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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19. 금요일

벨테브레









들어가며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각종 세금들이 들썩이고 있다. 담뱃값 2,000원 인상에 이어 주민세, 자동차세까지 큰 폭으로 올린다고 하는 걸 보면 정부가 돈이 없긴 한 모양. 미개한 국민들의 니즈에 맞추어 증세 없는 복지를 공약했지만 야당 후보의 지적에 '그래서 제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거 아닙니까'라는 사자후를 토했던 박 여사. 대통령이 된 후에도 그분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썩어빠진 관피아들이 은근슬쩍 증세안을 들이밀자 '원점에서 재검토'하라며 약속을 지키려는 으리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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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집권 2년차부터 심상치 않은 모습들이 연출된다. 한때 공천도 못 받고 떠돌던 쩌리 김무성이 '국민들이 공약에 속아 대통령 찍은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언급하더니, 세월호 침몰사고로 인해 예정에 없던 막대한 비용까지 지출되게 생긴 것이다. 유병언 일가의 재산을 추징해 한몫 잡아보려던 일말의 희망마저, 유병언의 시체와 함께 만만치 않은 상황에 묻혀버렸다. 결국 시체를 발견한 어르신에게 현상금 대신 감사장을 수여하는 구차한 촌극을 연출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정부가 돈이 없기 때문일 게다.

 

거기에 선거를 통해 새로이 구성된 지방정부에서는 이런저런 공약들도 했겠다, 일 좀 하게 돈 달라고 아우성이다. 심지어 재보선에서는 예산 폭탄을 공약한 대통령의 실세 측근까지 당선되는 바람에 여느 때보다 돈 쓸 일이 풍성한 2014년, 우리 정부가 만수르도 아니고 언제까지 퍼주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지방세와 간접세를 중심으로 슬금슬금 세금을 올리기 위해 간 보는 모습들이 포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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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보기 조기 교육 중인 만수르

 

조세법률주의의 원칙상 세금을 올리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법률을 제. 개정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세월호 진상규명법을 둘러싼 대립으로 몇 달째 한 건의 법률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국회를 보면 증세안 역시 쉽게 처리되지는 않을 것 같다...


고 방심하고 있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장사 하루 이틀 해 보나? 어느 날이고 국회가 정상화되기만 하면 밀려있던 법안들도 하루아침에 수백 건씩 일사천리로 통과될 것이고, 우리의 믿음직한 야당은 이렇다 할 저항은커녕 변변한 검토도 해보지 못한 채 정부의 세금 인상안을 받아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회나 야당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스스로 증세안의 허와 실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다만 필자는 재정이나 조세정책에 대한 식견이 떨어지는 관계로, 동서고금을 통하여 세금을 올렸다가 좋게 된 정부들의 사례를 고찰함으로써 정부여당에 겁을 주어 스스로 증세안을 철회하는 방안을 유도해 볼까 한다.

 



미국 : 보스턴 차 사건

 

1620년 메이플라워 호에 탄 102명의 청교도들이 상륙하며 본격화된 영국의 북미 대륙 경영. 그 하이라이트는 소위 프랑스-인디언 전쟁으로 불리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었다. 프랑스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재정파탄을 맞이한 영국정부와 의회는 설탕조례, 인지조례 등을 제정하여 식민지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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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격렬한 항의와 시위가 벌어졌고 북미 식민지의 상인들은 자신들과 거래하는 영국 상인들에게 인지세 폐지를 청원해 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북미와의 교역에서 많은 이익을 보아왔던 영국 상인들은 의회에 인지조례를 폐지해 줄 것을 요청했고 결국 인지조례는 철폐되었다.

 

식민지인들의 조직적 반발로 의회의 결정이 철회되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영국 의회는 '타운젠드 법안'이라 불리는 법안들을 만들어 다시금 식민지에 갖가지 세금들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식민지에서는 또 한 번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법안은 대체로 폐지되었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홍차에 세금을 부과하는 홍차조례만큼은 폐지되지 않았다.

 

격분한 식민지 주민들은 1773년 12월 16일 밤, 아메리카 원주민 코스프레를 하며 보스턴 항에 나타났다. 그들은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의 자물쇠를 부숴버리고 동인도회사가 영국 본토로부터 수입한 342박스의 차(Tea)를 몽땅 바다에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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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여파로, 얼마 동안 보스턴 앞바다의 색깔은 희미한 갈색을 띄었다고 하며, 며칠 동안 찻잎이 떠올라 해변에 밀려왔다고 한다. 아울러 동인도회사는 당시 돈 9천 파운드, 오늘날의 시세로 약 16억 원 상당의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영국인들의 정신적 충격이 훨씬 컸다고.

