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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시선]28호

2014-08-1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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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8. 14. 목요일

범우









지난 주말 전화를 받았다. 지난달 자신이 다니던 공장을 겨우 쉬는 일요일마다 함께 일을 했던 동생이 안부전화를 겸해서 품삯이 언제 지급 될 건지 물어온다. 마침 전날 주말, 고용주인 설비업자와 임금계산을 하고 입금이 오늘이나 내일 들어갈 거라고 이야기를 하니 다다음주에 밥이나 먹자는 이야기, 제가 보는 세상 이야기, 불투명한 삶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이야기한다. 한참을 들어주다 책을 좀 읽어보라는 말을 건네고 다다음주에 식사 약속을 잡았다. 처음 보았을 때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녀석을 처음 만난 건 주야 맞교대를 하는 염색 공장에서였다. 키가 크고 강원도에서 온 놈 치곤 피부가 곱고 숫기가 없었다. 같은 공장에서 근무를 하던 놈이 고향 사람이라고, 어머니들을 통해서 취업 부탁이 들어왔다며 녀석을 데려왔다. 잘 가르치고 잘 배우고 잘 지내자고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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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던 염색공장은 생산직 병역 특례병이 있었고,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했다. 주야간 맞교대에 명절이 아닌 휴일은 특근으로 대체하는 형편이라 그나마 그 계통에서 좀 대우와 환경이 낫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사람 구하기가 어려웠다. 병역 특례를 다들 권유했다. 군대를 다녀온 입장에서 생각해도, 병역 특례를 받은 녀석들 입장에서 생각해도, 돈 없고 백 없는 놈이 병으로 군대를 가는 건 조국에 헌신하는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남기보다는 버리는 시간이 되기가 쉬웠다.


돈을 좀 모아서 수능을 보고 전문대라도 들어가 볼 생각이라던 순진한 녀석은 여유롭지 않은 집안 형편에, 적은 돈이나마 돈 모으는 재미도 있고 해서 병역 특례로 삼 년을 더 다니기로 했다. 하지만 병역 특례도 티오가 있어서 자리가 날 때까지 좀 기다려야 했다. 중간에 사장 친구 아들이라는 녀석이 들어오는 바람에 영장이 나오고 나서야 병역특례가 적용되었다.


처음 일 년은 근무조가 달라 교대자가 하루 빼고 일을 보느라 36시간 연속 근무를 할 일이 생겼을 때나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눴다. '병원에서 몇 년을 앓던 누이가 죽었다.' 며칠 안 보이다 더 핏기 없는 얼굴로 나타난 녀석에게서 어릴 적 살던 집 근처 밭 자락에 유골을 뿌리고 왔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적금 들었던 돈을 삼촌에게 빌려드리고 삼촌과 연락이 끊어졌다. 어릴 적 꽤나 의지하던 분이라서 그런지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며 원망보다는 자신의 운 없음을 탓했다. 딱히 할 말도 없고 자판기 커피 한 잔을 주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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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을 처음 공장에 데려왔던 놈은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기고 이사를 가 버렸다. 병역 특례를 받아야하는 녀석은 회사가 마련해준 기숙사에 입주했다. 방 얻을 형편이 안 되는 독신남자들과 우즈벡 노동자들을 위해 저층 주공아파트로 이사하고 나서는, 해 떨어지면 나가기 무섭던 원곡동보다는 기숙사가 좋다고 말한다. 15평 주공 아파트 두 채에 십여 명씩 몰아넣어도 교대근무로 절반 빠지면 그리 북적거리는 건 아니란다. 일이 피곤하니 잠을 자기가 바쁜데 원곡동에 함께 살던 친구는 주색잡기를 좋아해서 생활리듬이 틀어져서 힘들었단다.


공장과 기숙사를 2년 정도 왕복하더니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일요일 특근을 빠지고 싶다는 말도 한다. 병역특례가 다른 놈들보다 일 년 미뤄진 것도 군소리 안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던 녀석이었다. 난생 처음 여자 친구를 소개 받아 사귀게 되었다. 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또 만나기로만 약속 했다며 특근을 빼달라고 부탁하는 표정이 간절하다. 다들 조금씩 힘들어지겠지만 흐믓한 웃음을 짓고 잘 되길 응원하며 특근을 빼주자고 했다.


