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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7. 27. 월요일

국제독투 씻퐈






편집부 주


아래 글은 국제/해외독투에서 납치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평범한 날이었다. 회사에 출근해서 블룸버그 단말기를 켜놓고, 커피를 뽑아 마셨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동료들이랑 주말에 뭐 할 건지 농담이나 따먹고 있었고, 폰으로 딴지일보에 접속해서 이것저것 읽고 댓글을 달았다. 자리로 돌아와, 뉴스를 끄적이다가 내가 아는 사람 얼굴을 불름버그 단말기에서 보았다. 대학교 교수님이 에리트레아라는 나라로 반군을 이끌러 가셨단다.


나는 아프리카 문제를 잘 알지 못한다. 단지 에리트레아란 나라가 에티오피아한테서 무장독립한 나라이고, 엄청 위험한 나라라는 것만 안다. 그리고 우리교수는 에티오피아 정부에 두 번이나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내가 구글에서 검색한 바로는 그가 조직한 반군이라는 거, 군대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다. 무슨 허름한 집 마당에서 병사들을 사열해놓고 악수를 하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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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Tesfanews>


졸라 위험한 나라에 가서, 총 몇 자루 든 반군을 이끌고 무장투쟁을 하러 가신 거다. 잡히면 무조건 사형이 집행될 테고, 아마 현상금도 붙었으리라. 머리가 아프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대학교 경제학 수업에서였다. 후질근한 청바지에 낡은 운동화를 신고 수업에 들어온 그는 출석체크도 하지 않고 한 시간 반 동안 주류경제학을 졸라 까대기 시작했다. 한 학기 내내.


한 반에 12명 정도 되는 수업이었는데, 시험은 주관식이었다. 시험문제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a) 위와 같은 상황에서 주류 경제학자가 미시이론으로 계산해낼 경제성장률을 구하시오 (b) 위에서 구한 경제성장률이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이유 네 가지를 서술하시오. (c)그럼 어떻게 구하는 게 더 나을지 제시하시오.


경제학 박사과정 중 95%가 주류경제학을 배우는 미국에서, 그 교수는 주류경제학에 맞서 싸우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학교도 졸라 이상해서, 주류경제학에 필수라고 할 수 있는 계량 경제학(Econometric)과 이 선생이 가르치던 자본주의 비판수업 중에 취사선택을 하면 전공 혹은 부전공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뒤로 이 교수 수업을 세 개나 더 들었고, 마샬의 주류 경제학 이론대신 아미야타센의 경제 민주주의에 관한 책만 읽고 부전공을 땄다.


4학년 때는 전공 논문을 협동조합과 자본시장에 대해서 썼다(괴랄한 조합이다). 지도교수는 하버드를 나온 경영대학교 학장이었고, 부지도교수는 바로 그 경제학 교수였다. 논문 심사만 하면 금융학 교수들과 그 경제학 교수와의 설전이 오갔다. 자본시장의 역할과 기능을 놓고 격론이 오갔고, 내 논문은 그렇게 무관심속에 통과될 수 있었다.


비주류 경제학자로써 항상 동료학자들과 싸우던 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미국에서 경제학 교수가 되었으나 사업가였던 아버지를 돕기 위해 에티오피아로 일시귀국 했고, 수요와 공급을 예측해서 옥수수 농가와 연계해서 식용유를 짜내는 협동조합을 만든 적도 있었다. 딴지마켓처럼 상부상조하며 농민의 주머니와 공장설비 현대화에 일조할 수 있었다. 몇 달 뒤에 미국에서 남는 식용유 2년치를 무상으로 지원해줘서 사업은 망해버리기 전까지만.


그후 정계에 입문한 그는, 야당 지도자로써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의 최초 민선 시장이 되었다(물론 다음날 독재정부가 그를 투옥하고,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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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ethiopianreview>


그는 일 년 남짓한 투옥 기간을 독방에서 지냈는데, 무려 4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그 시간을 투쟁으로 지친 삶의 유일한 쉼표였다고 회고했다(그래서 내가 군대 간다니까 밝은 표정으로 읽을 책 리스트를 뽑아줬다. 양구에서 눈 쓰느라 많이 읽지는 못했다).


미국 정부의 중재로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시민권을 취득했고, 다시 우리학교 교수가 되었다. 어렸던 아이가 대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기다렸고, 이제 다시 그는 투쟁 속으로 돌아갔다.


국제 역학관계를 모르는 나로서는, 그가 정치지도자로서 어땠는지, 무장투쟁이 정당한지는 모르겠다(무장투쟁으로 노선을 전향한 뒤 그의 가족들은 구금되었고, 그가 참석하지 않은 공판에서 그는 두 번째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학자로서 그는 항상 책을 읽고, 끊임없이 지식을 탐구했으며, 후학들에게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그렇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배우던 내가 금융관련 회사에 들어간다 했을 때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셨지만, 이내 도서관 앞에서 담배 한 까치만 구걸하시던(건강상 끊었다는데, 제자들만 보면 한 까치씩 빌려 달라고 하신다), 소탈한 분이셨다.


박정희란 주제를 가지고 5시간 정도 맞짱을 떴던 어느 오후였다. 나는 늘 그렇듯 그에게 졌고, 그의 방문을 나선 뒤로부터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박정희의 경제성장에 대해 비판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나는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사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충분히 기득권으로 평탄하게 살아갈 수 있으실 텐데, 왜 목숨을 내걸고서 투쟁하시냐고. 그런 독재 속에서 나약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란 건 그 속에서 같이 헤쳐 먹던가, 딴 나라로 가는 거 아니냐고.


피선거권이 영구히 박탈되어 선출직에 욕심이 없다던 그는, 웃으며 옛날 얘기를 하셨다.


하루는 에티오피아에 잠시 귀국해서 아버지 차를 끌고 나갔는데, 교통경찰한테 잡히셨단다. 물어보니 차량번호가 사업용이기 때문에, 개인운전면허증을 가지고는 운전할 수가 없단다. 관련법규를 몰랐던 교수님은 미안하다고 하고, 티켓을 끊어달라고 하셨다.


그러자 교통경찰이 티켓은 5만 원이니까, 자기한테 3만 원만주면 보내주겠다고 우겼다. 교수는 돈은 상관없으니까 제발 티켓 끊게 해달라는데, 그 경찰을 계속 쇼부를 치면서 만 원만 주면 보내주겠다고 했단다. 그래도 교수가 5만 원짜리 티켓을 달라고 하자, 경찰이 미친놈이라고 교수님을 공무집행방해죄로 체포하셨단다.


그 상태에서 합리적인 선택이란 건, 3만 원이든 만원이든 경찰 주머니에 돈을 꽂아주는 거지만, 그가 바랬던 건 세상이 이치에 맞게 돌아가고, 국민들이 정당한 한 표를 행사하는 세상이었다고. 그런 사회가 오지 않으면 그는 평생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멈출 수가 없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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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AP>


같은 시대를 산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교수님이셨다. 승산이 많이 있어 보이지는 않다는데, 나 같은 범인이 어찌 그의 뜻을 헤아릴까. 건승하시기를 빈다.






편집부 주

 


독투의 글이 3회 이상 메인 기사로 채택된 ' 씻퐈' 님께는 가카의 귓구녕을 뚫어 드리기 위한 본지의 소수정예 이비인후과 블로그인 '300'의 개설권한이 생성되었습니다. 


조만간 필진 전용 삼겹살 테러식장에서 뵙겠습니다.


아울러, '씻퐈'님께서는 본지 대표 메일 ddanzi.master@gmail.com으로 연락가능한 개인 연락처를 보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국제독투 씻퐈


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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