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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중에 사상누각이라는 단어가 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허술하고 무너지기 쉬운 것을 지칭한다. 이런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 중 '영혼 없는 예술'만큼이나 사상누각이란 말이 어울리는 것도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또 그 공허한 것 중 성수대교만큼 우리 사회에 큰 파란을 준 누각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예고되지 않은 참사는 없다'는 말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성수대교 붕괴의 기억을 이제 뒤적여보자.



1. 성수대교


성수대교는 1976년 10월 16일에 개통된 한강을 가로지르는 교량으로, 당시까지 기능 위주로만 따져 만들던 다리에 대해 미적인 기준을 추가시키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던 건축물이었다. 그래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개통식에 참석하는 등 사회적으로 많은 이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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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는 하늘색을 색상으로 채택하고 트러스식이라는 새로운 공법을 채택함으로 빼어난 미관을 자랑하며 한강의 새로운 자랑거리로 떠올랐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과 튼튼함은 반비례한다는 옛말처럼 그렇게 튼튼한 교량은 아니었다. 모든 건축물이 그렇듯, 기본적인 시공과 꾸준한 유지보수가 더해진다면 내구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서 건물을 가장 빨리 올린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나라에서 그것을 지었다는 것이 불행이었다면 불행이었으리라.



2. 조짐은 보였다.


1994년 10월 21일, 운전자들은 성수대교에 깔린 거대한 철판을 보게 된다. 철판이 깔렸던 이유는 상판부의 이음새가 심하게 균열이 일어난 것을 가리기 위한 땜빵 조치였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고작 철판 따위로 엄청난 무게의 다리가 갈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균열은 커졌고 철판을 지날 때마다 운전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몇몇은 이를 서울시에 신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일 오전 7시 48분경, 다리의 중간 열 번째와 열한 번째 교각 사이, 48m에 이르는 상판이 붕괴한다. 교각과 교각 사이가 뚝 하고 떨어져 버린 것이다. 사고 부분을 달리던 승합차 1대와 승용차 2대는 그대로 상판과 함께 떨어졌고, 붕괴한 지점에 걸쳐있던 승용차 두 대는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붕괴지점에 뒷바퀴가 걸려 조금 늦게 떨어진 버스는 하필이면 천장부터 떨어져서 붕괴한 다리 상판과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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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버스에서만 20명이 죽었고 그 외에 승용차와 승합차에 탑승해있던 8명이 사망한 것은 물론, 17명이 부상당하여 총 49명의 사상자가 나온 황당하기 짝이 없는 참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3. 무엇이 문제였나?


성수대교는 앞서 말했다시피 수려한 외관의 트러스식 공법으로 만들어졌다. 트러스식 공법은 이음새가 잘못되면 무너지기 쉬운 공법이다. 미관을 추구하기 위해서 기둥 사이 거리를 120m나 떨어뜨려 놓았는데 힘이 집중되는 부분의 핀은 지속적인 피로누적과 다리 위를 지나는 차들의 진동을 고스란히 받게 된다. 아무리 강철이라고해도 이런 구조로 극악한 조건을 이겨내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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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과적 또한 문제로 지적되었다. 붕괴 전 성수대교가 받아낼 수 있는 총 중량은 32t 정도였는데 40t이 넘어가는 차들도 다리 위를 씽씽 달렸다고 한다. 특히 1993년 도에 동부간선도로의 새로운 개통으로 교통량은 폭증했으나 서울시에서는 설마 다리가 무너지겠냐는 생각을 가졌는지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았었다.


앞서 구조적 문제를 설명하며 압력이 집중된다 언급했던 이음새의 부실함 또한 문제가 되었다. 아니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에 다리의 이음새 부분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점이 발견되었고, 그와 더불어 심하게 녹슬었을 뿐 아니라 이음새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켜야 할 구조물 또한 제대로 시공되지 않았다. 덤으로 이들을 연결하고 있어야 할 볼트를 무리하게 욱여넣어 변형된 점 또한 발견되었다. 심지어 볼트를 제대로 고정시키지도 않아서 손으로도 풀 수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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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시공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시공의 부실함을 발견했다면 도로 통제 등으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당시에는 20년 이상 된 교량에만 정밀안전단속을 시행했었다. 연수가 20년이 채워지지 않은 다리들은 눈으로만 대강 훑어보고 가는 수준이었고, 당시 교량을 점검하는 데 사용되었던 굴절자동차들은 전문지식이 없는 공무원들에게는 그냥 눈금 좀 많은 자동차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와 더불어서 서울시에서 대학교수들에게 의뢰하는 교량점검 또한 단순히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는 점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4. 희생자들