 

크게 빡친 영국은 식민지에 군대를 파병하고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 주 자치령 폐기를 선언하는 등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로 인해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했고 그 결과는 알다시피 북미 식민지, 아니 미합중국의 승리였다.

 

미국 독립전쟁의 원인을 한두 가지로 뭉뚱그려 얘기할 순 없겠지만,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무리한 증세 정책 또한 주요한 원인의 하나였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미국은 초강대국에 등극한 반면, 더는 리즈시절만큼의 지위를 누리고 있지 못한 영국의 위상을 생각해 볼 때 세금 올려 좋게 된 사례 중 하나로 빼놓을 수 없다 할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 시민혁명

 

팍스 아메리카나(편집부 주: 한 마디로 '미국님, 오오~ 굽신굽신'의 상황을 말하는 용어) 시대에 걸맞게 미국의 독립혁명을 제일 먼저 다루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무리한 세금 부과에 반발하여 일으킨 혁명은 영국이 원조라 할 수 있다. 1215년 영국의 존 왕은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지만 연전연패한 끝에 프랑스 내에 있던 자신의 영지를 모두 잃고 말았다. 결국 국가 재정이 파탄 나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귀족들에게 세금을 물리기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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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특권 귀족 세력들이 어디 호락호락한 사람들인가? 그들의 반발로 존 왕은 퇴위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몰렸다가,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각서를 받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대헌장(마그나카르타).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 '왕의 명령만으로는 세금을 거둘 수 없다'는 것과 '법이나 재판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유민의 자유, 생명, 재산을 침해받을 수 없다'는 것이 핵심이라 하겠으며 오늘날 대다수의 헌법에 비슷한 조항이 채택될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왕은 좋게 되었지만 나라 전체와 역사적인 차원에서 보면 좋게 된 것만은 아닐지도?

 

400년 뒤, 영국에선 찰스 1세가 왕이 되었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그는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무리한 해외 원정을 감행하다가 재정파탄에 봉착하게 된다. 특히 프랑스의 신교도 반란을 지원하다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 찰스 1세는 세금을 올려 위기를 해결하려 했으나, 이에 반발한 의회가 권리청원(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 불가 및 국왕도 건드릴 수 없는 자유권 보장)을 제출하며 본전도 못 찾게 된다. 그러나 '유단자' 찰스 1세는 '당황하지 않고' 권리청원을 수용할 것처럼 하여 반발을 잠재운 뒤, 위기를 극복하자말자 입을 싹 씻고 의회를 해산하여 11년 동안 한 번도 열지 않는 호연지기를 보여주었다. 바꾸어 말하면, 11년 뒤엔 의회를 열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 이유는 374년 뒤 주민투표로 독립을 결정하게 되는 '스코틀랜드의 반란' 때문이었다. 군비 마련을 위해 세금을 걷어야 했고 이를 위해선 의회 개최가 불가피했던 것. 


그러나 11년 만에 열린 의회는 증세 요구 따위는 쿨하게 씹고 국왕과 사사건건 충돌한 끝에 의회파와 왕당파의 내전을 유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의 승리로, 패배자 찰스 1세는 결국 참수당하는 비운을 겪고 만다. 역시 세금 때문에 좋게 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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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 이후 계속된 재정난 속에서도, 오지랖 넓게 미국 독립전쟁까지 지원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결국 버티지 못한 루이 16세는 귀족과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했으나 그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삼부회를 개최하여 제3신분 즉 부르주아 계층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표결 방법을 둘러싼 대립으로 삼부회는 2014년의 어느 나라 국회처럼 파행 모드로 접어들었고, 제3신분 의원들을 중심으로 국민의회가 구성되어 헌법 제정 등 셀프 개혁 작업에 돌입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당황한 루이 16세는 군대를 끌어들여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성난 민심은 외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프랑스 대혁명의 막이 오른다. 결국 루이 16세도 찰스 1세처럼 목이 잘리고 말았으니, 세금 올리려다가 목숨까지 잃어버린 임금의 프랑스 버전으로 기록된다.

