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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16. 화요일

trexx











1. 상품 소비의 중심

 

9 월 9일 이벤트 후 9월 12일 팀쿡은 Charlie Rose Show에서 

아직까지 TV는 70년대에 머물러 있다고 했다. 하필이면 왜 70년대 일까?




미국인들이 한때는 부자들의 권력과 영향력에 맞서 싸웠고 중산층 천국을 실현했다.


'부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 샘 피지게티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미국이 최강국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뉴딜정책* 이후 두터워진 중산층이 있었기 때문이다.



* 뉴딜 New Deal 정책


1929년 뉴욕 주식시장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추진하였던 제반 정책. 국가 경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정책을 추진한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연설에서 사용한 용에 뉴딜 New Deal에서 유래되었다.


'뉴딜정책의 핵심은 MB가 이룩한 4대강과 같은 토목사업이 아니라 부자 증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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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백투터 퓨처(1985년 작)에서 1950년대 중산층을 묘사하면서 거실에 있는 TV를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구매하여 보급된 대표적인 가전 제품이 TV다. 소리에 머물렀던 기존의 Radio 광고에서 상품을 눈으로 확인 시켜주는 TV광고로 인하여 중산층의 소비는 치솟게 되지 않았나 싶다. 1950년대 이후 미국은 시장경제 생산 및 소비의 중심이 중산층이 된 것이다. 경제 중심이 중산층 가정으로 들어오자 미국 문화의 중심 또한 중산층에서 시작하게 된다. (미국 문화의 시작이 차고(Garage)에서 부터 시작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맥OS 에서 제공하는 디지털오디오워크스테이션의 이름도 개러지 밴드(Garage Band)다. )


가정용 컴퓨터 시장을 가전제품 시장으로 완벽히 이해한 동갑내기 두 사람이 50년대 태어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바로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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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용 컴퓨터의 시작을 알린 MITS사의 Altair 8800





2. 가정용 컴퓨터의 시작

 

 

1977년 6월 10일 가정용 컴퓨터로 발표한 <Apple II>는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과 '히피' 스티브 잡스의 합작품이다. 물론 보드 설계와 구동 소프트웨어 일체를 스티브 워즈니악이 전적으로 만들었다. 잡스는 워즈니악이 만든 제품에 편승하여 이익만 취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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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워즈니악(좌)과 스티브 잡스(우)가 절친이던 바로 그 때.



당시 시장에 먼저 나와있는 가정용 컴퓨터는 <Apple II>가 아니였다. MITS사의 <Altair 8800>는 사용자가 직접 조립 해서 만드는 제품이었지만 1974년에 <Apple II>보다 먼저 나와 있었다. <Altair 8800>은 지금처럼 모니터와 키보드를 사용하는 제품이 아니었다. 본체 앞면에 On-Off 토글스위치와 표시등으로 입출력하도록 만들어진 장비였다. 가정용 컴퓨터라기 보단 인텔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장착한 공학용 장난감에 가까웠다. (MicroSoft의 빌 게이츠는 본 제품으로 BASIC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3. 워즈니악, TV와의 인연



2007 년 키노트에서 화면이 에러가 나서 멈추자 잡스는 워즈니악이 만든 

TV 전파 방해기로 대학교 기숙사 학생들에게 장난친 이야기를 했다.(31초부터)



워즈니악은 자서전에서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 : 1975년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어진 초기 컴퓨터 취미 생활자 클럽)에 참석하게 된 동기가 마이크로프로세서 등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친구 알렌이 “내가 HP에서 모임 하나를 알게 됐는데, 텔레비전과 비디오 단말기 같은 걸 만드는 사람들의 모임이야" 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워즈니악은 대학생 때 기숙사 학생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TV-Jammer(방해 전파기)를 만들었고, HP에서 근무하면서 비디오 단말기(VCR)에 대한 작업, 잡스의 꼬드김으로 아타리(Atari)에서 아르바이트로 TV 콘솔게임을 만든 경험이 있었기에 홈브루 모임에 자연스럽게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컴퓨터의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고, HP(당시 워즈가 다녔던 회사)의 계산기 업무에 온통 빠져있었다. 그러니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깜깜한 상태였다.

 

그러나 TV 단말기에 관한 모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래, 이런 자리라면 내가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떨렸지만 나는 그 모임에 나갔다. 어떻게 됐을까? 모임에 가기로 한 나의 결정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날 밤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밤 가운데 하나였다.


'iWoz (2장 괴짜 엔지니어의 천재적인 프로젝트) - 스티브 워즈니악 & 지나 스미스





*마이크로프로세서


2689703438.jpg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보통 CPU라고 통용되기도 한다. CPU가 칩에 달려있는 경우가 마이크로프로세서이다. 1971년 인텔의 엔지니어 테드 호프에 의해 발명된 제품이다. 테드 호프는 Busicom사로부터 복잡한 계산이 가능한 전자계산기 회로설계를 의뢰받게 되는데 당시 칩은 On-Off 스위치기능만 있었기에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테드 호프는 컴퓨터에 저장된 명령을 확인하고 수행 하는 즉, 두뇌 역할을 수행하는 칩을 처음으로 만든 것이다.






