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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12.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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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 <20> - 스티브 잡스 (下)]

[찌질한 위인전 <21> - 어니스트 헤밍웨이 ()]







세 번의 이혼, 네 번의 결혼



어니스트는 대작을 쓸 때마다 새 여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


헤밍웨이는 첫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과 1921년에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폴린 파이퍼(1927), 마서 겔혼(1940), 메리 웰시(1946)까지 네 명의 여성과 결혼했다. 헤밍웨이의 결혼과 이혼에는 몇 가지 공통점과 반복되는 패턴이 있는데, 그는 현재의 부인과 이혼하기 전 이미 다음 결혼 상대와 연인 관계에 있었으며 첫 번째 부인 해들리를 제외한 나머지 셋(불륜으로 시작된 관계)은 모두 헤밍웨이와 처음 만날 당시 기자 신분이었다.


앞선 두 번의 결혼 상대자인 해들리와 폴린은 헤밍웨이보다 연상인데다 헤밍웨이의 집필 활동을 지원해줄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들리는 세상을 떠난 부모에게서 상속받은 재산이 있었고 폴린은 재력가 집안의 딸이었다. 반면 마서 겔혼과 메리 웰시는 모두 헤밍웨이보다 연하였고 그들과 결혼할 당시의 헤밍웨이는 이미 작가로서의 명성과 함께 그에 못지 않은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앞서(상편) 밝혔듯이 헤밍웨이는 20대 초반에 전장에서 만난 애그니스에게서 배신-헤밍웨이의 자의적 판단이지만- 당한 후 평생 동안 배신과 외로움을 당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이혼하기 전 이미 다음 결혼 상대자와 불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919년에 애그니스와 결별한 뒤 1921년 스물셋의 나이로 첫 번째 부인인 해들리와 결혼한 후 1961년 사망할 때까지 평생 단 한 순간도 완전하게 홀로 남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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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해들리 리처드슨 부부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불륜의 시발점이자 주요 무대가 된 곳이 전쟁과 사냥여행 등 평소 그가 매혹되었던 위험의 현장이었다는 것이다. 평전의 저자 제프리 메이어스에 따르면 헤밍웨이가 전쟁과 육체 활동 매혹되었던 것은 그것이 헤밍웨이에게 있어 가장 큰 불안요소라 할 수 있는 여자를 제거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헤밍웨이에게 전쟁이 불륜의 현장이었다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헤밍웨이에게 여성은 가장 큰 불안요소였지만 외로움은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집필 중에는 성관계도 자제할 정도의 헤밍웨이였지만 한편으로는 여인과의 사랑이야말로 헤밍웨이가 가진 창작열의 원천이었다. 헤밍웨이는 해들리를 만나고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완성했으며 폴린을 만난 뒤에는 <무기여 잘 있거라>, 마서와 메리를 만나고 있을 때 각각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를 썼다. ‘헤밍웨이는 여인과 사랑이 빠질 때 대작이 나온다는 피츠제럴드의 견해는 그 당시의 헤밍웨이에게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헤밍웨이는 지적이고 활동적인 여성에게 끌렸다. 해들리 이후 헤밍웨이와 결혼한 세 여자의 직업이 모두 기자였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막상 불륜 상대자와 결혼하고 난 뒤에는 아내가 된 그들에게 집안과 아이를 돌보는 가정적인 역할을 강요했다. 장시간 집을 비우고 위험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헤밍웨이에게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안정적인 가정이 필요했다. 그리고는 다시 현장에서 만난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뿐만 아니라 불륜의 상대를 가족 앞에 데리고 나타나 아내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헤밍웨이의 불륜녀 앞에, 본의 아니게 집안을 돌보는 가정주부가 다 된 그의 아내들은 상대적으로 초라함을 느끼고, 절망에 빠졌다.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진 헤밍웨이는 아내에게 온갖 모욕적인 언사와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그의 아내는 어떻게든 가정과 부부관계를 지키려 애쓰다 결국 헤밍웨이의 뜻대로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해들리가 집에 있을 때 헤밍웨이는 밖에서 폴린 파이퍼를 만나 그렇게 해들리를 괴롭히다가 폴린과 결혼하여 그녀를 집에 들어앉혔, 폴린이 집에 있을 때에는 밖에서 마서 겔혼을 만나 같은 상황을 반복했다.


