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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02. 화요일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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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 <1> - 시인 김수영 (上)]

[찌질한 위인전 <2> - 시인 김수영 (下)]

[찌질한 위인전 <3> - 반 고흐 (上)]

[찌질한 위인전 <4> - 반 고흐 (下)]

[찌질한 위인전 <5> - 간디 (上)]

[찌질한 위인전 <6> - 간디 (下)]

[찌질한 위인전 <7>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上)]

[찌질한 위인전 <8>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下)]

[찌질한 위인전 <9> - 존 F. 케네디 (上)]

[찌질한 위인전 <10> - 존 F. 케네디 (下)]

[찌질한 위인전 <11> - 넬슨 만델라 (上)]

[찌질한 위인전 <12> - 넬슨 만델라 (下)]

[찌질한 위인전 <13> - 이중섭 (上)]

[찌질한 위인전 <14> - 이중섭 (下)]

[찌질한 위인전 <15> - 리처드 파인만 (上)]

[찌질한 위인전 <16> - 리처드 파인만 (下]

[찌질한 위인전 <17> - 허균 (上)]

[찌질한 위인전 <18> - 허균 (下)]

[찌질한 위인전 <19> - 스티브 잡스 (上)]

[찌질한 위인전 <20> - 스티브 잡스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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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불안과 두려움은 대부분 그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 대상이 명확하더라도 그 또한 대부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 경우가 많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질까 염려하는 마음이 두려움이 되고, 미래의 불확실성 자체가 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현재 시점에서 불안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다가오지 않은 미래가 눈 앞에 닥치는 순간이 되어서야 해소될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인 결과라면 안도할 것이며, 원치 않았던 결과라면 불안은 없어지고 그 자리를 고통이나 슬픔의 감정이 대신 차지할 것이다.


만약 자네가 모든 근심을 날려버리기를 원한다면, 자네가 두려워하고 있는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게.”

-세네카, 「도덕에 관한 서한」, 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에서 발췌


로마시대 철학자 세네카의 이 말은 불안(근심)이 다분히 미래의존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겠지만, 근본적인 공통점은 그것들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일 게다. 누군가를 잃는 것, 누군가의 애정을 잃는 것, 육체(건강)의 상실, 자존감의 상실 등 무엇인가를 잃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로 인한 두려움이 불안을 만든다.


사람이 살면서 가질 수 있는 온갖 불안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모든 불안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가장 거대한 상실이기에 모든 불안을 멈출 수 있지만 죽음 이후야말로 살아있는 어느 누구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건이므로 가장 큰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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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


1961 7 2일 이른 아침. 잠에서 깬 헤밍웨이는 살고 있던 집 지하실에서 엽총을 꺼내 들고 1층으로 올라온다. 총이 보관되어 있는 지하실 문은 잠겨있었지만 아내 메리가 평소 부엌에 열쇠를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헤밍웨이는 알고 있었다.


말년에 찾아온 불안장애와 정신착란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헤밍웨이는 몇 차례의 전기충격치료로 인하여 극심한 기억력 장애까지 겪고 있었다. 진정한 문학은 경험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던 헤밍웨이에게 쇠잔한 육체는 경험의 제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의 글에서 주요 소재가 되었던 경험이 전쟁과 사냥 등 강인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그러므로 노년의 헤밍웨이는 새로운 경험보다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억에 의존한 글을 써야 했다.


그런 헤밍웨이에게 찾아온 기억력 장애는, 작품 활동을 지속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것은 곧 작가 헤밍웨이에게 내려진 패배 선고였다. 당대의 대문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 받았던 그는 짧은 단문조차 제대로 쓸 수가 없어 이젠 글이 써지지 않는다!”며 괴로워했다.


헤밍웨이는 현관 홀에 서서 12구경 엽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로써 그는 작가로서 완전히 패배하기 전에-적어도 그 패배가 세상에 완전히 알려지기 전에- 스스로를 파괴했다. 『노인과 바다』에서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말한 그였다.


