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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8. 07. 목요일

산하






산하의 가전사


끔 하는 쟁 이야기 랑 이야기의 줄임말입니다. 

왜 전쟁과 사랑이냐... 둘 다 목숨 걸고 해야 뭘 얻는 거라 그런지 

인간사의 미추, 희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얘깃거리가 많을 거 같아서요.” 


from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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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초 바야흐로 최씨 60년 무인 정권을 여는 최충헌이 고려 천지를 호령할 즈음, 동북아시아, 아니 전 세계를 때려눕힐 거대한 태풍이 몽골 고원에서 발흥하고 있었어. 바로 칭기즈칸의 에케 몽골 울루스, 즉 대몽골제국이 그 태풍의 진원지였지. 


칭기즈칸은 자신의 조상의 원수이자 몽골인들을 분열시키고 짓밟던 여진족의 금나라를 공격한다. 한때 강성했던 금나라지만 몽골군의 파상공세에 무기력하게 무너졌고 몽골의 압력은 오늘날의 만주 지역에 이르게 돼. 마치 훈 족의 서방 진출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가져왔듯이 몽골의 압박은 금나라의 지배하에서 찍소리 못하고 살던 거란족을 움직이게 했고 거란 군대라기보다는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까지 거느린 거란‘족’이 고려로 밀고 들어온 거야. 


이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낸 게 김취려 장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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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관우처럼 수염을 길러서 시종들이 수염을 '모시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할 정도로 그 위용이 대단한 사람이었지. 처음에 고려군은 전군 중군 후군 3군으로 나뉘어 출진하는데 김취려는 후군을 맡은 사람이었어, 후군은 가장 약체라고 평가받는 부대였다고 하는데 김취려는 용맹하게 싸워 적을 물리치지. 전군과 중군이 참패를 당한 것과는 달리 말이야. 


이후 김취려는 군의 중심이 돼서 거란군과 싸우는데 평안도 영변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큰 슬픔을 겪지. 함께 출진했고 같이 싸웠던, 그래서 든든하기 이를 데 없던 큰아들을 전투에서 잃은 거야. 당시 김취려의 나이가 40대 중반이었으니 큰아들이라면 20대 중반의 한창 젊은 나이였을 거야. 김취려는 물론 비탄에 젖었겠지만 그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거야. "이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그 누구인들 누구의 아들이 아니랴. 자 모두의 원수를 갚으러 가자."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김취려가 이끄는 고려군은 그때부터 후일 거란족을 완전히 무릎 꿇리고 몽골과 새롭게 어깨를 맞닿게 되는 강동성 전투에 이르기까지 두려움 같은 건 제쳐 놓은 거란군의 저승사자로 군림하게 되니까. 아들을 잃고도 의연하게 깃발을 휘두르고 칼을 휘두르는 총대장 밑의 부하들은 목숨이 셋 정도는 있는 것처럼 싸우게 되지 않았겠어. 그리고 1217년 7월에 벌어진 박달재 전투는 그 하이라이트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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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의 그 박달재 맞아 


요즘은 그 아래로 터널이 뚫려 버려 좀 빛이 바랬으나 근 천년 동안, 또는 그 이전부터 충주와 제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지. 그 즈음 거란군은 평안도 언저리에서 놀던 초반과는 달리 내륙 깊숙이 들어와 원주를 점령하고 제천 일대로 남하하고 있었어. 이들을 박달재에서 막아선 게 김취려였어. 원주에서 남하하는 거란군을 국지적으로 괴롭히던 김취려는 박달재 정상에 군을 집결시킨 뒤 숨을 죽이고 거란군을 기다렸어. 


마침내 거란군이 박달재에 헉헉대고 달라붙었을 때 김취려는 공격 명령을 내리고 고려군은 고갯마루에서 아래로 빗자루질하듯 쓸어내기 시작한다. 거란군도 저항했지만 관우처럼 긴 수염 휘날리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려군을 호령하는 김취려의 활약 앞에서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지. 몇 달 전 김취려는 개경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령부가 기습당하는 위기 속에서 분전하다가 창도 맞고 화살도 꽂혀 죽을 뻔했었지. 그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도 않았을 때였어.


김취려 휘하의 병졸들은 겁이 나도 염치가 없어서 도망가지 못 했을 거야. "저 양반 아들도 전사했고 저 양반 자신도 죽다가 살아났는데 그 앞에서 어떻게 도망을 간단 말이냐." 박달재 전투에서 거란군은 참패하고 북쪽으로 도망가 대관령을 넘어 해안길로 고려 동북면 국경을 넘어 달아나게 돼. 


거란군은 참패한 뒤에 고려군에게 이렇게 애걸하기도 해. "우리야 죄를 지었지만 여자들하고 애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살려 주십시오." 즉 강성한 제국의 정규군이 아니라 그냥 유목민 '떼'였던 거지. 그런데 왜 김취려는 그들을 맞아 악전고투를 해야 했고 아들도 잃고 죽을 뻔해야 했을까? 고려의 군사력이 약해서? 그렇다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어, 바로 권력자 최충헌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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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정치?


