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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12. 금요일

벨테브레











연휴가 끝나 허탈한 가슴에 담뱃값 2천 원 인상이라는 충격적인 소식까지 겹쳐 애연가들의 빡침을 유발했던 어제 911. 예상은 했지만 받고 보니 더 황당한 판결 하나가 금연 7년 차인 필자에게도 담배 사재기를 고민하게 만들었으니,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의 1심 판결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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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 공직선거법과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던 그는, 7월에는 개인비리 혐의로 구속되는 연타석 홈런을 맞으며 두 가지 재판을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더 놀라운 건 뒤늦게 기소된 개인비리 혐의에 대해선 이미 대법원에서 3심이 계속 중인 가운데 2심에서 선고된 잠정 형기인 징역 12월을 모두 복역하여 사실상 만기 출소한 다음이라는 것. 반면에 먼저 기소된 대선개입 의혹 사건은 13개월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1심 재판이 끝났으니, 역전당한 것도 모자라 진도가 한참 벌어진 셈이다. 보아하니 대법원까지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과연 현 정부 임기 안에 마무리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과는 다들 아는 바와 같이 공선법 위반은 무죄, 국정원법 위반은 유죄로 징역 26월에 집행유예 4년이라는 무죄인 듯 무죄 아닌 무죄 같은 유죄 판결. 대선 당시 그리고 작년 내내 정국을 떠들썩하게 들었다 놨다 했던 핵폭탄급 이슈였던 걸 생각해보면, 그 최고 책임자에 대한 결론치고는 조금 시시한 느낌이랄까. 실제로 댓글을 다는 등 대선 정국에 참전했던 국정원 직원 대다수가 상관의 지시에 복종한 것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등 선처를 받은 걸 생각해 보면 끝판왕 대접이 영 시원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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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필자는 약 50일 전인 722일경에 이미 원세훈이 최소한 법정구속을 당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촉이 왔다. 이날 개인비리 사건 2심 판결에서 징역 12월이 선고되는 바람에 원세훈은 99일 자정을 기해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선개입 의혹 사건의 1심 판결이 911일에 선고된다는 걸 알고 있던 재판부에서, 12월이라는 자주 보기 힘든 형량(1년 이상의 징역형은 6개월 단위로 맞추는 것이 일반적)을 맞추어 하필이면 선고 이틀 전에 석방되도록 배려(?)한 것이다. 대한민국 법원이 아무리 야박하더라도 감옥에서 나온 지 이틀 된 사람에게 다시 콩밥을 먹이는 건 가혹한 일일 것이기에, 이 판결은 대선개입 의혹 사건이 재판부에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공선법 위반이 유죄가 될 경우 무려 국가기관의 조직적 대선개입을 사주한 최종 보스가 되는 원세훈에게 집행유예란 불가한 일. 물론 집행유예 없는 징역형을 선고하더라도 방어권 보장 등의 이유를 들어 법정구속을 하지 않으면 된다. (오히려 구속할 경우 최대 6개월인 구속기간 내에 항소심 재판을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ㄷㄷㄷ) 그러나 그보다는 역시 무죄판결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만일 법원에서 국정원 차원의 조직적 대선개입을 인정한다면 지난 대선은 물론 그 결과로 출범한 정부의 정통성에까지 흠집이 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이 지적한 바와 같다. 정부·여당이 이 사건의 쟁점화를 어떻게든 막으려 한 것이나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공직선거법 적용을 한사코 반대했던 점 또한 이 같은 이유를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2년 가까이 지난 이 시점에서 대선을 무효화하는 건 현실적으로나 법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뒤늦게나마 '태생부터 관권선거로 출범한 정부' 딱지를 붙이는 건 법원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웠을 게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들이 대선 기간에 트윗을 날리거나 댓글을 다는 방법으로 대선 정국에 참전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로 드러났기에, 이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감정에 반하는 일. 그리하여 '정치에는 개입했지만, 선거운동을 한 것은 아니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형사판결은 아니지만, 이 논리가 적용된 유명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헌법재판소에서 행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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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2004218일, 경인지역 6개 언론사와의 기자회견에서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저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 고 발언하였고, 6일 뒤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대통령 기자회견에서는 "국민들이 (열린우리당을압도적으로 지지해 주실 것으로 기대한다.",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에 표를 줄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정말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 "대통령을 노무현 뽑았으면 나머지 4년 일 제대로 하게 해 줄 거냐 아니면 흔들어서 못 견뎌서 내려오게 할 거느냐는 선택을 우리 국민들이 분명히 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 및 선거운동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다른 여러 이유와 함께) 탄핵소추를 당하였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위와 같은 대통령의 발언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에는 위반된 것이나, 선거운동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취지로 판시하였다. 