이혼 과정에서 헤밍웨이가 아내에게 보인 잔인하고도 치졸한 모습은 부부 관계를 정리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헤밍웨이의 인간관계 전반에서 발견되는 책임 전가의 행동 양상이 여기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헤밍웨이는 아내가 자신을 떠나가게 만들어 놓고는 이혼을 하고 나자 오히려 자신이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반응했다. 이혼의 책임을 떠나간 아내에게 돌리면서 피해자 행세를 하는 한편 공개적으로 전처를 공격했던 것이다. 심지어 버림받은 아내에게 창녀 같은 여자라고 욕하는 헤밍웨이의 모습은 간통으로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의 행동치고는 지나치게 뻔뻔했다.


그의 적반하장은, 때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당당해서 더욱 기가 막혔다. 마서 겔혼과 바람난 헤밍웨이가 그것도 모자라 아예 폴린과의 부부 관계를 청산하려 하자 이에 격분한 폴린 파이퍼는 헤밍웨이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헤밍웨이가 보인 반응이 압권이었다. 유부남이었던 자신을 만나 해들리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폴린이 마서 겔혼에 의해 같은 일을 당하게 된 것은 결국 그녀의 자업자득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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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당시의 헤밍웨이와 폴린


반면 마서 갤혼은 헤밍웨이의 다른 아내들과는 다른, 새로운 양상의 갈등을 빚어냈다. 헤밍웨이가 처음으로 맞이한 연하의 아내였던 마서는 애초에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헤밍웨이가 강요하는 가정에 충실한 아내 역할을 마서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끝까지 기자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서의 그런 모습에 끌려 사랑에 빠진 헤밍웨이였지만 막상 그녀가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자 부부 관계는 금세 위기에 빠졌고, 이번에도 헤밍웨이는 그 원인을 모두 마서에게로 돌렸다. 따지고 보면 헤밍웨이가 겪었던 세 번의 파경 가운데 그나마 마서 겔혼과의 불화가 원인 제공의 측면에서 가장 덜 일방적이기는 했다. 덕분에 그녀는 이혼 후에도 헤밍웨이의 다른 전처들보다 더 가혹하고 악의적인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마서 겔혼 또한 지지 않고 그런 헤밍웨이에게 맞섰다.


배은망덕한 헤밍웨이 왜 그토록 관계를 파괴하는가


나는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난 뒤 그 은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움을 거는 것을 보았습니다

헤밍웨이가 찰스 팬턴에게

-제프리 메이어스, 『헤밍웨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유인 1


해들리와 1921 9월에 결혼한 헤밍웨이는 그 해 12월 미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고, 1920년대의 대부분을 파리에서 보냈다. 파리 생활을 시작할 당시의 헤밍웨이는 작가이기보다는 <토론토 스타>에서 파견한 특파원 신분이었다. –앞서 밝혔듯이 헤밍웨이는 작가이기에 앞서 기자로서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오래지 않아 작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지만 당시만 해도 작가헤밍웨이는 명성으로나 문학적 역량으로 신출내기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파리는 유럽과 미국의 많은 문인들이 모여 그들의 문학적 성과를 나누고 친분을 맺는 사교와 교류의 장이었다. 1차 세계대전 후 미국에 돌아와서도 유럽에서의 생활을 동경했던 헤밍웨이가 그중에서도 파리를 선택하여 정착한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러 파운드, 제임스 조이스, 스콧 피츠제럴드 등 당대의 이름난 문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건장하고 수려한 용모의 젊은 헤밍웨이에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을 뿐 아니라 비록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에서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이미 어느 정도 문학적 업적과 명성을 쌓은 그들은 헤밍웨이에게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헤밍웨이는 에즈러 파운드, 거트루드 스타인과 교제하면서 그들의 문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헤밍웨이의 작품을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출판사에 소개하여 그것이 출간될 수 있도록 도왔다. 헤밍웨이에게 지인을 소개해 인맥을 넓혀주기도 했다. 헤밍웨이가 작가로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의 공로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은인과 다를 바 없는 이들과의 관계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철저하게 파괴되어 갔다. 그리고 그 원인은 대부분 헤밍웨이에게 있었다. 헤밍웨이는 에즈러 파운드 정도를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거나 한 때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문인들 대부분을 적으로 만들었다.