어니스트 파파(papa)’ 헤밍웨이


헤밍웨이는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 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작가다. 그는 작가로서 대중적 인기와 함께 작품성으로도 인정을 받아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식을 최대한 배제한 간결한 문장과 냉혹하리만큼 사실적이고 거친 묘사, 작중 인물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그의 문학적 특징으로 인하여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표 작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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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1,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등의 전쟁을 직접 경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차 세계대전은 의용병으로 참전하였으며 나머지 전쟁은 주로 종군기자로 체험했다. 그는 투우를 사랑했고 취미로 권투와 사냥을 즐겨 하는 등 글쓰기를 제외하면 주로 격렬한 육체 활동에 강한 애정을 보였다. 잘 생긴 외모에 다부진 체격, 전쟁과 사냥, 권투로 남긴 전설 같은 그의 일화들에 특유의 거칠고 간결한 문체까지. 대중에 각인된 헤밍웨이의 이미지는 남성성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파파(papa)’라고 즐겨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파파는 그의 별명이자 사회적 페르소나였다. 사람들이 헤밍웨이를 파파라고 부른 것 이상으로 그는 자신이 그렇게 불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자신의 사회적 페르소나를 더욱 공고히 구축하기 위해 허풍에 가까운 과장과 거짓말까지 일삼았다. 허세도 빼놓을 수 없다. 헤밍웨이가 겪었던 일들이 전설이 된 데에는 그것을 회자하는 사람들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당사자인 헤밍웨이가 스스로 윤색하여 이야기한 영향이 컸다.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특정한 모습으로 비쳐지기 위해 필요 이상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맨 얼굴과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에 헤밍웨이를 알고 지낸 몇몇 사람들과 후대의 학자들이 파파헤밍웨이의 이미지를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하는 말인 페르소나라 칭한 까닭 이 여기에 있다. 이는 헤밍웨이가 실제로 그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거나 최소한 그에 걸맞는 인물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그의 사회적 페르소나와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숱하게 보였다.


그 간극, 사회적 페르소나와 맨 얼굴 사이의 간극에서 어쩌면 인간 헤밍웨이와 그가 남긴 작품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찌질한 위인전>, 열한 번째 인물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어린 시절과 부모의 영향


헤밍웨이는 1899년 미국 일리노이 주의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먼즈는 의사였고, 어머니 그레이스는 젊은 시절 성악가로 활동하다가 결혼과 함께 은퇴했다. 그의 조부와 외조부는 모두 남북전쟁의 참전용사였고 어린 헤밍웨이는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의 무용담을 즐겨 들으며 자랐다. 독실한 개신교 집안의 엄숙한 분위기에서 자란 헤밍웨이는 아버지에게서는 외모와 운동 신경, 사냥 취미 등을 물려받았고 어머니에게서는 예술적 감성을 물려받았다.


헤밍웨이의 어린 시절에서 눈에 띄는 점 중 하나는 그가 두세 살까지 여장을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 그레이스는 헤밍웨이의 머리를 여자 아이처럼 길게 기르고 레이스 장식이 달린 드레스와 같은 여자 아이들의 옷을 그에게 즐겨 입혔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드레스 입은 어린 헤밍웨이의 사진을 보면 사진 속 헤밍웨이는 곱상한 얼굴에 여성스러운 차림까지 더해져 영락없는 여아의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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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헤밍웨이를 연구, 분석했던 여러 사람들은 헤밍웨이가 유난히 남성성을 강조하는 성향을 보인 것의 근원을 영유아기의 여장과 연결짓기도 했다. 하지만 『헤밍웨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유인』의 저자 제프리 메이어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장을 한 당시 헤밍웨이의 나이가 불과 2~3세에 불과했으므로 아직 자신의 성 정체성조차 확실하게 인지하지 못했을 것인데다 그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남자 아이의 옷으로 바꿔 입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둘을 연결짓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필자 또한 여기에 동의하는데, 헤밍웨이가 전쟁, 사냥과 같은 격렬한 육체적 활동에 매혹되었던 것에 부모가 영향을 일정 부분 있었다면 오히려 어머니보다는 아버지 에드 헤밍웨이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레이스의 증언에 따르면 헤밍웨이는 이미 다섯 살 무렵부터 자신이 군인인척 행동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는 참전용사였던 할아버지와 총알을 주조하는 취미를 가졌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고, -따지고 보면 그 나이 또래 사내아이가 전쟁 놀이를 즐겨 하는 것이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다- 평생에 걸쳐 취미로 즐긴 사냥 또한 아버지의 사냥 취미를 보고 자란 탓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성장기의 헤밍웨이는 종종 에드의 사냥을 따라 나섰으며 아버지의 사격 실력에 감탄하기도 했다. 에드 헤밍웨이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움직이는 모든 것을 쏘아 맞추길 좋아했는데, 중년의 헤밍웨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편, 헤밍웨이는 한평생 그레이스와 반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머니의 장례식조차 집필 작업을 핑계로 가지 않았을 정도였고 공공연히 증오를 표출하기도 했다. 사춘기 소년 시절부터 이어져 온 뿌리 깊은 그의 증오 이면에 여장의 기억이 한 켠 자리잡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헤밍웨이는 그레이스를 아버지를 착취하고 괴롭히는 존재로 여겼기에 그녀를 미워했다. 1928년에 일어난 에드 헤밍웨이의 권총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 그레이스라고 여겼다>


