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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8. 26. 화요일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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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보면 불편하다. 루게릭병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루게릭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사안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비난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면 다른 지적, 단순히 유명인들의 인맥 자랑과 이미지 메이킹으로 이용되기 때문인가? 이 역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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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레기의 불편함을 설명하기 위해 80년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래픽 노블 '왓치맨'의 결말을 예로 들어보겠다. (이 작품은 잭 스나이더 감독을 기용하여 2009년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해당 만화나 영화의 결말을 미리 알기 싫은 사람은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지 않으셔도 좋다. '왓치맨'이 결말을 미리 알고 본다고 그 울림이 잦아들 만한 작품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갈등이 극에 달하다 마침내 아프간에서 무력 충돌까지 일어난 시대, 히어로를 자처하며 활동하던 코미디언이란 인물이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던 코미디언의 옛 동료들은 뉴욕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테러 계획을 알아버린다. 코미디언의 살해는 이 계획을 알아버린 그의 입을 막기 위해 행해진 것이었다. 


범인이 히어로 중 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 코미디언의 동료들은 그를 찾아가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다. 뉴욕의 테러 계획은 가상의 범인(만화에선 외계인이었지만 영화에선 설정이 다르다.)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인류가 이 새로운 공적에 대항해 단합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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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테러는 자행되고 300만이 넘는 뉴욕 시민이 희생된다. 이에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던 미국과 소련이 동맹을 맺는 등 거짓말처럼 인류는 단합한다. 영웅들은 진범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인류 화합을 깰 수 없어 침묵하기로 합의하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진실을 알리겠다고 나서는 인물을 축출한다. 



본 기레기가 위의 이야기에서 주목한 것은 공공의 적을 눈앞에 둬야만 단합하는 인간의 특질이다. 위의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이 특질만큼은 팩트다. 전쟁하고 있는 집단 내부에서는 갈등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반면 오랫동안 전쟁을 하지 않은 집단은 좌우 등으로 나뉘어 대립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양 집단의 주장이나 성향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며 이것은 다시 전쟁으로 이어진다. 


위 강연에서 관련 자료를 볼 수 있다. 

전쟁을 겪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미국 의회 양극화 정도를 나타내는 도표다. 

(바쁜 분들은 6분 10초부터 보시라.)


자, 다시 왓치맨의 결말을 보자. 2차 대전 후 인류는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그러다 인류의 존망을 위협하는, 뉴욕시쯤은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거대한 적이 나타났다 치자. 인류는 당연히 뭉칠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의 갈등은 해결되는 것일까? 


아니다. 자유가 우선인가, 평등이 우선인가는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는 싸움이다. 다만 당장 눈앞에 모두가 우선할 수 있는 다른 문제가 나타나 이 결론이 나지 않을 싸움을 뒤로 미루게 됐을 뿐이다. 그럼 다시 바꿔서 생각을 해보자. 좌우로 나뉘어 으르렁거리고 있을 때, 우리는 지구 마을 한가족이며 서로 화합해야 함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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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대답은 '댓츠 노우'다. 외계인 침공 영화나 전 지구적 재난 영화가 사골 재탕하듯 나오는 거 보면 모르겠나?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음경될 수 있다는 거 다들 알고 있다. 당장 코앞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을 뿐. 그렇다면 왓치맨의 결말에서 일어난 인류의 화합은 우리 머릿속 문제의식의 우선순위 변화와 다름없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작용은 원래 우위를 점하고 있던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왓치맨의 결말에서 인류 화합은 기만에 의한 것이다. 그것이 꼭 가상의 적을 만들어 그 놈이 범인인 양 속인 것이라서가 아니다. 해결 아닌 해결이기 때문에 기만이다. 그래서 왓치맨에서 이룬 평화는 한없이 위태로워 보인다. 눈먼 평화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만이 늘 인류 역사에서 많은 행동을 만들어왔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왓치맨에서 무슨 짓을 해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전쟁 문제를 해결하였듯 보통 인간 세계에서라면 불가능했을 일들이 이 '기만'에 의해 실현되었다. 종교가 그러했고 정치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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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가르침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이다. 종교에 있어 믿음, 소망, 사랑 중 믿음이 먼저인지 사랑이 먼저인지를 놓고는 논쟁이 있을 것이나 저 가르침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임에는 기독교 신자이든 아니든 부정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의 실천은 어렵다. 이 글을 읽는 누구든 로마처럼 폭력이 지배하던, 그리고 그것을 자행하던 인간들이 잘 살던 시대에 던져 놓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퀘스트를 준다면 그걸 완수하고 렙업할 엄두는 감히 못 낼 거라 본다. 그러나 이걸 해야만 천국에 가서 면류관을 쓰고 신의 옆자리에 앉게 되는 보상이 걸려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렙업 따위는 됐고 그 간지나는 보상이 탐나서라도 사랑 실천이라는 퀘스트를 완료하려 들지 않겠는가? 