작가로서의 입지가 비교적 확고해지자 헤밍웨이는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이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문학적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이를 공개적으로, 그리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때로는 그것이 조롱에 가깝게 비춰지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공격을 받은 이들이 반대로 헤밍웨이의 작품을 공격하자 헤밍웨이는 더욱 격렬하게 반응하여 그들을 향한 비난의 수위와 강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헤밍웨이는 공격의 범위를 그들의 문학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까지 넓혔다.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난 뒤 그 은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움을 거는사람은 다름 아닌 헤밍웨이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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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피츠제럴드


작가 헤밍웨이는 근거 있는 정당한 비평조차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비평에 대한 헤밍웨이의 반감은 비단 젊은 시절뿐 아니라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것이었다. –물론 비평 중에도 호평은 예외였다- 그는 작품에 대한 비평을 불신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다. 때문에 헤밍웨이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라도 그의 작품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하면 헤밍웨이는 여지없이 적의를 표출하고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잘못은 너에게 있다.


헤밍웨이는 숱하게 관계를 망가뜨리면서도 언제나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했다. 그가 먼저 싸움을 걸어 문우들과의 관계가 깨어져 나갈 때에도 그러한 문학적 공격이 상대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노라고 합리화했다. 수차례의 이혼에서도 언제나 파경의 책임은 상대에게 있었다.


헤밍웨이의 책임 회피와 전가는 그의 가족이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겁쟁이인 아버지헤밍웨이는 그의 아버지 에드를 겁쟁이라 여겼다-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거의 모든 이유를 악랄한-이 또한 헤밍웨이의 자의적 판단이다- 어머니 그레이스에게서 찾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도를 넘어선 것이어서 그는 사람들 앞에서 그레이스를 늙은 암캐라 부르기까지 했다.


전처인 폴린 파이퍼의 죽음을 대하는 헤밍웨이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폴린과 헤밍웨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그레고리는 헤밍웨이와 그다지 원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헤밍웨이는 아들의 여자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자 둘의 관계를 깨버린 적이 있었고 부모의 이혼 후 정신에 문제를 보이기 시작했던 그레고리는 마약에 손을 대는 등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그레고리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잡혀가면서 폭발했다. 아들 문제로 동분서주하고 있던 폴린과 전화 통화를 하는 와중에 헤밍웨이가 분노하며 엇나가고 있는 아들에 대한 책임을 폴린에게 떠넘겼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폴린은 울며불며 헤밍웨이와 싸우다가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계속 오열했다. 그날 밤, 폴린은 복부 통증과 내출혈로 병원에 갔고 수술 도중 죽었다. 헤밍웨이는 그레고리에게 네가 말썽을 부린 것 때문에 네 어머니가 죽었다고 말해 결국 아들과 의절하고 만다. 헤밍웨이는 아들 문제의 책임을 전처에게 떠넘겨 그녀를 죽게 만들었고, 그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다시 아들에게 돌렸다.


사람들에게 받은 도움을 원수로 갚고, 먼저 상대를 버리고 떠났거나 적어도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떠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어 놓고도 오히려 버림받았다고 주장하는,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라면 가족에게까지 책임을 떠넘기는 헤밍웨이. 어떠한 전후 사정을 갖다 붙이더라도 그에게서 정당성을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 다만 헤밍웨이의 이러한 행동 양상의 원인을 추론해볼 수는 있겠다. ‘불안죄의식이다.