성수대교 사고가 우리 뇌리에 더욱더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까닭은 어쩌면 지금의 세월호와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꽃다운 나이의 청소년들이 사고에 휘말려 사망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당시 추락한 버스에는 무학여고생 8명과 무학여중생 1명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 즉사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수십 미터 높이에서 머리부터 떨어졌는데 살아 있었다면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사망자의 절반에 가까운 수가 버스에서 발생했던 이유는 앞서 말했다시피 천장부터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와 별개로 물속으로 떨어진 승용차의 탑승자들은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에 떨어져 큰 충격을 받지 않았기에 깨진 창문을 통해서 탈출한 이들도 몇몇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구조대는 사고 직후 20여 분동안 물속에서 시신 3구를 인양하고 오전 10시경 구조대가 포크레인을 통해 버스를 들어 올리자 버스 아래에 으깨진 6구의 시신을 발견한 다음 버스 안까지 수색하여 총 20여 명의 사상자를 발견, 11시까지 총 24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11명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중 8명은 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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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현장에는 표창을 받기 위해 서울로 향하던 의경대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교량이 추락하면서 같이 추락한 피해자들이었으나 다행히 크게 부상당한 이가 없어서 구조활동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전해진다.



5. 대응


다리가 상판째로 뚝 떨어져 버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서울시와 경찰의 대응은 재빨랐다. 사실 초기에는 장난전화로 생각하고 넘겨버리는 일도 없지는 않았다. 하기야 누가 갑자기 전화해서 다리가 끊어졌다고 전화하면 장난으로 생각할만하다. 그러나 그 전화가 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서울시와 경찰청은 재난본부를 설립하고 휴가 중인 경찰관을 모조리 불러들인 이후에 성수대교 근방에 폴리스 라인을 설치, 그리고 구조활동에 나선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데에 딱 20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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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대응은 재빨랐으나 구조활동에는 제약이 많았는데, 한강의 수압이 강해 물속으로 추락한 사람들의 구조속도는 더뎠고, 살아난 이들은 자력으로 탈출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버스는 말할 것도 없고.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서울시는 우회도로 표지판을 설치하여 영동대교와 동호대교로 교통량을 분신시키고 교통신호 주기를 변경하는 등, 교통혼잡을 예방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당일 오후 7시,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이원종 시장이 경질되었다. 동시에 개원 중이던 국회가 일체 중지되었고, 24일에 김영삼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방송이 나가는 등 정치계의 행보 또한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러한 당시의 정치권의 행동을 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미개했는지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세월호 때의 10분의 1 수준인 32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에 민생법안을 처리하기 바쁜 국회가 중지된 데다가 대통령이 30여 일이 아닌 3일 만에 대국민 사과방송을 하다니,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 아닌가?


사고의 수습이 대강 끝난 후 서울시는 성수대교의 재시공을 발표하는데, 총 공사기간 3개월이라는 파격적인 속도로 교량을 수리하여 교통불편을 최소화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웬 정신 나간 소리냐는 시민들의 거센 항의에 방침을 철회하였다. 결국 1995년에 현대건설이 시공에 들어간 뒤 2년 후인 1997년에야 성수대교는 재개통 된다. 


이 재시공에도 상당히 재밌는 부분이 있는데, 국내 최초로 해외 감리업체가 국내 감리업체와 함께 감리에 나섰다는 것이다. 당시 국내 감리업체가 건설사와 담합하는 등 부패를 드러내 보인 터라 우리나라 정부는 국내 감리업체에 대한 불신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세태가 잘 드러난 시공이 바로 성수대교의 재시공이었다고 하겠다. 후일 가양대교의 시공 시에는 아예 국내 감리업체의 참여를 제한해버리는 등 여러모로 국가적 망신살이 뻗친 사고였던 것이다. 



