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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8. 05. 화요일

행방불패 에너지전환






편집부 주


이 글은 행방불패에서 납치되었습니다.




지난 기사


원전 마피아계의 대부들(godfathers) <1>

원전 마피아계의 대부들(godfathers) <2>







후발주자 프랑스 날개를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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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전 원자력 연구에서 제일 앞서 있었던 프랑스는 전쟁의 피해를 가장 크게 받았어. 어렵사리 노르웨이의 중수를 입수하여 핵분열 연쇄반응에 성공하고서도 연구진과 중수를 영국으로 보내야만 하는 아픔이 있었지. 한마디로 숏된 거야.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캐나다를 방문한 드골은 그곳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던 할반과 코왈스키, 골드슈미트를 만나 눈물 젖은 거위간 요리를 먹으며(프랑스식 와신상담?) 후일을 기약해야 했대.

 

하지만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의 지원을 받아 독일의 점령 상태에서 벗어난 프랑스의 처지는 곤궁하기 짝이 없었지. 프랑스는 전후 서방파 두목으로 자리 잡은 미국이 유럽의 후원자로 나서는 데 저항감을 갖고 소련에도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했어. 그러자 미국은 프랑스 원자력 연구의 대부 격인 졸리오 퀴리가 공산당원이라서 최대의 적성국으로 등장한 소련으로 정보가 유출되는 것을 우려했지. 미국은 프랑스는 물론 프랑스와 공동연구를 진행한 바 있는 영국에게도 일체의 원자력 정보를 넘기지 않았어.

 

프랑스는 전후 복구의 어려움 속에서 독자적으로 원자력 개발에 나서야 했어. 할반은 영국에 남았지만 핵분열과 중수의 공동연구자인 코왈스키, 그리고 플루토늄 추출의 제1인자인 골드슈미트가 프랑스로 돌아와. 졸리오 퀴리는 2차 대전 중 벨기에령 콩고에서 수배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로코에 숨겨 두었던 10톤의 우라늄을 들여오고.

 

프랑스 정부는 1945년 원자력 연구의 총본산인 원자력청(CEA)을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전력사업도 국영화하여 프랑스전력공사(EDF)로 일원화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원자력 개발 체제를 갖춰. 원자력청은 1946년 코왈스키의 지도 아래 천연우라늄을 연료로, 중수를 감속재로 하는 실험용 원자로(ZOE)의 건설을 시작하여 1948년 임계에 도달함으로써 핵분열 연쇄반응의 제어에 성공해.

 

프랑스는 가장 먼저 중수를 감속재로 사용한 나라야. 하지만 스스로 중수를 생산해낼 기술은 없었어. 또한 미국은 농축우라늄은커녕 원자력 연구 정보조차 엄중하게 통제했지.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역시 영국과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어. 장기적으로는 농축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연료로 사용하기로 하지만 당장은 천연 우라늄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 결국 천연우라늄을 연료로 하는 가스냉각 흑연감속로인 G1로를 건설하여 1956년 첫 운전에 성공해. 근데 이 원자로는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것이 목적이었어. 발전보다도 하루빨리 완빤치를 가져야 히틀러한테 망가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더구나 섬나라 잉글리쉬들도 한방을 가졌으니 마음이 급해졌지.

 

미국과 영국, 소련이 핵실험 금지를 논의하던 중인 1959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핵억지력'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프랑스도 핵무기를 가질 것을 선언해. 어느 정도 준비가 완료됐다 이거지. 이윽고 이듬해인 1960년 2월 알제리 남쪽 레간 지역에서 프랑스도 핵실험에 성공해. 이로써 프랑스는 1967년 핵확산금지조약이 체결될 때 중국(1964년 핵실험 성공)과 함께 핵보유국으로서의 특혜를 누릴 수 있게 된 거야.