물론, 이러한 것은 가장 저급한 수준의 기만이다. 보상을 바라고 종교에 투신하면 '기복 신앙'이라고 까일 뿐이다. 그래서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기만이 나타난다. '나는 이타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보는 문제가 중요하다', '옳은 일이니까 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이 신념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세련된 기만은 인간들 사이에서 상당히 위력적으로 작용한다. 우리나라 복지시설의 60% 정도는 개신교 단체에서 만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그 나라 역사의 주체를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바꿔낸 것뿐이었지만 이 혁명이 민주주의를 가장 적극적으로 누리는-빨간 날 없앤 걸로도 시위하며 개개인의 의사를 표현하는-국민성을 완성시켰다. 세상이 별로 나아지는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미성년자가 16시간 이상 공장에서 뺑이치는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가고 아동 포르노 처벌은 무거워지고 있으며 장애인들과 성적소수자들이 지나가다 돌 맞을 걱정을 하지 않는 지역은 늘어났다. 그리고 여성들의 의상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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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만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기만이라는 어휘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라 부작용이라 표현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냥 쓰겠다.) 앞서 서술했듯 그것이 가져올 것은 눈먼 평화이기 때문이다. 성급한 이들은 구체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전에 눈이 멀기도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녀가자 일부 개신교 목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천주교가 반성경적임을 강조하는데 열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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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용했을 근거는 이 포스트에 스크랩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천주교에서 행해지는 의식이 이교도의 풍습과 유사함을 지적하는 목사들에게 개신교 역시 이민족의 문화와 융합하며 발전했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당장 대한민국 교회의 대부분이 찬양에 기타와 드럼 등을 사용하는데 기타는 이집트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며 드럼은 아프리카와 힌두교 문화권 등 여러 문명에서 사용되던 타악기들이 이어져 오다 세트로 구성된 것이다.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천주교와 교황을 위시한 흑역사가 워낙 끝판왕이긴 하지만 개신교 역시 청교도들의 미국 이주가 인디언 학살로 이어졌던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앞에서는 예수를 만나기 전의 바디메오처럼 소경이 되어버린다. 


정치 쪽을 봐도 이런 부작용을 목격하기란 어렵지 않다. 좌와 우로 나뉘는 것은 물론이요, 그렇게 각자 나뉜 세력 속에서도 지지하는 인물에 따라 또 한 번 편을 가르고 서로를 깎아내린다. 친박이든 비박이든, '안빠'든 '문빠'든 마찬가지다. 


정치인의 지지는 그가 '대의'를 위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지지하는 사람이 '대의'를 가졌으리라는 믿음만으로는, 유권자가 정치-어디까지나 남인 정치인의 업-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란 힘들다.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 자체에 대한 감정이 생겨 버린다. 이러한 기만이 '내가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더 부각되는 상황'이 합당하든 합당하지 않든 불편하게 느껴지기부터 하는 이유다. 