야간 근무 때 피자를 사들고 여자 친구가 근무하는 공장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 친구도 첫사랑에 지극 정성을 들였다. 구례에서 동생과 올라온 여자 친구가 녀석의 집요하고 순수한 구애에 마음을 열었단다. 어느 날 퀭한 얼굴로 출근해 조금만 짬이 나면 염색 기계 발판에 앉아 꾸벅 존다. 뒤통수를 만져주니 지난밤 한잠도 못잔 이야기를 한다. 뒷머리를 북북 긁으며 따라오더니 한숨을 푹 쉰다.


여자 친구와 다른 친구들과 새벽까지 놀다가 처음으로 함께 잠을 잤단다. 우물쭈물하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둘 다 처음이라 침대 위에 마냥 부둥켜안고 있다가 날 밝을 즈음에야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나더란다. 막상 어떻게 하려니 어떻게 하는 방법을 몰라서 등 뒤로 브레지어를 풀어보려고 두 시간 동안 애만 쓰다 출근시간 되어서 여자 친구는 데려다주고 출근하는 길이란다.


난감했다. “에라이 등신아 그 상황에서 출근하면 어쩌자는 거냐? 전화해서 안 받으면 넌 인제 끝난 거다.” 심각한 얼굴로 전화기를 들고 화장실로 가더니 얼굴이 밝아졌다. 전화 통화를 하고 주말에 또 만날 약속을 했단다. 브레지어를 어떻게 푸는 건지 재차 물어온다. 자세를 물어보니 누운 여자친구 위에서 체중을 제 팔로 버티면서 브레지어까지 끌러 볼끼라고 안간힘을 썼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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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들은 손가락만 스쳐도 끌러진다는데 너는 그러면 안 되겠다. 그냥 앞에서 잡고 위로 올려 .” 


“위로 올려서 벗길 수 있어요?” 


“아니. 올리기만 하면 너는 목적을 달성하는 거고 거기에 얼굴 푹 묻고 안고 있으면 돼. 답답하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 


“아래쪽은 어떻게 해요?” 


“끌어안고 뒹굴다가 네 한쪽 다리를 배위로 끌어 올려. 고무줄을 엄지발가락에 걸어. 그리고 다시 다리를 뻗으면서 끌어안고 뒹굴어.” 


이렇게 어디서 주어들은 이야기로 가르침을 주었다.


알콩달콩 사랑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이 흘러서 병역 특례도 끝나간다. 좀 더 돈을 모아서 전세방이라도 얻어서 살림집을 시작할 마음에 특례가 끝나고 경력직으로 월급이 오르길 기다린다. 그간 회사는 2공장을 만들고 베트남에도 공장을 만들어서 외형적으로 5배는 성장했다. 2공장을 짓고 베트남공장을 궤도에 올리고 회사가 안정이 되면 고생한 직원들에게 그만한 보답이 돌아갈 거라던 회사에서 구조조정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고, 홀몸인 사람들은 분기를 터트렸다. 창업주의 친구인 사장과는 달리 현장업무를 이해하는 권 전무님이 베트남으로 밀려나듯 가지 않았으면 좀 분위기가 좋았을지도 몰랐다. 사람이 재산인 염색 공장에서 인력구조조정은 없다던 공장장님의 장담과는 상황이 다르게 돌아갔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기숙사를 팔고, 2공장 부지도 절반 팔기로 했다. 쉬는 날 없이 일만 하던 사람들 사이로 흉흉한 소문이 돌고 가족의 생계를 등에 걸고 일하던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가장들을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홀몸인 특례병들을 내보내기로 했다. 아직 두 달 근무기간이 남은 것을 그 기간 동안 근무한 것으로 쳐주기로 하고 퇴직금을 지급했다. 갈 곳이 있어 공장을 얼른 떠나고 싶어 했던 특례병들에겐 좋은 일이기도 했지만, 아직 방 얻을 돈도 모으지 못하고 꼬박 꼬박 월급이 쓰일 곳이 필요한 소년 가장들에게는 잔인한 일이었다. 지켜보기 미안해졌다.


회사에 정이 떨어져버린 몇몇이 사직서를 썼다. 음울하게 고개 숙인 친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깝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사직서를 썼다. 공장장은 한숨을 쉬었고 사장도 말로나마 나가서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안 풀리면 다시 돌아오라는 말을 했다. 빠진 사람들의 빈자리가 많아서 남은 사람들이 안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절이 싫어지면 중이 떠나면 되는 거였다.


