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8. 08. 금요일
파토
<파토의 쿡찍어 푸욱>은 시급한 현안에서부터 해묵은 숙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 사회 관련 문제를 다루는 코너임다. 과학 잡설 <호모 사이언티피쿠스>와 교대하면서 격주로 연재되니 많은 사랑 주시던가. 지난 기사 <파토의 쿡찍어 푸욱> 3. 지금 우리에게 놓인 투쟁의 현실 <파토의 쿡찍어 푸욱> 6. 박정희, 이승만, 일제 그리고 개드립 <파토의 쿡찍어 푸욱> 8. 하는 김에 하는 교통 이야기 <파토의 쿡찍어 푸욱> 9. 우리는 그들에게 대한민국인가 <파토의 쿡찍어 푸욱> 10. 비극으로 모자라서 이렇듯 철저하게 패배할 겁니까 <파토의 쿡찍어 푸욱> 15.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바뜨 |
20대 후반 이상은 기억하겠지만 IMF관리체제하에 있던 15년 전 쯤에 <이경규가 간다>라는 티비 프로가 생겼다. 이경규와 제작팀이 횡단보도 신호등 주변에 숨어 있다가 정지선을 정확히 지키는 차를 찾아 냉장고를 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상당히 화제가 됐었다. (이하 프로그램명은 양심 냉장고로 부르겠다)
특히 첫 회는 한밤중에 인적이 드문 횡단보도 정지선을 지킨 장애인 운전자가 등장해서 드라마틱한 시작을 알리기도 했다.
새벽까지 기다리던 제작인이 신호를 지키는 넘이 아무도 없어 철수하려던 찰라 나타난 장애인 운전자. 이경규의 ‘왜 신호를 지키셨어요?’라는 질문에 힘겹게 그는 ‘난 항상 지켜요’ 라고 대답했고 이게 꽤나 임팩트가 있었다.
양심 냉장고는 이후 진행 과정에서 다소 무리가 있긴 했지만 당시 우리 사회에서 나름 의미있는 프로그램이었다는 점, 일단 전제하자.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제목과 내용, 그리고 지금의 세태와의 비교를 통해 다른 각도로 짚어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 관련된 논의를 통해 교통 부문을 넘어 이 사회가 갖고 있는 중요하지만 가려져 있는 문제들의 일면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건지, 함 같이 들어가 보시자.
이 프로그램은 우리가 정지선을 지키는 걸 ‘양심’의 발로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작진이나 보는 사람이나 저기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경우는 거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근데 좀 생각해 보면 이게 핀트가 좀 어긋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양심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나온다.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백과사전엔 이렇게 돼 있다.
양심(良心)은 선악을 판단하고 선을 명령하며 악을 물리치는 도덕 의식이다.
살짝 다르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표현은 선악과 도덕 의식이다. 근데 우리가 횡단보도 정지선에 차를 세우는 행위가 과연 ‘선악’의 문제일까? 정지선을 넘어서 있는 차에 대고 ‘이 양심도 없는 악한 자 같으니!’ 라고 비난하는 경우는 없지 않냐는 거다.
그래서 여기 개입돼 있는 건 실은 양심하고는 좀 다른 뭔가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데, 이게 뭔지 파악해 나가는 게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고질적 문제들에 접근하는 한 방법이라고 우원은 믿는 바이다.
그럼 생각해보자. 저런 게 양심하고 다른 거라면, 양심은 대체 뭐냐.
...누가 밤에 좁은 시골길을 운전해 가는데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서 그만 쳐 버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이 깜깜하고 CCTV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가면 내 짓이란 걸 아무도 모를 게 분명하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혹은 대부분의 인간은 순간적으로 생각이 돌기 시작한다. 내 차에 치인 저 사람은 술에 취해 차길을 위험하게 걷고 있었고 시커먼 옷을 입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따라서 사고의 절반, 아니 그 이상은 저 양반 책임이다. 게다가 보아하니 죽을 때가 멀지 않은, 사회적으로는 별 존재 의미도 없는 (알콜중독자일지도 모를) 노인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40대의 대기업 부장으로 많은 책임을 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한 집안의 가장이요 이 나라의 산업 역군이 아닌가? 그런 내가 이런 일로 감옥살이라도 하는 건, 내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내게 기대를 건 많은 사람들, 나아가 이 사회를 위해 큰 손실이다... 운운.