6. 처벌


성수대교 사고의 처벌은 이례적으로 강하게 이뤄졌는데, 간단히 요약해보면 동아건설의 부실시공에 대한 처벌로 재발 방지를 노린 대처였다 할 수 있다. 성수대교 사고의 재판은 우리나라 재판계의 한 획을 그을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다. 사고 대상자들을 모조리 잡아넣기 위해서 사법계가 대한민국의 법적 통설을 부정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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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에서 사법계가 들고 나온 것은 과실범의 공동정범이라는 개념으로 기능행위 지배설이라는 공동정범 이론을 박살 내는 것이었다. 기능행위 지배설의 이론을 간단하게 풀어보자면


가해자들이 각자 맡은 범행의 부분이 합쳐져서 범행이 완성되는 것으로 모두가 공범


이라는 내용인데 과실범의 공동정범에 대해서 사법계가 내놓은 답으로는



이 사건 성수대교와 같은 교량이 그 수명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건설업자의 완벽한 시공, 감독공무원들의 철저한 제작시공상의 감독 및 유지·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들의 철저한 유지·관리라는 조건이 합치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위 각 단계에서의 과실 그것만으로 붕괴원인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합쳐지면 교량이 붕괴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고, 따라서 위 각 단계에 관여한 자는 전혀 과실이 없다거나 과실이 있다고 하여도 교량붕괴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붕괴에 대한 공동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봄이 상당하다 할 것이다.


이 사건의 경우, 피고인들에게는 트러스 제작상, 시공 및 감독의 과실이 인정되고, 감독공무원들의 감독상의 과실이 합쳐져서 이 사건 사고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한편 피고인들은 이 사건 성수대교를 안전하게 건축되도록 한다는 공동의 목표와 의사연락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피고인들 사이에는 이 사건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 죄에 대하여 형법 제30조 소정의 공동정범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판례 97도 1740 발췌)



줄여 말하자면 '너그들은 의무의 이행을 성실히 하지 않았으므로 다 유죄'라는 이야기다. 물론 앞서 말했다시피 일반적인 법적 통념을 깨버리는 행위이기에 비판도 꽤나 있었는데, 대표적인 비판으로 이들이 고의성을 가지고 구체적인 행동은 한 것은 아니기에 이런 개념은 있을 수 없다라는 내용이 뽑힌다. 다만 이런 비판을 제기한 이들도 사법계의 판결에는 찬성했다. 왜냐하면 책임자들에 대한 과실은 인정이 되나 그 원인이 확연하게 입증되지 않기에 모조리 무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죄형법주의(법률이 없이는 범죄도 없고, 법률이 없이는 형법도 없다는 뜻으로 범죄와 형법을 미리 법률로 규정해야 한다는 이야기)의 원칙상 맞는 이야기지만 국민의 감정을 생각해보자면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법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실로 멋진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7. 여파


이후 서울시의 인문계 학교배정에서는 절대로 한강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생기는 등-10년 후 폐지되었지만- 국가적인 트라우마를 남겼다. 


사실 다리가 무너진다는 것을 서울시에서 예측 못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당산철교라는 실로 낡아빠진 다리에서 붕괴위험이 이미 감지되어 지하철이 서행하는 등 여러모로 조치를 취한 덕에 성수대교가 먼저 무너지는 상황이 온 것일 뿐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난 이후에 당산철교는 바로 수리에 들어갔다.


성수대교가 재시공된 이후에는 모든 다리들은 과적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단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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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총평


성수대교는 여러모로 국가적인 전환점이 된 사고였다. 관선시장인 이원종 시장의 경질을 시작으로 우명규 시장과 최병렬 시장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끝내는 신호탄이기도-물론 최병렬 시장의 마지막은 눈뜨고 봐줄 수 없을 만큼 안타까웠다.-하였으며, 우리나라 건축물들에 대한 불신이 피어나기 시작한 사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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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불신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못해 후일 더 큰 사고를 맞이하게 되었음은 씁쓸한 따름이다. 끝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mbc에서 방송했던 한 아버지의 울분에 찬 인터뷰를 읽어보도록 하자.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올 수 있어! 

올 수 없다고 장담 못 해! 

미리미리 방지한다고 하지만 이미 늦은 거야."




자 다음은 대망의 삼풍이다. 참고로 재난에 대한 이야기는 삼풍 이후에 광주 대단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한 후에 끝이다. 그 이후에는 독재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가도록 하겠다. 독재자의 첫 타는 살라자르다.








돼끼


편집 :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