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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7. 24. 금요일

김현진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나를 스쳐 간 당신의 몸, 

당신의 이마를 한때 어루만졌던 누군가의 손, 

아스팔트 위에서 사정없이 깎여나가던 누군가의 피와 살,

철탑에서 얼거나 타들어 가는 몸들, 

당신이 나를 낚아채 주길 바라면서 

숨죽여 뺨을 대 보았던 당신의 쇄골.


몸은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은밀한 삶을 알고 있다.

이것은 그 '몸'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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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기륭전자 노조가 결성된 지 10년이다. 말 그대로 평범한 ‘아줌마’들에 불과했던 이들이 눈빛 한 번 째리면 다 꿇을 만큼, 죽는 것 빼곤 다 해 본 투사들이 되었다. 얼마 전 내가 진행했던 팟캐스트에 기륭전자 노조의 유흥희 조합원, 오석순 조합원을 모셔 이야기를 들었다. 세 시간이 지나도록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중간에 멈출 수도 없었다.


“우리 이 이야기 늘어놓으면 일주일 밤을 새도 모자라. 그런데 투쟁 다 끝나고 나니까 우리 나이 인제 50살이야. 투쟁은 이겼는데 우리 이제 어디 가서 일하니.”


여자들이야 툭하면 굶는 게 일이지만, 마음 독하게 먹고 굶어 본 적이 있다. 몇 년 전 김소연, 유흥희 조합원이 경비실 옥상에 드러누워 100일 가까이 단식을 했을 때, 방문하거나 집에서 동조단식을 하고 그만큼 절약한 식대를 투쟁기금으로 모으는 게 있었다. 성서에도 종교적 의무로 인해 단식을 했을 경우 그 음식 값만큼 과부나 고아를 도우라고 율법에 정해져 있는데, 모양새가 비슷해 신기했다. 그때 르포를 쓰고 싶었던 나는 <시사in>에 요청을 해 농성장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함께 단식을 해 보고 체험기를 쓰기로 했다.


가서 하루 굶어 봤는데 이런. 여자들은 또, 특히 나는 다이어트한다고 굶어 본 적이 하도 많아서 하루 갖고는 ‘너 굶었니?’ 소리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이틀, 이틀도 별로 배가 안 고팠다. 사흘로 하자. 사흘 굶고 체험기를 쓰자니 면이 안 선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렇다면 5일? 날짜가 어정쩡해. 일주일을 하면 어떨까?


그렇게 7일 동안 물 말고는 효소도 사양하고 아무 것도 안 먹었다. 어지러운데 기륭전자 사람들은 변태인지, 하도 이 사람들은 단식을 오래해서 인지, 먹는 기분이라도 느끼려고 농성장 컨테이너에 만화 <식객> 전권을 갖춰놓고 있었다! 누굴 죽일 셈인가... 산 채로 고문을 당하면서, 이왕 하는 거 10일은 채우고 체험기를 써야 하지 않겠냐 싶어 결국 열흘을 채웠다. 그래 봤자 94일간 단식한 두 사람에게는 한참 못 미쳤지만.


땡볕이 쨍쨍하던 8월, 나는 매일 아침 조심스럽게 경비실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올라가 보곤 했다. 두 사람의 숨이 아직 붙어 있는지 싶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누워 있는 두 사람은 매일 살아는 있었다. 살아만 있었다.


그 때 나는 앞날에의 고민, 대학원 진학 등의 문제로 3년째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직후였다. 연배나 목소리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합원, 우리의 사랑스러운 행란언니가 최근에 회사를 그만뒀다고 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정규직인데 왜 관뒀어?”


그러게, 나는 너무나 배부르게 산 것이 아닌가. 그 말은 오랫동안 내 가슴을 찔렀다. 그러게 나는 왜 그랬을까. 배가 부르다 못해 넘쳤구나. 행란언니의 활약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는 효소는 섭취하지 않았지만, 칼로리가 없다는 소리에 블랙커피는 연하게 마셔서 그나마 마음을 달래고 했다. 그런데 몇 사람이 그걸 트집 잡았다. 내가 다니던 대학엔 운동권 써클 같은 것이 전혀 없었으므로 이런 질서를 몰랐던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럼 효소 드시면서 물만 드시는 분하고, 저는 블랙커피하고 물만 먹을 테니까 누가 먼저 죽는지 보면 되겠네요.” 결국 단식 중에 기호품을 섭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중론이 모아졌다. 그러자 행란언니가 매서운 눈을 하며 말했다. “그러면 남자 동지들, 아무도 담배 태우지 마.” 이후 나는 커피 마시는 데 누구의 참견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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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중인 금속노조 기륭전자의 유흥희 조합원(좌)과 김소연 분회장(우)

(출처- 참세상)


김소연, 유흥희 조합원은 하루가 갈수록 말라갔다. 손목이 서너 살짜리 어린아이 같았다. 최동열 회장 이 나쁜 놈, 그게 내가 처음으로 접한 파업 현장이었고 왜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라 불리는지 알게 된 곳이었다.