 



중국 : 황소의 난

 

담뱃값을 올림으로써 돈방석에 앉게 될 듯한 KT&G의 전신은 한국담배인삼공사이고 그 전신은 재무부 전매청이다. 그렇다. 놀랍게도 국가기관에서 직접 담배를 팔았던 것이다. 이는 담배가 전매사업(국가 또는 지정된 기관에서 지정된 상품에 대해 독점적인 판매권을 가지는 것) 아이템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담배의 놀라운 중독성과 독점사업이라는 특수성에 힘입어 어려운 나라살림에 쏠쏠한 도움을 주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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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것은 1962년까지는 소금도 전매사업 아이템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담배는 힘들어도 끊을 수 있지만 소금은... (그 필수성 때문일까. 고대 로마에서는 병사들의 급료를 소금으로 주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라틴어로 소금을 의미하는 Salary라는 단어가 오늘날 영어의 봉급을 뜻하는 말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소금 전매와 관련 폭리를 취하다 좋게 된 중국 당나라 이야기가 있다. 한때 잘나가던 당나라는 안녹산의 난으로 큰 위기를 겪었다. 반란은 가까스로 평정되었지만 중앙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자작농이 몰락하면서 나라의 수입이 크게 줄어든 것. 결국 당나라는 소금을 전매하기로 결정했고, 한때 나라 살림의 절반 이상을 여기에 의존했다고. 그럴수록 소금 값은 계속 치솟아 10전이었던 소금 한 말이 370전까지 올랐다고 한다. 가난한 백성들은 소금 때문에 난리였고 이 틈을 타 지하경제 어둠의 소금장수들이 활개를 쳤다. 이들로 인하여 나라의 이익이 자꾸 줄어들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암거래상을 심하게 단속하였고,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한다.

 

875년, 흉년이 들어 민심이 급격히 악화되자 황소라는 암거래상이 농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을 바탕으로 세력을 모아 낙양 태수의 항복을 받더니, 급기야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함락할 정도로 기세를 떨쳤다. 황제에 오르며 리즈시절을 구가하던 황소는 부하 장수였던 주전충이 배신을 때리는 바람에 쫓기다 자살하는 것으로 아웃. 그러나 여러 해에 걸친 반란으로 가뜩이나 맛이 가 있던 당나라는 크리티컬 데미지를 입었고, 투항 후 절도사가 된 주전충이 또 한 번 배신을 때리면서 끝내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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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전매사업도 아니고 소금만큼의 생필품도 아니지만, 담배도 애연가들에게는 끊을 수 없는 아이템일 터. 계속 담뱃값을 올리다가는 어둠의 담배 장수들이 등장하여 지하경제를 활성화시킬지도 모른다. 유수의 다국적기업들이 판치는 담배사업의 특성상 스케일이 커질 암거래상들을 빡세게 단속하다 보면 한국판 황소의 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상상을 해본다.

 



일본 : 소비세의 저주

 

한국에 부가세가 있다면 일본엔 소비세가 있다! 일제 가격표를 보면 '税込'이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바로 '세금 포함'이라는 뜻이 되겠다. 이때 포함되는 세금이 바로 소비세다.

 

요즘은 일본도 세금을 포함하여 가격을 표시하는 것이 의무화되었지만, 이전에는 세금 뺀 가격을 기재하는 꼼수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해프닝도 많았다. 100엔샵에 가서 정가표 보고 물건을 샀는데 105엔을 내야 한다든지...

 

이 소비세는 도입되기도 전부터 일본 정국을 들었다 놨다하는 핵폭탄이자 판도라의 상자였으니, 소비세를 건드리거나 어느 나라 전직 국회의장처럼 손가락으로 딸 같은 여인네 가슴 건드리듯 툭 찔러본 정부들은 예외 없이 정권을 잃거나 선거에서 참패를 당해왔던 것. (일본어로는 키몬<鬼門> 이라고 하며 '귀신이 다니는 피해야 할 방향'이라는 뜻으로 통상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쉬운 사건을 의미한다. 한국은행 보고서에서 인용) 그 저주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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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최초로 소비세 도입을 추진하던 오히라 내각은 여론의 반발로 인해 황급히 철회했음에도 총선에서 참패를 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1987년 나카소네 내각은 세율 5%의 매상세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여당 내부에서조차 반발이 만만치 않아 법안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1988년 논의 10년 만에 다케시타 내각이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비세법을 강행 통과시켰다. 이로써 이듬해 4월 1일부터 세율 3%의 소비세를 부과하는 법이 시행되었으나, 소비세 실시를 고려한 예산심의 과정에서 태클을 당한 다케시타 총리는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꿎은 후임 우노 내각이 소비세 도입 후폭풍을 맞아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하였다.