그레이스에 따르면(그레이스는 자녀들의 성장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헤밍웨이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공적을 과장하고 이를 과시하기를 좋아했다. 헤밍웨이는 다섯 살 때 자신이 달아나는 말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고 우겼고, 호수에서 목욕을 한 번 한 뒤로는 자랑스럽게 자기는 세상에서 무서운 게 없다고 고함을 쳤다. 어린 아이가 자기 경험을 과장하고 과시하는 게 비단 헤밍웨이만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자신이 겪은 어려움과 업적을 과장하는 모습이 어린 시절뿐 아니라 헤밍웨이의 삶 전체에 나타난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겠다.


성장기의 헤밍웨이는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가거나 권투를 하는 등 몸을 쓰는 활동을 즐겼지만 독서에 탐닉하고 작문에 심취하기도 했다. 자녀들이 방에 틀어박혀 책에 파묻히거나 멍하니 앉아 생각에 빠지는 것을 에드 헤밍웨이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어려서부터 고집이 셌던 헤밍웨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렇듯 헤밍웨이는 부모의 영향과 성장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가적 감수성과 섬세함을 갖는 것과 함께 격렬한 육체 활동에 매혹되고 그것을 체험으로써 다소 상반된 기질을 자신 안에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공존시켰다. 이것은 헤밍웨이가 앞으로 선 보이게 될 문학적 업적과 특징의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 그가 가진 찌질함의 성장판이 되기도 했다.

 

1차세계대전


고교를 졸업한 헤밍웨이는 그의 고집대로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취업을 택한다. 1917 10, 당시 이름난 지역지 <캔자스시티 스타>의 기자로 취직한 헤밍웨이는 그곳에서 강조하는 문체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문체를 더욱 연마했다.


헤밍웨이는 기자 생활에 나름 충실하면서도 한창 유럽을 포화로 물들이고 있던 1차세계대전에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미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참전의 뜻을 굳힌 상태였던 헤밍웨이였지만 신체검사에서 시력이 나빠 떨어지면서 좌절했다. 그럼에도 입대의 꿈을 놓지 않은 헤밍웨이는 결국 비전투병을 모집하는 적십자 구급차 운전사로 지원해 합격, 입사 7개월 만에 사직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유럽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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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 도착한 헤밍웨이는 구급차를 모는 임무를 맡았으나 보다 전선 가까이에서 있고 싶은 마음에 오스트라와의 전선과 가까운 곳에 있는 적십자 군 매점 운영에 지원해 그곳에 배치된다. 비록 비전투병이었지만 전투의 현장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했던 헤밍웨이는 그것 자체에 매혹되었고, 그것을 소재로 기사를 썼으며 글의 소재로 삼았다.


적십자 군 매점 운영병 헤밍웨이는 비록 전투 현장 가까이에 있었으나 맡은 일은 초라했다. 그의 주요 임무는 전선의 부상병이나 일반 병사들에게 초콜릿이나 담배 따위를 나눠주는 것이었다. 전투의 현장에서 탄약과 수류탄을 챙기는 대신 주머니와 배낭 한 가득 담배와 엽서, 초콜릿을 가득 채워야 했던 헤밍웨이는 자조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설명했으나 자신이 전장의 한 가운데에 있음을 즐겼다.


전공(戰功)과 거짓말


그러던 중 1918 7 8, 헤밍웨이는 오스트리아의 박격포 공격에 중상을 입는다. 당시 그는 그의 임무대로 참호에 있는 병사들에게 먹을 것 등을 나눠주고 있었는데, 근처에 떨어진 박격포탄으로 인하여 이탈리아 병사 한 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다른 병사는 다리가 날아갔으며 또 다른 병사는 중상을 입었다. 헤밍웨이의 몸에는 200여 개의 파편이 날아와 박혔다. 헤밍웨이는 포탄에 의해 중상을 입고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음에도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부상당한 이탈리아 병사를 이끌고 참호 속으로 들어간 후에야 다시 정신을 잃었다.