겪은 적은 없지만 뺑소니의 유혹은 실제로 열라 크고 강렬할 거다.
그 순간 내 앞의 세상이 두 개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거두절미하고 얼른 119와 경찰에 연락하는 분. 사람 살리는 게 첫째고 책임이고 뭐고는 다 나중에 걱정할 일인 거다. 둘째는 그냥 도망가는 넘. 이 때 이넘 마음은 ‘제길 똥밟았네’ 부터 ‘죽진 않았을거야, 누가 발견해 치료해 줄거야’ 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완전범죄를 위해 쓰러진 사람을 후진해서 밟아 확인사살하는 인간말종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좀 거창한 예를 들긴 했지만 양심은 이때 첫째를 선택하는 마음의 힘이다. 내 이익과 안위, 나아가 저런 기괴한 합리화의 유혹을 극복하고 선악의 기본을 지키는 게 바로 양심이기 때문이다. 이건 누구나 깊숙히 갖고 있는 사람된 맘을 용기있게 직시하고 거기 맞게 행동하는 개인의 내적 윤리고 규칙이나 룰, 법, 합리성과는 별개다.
그리고 여기서 양심 냉장고의 개념적 헛점이 드러난다. 정지선 지키기 같은 건 우리 심중의 죄책감을 건드리는 일이 아니라 소소하다면 소소한 ‘룰’이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에 의거하는 접근으로는 도리어 지킬 이유가 불투명해 지기 때문이다. 선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바쁘다, 정지선이 너무 멀다, 차가 많다 등등 위반을 위한 합리화가 쉽게 가능한 거다.
그럼에도 그런 부분을 지적당하고 찝찝함을 느낀다면 그땐 양심의 가책하곤 좀 다른 게 작동하고 있는 거다.
바로 수치심, 다시말해 쪽팔림이다.
신호 안 지켰다고 이러진 않겠지만서도
수치심이라는 감정의 원인은 사소한 옷매무새 문제부터 공개적으로 개망신을 당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천박함을 인식하거나 주위에 노출당하는 데서 생겨난다.
그럼 스스로 천박하다고 느낄 때는 언제일까? 자기 자신의 기준, 혹은 사회의 기준에 비해 스스로 모자람을 깨닫거나, 보편률에 의거해 미달한다는 점이 확인될 때다. 이 기준은 양심하고는 좀 다르다. 지가 한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넘조차 막상 세상에 노출되면 위 사진처럼 얼굴을 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맘을 느껴야 마땅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룰’에 대한 존중의 결여다. 다른 말로 준법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 때의 룰이 곧 법을 말하는 건 아닌 데다가-후진한 사회일수록 둘 간의 차이가 크다- 울나라에서 개념 없이 기계적으로 쓰이는 말이라 오히려 의미를 전달하기 어렵다. 따라서 여기에서 룰의 존중은 ‘양식있음’에 가깝다고 보면 되겠다.
룰은 합의의 결과다. 한 사회나 문명이 다양한 논리적 사고와 상식, 경험을 통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정리한 것들이다. 그리고 대개는 그것을 따르는 게 합리적인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존중은 합리성에 대한 인식이자 문명에 대한 존중이고, 반대로 룰을 쉽게 무시한다는 건 그 의미들을 인식할 수 있는 지성의 결여를 뜻하는 거다.
이렇게 룰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들은 ‘양심’에 크게 거리끼는 게 아닌 한 모든 게 합리화되고 핑계 거리가 생긴다. ‘나만 그러냐’는 항변과, ‘나만 손해 볼 수 없다’는 투쟁심과 억하심정 같은 게 여기 또 함께 한다. 그 과정에서 룰을 경시하는 이런 태도들의 총합이 사회를 얼마나 막장으로 밀어넣는지 그들은 전혀 보지 못한다. 스스로를 원칙과 합리성으로 통제하는 걸 포기해 버렸기 때문에 행정력이나 언론에 의해 지적되지 않는 한 문제의 존재 자체가 환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태도로 살아도 그들이 원한 이익은 충분히 달성되지 않는다. 교차로 꼬리물기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듯 사회적 룰을 무시하면 일시적으로 편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결국은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천박할 뿐 아니라 그게 목적으로 하던 이익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하는 빙충이 짓을 하고 있는 거다.