 

소위 55년 체제라 불리는 자민당 독주 체제는 38년 만인 1993년 무려 7개 야당이 연립정권을 구성하며 일시적으로나마 무너졌다. 새로이 구성된 호소카와 내각은 소비세를 폐지하고 세율 7%의 국민복지세를 도입하려 했으나, 여론의 반발로 철회하면서 내각이 무너지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다만 호소카와가 사퇴한 직접적인 이유는 사가와 규빈 사건이라는 정치자금 스캔들 때문, 호소카와는 20년 뒤인 올해 뜬금없이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탈 원전을 기치로 고이즈미의 지지를 받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3위로 떨어지는 굴욕을 겪는다.)

 

자민당은 빼앗긴 정권을 찾기 위해 철천지원수 사회당과 연립정권을 구성하는 파격적인 변신을 단행한다. 그리하여 탄생한 사회당 출신 무라야마 총리의 내각은 소비세 5% 인상을 관철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 법안은 자민당 출신 하시모토 내각이 구성된 후인 1997년 4월 1일부터 시행되었지만, 예상대로 하시모토 총리는 이듬해 참의원 선거에서 대패하고 사퇴했다.

 

잠깐 정권을 내준 듯싶던 자민당은 이후 승승장구했지만, 2009년 아동수당을 공약으로 내세운 민주당에 밀려 또 한 번 정권을 빼앗긴다. 민주당은 다양한 복지플랜을 제시하면서도 총리임기 4년 동안은 소비세를 인상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유권자들의 환심을 샀다. 한 마디로 '증세 없는 복지'를 공약한 셈.

 

그러나 막상 집권하고 보니 재원 마련에 어려움을 겪던 민주당 정부는 약속한 복지혜택을 슬금슬금 축소하고 소비세를 인상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결국 간 나오토 총리가 총대를 메고 소비세 인상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가 참의원 선거에서 대패하였고, 그럼에도 동일본 대지진으로 증세를 피할 수 없었던 후임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뚝심 있게 소비세 인상을 밀어붙인 끝에 결국 2014년부터 8%, 2015년부터 10%까지 세율을 인상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다. 물론 이듬해 중의원선거에서 폭망한 민주당은 3년 만에 정권을 잃고 야당으로 원위치.

 

보다시피 소비세를 건드렸던 정권이나 총리치고 잘 된 사례가 하나도 없다. 소비세를 올려야 한다는 자체가 이미 경기가 좋지 않고 정부 재정이 어렵다는 걸 의미하는 탓도 있겠지만,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한 채 추진한 증세가 혹독한 심판으로 이어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세금으로 좋게 된 정권 in Korea를 이야기하자면 종합부동산세를 비롯하여 세금폭탄을 터뜨렸다가 저조한 지지율에 시달린 끝에 한나라당에 정권을 빼앗긴 노무현의 참여정부...

 

를 쓸 줄 알았겠지만, 이보다 더 큰 타격을 입은 정권, 무려 임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가 끝나기 전에 무너진 정권이 있으니 놀랍게도 박정희 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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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은 1977년 7월 1일, 여러 간접세를 통합하여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의 10%를 징수하는 부가가치세를 도입하였다. (이때 재무부 사무관으로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이 나중에 경제부총리가 되는 강만수) 하루아침에 모든 물가가 10%씩 오른 거다. 가뜩이나 오일쇼크 등의 영향으로 물가는 폭등하고 경기는 침체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시대.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라는 금자탑을 달성하긴 했지만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던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1978년 12월 10일,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 1구 2인제의 중선거구제를 채택하여 웬만한 선거구는 전부 여당 공화당과 야당 신민당이 각각 1명씩 동반 당선될 수 있었던 희한한 선거였다. 거기에 비례대표 대신 국회의원 1/3을 대통령의 똘마니인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도록 함으로써 어떻게 선거를 해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의원수가 전체의 2/3에 육박할 수 있었던 야바위 같은 룰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이변이 일어난다.