나는 내 몸이라 잘 알지 못했지만 열흘 가까이 곡기를 끊자 15kg 정도가 빠져 키가 166cm인데 몸무게가 39kg쯤 나갔다. (물론 지금은 저것보다 XXkg쯤 더 나간다!) 몸을 씻을 데가 딱히 없어서 근처 테크노밸리의 회사 사무실을 몰래 이용했는데, 새벽녘 아무도 안 다니는 시간을 이용해 뼈 밖에 안 남은 몸을 잘 접으면 대걸레를 씻는 수도꼭지 딸린 스테인레스 물통에 기어 들어갈 수가 있었다. 마치 욕조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또 샴푸고 바디워시고 폼클렌저고 이거 다 장사하는 놈들의 상술이었다는 걸 알았다. 폼클렌저 하나만으로 목욕하고 샴푸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폼클렌저마저 없으면 비누로도 만사 오케이다.


내가 비쩍 말라가는 걸 유심히 본 건 경비실 위의 두 사람이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오가던 곳이라 나라는 존재가 얼쩡대고 있다는 걸 알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데, 몇 년이 지나 흥희언니가 그랬다. 우리 그때 많이 걱정했다고.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서 저 동지 단식 풀게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고, 저러다 죽는다고. 나처럼 하찮은 글씨 쓰는 사람에게 그 절체절명의 와중에 관심을 기울여 줬다는 것이 고맙고 황송했다.


내가 10일째에 단식을 그만둔 것은 원고 마감이 다가와서도 있지만, 컨테이너 안에 자빠져 있을 때 (오래 굶으니 왜 그리 졸리던지) 냉장고에서 밥을 해먹는 기륭 동지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였다. 커다란 양푼을 가져와 냉장고에 남은 반찬을 처치하자며 각종 나물, 김치, 남은 반찬을 고추장 넣고 쓱쓱 비벼 참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리는데, 세상에! ‘똑’하고 떨어지는 참기름의 입자 하나하나까지 보일 정도였다. 동지끼리 이럴 수 있나! 이후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다가 풀썩 쓰러진 다음, 이제는 충분히 체험기를 쓸 수 있겠다 싶어 단식을 멈추고 체험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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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마이뉴스)


그 해 말까지 농성장을 종종 찾아갔고 경찰이 털어버린 텐트 잔해 위에 앉아 엉엉 울기도 했다. 그러면서 간혹 하루씩은 동조 단식을 꼭 했다. “오늘 동조 단식이에요”라고 하면 행란언니는 “넌 하지 마”라고 하면서 컨테이너 뒤로 나를 끌고 들어가 두유에 빨대를 꽂아 억지로 내 입에 밀어 넣곤 했다. 그건 기독교에서 말하는 중생, 구원의 경험 같은 거였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내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등 따신 데서 일했었다.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 때문에 주 5일 근무제가 왔다. 사장이 착해서 우리에게 내려 준 게 아니고, 바로 이 사람들 때문에. 한없이 빚진 기분이었다.


단식의 경험은 나에게 두 가지 큰 교훈을 주었다. 첫 번째, 김영삼은 굶지 않았다. 보름달 빵을 먹은 것이 틀림없다. 두 번째, 사람은 그렇게 쉽게 굶어 죽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그런 말을 하며 서로의 두려움을 고조시킨다. 특히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는 헛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는 게 우리의 버릇이다.


“너, 그렇게 살다 굶어 죽어.”


동조단식 기간을 합쳐 총 40일 정도 단식해 봤더니, 굶어 죽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두 번째 교훈은 사람은 그렇게 쉽게 굶어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두려울 게 없다. 특히 처자식 안 딸린 홀몸이라면, 잘 안 굶어 죽으니 쫄지 말고 모험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그 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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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세상)


매일 경비실 옥상에 올라가 시체처럼 누워 있는 두 분을 보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했어도 내가 뭐라고 주책 맞다 싶어 운 적은 없었지만, 개중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 기륭전자 정문 앞 골목길에 털썩 앉아 텅 빈 위를 움켜잡고 있는데 웬 할머님이 부축을 받아 힘겹게 경비실 옥상으로 올라가고 계셨다. 저기에 올 노인 분이 없는데. 자세히 보니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되시는 이소선 선생님이었다. 단식이 100일에 이르러 가던 참이었다. 죽어서 내려오겠다고 짜 놓은 관이 옥상 위에 불길한 징조처럼 함께 있었다.