우리는 보통 지지하던 정치인에게 강한 경쟁 상대가 나타날 경우, 그가 '무엇을 목적하는가'를 넘어 방법론 등 구체적인 것을 따지게 된다. 여기까진 좋다. 삽질해서 경제 살리는 게 될 일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건 중요한 일이니까. 그런데 상대 쪽 방법론이 그럴 듯 하거나 우리 쪽에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이 없는 경우, 유권자가 정치에 적극적이게 만들던, 기만은 부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먹은 거다', '일부러 거짓말한다' 


심지어 자기 주변 사람이 정치적 이해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행동을 하더라도 진영에 입각한 행동으로 해석하는 오를 범하기도 한다. 눈이 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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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는 위와 같이 진영에 상관 없이 (심지어 총수까지) 합성을 하지만

당장 합성의 대상이 된 인물의 '빠' 입장에서는

과거 딴지일보가 했던 합성이 보일 리 없다.


이러한 부작용이 일어나는 이유는, 내가 기만에 의해 움직였음이 드러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신념이 무너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 불편은 두려움에 닿아있기도 하다. 왓치맨의 주인공들이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드러내려한 동료를 축출해내고 범인이 옳았으므로 '우리가 잘한 거라곤 그의 계획을 막으려다 실패한 것 뿐'이라며 괴로워하던 것처럼. 


'나는 이타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보는 문제가 중요하다', '옳은 일이니까 하고 있는 거다'라는 기만이 깨지는 순간 내가 한 좋은 일은 좋은 일이 아니게 된다. 개신교가 천주교보다 정통성 있는 종교가 아니라고 해서 사랑을 베푸는 정신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며 딴지일보가 '친노 패권주의' 기사나 '안철수, 김한길 합성'을 올렸다고 해서 대통령 비난 여론에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잘하던 놈이 나랑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명제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자신의 기만을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축출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들을 지나칠 수 있다.


자, 지금까지 왓치맨이라는 작품의 결론이 종교적 현상이나 정치인 지지 현상과 어떻게 일맥상통하는지를 짚어봤다. 다시 화제를 아이스 버킷 챌린지로 돌려보자. 이 캠페인은 분명 기만의 측면이 있다. 일부 연예인은 취지도 모르고 얼음물 뒤집어쓰며 즐거워하겠지만 그런 그들의 캠페인 실행이 루게릭병 환자들을 위해 기획된 이 행사를 더 널리 알릴 것은 자명한 일이다. 누군가가 얼음물 뒤집어쓰고 내 인맥을 뽐내며 재미를 느꼈다고 그들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그러다 취지가 희석되어 버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취지가 희석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순수함이 없다는 비난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하지 않게 자기 기만으로 캠페인 하는 놈은 쪽팔린 거다. 웃고 떠들 놈은 빠져라'는 메시지에 어떤 루게릭병 환자는 안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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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우리는 쪽팔림을 무릅쓰고 인정해야 하는 거다. 우리가 병신스럽고 철저히 이기적이라는 걸. 루게릭병 환자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외침에는 꼼짝 않을 사람이라도 얼음물 뒤집어 쓰고 검색어에도 오르고 인맥 자랑질도 할 수 있는 놀이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만에는 기꺼이 움직인다. 재밌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이스 버킷 챌린지가 우리 인간의 병신스러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불편하지만, 불편해하지 않으려 한다. 이 캠페인이 인간의 민낯을 보고 고찰한 결과물은 아닐지언정 그러한 인간의 병신스러움이 반드시 사회를 썩게 하는 건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병신이면 어떤가? 그걸 상쇄할 수 있는 수단을 떠올리며 여기까지 온 게 우린데.


우리의 못난 부분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우리 스스로를, 그리고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순수하지 못한 것만큼 쪽팔린 게 남들 다 보는 거를 나만 못 보는 거 아닌가.









퍼그맨

트위터 : @ddanzipugman



Profile
딴지그룹 마켓팀원. 편집부 일도 하고 왔다갔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