살 = 2)로 보고 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사랑이 보다 적은 나이다.


19. 초등학교 영어시간에 맨날 울었기 때문에 그때의 영향인지 나는 영어를 못한다. (I'm not Engilsh,잉그리쉬 스펠링이 틀렸나 보다 빨간 줄이 들어온다. 인생은 언제나 빨간 줄이 그어진다. 서류 상에 기록이 되면 범죄자가 되는 거고 아님 마는 거다.)


20. 그 외의 수업 시간에는 교실에 안 있었다. 그저 계단 사이에 걸쳐 앉을 수 있는 곳에 앉아서 하염없이 시간이 보냈다. 



아직 몇 가지를 더 쓰면 좋을 거 같지만 일단은 이 정도만 읽어도 나에 대해서는 백에 칠십 정도는 알게 된 거라고 생각한다. 

 

임병장 사건이 터졌을 때, 임병장을 차마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못 했다. TV에 나오는 그의 삶이 나와 너무나 유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병장을 김상병으로 고치면 딱 맞아떨어질 상황이었다. 나는 TV 속 임병장의 과거와 가장 근접하게 도달한 사람이었고, 또 제2의 임병장이 될 가능성에 가장 근접한 또 다른 사람이다. (이 한 줄을 쓰면서 참으로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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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일 같지 않은 거다. 임병장...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


다행인 것은 아직 병장은 15년 1월에 단다는 것이었고, 불행인 것은 15년 4월 전역이라는 것이다. 제2의 임병장 사건을 일으키기에는 너무나도 시간은 많고 총 쏠 기회도 많다.


이 회고록을 쓰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 과거와 그에 여파인 현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임병장을 이해하고 왕따에 대한 스스로의 용서와 화해를 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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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따다. 

홀로 남았고, 홀로서기 위해 노력하지만 누군가가 내 두 다리를 부서뜨린 거 같다.


필자가 왕따를 당했던 시절보다 그 수법이 교묘해지고 악랄해진 것 같다. 점점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거다. 마치 선량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다가 시간이 흐르면 용공 종북좌파 등으로 바꿔 부르며 괴롭히고 그러다 보니 당했던 사람들도 당하고 있는 이들도 점점 이해하기 힘들어지게 되고 말이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왕따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을 모조리 망가뜨려서 기억하기 어렵게끔, 또한 괴롭게끔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용서를 구해야 할 대상이 어린 시절의 왕따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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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을 때의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한 사람을 너무나도 끔찍하게 유린했다.

그렇게 유린당한 사람은 철이 들지 못한다. 성숙하지 못한다. 그렇게 괴물이 되어간다. 


일단 여기까지 써 놓고 보니 후회가 된다. 'X 됐다. 할 말은 많은데, 생각을 안 했다' 싶으면서, '뭘 쓸까?'도 고민하게 된다. 어차피 이런 건 처음인데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쓰는 것도 아니기에 쓰고 싶은 부분에서 시작해서 내 맘대로 결론을 내리자고 마음먹었다. 이거 잘 쓴다고 떡이 나오나 치킨이 나오나? 자, 시작한다. 잘 보일 필요 없다는 거에 안심했다. 자기 위안이 최고인 거다. 




12살, 성희롱범이 되다


스스로 고민해봤다. 그게 희롱이었나? 추행이었나? 혼자 생각하다가 (이걸 옆에 물어볼 수도 없고) 잠정적으로 희롱이라 정의해봤다. 만지진 않았으니깐. (물론 희롱도 없었...)


어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왕따 생활 7년차로 기억한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왕따가 느끼는 기분(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아. 또 하루인가.) + 뭔가 주위가 싸늘한 기분이 그날따라 느껴졌다. 주위에서 "변태 새끼... XXX" 혹은 "그 일이 사실이냐?" 이런 말이 들려왔던 걸로 기억난다. '뭐지 뭔 일 있나?' 하며 자리 앉으려는데, 당시 여반장(당시 남녀 정, 부로 4명씩 뽑았다.)인 J양이 날 보자마자 울었던 기억이 난다. 정확하다. 돌이켜보면 확실히 그녀의 눈빛은 성추행범을 본 피해 여성과 같은 것이었다. 


결국 난 책가방도 내려놓지 못하고 교무실로 불려갔다. 


담임선생님(확실히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이지만 미안하고 안타깝게도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 그렇게 좋은 감정을 가지진 못 했다. 물론 훌륭하신 분도 만났지만, 교통사고로 6개월 전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좋은 분이었다.)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내가 하굣길에 J양의 가슴이 크다. 작다.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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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럴 때는 했다는 쪽이 증거나 증인을 내세워서 증명해야 되지 않나 싶지만, 나는 단지 12살 밖에 되지 않았고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머리도 없었다. 그저 찌질하게 울면서 안 그랬다고 해명하는 수밖에, 결국 사건은 유야무야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그로 인해 나는 왕따에다가 성희롱범이 되었다. 합치면 '변태 왕따'라 표현해 될까? 