4. APPLE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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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I>은 케이스에 밀봉된 완제품이 아니었따. 두 스티브(잡스와 워즈니악)은 기판만 팔았다.



워즈니악이 홈브루 모임에 참석한 이후 표시등과 스위치로 작동되는 알테어에 머물러 있었던 가정용 컴퓨터는 TV 모니터와 키보드로 작동하는 지금의 PC의 원형*인 <Apple I>으로 탈바꿈하였다. 워즈니악은 홈브루 회원들에게 <Apple I> 설계도면을 공유**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설계한 제품을 직접 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홈브루 회원들은 시간도 없고 능력도 안된다며 만들기 어렵다고 했다. 워즈니악의 기판보다 홈브루 회원들은 Altair에 관심이 더 많았다.




*1973년에 프로토타입 컴퓨터인 IBM SCAMP(Special Computer APL Machine Portable)이 있었다. 카세트 테잎 드라이버, CRT 모니터, 키보드 등을 갖춘 최초의 가정용 컴퓨터라고 하지만 프로토타입으로 판매제품은 아니었다. 그 프로토타입을 모델로 하여 나온 제품이 IBM 5100이었는데, 2만불이나 되는(탑재프로그램 사양에 따라 $8,975 ~ $19,975까지) 전문적용도의 컴퓨터였지 가정용 컴퓨터는 아니었다.(이어질 하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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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만불 짜리 IBM 5100


**워즈니악의 <Apple I>의 설계도면 공개로 <Commodore PET>과 <Radio-Shack TRS-80> 또한 모니터와 키보드를 장착한 제품을 1977년에 발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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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dore PET (좌) / Radio-Shack TRS-80 (우)




이를 상품으로 바라본 20살의 잡스는 홈브루 회원들에게 20달러에 만들어 40달러에 팔겠다고 제안하게 된다. 두 스티브는 홈브루 회원에게 50대 정도 팔 것으로 판단하고 워즈니악은 자신이 아끼던 HP65 계산기를 팔고 잡스는 폭스바겐 밴을 팔아 1,000달러를 마련하였다. 자본금 1,000달러로 애플사를 설립한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잡스는 바이트 숍 컴퓨터 매장 주인 폴 테럴에게 100대에 5만불 계약을 따낸 것이다. 대당 40달러에서 500달러 제품(판매 가격 666.66달러)이 되었던 것이다.





5. APPLE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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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TV에 연결한 <Apple II>



홈브루 모임에서 스티브 워즈니악은 <Apple I>을 선보였다. 그러나 당시 <Apple I>은 케이스 없이 사용자가 조립해서 만드는 <Altair> 같이 전자장비 취미가의 제품이었다. 일반 사용자에게 팔려고 만든 제품이 아니었다.


워즈니악은 개인적인 기술 경험과 지식으로 집안의 TV를 출력 장치로 선택하였던 반면 스티브 잡스는 TV에 연결되는 <Apple I>을 바라보면서 워즈니악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워즈니악은 엔지니어 장비로 잡스는 TV와 같은 가전 상품으로서 <Apple I>을 바라봤다. 이 둘의 극명한 차이가 정식으로 <Apple II>를 발표할 때가 되어서는 환상적인 콜라보가 된 것이다.




잡스는 메이시스 백화점의 가전제품 통로를 거닐다가 쿠진아트 브랜드의 믹서를 보고 ‘이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미끈한 케이스를 만들기로 했다.

 

'스티브 잡스 (Apple II: 최초의 통합 패키지형 컴퓨터)' - 월터 아이작슨




잡스는 홈브루 지역 컨설턴트인 제리 매넉에게 1500달러로 흥정하여 케이스 디자인을 부탁하였다. (워즈니악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프라스틱 케이스로 하자고 제안했다고 하지만 여러 정황상 잡스가 한 것이 맞는 것 같다.) 잡스가 프라스틱 케이스를 베이지색으로 결정한 이유는 세탁기, 냉장고 등 가정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의 기본색이 베이지 계통의 색이였기 때문이다.(베이지색 케이스 전통을 만들고 가차없이 버린 사람 또한 <iMac> 제작을 진두 지휘했던 스티브 잡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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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지 컬러를 버리고 애플의 부활을 알린 <iMac>



잡스는 1977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제1회 서부 연안 컴퓨터 박람회에 <Apple II>를 완제품으로 전시하였다. 잡스는 Apple II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게 될지 세세하게 체크하며 케이스에 있는 얼룩을 제거하기 위해 직원들을 시켜 사포로 닦았다. 또한 가정에서 조용히 사용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하여 아타리 알 아콘의 소개로 로드 홀트라는 엔지니어를 애플로 데려와 팬이 필요없는 스위치식 전원 공급장치를 개발, 장착했다.