옥상으로 올라가신 이소선 선생님은 한참이나 나오지 않으셨다. 얼마 전에야 흥희언니에게 이소선 선생님이 왜 그렇게 오래 계셨냐고 물어볼 수 있었고, 그때서야 그분이 그 위에 오래 머무신 까닭을 알았다. 선생님은 오시자마자 “신나 내놔라. 신나”라고 하시며 혹시라도 분신을 할까 봐 기름을 찾는다고, 몸이 편치 않아 떨리시는 손으로 온 구석구석을 뒤지셨다고 했다. 정말 우리 그런 거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선생님은 듣는 둥 마는 둥 그 좁은 곳을 이 잡듯이 찾으셨다. 그래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거였다. 결국 신나를 찾아내지 못한 선생님은 두 사람에게 단식을 그만둘 것을 종용했다. 내 새끼 먼저 보낸 것도 가슴이 터지는데 여러분까지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살아서 싸워야지 않겠느냐고 몇 시간이나 설득을 하시는데, 단식 중이던 두 분도 몸이 힘들어 너무나 곤란했다. 큰 어른이 오셨으니 일어나 맞이하고 이야기를 하는 게 도리인데, 그 때 두 사람은 이미 앉아 있을 힘조차 없어서 흥희 언니는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앉아 어지러움을 견뎠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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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륭전자 공대위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이소선 여사 (글과 시점의 차이가 있음)

(출처- 진보넷 블로그 'We are the world')


그렇게 선생님은 신나를 내놓으라고 협박도 하고 단식을 그만두라고 애원도 해보다가 미라처럼 바싹 말라 집념만 남은 두 사람에게 끝내 지고 천천히 사다리를 내려오셨다. 간신히 바닥에 발을 딛고 치마를 터시는데 주름진 눈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골목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그분이 우시는 이유를 몰랐지만, 두 사람을 설득하러 오셨겠구나 정도는 알았고 그 눈물을 보니 잘 안 됐구나 하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모시고 온 분의 부축을 받아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기면서 걸음마다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스팔트 위에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애처롭고 작던지, 그 울면서 가시는 모습이 얼마나 가슴 아프던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는 콘크리트 벽만 주먹으로 쾅쾅 쳤다. 최동열 이 나쁜 놈아. 선생님 가시는 걸 내다보면서 하염없이 울던 김소연, 유흥희 조합원, 그리고 발자국마다 눈물을 뿌리면서 불편한 걸음으로 골목을 떠나가시던 이소선 선생님의 그 작고 작아서 마음이 아려오는 그 뒷모습...


2008년까지 <임을 위한 행진곡>도 들어본 적 없던 내가 얼결에 가 봤던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배운 건 이런 것이다. 배운 게 아니고, 그냥 ‘기억’이라 할 수 있겠다. 폼클렌저 하나로 혹은 다이알 비누로도 머리며 온몸을 다 씻을 수 있다, 사람은 쉽게 굶어 죽지 않는다, 그리고 멀어져 가던 이소선 선생님의 그 작은 등...


어쨌거나 기륭전자 노조는 내가 겁대가리를 상실하게 만들어 주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굶어 죽으면 어쩌지 하면서 내키는 일이냐 혹은 이걸 꼭 해야 할 것만 같은 일이냐 선택해야 하는 인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사람 그렇게 쉽게 안 굶어 죽는다’ 생각하면서 아직까지는 ‘안전빵’을 피해가며 살아오고 있다.


그리고 행란언니나 소연언니나 흥희언니 같은, 우리 노조원들 같은 사람들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것이 가슴에 생생히 박혔다. 굶어 죽는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니까 힘내야 한다. 이러다 굶어 죽을까 봐 고민하는 당신이 있다면, 당신도 힘내라. 아사는 우리 생각보다 상당히 어렵고 골치 아픈 일이다. 이게 기륭전자 노조가 내게 가르쳐 준 아주 소중한 진실이다.


밥이 얼마나 귀한지, 그러므로 밥 먹는 사람들은 밥값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남의 입에도 밥이 들어가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






이번 에피소드를 마지막으로

<김현진의 몸살>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김현진의 몸살>을

사랑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난기사>


경찰아저씨의 옷자락

헐리우드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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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남편 밥을 차리면서: 쌍차 해고자를 위한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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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몸

여성혐오에 대하여





김현진입니다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