헤밍웨이의 불안


커다란 덩치에 폭력을 즐기고, 위험에 매혹되어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를 시험했던 헤밍웨이는 내적으로는 매우 여리고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것은 그를 알고 지낸 몇몇 사람들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거트루드 스타인과 스콧 피츠제럴드의 부인 젤더는 헤밍웨이가 실은 겁쟁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이 헤밍웨이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과 전혀 다른 왜곡된 주장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들이 헤밍웨이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므로 허무맹랑한 낭설로 치부하기도 어려운 면이 있다. 뿐만 아니라 헤밍웨이의 평전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그를 일컬어 떨리는 감수성과 폭력에 대한 몰두가 이처럼 불가사의하게 결합된 존재가 이 지상에 걸어 다닌 적이 없다고 말했으며 그 밖에도 헤밍웨이를 알고 지낸 여러 사람들, 그의 가족 등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그에게 겉으로 보이는 강인한 이미지와는 상반된 다른 면이 공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수차례 언급했듯이 애정 관계에 놓인 헤밍웨이는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상대가 자신을 떠나기 전에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곧 정신적인 상처를 입는 것과 동시에 홀로 남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헤밍웨이는 그러한 사태에 대한 불안으로 결혼 생활마다 간통을 저질러 그들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방어했다.


헤밍웨이가 자신을 향한 문학적 비평에 격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거부한 까닭은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비평에 의해 자신의 문학적 역량과 작품의 허점이 드러나 작가로서의 입지가 무너지게 될까 두려워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을 도왔던 사람,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의 작품에 비판적인 평가를 내리면 극단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헤밍웨이와 그의 작품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헤밍웨이가 더욱 반격의 칼을 갈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개의 경우 그런 사람들의 비평이 보다 정확할 것이기 때문이다. 헤밍웨이가 자신에게 문학적 영향을 끼친 작가들에게서 허점을 발견하면 누구보다 더 앞장서서 잔인하게 공격을 가했던 이유 또한 그들로 인하여 헤밍웨이 문학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면 헤밍웨이는 아예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조차 부정해버렸다.


누구보다도 헤밍웨이의 문학적 역량을 의심한 사람이 헤밍웨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평생 동안 작가로서 쇠퇴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것이 탄로 날까 불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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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죄의식


나의 아버지는 양심의 가책을 너무 심하게 느꼈습니다. 실수를 저지르면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속죄양을 찾아야 했습니다.

-헤밍웨이의 아들 그레고리

-제프리 메이어스『헤밍웨이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유인 2


헤밍웨이가 그토록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한 이유가 그가 느낀 죄의식때문이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죄의식이 눈앞에 닥치면, 자기방어 기제가 발동하는 방식에 따라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넘기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다.


헤밍웨이가 숱하게 관계를 파괴해 나간 것은 불안에 빠진 자신을 원치 않는 결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야기한 죄의식, 헤밍웨이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다른 사람을 희생양 삼아야 했다. 관계의 파괴와 책임 전가라는 헤밍웨이의 그늘은 좋지 않은 방식의 자기 방어기제가 중첩되어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불안과 죄의식은 헤밍웨이의 또 다른 행동 양상에 영향을 미쳤다.


육체를 시험하는 헤밍웨이, 그리고 힘의 과시


저는 어떤 고통이 없으면 정말로 편하지 않습니다.

-헤밍웨이가 그의 부모에게


군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전쟁에 관심을 가졌고, 아버지로부터 사냥과 모험을 즐기는 취미를 물려받은 헤밍웨이. 1차 세계대전에서 적군의 박격포 공격을 받아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던 헤밍웨이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전쟁에 매혹되었고 자신의 육체를 위험에 노출시켰다.