이즈음 소련이 우주개발에서 미국을 앞서나가는 등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증대하자 미쿡은 서방파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미쿡의 원자력잠수함 기술을 개방하기로 해. 프랑스도 영국과 같이 미국에 기술이전을 타진했으나 미국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드골 정부의 요구에는 '노~!', 그러자 토라진 드골은 나토에서 탈퇴하고 독자적인 힘으로 잠수함용 원자로를 개발하여 1967년 3월 첫 핵잠수함을 진수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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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해군 핵잠수함 '르 르두타블'이래


한편 1955년 프랑스 정부는 원자력청과 프랑스전력공사, 산업계 대표로 구성되는 원자력 자문위원회(PEON 위원회)를 발족시켜. 이 위원회는 우선 마쿨 연구로(G1~G3)에서 얻은 자료를 토대로 소형의 발전용 원형로를 건설하기로 하지. 이에 따라 70MW급 탄산가스 흑연로 시농1호기의 건설이 1957년 시작돼. 이어 실증로인 180MW급 시농2호기와 360MW의 시농3호기를 1958년과 1961년에 연달아 착공해. 하지만 영국에서와 같이 탄산가스 흑연로의 성과는 지지부진. 대형화와 경제성에서 고전하며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경수로가 세계 시장에 두둥~. 아울러 미국은 자국의 경수로 판매를 위해 농축우라늄 제공도 허용하는 센스까정.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독자적인 기술 개발을 주장하는 원자력청과 현실적으로 경제성을 추구하는 프랑스전력공사 간에 노형 선택을 둘러싼 지루한 싸움이 시작돼. 시농1, 2, 3호기의 설계에 대해 원자력청은 G2, G3의 시험로의 설계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전력공사는 발전로의 소유자이자 운전자인 자신들의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입장. 결국 전력공사 설계안이 채택되어 공사에 들어갔지만, 막상 작업에 임해 보니 기술적인 문제의 해결에 많은 시간이 걸려 공기가 지연되었어. 그리고 운전을 시작한 뒤에도 기술적 문제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지. 이에 대해 원자력청은 자신들의 기술적 실적에 기초한 설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때문이라고 비난했고, 전력공사는 운영상의 문제를 들어 자신들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어. 사실 전력공사는 프랑스는 물론 앞서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영국에서도 가스냉각로의 상업화가 원활하지 않은 데 비해 화력발전보다도 낮은 건설 비용을 들고 나온 미국의 경수로에 자꾸 눈길이 갔던 거야.

 

하지만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했던 드골 정부와 원자력청은 자신들이 개발한 가스냉각형 흑연감속로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어. 더구나 프랑스는 잠수함용 원자로 기술을 독자적으루 개발하고 있는 상황이었잖아. 당근빠따 연료인 농축우라늄을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경수로는 프랑스 정부에겐 아웃 오브 안중. 프랑스 정부는 1964년 2.5~4기가와트(GW) 규모의 원전개발계획을 결정하고 우선 400~500MW급의 생 로런1, 2호 및 뷰제1호 등 3기의 가스흑연로 건설을 추진하기로 해.

 

하지만 매력적인 경수로에 흥미를 버리지 못한 프랑스전력공사는 결국 모텔 투어에 나서고 이웃나라의 경수로 건설 계획에 참여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 벨기에가 계획하고 있던 미국 웨스팅하우스사의 가압수형 경수로 건설에 참가하는 한편, 스위스와 미국 제너럴일렉트릭사의 비등수형 경수로 건설에도 한 다리를 걸쳐. (이건... 쓰리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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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MW의 가압경수로인 벨기에 쇼즈 원전은 1967년 성공적으로 운전을 시작해. 반면 목표 기한을 넘겨 같은 해 운전을 개시한 프랑스의 가스흑연로인 시농3호기에서 발생한 기술적 문제가 세간에 널리 알려지면서 프랑스전력공사는 경수로에 대한 확신을 굳히지. 


'역시 모텔에서 만났던 그녀가 이뻣어, 흑...'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은 농축우라늄의 안정적 공급을 약속하며 경수로의 수출을 적극 지원해.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군사용으로 개발하고 있던 우라늄 농축 공장이 운전에 성공하여 농축우라늄의 해외 의존에 대한 우려가 감소하게 되지. 이와 더불어 벨기에 쇼즈 경수로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프랑스전력공사는 생 로런1, 2호와 뷰제1호기의 뒤를 잇는 새로운 원자로의 노형으로 경수로를 추천해. 하지만 드골 대통령은 다른 강대국들이 실험에 성공한 수소폭탄을 개발하고 있던 원자력청의 손을 들어줘. 