특정 후보의 당선 또는 낙선에 대한 '목적성'이나 '능동성', '계획성'을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선거운동은 아니라는 것.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원세훈 판결과 매우 비슷한 구조이다. 선거운동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목적성, 능동성, 계획성을 든 것도 유사한 대목. 모르긴 몰라도 결론을 내리고 논리를 구성하는데 헌재 결정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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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원세훈 판결에 헌재의 결정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는지 다소 의문이다. 헌재는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운동에 대한 목적성을 부정하면서, '발언 당시 후보가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반면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는 선거운동 기간 한참 전인 820일 확정되었고, 솔직히 그전에도 누가 될지 뻔히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다. 국정원의 트윗이나 게시물들이 거의 일관되게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야권 계열의 후보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누굴 당선시키고 누굴 떨어뜨려야 할지에 대한 목적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이 사건 재판부는 통상의 선거운동과 달리 선거에 임박해서 게시물들이 줄어들었다는 점 또한 목적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요소로 보았다. 사건이 이슈화된 이후 벌어졌던 필사적인 증거인멸을 감안하면 게시물이 줄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거니와, 경선과정을 포함 사실상 1년 내내 이루어졌던 대선정국을 생각해보면 선거 직전 얼마간의 게시물 수가 줄었다는 점만으로 목적성이 없었다고 하는 건, 먼저 결론을 내고 나중에 논리를 끌어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대목. 20124월에는 총선도 있었으니 상당수의 댓글과 트윗은 이에 대한 선거운동으로 볼 여지도 있었는데(다만 이를 처벌하려면 공소장변경 등 검찰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 막연히 목적성이 없었다고 평가한 것은 국정원법 유죄, 공선법 무죄라는 절묘한 결론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능동성이나 계획성이라는 측면에서도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형태를 띤 노무현 대통령과 심리전의 일환으로 요원들을 추려 공작을 펼친 국정원의 행태를 동일하게 보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양형 이유에서 관행이나 북한의 위협 등을 거론하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는 인상을 주려 했던 것 같다. 이 얼마나 구차한 일인가. 졸지에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상당수 활동은 본의 아니게 북괴의 심리전에 놀아나는 행태로 전락해 버렸고, 우리의 엘리트 정보요원들은 음지에서 댓글을 달며 국민들을 상대로 여론을 형성하는 관행 어린 심리전을 통해 북괴에 맞서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번 판결은 다수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정치 관련 글을 쓰는 바람에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던 많은 네티즌과의 형평에도 맞지 않는다. 필자의 지인 한 명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번 선거는 현 정권에 대한 심판'이라는 취지의 댓글 몇 개를 달았다가 공선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는데, 그 당시 선거운동에 대한 목적성이나 능동성, 계획성 등을 위와 같이 엄격히 따졌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 이런 식으로 기소되어 억울한 전과자가 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현재 진행 중이거나 향후 예상되는 다른 재판에서만큼은 일관성을 지키는 사법부의 모습 기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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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번 판결은 모두를 만족하게 하려 했지만 아무도 만족하게 할 수 없었던 결과요, 결론을 위해 법리를 희생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드는 판결이었다. 아마도 검찰과 피고인 모두가 항소할 테고 2심은 물론 3심에서까지 다시금 치열한 법리 공방이 벌어지겠지만, 현재까지의 상황만으로는 1심의 결론이 크게 바뀔 것 같지 않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선법 유죄나 국정원법 무죄를 인정했을 때의 만만치 않은 후폭풍 탓도 있겠지만, 필사적으로 방어하고 있는 원세훈 측과 달리 공소유지에 이렇다 할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검찰의 힘으로 사건을 뒤집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짧은 공소시효에 쫓겨 부랴부랴 기소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뒤 많은 압력과 외풍 속에도, 세 차례나 공소장을 변경하는 등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일선 검사들의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소장변경을 통해 댓글과 트위터의 개수를 늘리기보다는, 치열한 법정공방을 통해 직원들의 사이버 활동이 궁극적으로 원세훈의 지시에서 비롯되었고 그러한 지시나 활동이 선거에 영향을 주리라는 점을 원세훈 또한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다 명확히 입증했더라면 어제와 같은 찜찜한 판결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망상을 해본다.