직접 경험한 것을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을 덧대어 작품을 집필하는 것이 헤밍웨이가 추구하는 문학의 기본방향이었기에 전쟁은 작가 헤밍웨이에게 가장 매력적인 소재였다. 그러나 작가이기 이전에 헤밍웨이는 본능적으로 전쟁과 위험을 쫓았다. 그것이 자신의 불안과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구였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불안 가운데 정점에 있는, 죽음의 공포가 가장 짙게 드리워지는 사건이다. 때문에 전쟁이 야기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살아있음을 전제로 촉발되는 죽음 이외의 모든 불안을 잠식한다. 전쟁 앞에 선 인간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오로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헤밍웨이에게 전쟁은 평소 자신을 지배하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게다가 헤밍웨이에게는 처음 겪었던 전쟁에서 죽음의 문턱을 밟고 돌아온 경험이 있었다. 전쟁은 헤밍웨이에게 자유를 주었고, 작가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소재를 제공했다.


적십자 운전병으로 참전했던 1차 세계대전을 제외하고 헤밍웨이는 대부분의 전쟁을 특파원 자격으로 경험했다. 그럼에도 헤밍웨이는 전선에 더 가까운 곳, 더욱 위험한 곳에 가기를 원했고 기자이기보다는 스스로 군인인 것처럼 행동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연합군을 동행 취재했던 헤밍웨이는 그가 배속된 소대가 가장 먼저 노르망디를 밟아야 한다고 부추겨 소대장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며 종군 기자는 무기를 휴대할 수 없음에도 총을 들고 직접 독일군 몇을 사살해 물의를 일으켰다. 건물 안에서 포격을 당하는 와중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최대한 몸을 웅크려 몸을 보호하는데 헤밍웨이 혼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펴고 건물 안을 돌아다녀 주변 사람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모하고 객기 어린 행동이었다.


평상시 집에 생활할 때의 헤밍웨이는 술을 입에서 때는 날이 거의 없었다. 과하고 잦은 음주를, 헤밍웨이는 자신의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지만 근본 원인은 그를 괴롭히는 불안에 있었다. 헤밍웨이는 비평에 무관심한 척하면서도 작품을 내놓고 나면 불안한 마음을 술로 달랬다. 그러다 작품에 대한 반응이 다행히 호의적이라는 것을 확인하면, 그제서야 손에서 술을 놓았다. 평시의 헤밍웨이는 지나치게 자주 술을 마셨고, 불안정했으며 때로는 의기소침했다. 그런 그를 그나마 생기 있게 만들어 준 것은 사냥 여행과 낚시, 권투와 같은 육체적인 활동이었다. 투우사들의 목숨을 건 싸움에 매료된 그는 투우에도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평시에도 그는 자신의 육체를 시험하는 운동과 취미를 즐겼고, 때문에 끊임 없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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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전쟁의 현장에서 헤밍웨이는 평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전쟁터에 있을 때 육체와 정신 모두에서 최고의 상태를 유지했다. 술에 절어 괴팍한 성격을 드러냈던 평소 헤밍웨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전쟁은 헤밍웨이의 생명에 위협을 가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제외하면 헤밍웨이에게 전쟁보다 위협적인 것은 평화였다. 육체가 위험에 처하거나 스스로 육체의 한계를 시험할 때, 헤밍웨이는 불안의 사슬을 잠시나마 벗을 수 있었다.


덧붙여 헤밍웨이를 연구했던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헤밍웨이는 자신의 육체를 위험 상황에 내던지고 때로는 

부상으로 고통받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내재되어 있던 죄의식을 조금이나마 덜어냈다. 또한 고통이 없으면 정말로 편하지 않다는 그의 고백을 통해 육체적 고통이 죄의식에 대한 일종의 자가 징벌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가면의 강화 - 맨얼굴과의 긴장이 무너졌을 때