까딱하면 죽을 뻔 했다는 표현이 전쟁터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터만큼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헤밍웨이는 정말 까딱하면 죽을 뻔했다. 적십자 군에 지원한 것도, 전선 가까이에서 임무를 수행하고자 한 것도 헤밍웨이의 의지였지만 오스트리아 군이 쏜 포탄 속에서 헤밍웨이의 생사를 가른 것은 전적으로 이었다(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를 신의 섭리라 하겠지만). 어찌됐든 헤밍웨이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헤밍웨이는 재활 후 성급하고 무모하게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황달에 걸려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왔다.


비록 비전투병 신분이었고, 포격 속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 이렇다 할 전공을 세우지는 못한 헤밍웨이였지만 중상 가운데에서도 다른 병사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모습은 분명 칭송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 공로로 헤밍웨이는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공적은 이후 그 자신에 의해 점점 부풀려졌다. 헤밍웨이는 인터뷰와 강연, 글을 통해 자신이 휴전 당시까지 전장에 남아있었노라고 주장했고, 그의 부상 정도는 날이 갈수록 더 과장되었다. 1차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파시스트 기병대의 핵심이 된 자원병 부대에서 복무했다는 거짓말도 서슴없이 하는 바람에 한동안은 그것이 세간에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업적과 어려움을 과장하는 헤밍웨이의 성격은 이 사건을 통해서도 여지 없이 드러났다. 전쟁터에서의 행적만큼 사실 확인이 어렵고 부풀리기 좋으며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소재도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첫 여인 애그니스


포탄에 중상을 입은 헤밍웨이는 후방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미국인 간호사 애그니스와 사랑에 빠진다. 헤밍웨이보다 7살 연상이었던 애그니스는 큰 키와 금발을 가진 명랑한 성격의 여성이었다. 애그니스의 미모는 부상병들의 눈에 단연 돋보였고 그것은 수려한 외모에 건장한 헤밍웨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상병과 간호사의 관계, 상처를 감싸고 간호하는 존재로서의 여성과 보호를 받는 남성의 관계 또한 이들의 사랑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헤밍웨이가 퇴원한 후에도 둘은 이탈리아에서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지속했다. 헤밍웨이는 이탈리아에서 더 머물면서 애그니스와 함께 하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결혼을 약속한 채 1919 1월 미국에 돌아왔다.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헤밍웨이는 애그니스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확인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탈리아에 있던 애그니스의 사랑이 먼저 식은 것이다.


스무 살, 스물 한 살의 젊은 헤밍웨이가 처음으로 경험한 실연의 상처였다. 헤밍웨이는 지독하게 괴로워했고 애그니스를 잊지 못해 고통스러워 했다. 평전의 저자 제프리 메이어스는 애그니스가 헤밍웨이를 떠나간 이 사건이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그녀의 배신(그는 그녀의 거절을 배신이라고 생각했다)으로 인한 상처는 그에게 본능적인 자기 보호를 강요했다. 평생 동안 그는 현재의 결혼 생활 중에 미래의 아내와 간통을 범함으로써 배반과 외로움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했다. 자신이 정서적 안정을 얻었다고 확신했을 때 그는 아내가 자신을 떠나기 전에 그녀를 버렸다.

-제프리 메이어스, 『헤밍웨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유인 1


1차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헤밍웨이는 육체와 정신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양쪽 모두 그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상처였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가지 상처는 각기 전혀 다른 방향으로 헤밍웨이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포탄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헤밍웨이는 생전 처음으로 죽음의 가장 가까운 문턱을 밟았다. 헤밍웨이는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지만 반대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헤밍웨이는 이후 무모해 보일 정도로 더욱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을 감행했다. 생사의 위험은 헤밍웨이를 주저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의 글을 더 가치 있게 만들고 그의 정신 상태를 한층 고양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 겪은 실연의 상처는 달랐다. ‘버림 받음의 고통을 겪고 난 후의 헤밍웨이는 앞서 인용한 제프리 메이어스의 말처럼 자신이 상처받기 전에 상대를 버렸다. 이러한 양상은 비단 애정 관계뿐 아니라 그의 인간 관계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전쟁 상황에서는 오로지 아군과 적군 만이 존재한다. 피아식별이 되어 상대가 적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나의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취해야 할 행동은 상대를 쏘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쏘는 것을 주저하면 반드시 상대가 나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전시의 병사처럼 헤밍웨이는 그가 만나는 사람을 대했다. 인간 관계가 적과 아군으로 양분되는 지극히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되지 않음에도, 그는 상대가 자신에게 적의를 보인다고 판단하면 그 의도와는 상관 없이 무차별적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아무리 자신에게 호의적이고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예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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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下)편에 계속.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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