그래도 그렇게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던 걸로 기억한다. (훗날 다이어트 후에 사진첩을 봤는데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에 웬 60대 남성 몸매를 한 놈이 꽃다발을 들고 서있었다. 나다. 젠장)


이 이야기를 하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첫 번째는 그 당시 왕따라서 나랑 같이 다니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런 이야기는 나한테 어떻게 들었지? (쓰고 나서 이거 지울까.. 싶었다. 너무 혼자잖아 이거..) 내가 뭐 혼잣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두 번째는 필자가 성에 대해서 눈에 떴을 시점인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11살 때로 기억난다. 물론 본격적인 시점은 13살 때지만 당시 집에는 원도우98이 있었고 발가벗은 여자 사진보다 비키니 입은 여자 사진이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도 좋고 눈이 돌아간다. A형 텐트도 저절로 쳐지고 말이다. (나는 결백한가. 아닌가. 나도 나를 모르겠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과거를 회상할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은 내 기억 속에서 잊혀지다가 불현듯 군대에서 떠올라 나를 그저 멍하니 쳐 웃게 만들었다. 사실 나도 그 당시에는 내 결백을 주장했지만 뭔가 집단적 지록위마라고 할까나, 괴벨스의 말에서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다음엔 의심받지만, 되풀이되면 결국 진실이라 믿게 된다.' 그래서 이제 그때 내 잘잘못을 따져보려 하면 "나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나? 나도 헷갈린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답 밖에는 내놓을 수 없다. 정말 성의 없는 답변이라 답답할 노릇이지만 이게 가장 진실에 근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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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문뜩 든 다른 생각이 '왕따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란 것이다. 굳이 누명까지 씌울 필요가 있었을까? 있었다면 왜? 일정 수에 인원이 모여서 집단을 형성하면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가해자 방관자 피해자, 부유층, 중산층, 서민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왕따는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재미를 위해서 일까? 집단의 결속력을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일까? 그저 한 사람이 미웠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집단의 결속력이라는 것에 이르러 조금 납득을 했다. 모난 곳은 정 맞듯이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임에도 이 사회는 가차 없이 정을 때린다는 것,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통령 후보시절 연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나?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물론 그와 나를 동시에 놓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지만 어쨌든, 왕따는 주류의 개념이 아니다, 이회창 씨가 말한 메인스트림이 아니란 말이다. 리처드 매드슨의 책인 <나는 전설이다>를 조금 인용해서 표현하자면 정상은 다수의 개념이기에 왕따는 비정상일 수밖에 없다. 정상이 비정상을 다르게 보지 않고 틀리게 보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뭐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 시절에 누군가가 나를 미워했던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다. (손을 보면 손바닥이 반이고 나머지 반이 손등이듯이 나 좋아하는 사람 반이면 또 반은 싫어하는 사람이겠거니 한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결혼하는 이유는 수만 가지이지만 이혼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라고. 나에게 누명을 씌우고 싶었던 이유 역시... 그저 '단 한 가지'였다고 생각한다. 


훗날 전역하고 J양을 찾아가서 내 결백에 대해서나 그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아직 그 당시 가해자들을 지금 머리 커서 만난 적이 없다. 만나면 물어 보고 싶은 게 아마 '왜 그랬니?' 정도의 유치한 질문이지 않을까, 싶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물어볼 게 없기도 하다.) 혼자 되뇌었지만 그저 생각으로 그치려고 한다. 어차피 사람이란 자고로 본인이 믿는 대로 믿기에, 그냥 나는 J양의 남아나 있을지 모를 기억 속에서 변태 왕따인 채 살기로 했다.


다 쓰고 읽어보는데, 가관이다. 뭐. 이 환경(사실 연장이 좋아진다고 목수가 목수질을 잘하나, 잡기만 능해질 뿐이겠지.)에 썼으니깐 자기 위안을 해보지만 글에는 재주가 없나 보다. 그래도 계속, 써보자. 


이상이다.



P.S J양의 가슴은 대한민국 평균에 가까우면서 뭔가 풍성했다. (아니, 기억 상 그렇다고.) 그걸 잘 표현해 보기 위해서 사진이나 자료를 첨부하려고 했지만, "참 여기 싸지방(편집부 주 - 싸이버지식방, 군 부대 안에서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지." 하면서 쿨럭이며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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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의무를 수행 중인 군인 필자 대신 B컵 짤 첨부해 드린다 - 편집부)







그냥불패 타락한아기사슴


편집 :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