"조강지처 버리지 마!!"

 

그러나 1968년 5월의 프랑스 학생운동은 권위적 드골 정부를 휘청거리게 해. 1969년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패한 드골 대통령은 4월 스스로 엘리제궁에서 물러나고, 강력한 민족주의자 드골의 퇴장과 친미적인 퐁피두의 등장은 원전 개발에도 곧바로 영향을 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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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마이크 시험중... 학생들! 고마해라~" 

"국민투표해서 지면 그만둘게~"

 

1968년 4월 원자력자문위원회(CCNPE)는 이미 '가스흑연로의 건설은 훼센하임을 마지막으로 하고, 경수로를 시급히 건설해야 한다'는 권고를 제출한 바 있었거든. 1969년 퐁피두 정부에서 원자력청장관으로 임명된 앙드레 지로는 전력공사에게 모텔 자유이용권을 건네. 


"니 맘대루 양키년하구 놀아봐."

 

프랑스 전력공사는 1970년 아직 건설이 시작되지 않은 훼센하임에 당초 예정되었던 가스흑연로 대신 경수로 제1호기를 건설하기로 결정해. 그리곤 가압경수로와 비등수형 경수로 양쪽에 입찰을 요청하지. 가압경수로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사의 허가증을 가지고 있던 프라마톰사가, 비등수형은 미국 제너럴일렉트릭사의 허가증 소유사인 CGE사가 응찰해. 프랑스는 아직 경수로에 대한 기술적 평가를 할만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지 못 해서 건설 비용이 가장 큰 판단 근거가 되었고 25%나 싼 가격을 제시한 프라마톰사의 가압경수로로 낙찰돼.

 

프랑스전력공사는 시설의 대형화로 경제성을 꾀하고 기술을 축적하기 위해 같은 부지에 2기 이상을 건설한다는 기본 방침을 정해. 이에 따라 훼센하임에는 900MW의 대형로 2기가 발주되었고, 이어 이듬해에는 뷰제에도 900MW의 가압경수로 2기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지.

 

전력공사는 또한 국내 제조업체의 기술 개발과 경쟁을 위해 비등수형에게도 기회를 주기 위해 다음에는 비등수형 경수로를 건설하기로 해. 그러나 프랑스에서 비등수형은 기회를 잡지 못했어. 웨스팅하우스에 비해 제너럴일렉트릭은 유럽에서 공급체계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해 가격경쟁력을 갖지 못했거든. 게다가 1973년 말에 불어닥친 중동 발 석유파동은 추가 건설을 재촉하였고, 실적을 가지고 있는 웨스팅하우스와 프로마톰사의 경수로에게 구축당하는 처지가 되었지.

 

석유위기의 바람을 타고 프랑스전력공사는 1973년 말 '앞으로 석유 및 석탄화력발전소는 일절 건설하지 않고 모든 신설 발전소는 원자력발전으로 한다'는 방침을 세워. 그리고 매년 5~6기의 원자로를 갖춘 5GW 규모의 대형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착수한다는 계획을 발표해. 그리곤 1974년부터 1981년까지 무려 40기의 가압경수로가 발주하지. 30기까지는 900MW급이었으며, 기술이 축적되자 이후에는 1300MW급으로 대형화하면서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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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모두 70기의 원자로를 지어 현재 58기 가동 중. 

체르노빌 낙진 피해를 경험 바 있는 유럽인들에게 프랑스는 '블랙 쉽'이래.