기숙사를 나와 있을 곳이 없을 녀석에게 부담 갖지 말고 잠깐 함께 살자고 했지만, 부담이 된 듯 했다. 녀석은 어머니가 있는 강원도로 내려갔다. 강원도에는 젊은 청년이 할 일이 없었다. 적금이 만기될 동안만 함께 있게 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몸을 의탁하고 있는 사실혼관계의 아저씨 집에 제가 있을 곳이 없어 시립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단다. 답답하고 갑갑한 것도 있지만 여자 친구에게 느껴지는 미묘한 거리감이 불안했었다고 한다.


처음엔 눈치를 좀 보며 어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막 편한 성격은 아니다. 부담을 좀 덜어주려고 지난 이야기를 조금 해줬다. 처음 돈을 벌고 방을 얻고 그냥 저냥 갈 곳 없는 아이들 모여 살던 시절부터 얼마 전 군대 간 막내 동생 친구를 지나서 네가 28번째쯤 될 거라고, 여자 친구랑 살림 차릴 돈을 모을 때까지 편하게 있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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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녀석은 청소도 제법 자주하고 생활정보지를 보며 기술을 익혀야할지 공부를 해야 할지 돈을 더 모아서 얼른 독립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눈칫밥을 제법 먹고 자라서인지 상황에 대한 견적이 일찍 나오는 듯 했다. 눈치를 보던 어색한 행동들이 사라졌다. 어쩌다 서로 조금씩 살아온 이야기들을 흘릴 때가 있었다. 아픈 이야기일 때도 있고 그나마 좋았던 시절에 관한 기억도 있었다.


가끔 이름 말고 검은머리 28호라고 불렀다. 검은 머리 짐승은 배은망덕하니까 거두면 안 된다는 옛말을 빗대 낯간지럽게 고맙다는 표현을 하는 녀석에게 그냥 너나 잘 살라고 하는 농이었다.


탄광에서 일하던 남편을 잃고 자식들을 건사하고 살아보려던 노력들이 사기와 번번한 실패로 끝난 녀석의 어머니는 딸을 잃은 뒤 하나뿐인 아들에 집착증을 보였다. 당이 있으시고 조울증을 앓는 것 같았다.


녀석은 한동안 고민을 하다 돈을 더 벌기로 했다. 생활정보지를 모으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발품을 팔더니 기계 쪽을 배워 보고 싶다고 기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간다고 했다. 나는 그간 쉼 없이 십 년을 일했으니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 책을 보고 여행도 다니고 취미 생활도 해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유리천장에 근육이 굳어버린 벼룩처럼 노는 법을 모르게 되었다.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 둘을 데리고 겁 없이 슈퍼를 개업한 친구가 도움을 요청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날마다 일을 도와주다가 조금씩 발을 줄였다. 연락처를 남겨둔 인력업체에서 전화가 오면 간간히 공장 일용직을 나가기도 하면서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말을 꺼냈다. "형 우리 회사 이력서 내봐요. 돈은 별론데 외국계 회사가 인수해서 앞으로 주 5일제 한다니까 교대근무나 잔업도 없어지고 좋아질지도 몰라요.” 그렇게 파카 한일유압에 입사를 했다. 노동조합이 생기고 등 떠밀림을 당해서 노동조합 간부를 하는 녀석에게 말해준다. “마치 사람들이 너 밤나무에 밤 털라고 올려 보낸 느낌이다. 너만 밤송이에 두드려 맞고 밤알은 네 등 떠민 사람들이 다 주어가지 않게 조심해라.”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집착하던 아들을 두고 죽음을 생각하실 정도로 힘들고 많이 아프셨나보다. 녀석의 어머니가 부엌칼로 손목을 그으셨다. 혼수상태에서 며칠을 계시다가 회복하셨다. 휴가를 내서 어머님 간호를 하던 녀석이 다시 출근을 했다. 회사에서는 원래 지병이 있으신 어머니가 쓰러지신 걸로 안다. 노동조합의 간부들에게 유화책을 사용하던 대표이사가 혈당 측정기와 20만 원을 따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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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녀석은 함께 살림을 차린 여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살림집 구할 걱정이 컸는데, 다행히 여자 친구도 제법 모아놓은 돈이 있었다. 한동안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식사를 하시다 음식물이 기도를 막았다. 몇 번의 자살기도에서는 용케 살아나시더니 살려고 식사를 하시던 중에 돌아가셨다. 사람 운명이 알 수가 없다.