그는 겁먹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피터 위컴

-제프리 메이어스『헤밍웨이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유인 2


전시와 평시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위험을 무릅썼던 헤밍웨이. 그가 일으키고 당한 수많은 사건과 사고는, 자신의 공적을 과장하고 왜곡하는 헤밍웨이 특유의 성격을 만나 점차 전설이 되어갔다. 헤밍웨이의 허세와 허언, 육체적 힘의 과시는 헤밍웨이의 명성에 흠집을 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훌륭한 자기방어 수단이기도 했다.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불안에 휩싸인 헤밍웨이의 내면을 감추는 것과 동시에 그가 쓴 가면을 한층 더 단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헤밍웨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의 맨얼굴과 가면 사이의 긴장과 균형은 점차 한쪽으로 기울어 갔다는 것에 있다. 매우 당연하게도, 헤밍웨이의 육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쇠퇴했다. 그럴수록 헤밍웨이는 자신의 사회적 페르소나를 강화하는 데에 더욱 집착했기에 균형은 더 빠르게 무너져갔다. 자신의 성관계 횟수나 음주량 같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떠벌리기도 하고 숫자를 기억하는 것에 집착하는 전에 없던 버릇이 생겼다. 자신에게 생산적인 비판을 해줄 수 있는 문우들을 이미 다 떠나보낸 헤밍웨이는, 주변을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로 채워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파파라 부르는 것을 진심으로 즐겼고 그들 앞에서 대장 노릇 하는 것을 좋아했다. 사회적 저명인사이자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헤밍웨이는 헐리우드 배우 못지 않은 인기와 관심을 끌었다. 그렇게 헤밍웨이의 허세는 계속해서 커져갔고, 반대로 그의 창작은 갈수록 줄어만 갔다.


말년의 헤밍웨이 - 깨어진 가면


헤밍웨이의 전설은 1954년에 그가 당한 비행기 추락 사고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아프리카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하고도 살아남은 헤밍웨이는 자신의 부고 기사를 생전에 읽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언론은 헤밍웨이가 그 사고로 죽었다고 판단하여 사망 기사를 1면에 실어 내보냈다- 숱한 위험과 전쟁, 사고를 겪고도 살아남은 헤밍웨이는 영영 파괴되지 않을 것 같은 존재로 대중에 각인되었다.


하지만 큰 부상을 입은 헤밍웨이에게 50대 중반의 나이는 더딘 회복 속도와 사고 후유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사고를 당한 그 해 10월, 그는 노벨 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지만 그것이 육체의 쇠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나친 음주가 오히려 가속도를 붙였다. 육체의 쇠락은 헤밍웨이의 가면을 더욱 두껍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선을 넘어서자 헤밍웨이의 맨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꺼운 그 가면은 완전히 깨어져 버렸다.


민낯이 드러난 말년의 헤밍웨이는, 모든 것을 불안해하는 노인이 되었다. 전쟁 중 건물을 스치는 포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쪼그려 있는 사람 사이를 돌아다녔던 그는, 이제 불안에 떨며 자동차 속도를 줄이라고 소리치는 늙은이가 되었다. 육체의 건강이 허물어진 헤밍웨이에게 더 심각한 문제는 그에게 찾아온 정신적 문제였다. 그에게 찾아온 불안 장애. 헤밍웨이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FBI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 (헤밍웨이는 쿠바에서 미국 정부의 지원 아래 일종의 스파이 집단을 조직하여 활동을 벌였는데, 독일 잠수함을 찾아내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이 과정에서 헤밍웨이의 조직은 FBI와 잦은 마찰을 일으켰고, 때문에 헤밍웨이는 말년에도 여전히 FBI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훗날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당시 FBI는 실제로 헤밍웨이의 치료 과정을 면밀히 살피며 감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심각한 신경 쇠약과 피해망상이 헤밍웨이를 괴롭혔다.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헤밍웨이의 정신 치료. 의사들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전기충격요법을 헤밍웨이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뚜렷한 치료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뿐더러, 오히려 기억 장애라는 최악의 부작용을 헤밍웨이에게 남겼다. 1961년 1월에 메이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4월에 다시 재입원 수속을 밟아야 했다. 그리고 평생 동안 그를 불안케 했던 그것, 작가로서의 추락은 가장 극단적인 모습으로 헤밍웨이에게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1961년 6월 30일. 헤밍웨이는 자신이 많이 회복되었음을 주장하며 그를 지켜보는 의사를 속이고 퇴원해 집으로 돌아온다. 이틀 뒤 7월 2일. 엽총을 입에 문 헤밍웨이는 방아쇠를 당겼다. 포탄과 비행기 추락도 파괴할 수 없었던 헤밍웨이의 육체는 그렇게 스스로에 의해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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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헤밍웨이


