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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17. 수요일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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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북침이냐 남침이냐는 질문 자체는 의미가 없다. 그 질문에 '여러 가지 설이 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통진당 이정희 대표는 그녀 스스로의 무식을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엎어치든 메치든 1950년 6월 25일의 전면전은 북한의 기습에 의해 시작된 게 맞다. 그리고 그 전쟁은 3년을 끌면서 수백만의 한국인의 목숨과 수십만의 외국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모든 사태에서는 항상 그렇듯 초동대응이 대단히 중요하다. 사태 초반의 게으름이나 판단착오가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는 세계사가 증명한다.


6.25의 시작은 흔히들 반공웅변대회에 등장하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로 알고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이미 새벽 3시에 인민군은 오늘날 고현정 소나무가 서 있는 정동진에 기습 상륙해서 한국군 8사단의 허리를 자르려 들었고 개성 지역의 포격은 4시 45분쯤 시작됐다. 육본 정보과장 김종필 중위(우리가 아는 그 이름 맞다)는 4시 30분쯤 포탄이 막 떨어진다는 7사단 일직 장교의 보고에 눈이 번쩍 뜨이고 있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국군 수뇌부는 뭘 하고 있었던가. 우선 코끼리라는 별명을 지닌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전날 육군 장교 클럽 오픈을 기념한 미군 군사고문단과의 술자리에 지쳐 자고 있었다. 새벽 2시를 넘어 귀가했으니 아마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 정보과장 김종필은 정보국 장교들을 호출하는 한편 작전국으로 달려갔다. “당장 비상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작전국 일직 사령의 답은 완강했다. “저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권한이야 총장에 있었다. 이미 총장 집에는 득달 같은 전화가 걸려 와 있었다.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의 전화였다. 새벽 5시 10분쯤. '화천 지구에 적 공격!'을 알리는 다급한 목소리에 부관은 총장의 부인을 깨웠고 부인은 총장을 깨웠지만 술 취한 총장은 "어차피 38선에서 노상 있는 분쟁일 거이야.” 하면서 꿈 속을 헤매고 있었다. 전화를 수없이 돌려도 총장이 나타나지 않자 육본의 장교가 직접 발바닥에 불이 나게 달려왔고 그제야 채병덕은 꿈나라에서 벗어나게 된다. “뎐군 비상하라우.” 평안도 억양의 총장 명령이 떨어졌지만 비상은 쉽게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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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


작전국장은 장창국 대령. 그런데 이사 간 지 얼마 안 된 그의 집에는 전화가 없어서 연락이 닿지를 않았다. 애가 탄 헌병 백차가 출동해서 장창국 대령의 집 근처로 추정되는 곳에서 사이렌을 울리며 방송을 해 댔다. “장창국 작전국장님 비상입니다. 비상입니다.” 채병덕 참모총장도 이제는 서둘러 국방 장관 신성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은 건 국방장관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 “당관님 당장 바꾸라우.” 그때 신동우 중령이 한 말은 길이 역사에 남는다.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도 않고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이 영국 신사 국방장관을 만나기 위해 그 황망한 시간, 다급한 순간에 코끼리 채병덕은 쿵쾅거리며 달려가야 했다. 그가 신성모에게 상황을 보고한 건 3시간이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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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모


그래도 준비가 돼 있었던 동부전선의 6사단과 8사단은 인민군의 공격에 대응했지만 서부전선은 쉽게 붕괴됐다. 분단 이후 끊겼던 경의선을 몰래 이은(이 부분에선 논란이 있지만) 인민군은 세상에 기차를 타고 개성역에 내려서 개성을 장악해 갔다. 이때 인민군에 넘어간 개성은 지금도 우리 땅이 아니다.


국군이 인민군의 전면남침을 제대로 파악한 건 9시 경, 남침이 시작된 지 대략 5시간이 지난 뒤였다. 38선 전역에서 공격이 시작됐고 북한 공군기도 서울 상공에 나타나고 개성이 벌써 적의 손에 넘어갔지만 전면전이라는 걸 파악한 건 그만큼 늦었다. 당연히 대응도 늦었고 그 지연의 댓가는 국군이 치러야 했다.


작전국장 장창국은 아침에 아내와 함께 찬거리를 사러 갔다 돌아와서는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었다. 하도 헌병들이 사이렌을 울려서 무슨 일인가 나가보니 자신을 찾고 있었다, 기절초풍하여 그 짚차에 몸을 싣고 내달려 육본에 도착한 게 10시. 인민군이 공격을 시작한 지 7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비슷한 시간 신성모 국방장관은 경무대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침 잠 없는 늙은이 이승만은 자리에 없었다. “경회루에 낚시 가셨습니다” 다시 경복궁으로 뛰어들어가서 보고한 게 10시 3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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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첫날 7시간은 그렇게 한심하게 지나갔다.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데만 7시간이 걸렸다. 이 날을 복기해야 하는 이유는 다시 그런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전화가 빗발쳐도 별 거 아니라며 코를 골았던 육군 참모총장의 실수가 그렇고, 핫라인 하나 없는 작전국장의 처지가 그렇고, 일요일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는 최악의 영국 신사 신성모는 그 하이라이트였다. 누구도 책임지는 이가 없고 누구도 정리하는 이도 없이 작전국장님, 참모총장님, 국방장관님만 부르짖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한국군은 바야흐로 몰락하고 있었다.


그나마 우리는 지금 그 7시간이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알고, 누가 어떤 삽질을 했는지 대충 알고 있다. 그 사실들이 끊임없이 복기되고 추정되고 스토리의 일부가 되어야 반성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만약 채병덕 총장이 어디서 뭐하고 있었는지가 비밀로 남아 있다면, 신성모의 행적이 안개에 싸여 있다면, 그 둘이 그저 단단한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면, 국으로 "니들을 몰라도 돼" 이러고 있다면 그 미스테리 하에서 누가 누굴 믿을 수 있을 것이며 과연 우리 군은 무슨 교훈을 얻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이 궁금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연애를 하고 누군가를 만났다는 식의 이야기는 믿지 않는다. 7시간 동안 무슨 음모를 꾸며 세월호를 수장시켰다는 주장에도 반대한다. 결국 궁금한 건 대통령으로서 수백 명이 갇혀 있는 배의 침몰 소식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냐일 뿐이다. 어떤 보고를 받고 무슨 지시를 내렸고 어느 정도로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는지가 미치도록 궁금한 것이다. 하물며 세월호가 뒤집힌 그날은 일요일도 토요일도 아닌 수요일이었는데, 신성모처럼 일요일 핑계도 대기 어려운 상황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7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다. 6.25 때 7시간은 고려의 옛 고도였던 개성을 순식간에 내주는 시간이었다. 갈팡질팡 오락가락의 최고봉을 달리며 수뇌부 스스로 사람들을 헛갈리게 한 시간이었다. 하물며 평일 오전 대통령의 시간에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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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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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