 

(항소심에서 검사들의 분발을 촉구! 하려 했으나 이 사건을 건드렸던 이들의 후일담을 떠올려보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가장 먼저 표창원 박사. 그는 이 사건 초기 경찰의 수사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정치적 중립이 훼손될 수 있다며 잘나가던 경찰대 교수직을 때려치웠다. 한때 '표창원의 시사돌직구' 등 방송 진출을 꾀하던 그는 요사이 '김어준의 파파이스' 전화 패널로 등장하거나 본지의 강력한 라이벌인 '맥심코리아'와 인터뷰를 하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조만간 본지의 필진으로 합류하거나 딴지라디오 팟캐스트를 진행하게 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표창원이 자리를 걸고 비판했을 만큼 문제가 많았던 경찰 수사. 그 담당자였던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은 수사 도중 송파경찰서로 전보되었고, 이후 수사 과정에서 김용판 서울지방경찰청장의 외압이 있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다. 김용판은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2심까지 무죄를 선고받았고 현재 대법원에서 3심이 진행 중이다. (공교롭게도 김용판의 1심 재판장 또한 이번 사건을 담당한 이범균 부장판사) 권은희는 경찰을 그만두었고 우여곡절 끝에 새정치민주연합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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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검찰로 송치된 후에도 파란만장했으니, 공직선거법 적용을 두고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갈등을 빚던 채동욱 검찰총장이 사생활 이유로 낙마했던 것. 이후 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여주 지청장은 국회에서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의 압력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다가 대구고검으로 좌천되고 정직 1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조영곤 또한 눈물을 흘리며 옷을 벗어야 했고.

 

한편 이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천막 농성을 벌이던 김한길 당시 민주당 대표는 한명의 국회의원으로, 원세훈의 후임 국정원장으로 취임한 뒤 직원들을 옹호하던 남재준은 야인으로 돌아간 상황. (보다시피 잘된 사람도 그대로인 사람도 없진 않으나 좋게 된 사람이 더 많이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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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기분 탓이다.

 


이 저주받은 사건을 '정치개입은 맞지만, 선거개입은 아니었다'는 묘한 논리로 비껴가려 한 이범균 부장판사에 대한 분노로 글을 마무리 지으려던 순간그분의 깊은 뜻을 뒤늦게 깨닫고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범균 부장판사에게 있어 그 많은 댓글과 트위터를 통해 특정 정치인과 정당을 찬양하고 반대 세력을 비난하던 모든 것들이 선거개입이 아닐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마음속에서 20121219일 치러진 18대 대통령선거를 무효로 보기 때문인 것이다! 선거로 인정할 수 없으니 선거운동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 역시 당연한 귀결. 아울러 그 선거에서 당선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음도 피할 수 없는 결론이라 하겠다.



그런 점에서 이범균 부장판사는 원세훈에 대한 무죄판결을 통해 은연중 대선에 불복하는 속내를 드러낸 깨어있는 시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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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나타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