헤밍웨이의 찌질함과 그의 문학


헤밍웨이의 찌질함. 그것은 결국 불안에 몸서리치는 그의 맨얼굴과 그가 쓰고자 했던 가면 사이의 거리로 설명할 수 있겠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용기 있어 보였던 헤밍웨이가 상실의 불안에 고통스러워 하고,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모습은 찌질하다. 더 간단히 말해 이중적인 그의 모습이 찌질한 것이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몸이 박격포탄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쓰러진 이탈리아 병사를 부축하는 용기와 전처의 죽음을 아들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비겁함을 동시에 보여줬다. 죽음의 위험 앞에 누구보다 의연했지만 외로움은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그 찌질함 덕분에 그의 문학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헤밍웨이의 이중성과 모순은 비록 찌질하지만 한편으로 내면의 범주가 그만큼 넓다는 이야기 또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범주가 넓다는 것은 곧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의 폭이 넓다는 것이다. 그가 남긴 명작들은 대부분 전쟁을 소재로 쓰여졌다. 헤밍웨이는 그의 소설에서 전쟁을 무대로 인간이 느끼는 극도의 불안과 상처, 사랑과 상실 등을 덤덤한 문체로 묘사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만약 헤밍웨이에게 이와 같은 찌질함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그가 남긴 작품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인간의 각자 본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전쟁을 마주한 인간은 가장 비겁하고 잔인해지기도 하지만 가장 고결한 용기와 헌신을 보여주기도 한다. 문학의 본질은 실재하는 인간의 삶과 본성을 투영하는 것이기에 헤밍웨이의 이중성과 모순이 적어도 문학적으로는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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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항상' 영혼을 잠식하는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파스빈더 감독의 동명 영화에서 따온 이 말은 증폭된 불안이 인간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한편으로 이렇게 되묻고 싶다. 모든 불안은 부정적인가? 불안은 반드시 지워야 하는 가치인가? 불안은 인간에게 항상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작용하는가?


필자가 헤밍웨이 편의 서론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거의 모든 불안은 근본적으로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취업 준비생이 취직이 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 불안의 본질은 '취직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태가 야기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존재감 상실, 안정된 수입의 결여로 발생하는 경제력 상실과 자존감의 상실이 취업 준비생이 가지고 있는 불안의 본질인 것이다.


불안의 본질이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면, 불안해하는 우리는 이미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무엇, 잃을까 두려워하는 그 무엇이 영원하지 않고 '유한'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기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언젠가는 나를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안할 수 있다. 불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들의 유한성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진짜 찌질한 것은 무엇이든 그게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내 목숨이 영원할 것 같고, 내가 가진 권력이나 돈이 영원히 나에게 머물 것 같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가장 거대한 찌질함의 가능성이 열린다. 때문에, 불안이 반드시 영혼을 잠식하는 것도 아니고, 불안이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도 아니며, 반드시 지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불안에 대처하는 자세에 따라 우리는 더 찌질해질 수도, 덜 찌질해질 수도 있다. 불안이 우리의 영혼을 잠식할 수도 있지만, 불안이라는 계단 없이는 우리가 더 나은 곳으로 올라갈 수도 없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영원한 것은 없기때문에 우리는 불안하지만, 덕분에 우리가 희망을 가져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찌질한 위인전, 헤밍웨이 편은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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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평전에 수록된 그의 사고, 질병 기록.

'드롭킥을 하다가 발로 거울을 참'

기록에 드러난 것으로만 헤밍웨이는 총 스물아홉 차례 부상을 당했다.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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