이런 대량 발주와 건설은 웨스팅하우스사의 파트너인 프로마톰사의 입장을 강화시켜 줘. 일방적인 허가증 계약으로 출발한 양사의 관계는 점차 기술이전을 명시한 동반자의 계약으로 전환하였으며, 프로마톰사는 독자적인 기술능력을 갖추기에 이르지. 또한 자본 면에서도 45%에 이르는 웨스팅하우스의 프로마톰사 주식 대부분을 매각토록 하여 양사의 관계는 더욱 대등해지고..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원전 사고는 프랑스에겐 도약의 기회가 돼. 미국 원자력 시장이 얼어붙자 원전 업체들이 경영난에 처하게 되고, 1981년 웨스팅하우스는 원천기술을 프로마톰에게 팔아. 전적으로 넘긴 건 아니고 프로마톰사도 독자적으로 원자로를 공급할 수 있게 허용하는 거였지. 암튼 이로써 세계 시장에 발을 들인 프로마톰사는 오늘날 세계 원전 마피아계의 최대 대부 '아레바'로 성장하게 돼.

 

현재 프랑스는 전력의 4분의 3을 원자력발전으로 생산하고 원전 산업이 핵심 산업으로 자리 잡았어. 하지만 이게 프랑스에 약인지 독인지는 모르겠어. 재생 가능 에너지로 전환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유럽연합 내에서 프랑스는 '블랙 쉽' 취급을 받고 있거든. 머지않은 장래에 판가름이 나겠지.





일본, 피폭국가에서 원전 수출국으로 




원자력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는 이중적이야. 일본은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이지.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었으며 그 후유증은 두 세대가 흐른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상흔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평화를 갈구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자력이 가진 엄청난 에너지(힘)를 추구하게 만들었어. 그것이 발전이든, 핵무기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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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일본의 패배를 재촉하고 확인한 것은 ‘리틀 보이’와 ‘팻 맨’ 단 두발의 원자폭탄이었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일본은 아시아의 식민지로부터 물러나 무장해제된 상태로 미국의 애정 어린 지도를 받아들여야 했지. 다시 힘을 길러 대국의 영광을 찾고자 하는 일본에 기회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어. 동서 냉전이 고조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일본을 동아시아의 교두보로 삼아. 이를 기회로 일본의 경제는 다시 부흥하고 자위대라는 준군사조직까지 편성할 수 있었지. (내 칭구가 그러는데 일본 야구 동영상 보면 얘들은 진짜 '집단 자위' 무쟈게 좋아한대. 나야 그런 거 잘 안 봐서 모르지만.)

 

그러던 차에 나온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 선언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였어. 1954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의원의 발의로 원자력 연구개발 예산 2억3,500만 엔을 확보하고, 1955년에는 원자력 기본법이 통과되어 4~6년 단위의 원자력 이용개발 장기 계획이 이어져. 1956년 설립된 일본원자력연구소는 일본 최초의 연구로 JRR-1을 건설하여 1957년 8월 초임계 상태에 도달해. 이어 원자력연구소는 연구로 JRR-2와 JRR-3으로 성능을 향상시키며 연구를 계속하지.

 

이를 토대로 일본원자력연구소는 1960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사와 동력시험로 JPDR의 건설 계약을 체결해. 12.5MW의 비등수형 경수로인 동력시험로의 건설에는 제너럴일렉트릭사의 일본 내 파트너인 히타치제작소가 기기 제조를 수행하지. 이 동력시험로는 1963년 10월 첫 발전을 시작하여 일본 원자력 발전 시대의 개막을 알려.

 

원자력 연구를 시작한 일본은 자주 개발과 상업로의 조기 수입에 대한 논쟁을 벌여. 다수는 하루빨리 선진기술을 수입하자는 쪽이었는데, 일본 정부는 1957년 일본원자력발전(주)을 발족하여 미국의 경수로와 영국의 가스로에 대해 교섭을 시작해. 아직 본국에서도 상업화되지 않은 발전용 원자로를 수입하기로 할 정도로 일본의 원자력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거지.

 

흥미로운 건 이때 일본이 미국의 경수로가 아니라 영국의 탄산가스냉각 흑연감속로(마그녹스로)를 수입하기로 결정했다는 거야. 이바라키현 도카이무라에 건설된 116MW급의 이 가스로는 1965년 11월 첫 발전에 성공해. 영국의 유일한 원자로 수출이기도 한 이 거래는 미국의 영향 아래 있었던 일본으로서는 대단한 결단이었지. 일본이 왜 이런 모험을 강행했을까?