...이런 게 미개한 거고, 이런 사람들이 많은 게 후진국이다. 다른 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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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은 비결이 뭐든 이런 점이 매번 환기되기 ‘전에’ 미리 공유돼 있는 사회다.
일단 그들은 룰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심을 갖고 있다. 이건 그들이 스스로 살고 만들어가는 사회, 커뮤니티에 대한 신념과 관련돼 있는 부분이다. 굳이 그 사회가 절라 믿을 만해서 신념을 갖는 게 아니다. 울나라 사람들이 정치인들 욕도 많이 하고,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도 자주 하지만 사실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미국도 별 다를 게 없다.
아래는 지난 2013년에 USA 투데이가 실시한 정치권에 대한 신뢰도 조사 결과다.
보다시피 ‘아주 가끔’ 즉 거의 안 믿는다는 비율이 75%를 넘고 있는데 울나라보다 나을 것도 없는 수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에 우리처럼 자조적인 불신과 냉소가 팽배해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개인의 사회적 태도와 위정자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은 별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정치인이나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부도덕함이나 문제점은 어느 사회에서나 그것대로 짚어가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러니, 그들이 저러니 나도...'라는 태도는 결국은 남의 존재 양식에 자기 삶을 의탁하는 어리광을 부리는 짓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고 지난 시간의 표현을 따르자면 줏대가 없기 때문에 근대 시민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 공화국에서는 내가 바로 사회다. 내 행동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권리와 책임을 질 자세를 가진 자만이 한 나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거다.
이렇게 기본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결국 주변이 어떻게 하나 눈치나 보면서 군중심리에 기대 생존한다. 그런 태도의 결과는 시민의 실종, 사회의 전근대적 쇠퇴, 봉권적 권력 구조의 복귀, 그리고 종국에는 구성원의 자유와 권리의 제한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어디서 많이 본 꼴 아니냐.
두번째는 그들은 합리성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건 사소하더라도 보편적 룰과 양식을 지키는 게 결국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거다. 지금 당장엔 가시적 도움이 안될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관련된 문화가 향상되기 때문에 그 혜택이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점을 아는 거다. 물론 불합리한 룰들도 많이 있지만 그건 개별적으로 따져야 할 사안이지 그 이유로 룰 전체가 경시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점도 구성원 사이에 공유돼 있다.
그런 합리성이 공유되지 않은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래의 모습이다.
이건 인도 뉴델리의 미친 지하철 타고 내리기 광경이다. 우원이 직접 겪은 바, 타는 넘과 내리는 넘이 서로 전혀 양보 없이 뒤엉켜 매번 미식축구의 스크럼처럼 대치하는 아비규환이 연출된다. 우원은 지하철에서 저 무더기에 낑겨 내리고 나서도 이 모습을 계단에 서서 한참 바라봤다.
그런데 아무리 보고 있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타기 위해서만 저러는 게 아니라 내리기 위해서도 저런다. 사진은 러시아워의 모습이지만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을 때도 저런다. 하지만 이렇게 혀를 차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광경도 막상 저 사회에서 늘 저렇게 산 사람들한테는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자기가 속한 사회의 무지몽매함은 바깥에서 객관적인 눈으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머 저런 나라가 다 있나 싶겠지만 울나라의 꼬리물기나 불법 유턴, 끼어들기, 버스전용차선 침범, 갓길 운행, 소방차나 구급차 안 비켜주기 등이 서양인들의 눈에 저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우원도 외국 살아보기 전에는 잘 몰랐다. 그냥 세상이 다 우리 같을 줄 알았다.
그런 점에서는 결국 저기나 우리나 오십 보 백 보인 거다.
이런 일이 매일같이 수백 군데의 교차로에서 일어난다.
GDP 10만불이라도 이래선 아무 소용 없다.
그리고 그들은 룰의 존중심과 합리성의 두 가지에 더해, 혹은 그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한 명예심을 우리에 비해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 이 때의 명예심이란건 ‘돈과 명예를 좇는’ 할 때의 그 명예도 아니고, 노벨상을 받는 거창한 명예도 아니다.