녀석은 예쁜 딸아이를 낳았다. 제법 자란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며 안겨오면 묵직한 무게감이 형용할 수 없는 충족감을 준다고 했다. 세상 유일한 핏줄이 주는 유대감이 삶이 주는 외로움의 무게를 녹여내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카자본은 장안공단에 비정규직으로 운영할 복제공장을 만들어두고 시화공장에서 대량 해고 사태를 일으켰다. 전후를 몰랐으면 그냥 떠날 수도 있었겠지만 둘 다 해고자 무리가 되었다.


32명 해고자들 전체 연봉 합해야 한 사람 연봉 겨우 줄까말까 하다는 김&장 변호사들이 보낸 해고 이유서는 녀석 어머님 장례식에 다녀왔던 일이 무단결근, 치과치료를 받으러 다닌 일이 상습 조퇴이기 때문에 근태불량이라는 것이었다. 저만 아니었으면 함께 해고자가 되진 않았을 거라고 미안하단다. 그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기에 웃고 말았다.


노동조합을 시작하면서 세상 사는 게 힘든 이유가 제 잘못이 아니라 자본과 권력이 판을 그렇게 짜 놓았다는 걸 알게 되고, 맞서서 소리 나마 질러볼 수 있고, 혹시 세상이 조금 변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행복하다던 녀석은 다시 소중한 가족이 주는 무게에 눌려야 했다. 가족은 때로는 힘이, 때로는 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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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무효 소송 2심 결심 전 공판에서 황병하 판사의 갑작스런 질문에 더듬거리며 긴 시간 싸움의 고통을 토로하는 이야기에 옆자리에 앉아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갑작스런 질문에 대한 어눌한 답변이 페널티킥을 실축한 것처럼 돌아오는 내내 답답했지만, 눈물을 흘리던 녀석을 놀렸다. 시스템의 일부인 황병하 판사 개인에게 원망이 남아있지 않지만 2년 반 만에 겨우 한 번 주어진 발언 기회를 감상적인 이야기로 흘려버린 것이 못내 아쉽다.


조롱과 비야냥을 듬뿍 담아 해고자들에게 불쌍한 놈들이라며 너희들이 얼마나 불쌍해 보이는지 아냐는 노무관리자에게는 “닥쳐 씨발놈아. 컨셉이야” 라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지만 대법원까지 가서도 져버린 해고자 무리와 또 함께 하던 노조원들은 조금 불쌍해질 뻔 했다. 혁명의 순간에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던 혁명가는 진즉에 떠났고,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운동가들도 다른 투쟁의 현장에 힘을 보태러 갔다. 잘 풀리길 바란다던 지역의 국회의원은 야당의 사무처장이 되었고, 지역 진보 정당의 위원장이던 사람은 안철수의 새정치에 몸을 의탁해 시장후보로 나섰다가 민주당과 합당한 후 묻혔다.


하지만 정말 불쌍한 사람들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는걸 보고 애기 손바닥만한 무궁화 꽃잎이 담배꽁초처럼 작게 말려 땅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것처럼 곱게 죽었다. 이명박 정권의 혹독함을 버티고 다시 오 년을 참아낼 힘이 없었다. 지금은 겨우 몇몇 사람들만 기억하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죽을 만큼 힘든 건 아니고, 죽일 만큼 독한 것도 아닌 사람들은 살아간다. 똥개가 자기 집 앞에서 50점을 먹고 들어가는 건 아무리 개 반찬 같은 주인이라도 제 편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법과 시스템은 돈 없는 사람의 편을 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씩 일어나는 기적 같은 미담사례로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 한구석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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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의 일들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아니었다고, 그저 끝은 보겠다는 사람 몇을 남기고 각자 살기 위해 흩어졌다. 인연의 끈들은 각자 성향대로 이어가며 살아간다. 다시 구조조정 이야기가 들린다. 거대한 자본은 애초의 계획을 조금 돌아서 왔을 뿐이다.