최충헌의 지상과제는 국토방위가 아니라 정권 안보였어. 처음에 거란족 내침 소식이 들려오자 별것도 아닌 일로 소란하게 한다며 소식을 전한 이를 귀양보내는 위엄(?)을 과시하더니 이후 동원령을 내려 스님들까지 징발한 거란족 토벌 군대를 편성하면서도 그는 자신을 호위하는 고려 최강의 무사 집단에는 손도 대지 않았어. 어떤 짓까지 하냐면 자신의 호위병 집단인 도방(국사 시간에 배웠지?)의 무사들이 참전 의사를 밝히면 외딴 섬에 보내 버렸고 출정군 가운데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도방으로 들어오지?" 하면서 은병을 내밀었을 정도야. 이런 짓들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아마 '동시 사열'일 거야. 


전쟁에 나설 출정군이 조직되면 왕이나 기타 권력자 앞에 도열하여 의식을 치르는 게 동서고금의 일반적인 예지. 그런데 최충헌은 동서고금에 없는 사열을 벌여. 전쟁에 나서는 출정군을 격려하는 사열식에 자신의 도방 군사들도 쫙 도열시킨 거야. 생각해 봐. 일단 덩치와 눈빛부터 다르고 무장도 화려한 권력자의 사병들 앞에서, 도방에 들어갈 만한 능력은 안되고 군대를 빠질만한 재산도 없고 농사짓던 쟁기 대신 별안간 창을 쥐고 듣도 보도 못한 서북면으로 행군할 생각에 눈만 껌벅거렸을 허울 좋은 '출정군' 병사들을. 최충헌은 거란족보다도 자신을 위협할 대규모의 군대 편성이 더 두려웠던 거야. 특히 견제한 건 김취려와 함께 싸운 총대장 조충이었는데 후일 그의 개선식마저 생략할 정도로 옹졸한 모습을 보여. 


정권의 사병화가 된 군대는 결코 강할 수 없어. 바로 그게 김취려가 악전고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야. 김취려는 창을 거꾸로 쥐는지 제대로 쥐는지도 모르는 농민병들을 데리고 군례 올리는 법부터 가르치고 암구호 요령부터 익히게 하면서 싸웠던 거야. 기록에 따르면 '술이 생기면 같은 잔으로 졸병들과 함께 마시면서' 격려해야 했고 그들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무사 집단이 선봉에서 활약할 수 밖에 없었고 대장이라 할 김취려 자신도 창과 화살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해야 했고 아들은 목숨을 잃어야 했던 거지. 


오늘날 사이버사령부의 군인들이 선거에 개입해 자국민을 상대로 한 '작전'을 펴고 자빠졌고 그 공으로 훈장도 받고,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의 자식은 군대에서 서로 괴롭히고 고통받다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상황을 떠올린다면 무리일까. 그런데 그 대장이라 할 참모총장은 병사들의 근무 연한 (이병으로 몇 개월, 일병으로 몇 개월 근무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 군대는 13세기의 고려군보다 무엇이 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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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김취려 장군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공을 세우게 된다. 전투에 이긴 공도 있겠지만 강동성 싸움에서 거란족을 노리고 들어온 몽골군과 '형제의 의'를 맺은 거야. 물론 몽골군 사령관과 형제의 의를 맺은 건 총사령관 조충이었지만 몽골군 속으로 그 긴 수염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서 담판을 지은 건 김취려였어. 


이때 김취려는 나이까지 속이는 깜찍함(?)을 과시해. 몽골 원수 합진이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하니 기록상 당시 쉰도 안됐던 김취려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환갑이오"라고 대답해서 합진으로 하여금 "아이쿠, 나는 쉰도 안됐으니 당신이 형님이네." 하고 한 수 굽히게 만들었고 당연히 김취려보다 나이가 위였던 조충도 몽골 원수 합진의 형님이 되게 했던 거지. 


이 '형제의 의'가 왜 의미있냐 하면 몽골 제국이 전 세계를 정복하러 다니면서 '형제 관계'를 맺은 적은 없기 때문이야. (합진에 따르면 칭기즈칸이 그렇게 명령했다고) 전쟁하기 전엔 적이고 전쟁한 뒤에는 복속할 따름이었던 몽골에게 ‘형제’ 관계란 그 이전도 이후도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해. 후일 몽골에 무릎 꿇은 뒤 그냥 몽골제국의 일부, 즉 대원제국의 한 성으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을 때 이 '형제의 의'의 선례는 칭기즈칸도 고려를 이렇게 대했습니다 하는 논거로 작용했다고 해. 형제의 의를 맺은 것이 김취려의 공만은 아니겠지만 그가 흉포하다고 소문난 몽골군에게 갈 것을 자청하면서 남긴 말은 새삼 그의 이름을 다시 기억하게 한다. 


"나라의 이해(利害)가 오늘에 달려있거늘, 어렵다고 피할 수만은 없습니다. 

제가 병사들을 이끌고 몽골군에 합류하겠습니다." 


이런 군인이 오늘날에도 있기를 바랄 뿐이야.







산하

트위터 : @sanha88


편집: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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