울나라에서는 명예라는 말이 위선과 가식, 혹은 대성공의 상징처럼 돼서 개념 자체가 훼손된 상태지만, 영미권에서 'honorable person'이라고 하면 돈 많고 유명한 분들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보편적이고 공평무사한 원칙에 근거해 정직하게 사는 개인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은 생각과 행동의 틀이 잡혀있기 때문에 주변의 영향으로 일희일비하거나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또 주체적인 자기 원칙에 기초해 살기 때문에 정치인이 나쁘던 세상이 다 x 같던 그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다. 배려나 양보도 단순히 친절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원칙이기 때문에 한다.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네 의지를 통해서 보편적 자연법칙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행위하라 - 칸트
절라 어려운 말 같지만 실은 그냥 위의 저런 뜻이다.
물론 이런 명예심은 그냥 갖고 싶다고 가져지는 건 아니다. 일단 보편적 원칙과 편견적 고집을 구별할 수 있는 지성과 인식이 필요한데, 사회와 학교, 가정 등에서 이런 것이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선진국과는 달리 울나라에서 태어나선 이걸 자동적으로 얻기 힘들기 땜에 따로 독서, 생각, 성찰 등등의 노력을 해야 된다.
그리고 그만큼 또 중요한 게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에 대한 긍지다. 남이야 어찌 됐든 나는 내 원칙과 프라이드를 지키며 사는 거다. 그래서 다른 차들이 전부 신호 안 지키고 지나가도 나는 서 있는 거다. 저 찌질한 군중심리의 대오에 내가 합류할 이유는 없다. 이런 오기에 가까운 긍지 없이 이 사회에서 작은 일이라도 합리성과 명예를 지키며 사는 건 열라 어렵다.
우원이 비록 교통 이야기로 예를 들었지만 실은 모든 게 똑같다. 양심과 선악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세상과 자신에 대한 존중, 그 결과로서 룰에 대한 존중심과 스스로의 존재 양식에 대한 명예로움이 없으면 인간 세상은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알고 보면 나쁜 넘 없다’는 소리가 있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전부 성숙한 시민이냐 하면 그렇진 않은 거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를 조금씩 미친 세상으로 만들어 온 것은 진짜 양심불량의 악당들 만큼이나, 바로 우리 속에 존재하는 몽매함의 다른 말인 그 ‘알고 보면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다.
예컨대, 경미한 교통사고를 핑계로 거짓 입원해 배상금을 챙기는 사람들이 특별히 나쁜 넘들이라 그러는 게 아니다. 돈 몇 십만 원 건지기 위해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이런 천박함의 나락으로 스스로를 던진다. 심지어 본인은 아무 생각 없었는데 가족 친구들이 부추기다보면, '아 이거 놀면서 돈 벌 기횐데 나만 놓치면 바보지, 한다. 이 때 어차피 돈은 사고 운전자가 아닌 보험회사가 준다는 점이 ‘이건 나쁜 짓이 아냐’ 라는 합리화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결국 양심이 아니라 양식의 문제다.
그래서 우원은, 그때 그 양심냉장고가 양식냉장고였다면 어땠을까 싶은 거다.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정지선에 차 세우기 같은 일이 우리도 선진국 되는 것 같은 중요하고도 쿨한 일로 비춰지던 그 때, 그 순진함의 열정을 갖고 핀트가 안맞은 양심 대신 합리성과 명예심, 즉 양식의 코드를 보다 적극적이고도 면밀하게 찾아갔더라면 어땠을까.
허나 지금은 어느덧 그런 냉장고가 다시 나온들 다들 콧방귀나 뀔 세상이 되어 있다. 사회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가치들이 16년 전, 1998년보다 오히려 쇠퇴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에 대한 애교스런 향수가 진짜 박정희의 부활을 불러왔듯, ‘부자 되세요’ 하는 귀여운 여배우의 애교가 진짜로 삶의 맹목적 가치가 되어 버린, 이 찌질하고 못난 대한민국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세월호 사건도, 수많은 음모론적 주장이 난무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양심의 문제가 아닌 양식의 문제였다고 우원은 생각한다. 거대한 것 부터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룰을 고지식하게 지켰다면 그런 사고가 일어났을 것이며, 선장부터 정부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어처구니 없이 대응했을까. 지금 저들이 이토록 뻔뻔하게 나오는 것도 ‘양심’에 비추어 잘못한 게 없다고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양식을 갖추지 못한 게 얼마나 치명적인 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이 나라에는 정말 희망이 없을지도 모른다. 대체 언제가 되야 함석헌 선생이 44년 전에 말한 ‘생각하는 씨알’ 들이 될 거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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