파카한일유압에서 1년 반이 넘도록 무의미한 유리창 닦기 청소작업지시에 소모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쉽고 무력감에 지쳐가는 사람에게는 그저 어깨를 두드려준다.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멸종시키기로 했지만, 사람이 사람을 직접 죽이도록 하는 게 어려워 대량으로 죽이는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하루하루 꼬박 죽이는 것도 모자라 수용소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노동을 강제해서 무력하게 만들고 사람이 아니게 만들었다. 인생 화려하게 불태우고 가는 사람 몇이나 있을까, 부서지지 않고 버텨 끝을 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녀석은 올해 들어 문득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작년까지는 그런 생각을 안했었는데, 세월호 참사와 그에 대처하는 세상인심을 보고 지하철과 버스에서 노인들에게 반사적으로 자리를 양보하던 마음이 어떤 장관님 말씀처럼 인생 헛살아서 자리 양보나 바라는 거 아닌가 하는 냉소로 변했다고 한다. 딸아이를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는데 하며 고개를 젓는다.


저처럼 외롭게 자랄 딸아이를 걱정하기에 형제를 만들어 주라고 하니, 하나도 힘든데 도저히 둘 이상을 키워낼 자신이 없단다. 세상이 한 번 빠지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죽어야하는 싱크홀 범벅이다. 맞벌이를 하고 놀이방에 보내야 할 텐데, 최저임금을 겨우 받는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이 없는 비정규직 교사들의 학대를 피해야 한다. 다행히 잘 자라 학교에 들어가더라도, 비싸고 질 좋은 사립학교에 보낼 여력이 안 되면 돈 없는 것들이 배타고 수학여행 간다고 해서 나라를 시끄럽게 만든다고 목사님의 질타를 받을 일이다. 예수님이 이미 2천 년 전에 사람보다 돈이 우선인 일부 종교인들을 독사 새끼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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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자라난 남자아이라면 힘 없고 빽 없는 다수의 이웃집 아들들처럼 군대를 가야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십 분지 일이 안 되는 급여를 받으며 참으면, 윤일병 터지면 임병장인 시기를 무사히 마치고 사회에 나오면, 취업전쟁에 시달리고 행여 취업되더라도 그곳이 민간 자본이라면 십여 년 소모되고 난 후 구조조정,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씹다버린 껌처럼 버려진다. 운 좋게 공기업이나 공무원이 되었다면 지금 다수의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영혼을 팔아 자리를 유지해야한다.


세상살이가 정치와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다지만, 보수를 참칭하는 무리들은 욕심에 비해 무능하고,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호에 비해 무력하다. 재수 없게 깊은 싱크홀에 빠진 세월호 유족들은 자식을 잃은 죄로 단식을 한다. 단식을 제대로 하면 쓰러진다는 여당의원님의 말대로 십 몇 명이 이미 쓰러졌다. 육체적인 고단함보다 단식 농성장에 침입해 고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들에겐 비수가 되나보다.


아직까지 세월호 타령이냐고, 세월호 때문에 경제가 엉망이라고, 대통령님이 무슨 책임이 있냐고, 자식을 잃은 건 안타깝지만 어차피 죽은 거 그 정도 보상이면 복권 맞은 거 아니냐는 경우 없는 노인네에게 “그 배에 타지 그러셨어요. 어차피 한 번 죽을 거 돈이라도 왕창 받아보게요.” 하니 자기 죽은 다음 돈이 무슨 소용 있냐며 버럭 한다. 내 말이 그 말이었다. 당신한테는 아직이겠지만 당사자들은 그날 시간이 멈췄다. 자식이 죽은 연유를 알고 싶다는 부모들은 자식이 죽은 그날을 하루하루 반복한다.


28호와의 전화통화를 하고, 28호의 이야기와 28호와의 이야기를 적으려고 했는데, 결론은 세월호다. 산케이 신문이 4월 16일 참사가 일어나던 그날, 대통령이 업무시간에 집무실에서 정사를 돌보신 게 아니라 정사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개똥 같은 소리를 했다. 우리가 접하는 언론에선 항상 개똥 같은 소리만 했다.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하려면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던 전임 대통령을 엿 먹이던 일본의 언론이기에 검찰에서 얼른 고발 조치를 하고 조사 중이다. 국정원 여직원의 프라이버시 침해에 분노하던 대통령님의 분노가 새삼 와 닿는다. 타인의 일에도 불 같이 화를 내었는데 자기 일이면 얼마나 화를 낼까? 자식을 잃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단식을 하는 부모 마음에도 감응이 되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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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