 

맞아, 플루토늄!


일본으로서는 농축우라늄을 미국으로부터 들여오는 경수로보다 천연우라늄을 사용하여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가스로를 선호했기 때문이었지. 여기에는 원자력을 바라보는 일본의 숨은 욕망이 그대로 드러나. 바로 원자력발전의 외피를 두른 핵무기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강렬한 욕망!! 마침내 이들은 훈도시를 벗어젖히고 아베를 선두로 집단 자위를 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 있는 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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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첫 원전이 세워졌던 도카이무라에는 

핵연료사이클공학연구소 등 원전 관련 연구 시설들이 모여 있대


하지만 이런 일본으로서도 본격적인 원자로의 도입은 미국의 경수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어. 1960년대 들어 영국이 가스로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미국의 경수로는 경제성을 확보했기 때문이었지. 당시 경수로는 건설비가 더 저렴하고 향후 개량과 대형화를 기대할 수 있었거든. 일본의 9개 전력사들이 미국의 경수로 수입을 추진해.

 

일본원자력발전㈜도 1965년 9월 경수로로 노선을 변경하여 쓰루가발전소 1호를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사에 발주해. 357MW의 비등수형 경수로인 쓰루가 1호기는 제너럴일렉트릭과 히타치그룹에 의해 건설되어 1970년 3월 상업운전을 개시하지.

 

그해 11월에는 간사이전력이 발주한 미하마발전소 1호기도 가동을 시작해. 이 넘은 340MW의 가압경수로로 웨스팅하우스와 미쓰비시 그룹이 건설한 거야.

 

이듬해인 1971년 3월에는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1호기가 영업운전을 개시함으로써 원자력발전이 본격화되는데, 이 원자로는 460MW급의 비등수형으로 제너럴일렉트릭과 도시바그룹이 참여해.

 

봐봐~ 일본 회사 몇 개 나왔지?

 

히타치제작소, 미쓰비시중공업, 도시바, 이 세 개의 회사는 질긴 넘들이니까 기억해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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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원전 건설에서 주목할 부분이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사나 웨스팅하우스사가 원청업체이지만, 건설 과정에는 일본의 대기업이 하청업체로 참여하여 기술 습득을 꾀했다는 거야. 이때 원전 건설에 참여한 히타치제작소와 미쓰비시중공업, 도시바는 현재 원전 마피아계에서 서방파 3대 패밀리에 모두 이름을 올려.

 

일본 정부는 일본원자력연구소와 일본원자력발전(주), 발전사, 제조업체들을 망라하여 1975년부터 세 차례에 걸친 개량 표준화 계획을 추진해. 이는 하청업체로 참여하면서 습득한 기술을 기반으로 기존 원전의 문제점을 개량하고 원자로의 국산화를 추구한 정책이었지. 마침내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수행된 제3차 개량 표준화 계획에서는 일본형 경수로라고 할 수 있는 개량비등수형원자로(ABWR)와 개량가압경수로(APWR)를 개발해. 개량비등수형원자로는 1991년과 1992년에 가시와자키가리와 6호와 7호로 채택되어 1996년과 1997년에 신장개업!

 

비등수형 경수로 개량에 참여한 업체는 제너럴일렉트릭의 파트너인 히타치와 도시바 두 회사였고, 웨스팅하우스와 가압경수로 개량에 협력한 회사는 미쓰비시중공업인데, 현재 일본에 비등수형 경수로가 더 많은 것은 이런 사정에 연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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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그동안 모두 60기의 원전을 지었어





기대하시라, 다음 편을...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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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전환'님께서는 딴지일보 대표 메일(ddanzi.master@gmail.com)로 연락 가능한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를 보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조만간 필진 전용 삼겹살 테러식장에서 뵙겠습니다.



 




행방불패 에너지전환


편집 :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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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선은 끊임 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