워즈니악은 경쟁 제품과 차별하기 위하여 <Apple II>의 기술적인 부분에 매달렸다.




Apple-II-Review-Fall-1985-cover.jpg  <Apple II>의 사양


 1. 메모리는 최대 48kb(경쟁사들은 4kb, 8kb)

 2. 칼라TV와 연결하여 색을 구현(280 x 192 (6 색) 혹은 40 x 48 (16 색)) 

     하여 베이직(BASIC)으로 짠 그래픽 게임을 선보임

     (경쟁자는 그래픽 기능이 없음)

 3. 슬롯은 8개, 오디오 스피커, 게임 포트 등

 4. 데이터를 보다 빠르게 전송하기 위하여 최초로 플로피 디스크 도입

     (1978년 / 경쟁자는 카세트 테이프 사용)





두 스티브의 노력으로 외관 및 기술적으로 모두 당시 경쟁사(TRS-80, Commodore PET 등) 보다 기술적으로 월등한 제품을 만들었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한 절대적인 공로자는 투자자 마이크 마쿨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쿨라는 애플에 투자하면서 컴퓨터 시대를 도래할 것으로 예언했다. 애플이 2년안에 포춘이 선정한 500대 기업 안에 들어갈 장담하면서 말이다.





6. 완전한 실패작 APPLE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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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제품 <Apple III>



애플의 <Apple II>의 성공은 기술적으로 하드웨어 개방과 소프트웨어 확산에 있었다. 본체에 8개의 슬롯을 장착하여 많은 주변기기를 만드는 하드웨어 기업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그래픽 지원으로 게임 등 소프트웨어 시장이 활성화 되었다. 지금의 서드파티 개념이 <Apple II>로 확립되었다.

 

또한 <Apple II>는 1979년 역사적인 프로그램 VisiCalc 등장으로 가정뿐 아니라 사무실에서 업무용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컴퓨터는 비로소 공학도가 쓰는 전문 장비가 아니라 가정에서 아이들이 게임을 할 수 있는 친근한 기기이자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업무용 기기가 되었다. <Apple II>로 인하여 게임 컨텐츠 및 소프트웨어 소비가 활성화 된 것이다. <Apple II> 판매량은 1977년도 2500대에서 1981년 21만대로 껑충 뛰었다. <Apple II>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성공했던 것일까? 애플사는 순식간에 대기업이 되어 관료화 되고 있었다. 애플사가 무너진 건 초 거대기업 IBM이 PC로 가정용 컴퓨터시장에 진입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일면 맞는 말이지만 대기업이 된 애플사 내부에 이미 어두워진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IBM PC가 나오기 1년 전 1980년 5월 애플은 차기작인 <Apple III>를 내놓았다. 가정용으로 <Apple II>를 사무실용으로 <Apple III>를 내세워 마케팅 하였다.(이원화 전략은 멍청한 마케팅이다.) 워즈니악에 따르면 <Apple III>는 스펙은 <Apple II>에 비해 높게 출시 되었지만 엔지니어 제품이 아닌 마케팅 부서 제품이라 혹평했다. <Apple III>는 스위치를 통하여 <Apple III>와 <Apple II> 모드를 변경하여 부팅하게 만든 제품이었다. 그 말은 <Apple III>와 <Apple II>의 프로그램이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Apple III>에서 <Apple II> 호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하드웨어 성능을 낮추어 <Apple II> 모드로 사용하여야 했다. 이는 <Apple II>가 양산되고 있었기에 <Apple III> 판매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았다. <Apple II>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해 더 비싼 <Apple III>를 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Apple III>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치명적인 하드웨어 결함인데 시스템은 불안정하여 멈추기 일쑤였고 부팅 마저 한번에 성공하지 못했다.


잡스 또한 <Apple III>의 실패를 거들었다. <Apple III>에서 소음의 원인인 팬 자체를 아예 없애버린 것과 확장 슬롯을 2개로 제한해 버린 것이다. 회로기판에 더 많은 부품이 들어가는 상황에서 잡스는 자신이 정한 크기와 형태의 케이스를 절대 바꾸지 못하게 한 결과였다.


잡스는 <Apple II>가 성공한 것이 기술보다는 가전제품으로 포장한 자신의 능력이라 자만했던 것이다. 하드웨어 기술을 무시한 처사였다. 여하튼 애플 내부 부서 간 갈등이 심화된 결정판이 <Apple III> 였다.


가정용 컴퓨터가 가전제품이 될 것이라 본능적으로 알고 공학도들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곳에서 상품 가치를 찾았던 스티브 잡스는 20대 초반에 너무 이른 성공을 했다. 그의 주변에서 그의 능력을 인정하자 그는 자신이 이룬 업적에만 치중하였고 그것이 독이 되어 수년동안 그 대가를 지불했어야 했다. 그의 성공이 운이 아니라는 것을 20년이 지난 다음에야 증명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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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편 IBM PC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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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