 

여당인 공화당(31.7%)보다 야당 신민당(32.8%)의 득표율이 1.1% 높았던 것. 물론 오늘날과 같은 정당투표가 아니라 지역구 후보자의 득표율을 단순 합산한 결과이긴 하지만 긴급조치에 언론탄압으로 정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나름 의미 있는 결과였고, 이는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과 아울러 물가폭등 + 부가세 도입으로 인한 민생경제의 위기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세가 오른 야당은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하고 선명성의 기치를 드높인 반면, 박정희 정권은 YH사건(가발업체 YH무역의 여성노동자들이 회사 운영 정상화와 근로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야당 당사 앞에서 농성을 벌였던 사건, 경찰이 당사에 진입하여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사망) 및 김영삼 의원직 제명(헌정 사상 유일한 국회의원 제명사례, 김영삼이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미국정부의 박정희 지지 철회를 요구함으로써 국가를 '모독'했다는 이유였음)과 같은 병크를 터뜨려 점점 민심과 멀어져 갔고, 결국 부마항쟁과 10.26으로 정권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부마항쟁 또한 독재에 대한 반발심과 함께 불경기 + 물가 상승 + 부가세 도입에 대한 불만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은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정권의 몰락은 직접적으로는 김재규의 총탄 때문이지만 넓게 본다면 부가세 도입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 또한 작용한 결과라 볼 수 있다. 경제성장을 명분으로 한 독재였던 만큼, 그 경제성장의 과실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돌아오지 않고 증세로 귀결되는 걸 보아버렸을 때 국민들의 상실감은 정권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가 아니었을까?




마무리

 

지금까지 동서고금을 통틀어 세금 올려 좋게 된 정부들을 알아보았다. 물론 이러한 정권교체 등의 원인을 반드시 세금 인상과 같은 한두 가지 이유로만 분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정부의 역할에 대한 기대도 커질 수밖에 없기에 어느 정도의 증세가 불가피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정부가 세금만 올리려 한다거나, 특권은 조금도 내려놓지 않는 지배층이 구린 정책으로 재정 부담을 증가시킨 경우에는 여지없이 조세저항의 수준을 뛰어넘는 민란이나 시민혁명이 일어나곤 했다. 조세저항이 적다는 간접세의 경우에도 간접세로 인한 물가 상승 또는 조세포탈을 위한 지하경제의 활성화가 국가 경제를 전복시켜 버리는 일이 없지 않았으니 정부의 당국자들이여 간접세를 올릴 때에도 신중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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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글을 쓰는 9월 18일 현재 스코틀랜드에서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결정할 주민 투표가 실시되고 있다. 300년 넘게 하나의 나라로 살아온 스코틀랜드가 새삼 독립을 추진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스코틀랜드 영역에 속하는 북해 유전이 영국 경제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음에도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서운함 때문이라고 한다. 벨기에의 플랑드르나 이탈리아의 베네토, 스페인의 카탈루냐 등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유럽의 다른 지역들 역시 많은 세금을 내는데도 그에 따른 혜택은 별로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고 한다. 이 또한 세금 문제의 핵심이 액수의 많고 적음보다도 ①걷은 만큼 적절히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믿음과 ②정부가 세금을 들여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공감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리라.

 

우리나라에도 세월호 특별법을 비난하며 조세저항으로 막아야 한다는 네티즌이 있었고,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휴전선 이북의 어느 반국가단체는 '세금 없는 나라'를 내세워 사회불만세력의 월북을 꼬신지 이미 오래되었다. (막상 가도 가난뱅이는 안 받아준다 카더라) 그러므로 증세 문제에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알지?

 

그러니까 부유층한테나 해당될 법한 '손자 교육비 1억 원까지 증여세 면세' 같은 희한한 예외를 만들거나 돈 없어서 담뱃값 올리는 주제에 국민 건강을 위한답시고 생색내지 말고, 더 받아간 세금을 어따 쓸지 투명하게 오픈하는 것과 함께 반대세력도 진정성 있게 설득하는 노력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하길 바라 마지않는다.


 

※ 이 글의 사실관계는 위키피디아와 엔하위키 미러의 해당 항목 및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의 1976~1979년 관련기사, 한국은행 해외조사실 아주경제팀이 작성한 해외경제정보 제2010-31(2010. 8. 10.) '일본의 소비세 인상 논란의 배경과 전망'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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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 @backtalkking


편집 :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