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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24. 수요일

trexx










1. 인물 간보기


Q) 이 쓰레기는 누구일까?


-나이는 적어도 50은 족히 먹은 중년 남자다.

-여성 편력으로 4번 결혼과 4번 이혼한 경력이 있다.

-루머에 따르면 여직원 뽑을 때 서류심사는 건너뛰고 미인대회 스타일(룸 스타일)로 면접을 본다.

-막 입사한 젊은 여직원은 외모에 따라 특별 대우로 섹스 파트너로 모시기도 한다.

-동거여성과 산책길에서 정사하다 들켜 특집 기사의 주인공이 된 적이 있다.

-20대 여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은 적도 있다.(무죄로 결론)



한국에서는 '공인'이었던 자가 상대방의 의사와 관계없이 희태, 아니 추태를 보이기도 하지만 위의 '쓰레기(?)'는 다행히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헐리우드에 있는 썩어빠진 연애인도 아니다.


이 사람의 성적 기행 리스트는 이밖에도 한페이지를 다 채워도 모자를 판이다. 비서가 대통령의 거시기를 빨아도 별것 아닌 취급한 미국이라지만 이 사람 이야기는 언제나 가십뉴스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2014년 9월 18일 이 상남자가 70세 나이에 CEO로서 은퇴하였다. 어쨋든 유명한 래리 앨리슨(Larry Ellison)이다.



2. 세상에 이름을 알린 기업, Ora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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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친숙한 IT 기업들의 창업자들은 유무형을 떠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친숙한 제품들을 만든 회사들이다. Windows와 MS Office로 대변되는 Microsoft의 Bill Gates, SNS 대표 주자 Facebook의 Mark Zuckerberg, Google의 Larry Page, Sergey Brin 그리고 Apple의 Steve Jobs 등 이러한 IT 제품 혹은 서비스들은 일반 대중의 실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창조해낸 인물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데 IT 기업 중 일반인들 대상으로 장사를 하지 않으면서도 창업자가 대중에게 잘 알려진 독특한 회사가 있다. 바로 Oracle이다.


Oracle이 만드는 제품들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TV 광고에 자주 등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기업 Oracle이란 이름은 컴퓨터에 관심이 없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써보지 않았는데도 많은 이들이 이 기업의 이름을 아는 이유가 뭘까? 단지 창업자가 재계 서열에 들어 있어서 일까?


애플의 DNA에 스티브 잡스가 있듯이 오라클의 DNA에는 래리 앨리슨이 있다. 경우는 다르지만 IT 업계에서 그 둘은 자기를 이용하여 회사를 마케팅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래서 서로 절친이었나 보다.



3. 래리 앨리슨에 대한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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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on man>의 Tony Stark과 Oracle의 Larry Ellison. 방탕한 삶은 닮았지만 래리가 공학 천재는 아니다.


래리 앨리슨은 90년대 후반 작가 Mike Wison을 통해 자서전을 쓴 이력이 있다. <신과 래리 앨리슨의 차이, 신은 그(자신)를 래리 앨리슨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이상한 제목으로 나왔다. 책 내용은 오라클의 기술에 대한 설명보다는 그의 범상치 않는 병신 같은 사생활이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번역본은 없는 것 같다.


2000년에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지만 절판된 <데이비드 A 캐플런의 실리콘밸리 스토리>에 한 챕터가 오라클, 아니 래리 앨리슨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그의 잘난 구석을 다소나마 확인 할 수 있겠다.


래리 앨리슨은 여성 편력으로 사생활이 난잡할 뿐 아니라 자신이 돈이 많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바란다.(그것도 일종의 마케팅이랄 수 있겠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비싼 일본식 저택에 사는 것은 물론 다른 IT CEO 들이 비행기 한 대, 배 한 척 이런 수준에서 과시했다면 래리는 비행대 및 소함대 등 규모 면에서 다른 이들을 압도한다. 취미 또한 그 연장선인데 미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사요나라 등 요트를 보유하고 뻐기는 것을 서슴없이 한다. 부자들의 놀이인 요트경기에 주기적으로 나가는데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특급 향해사 크리스 딕슨을 비싼 돈으로 데려와 경기에 나가 승리를 갈취했고, 자축하는 것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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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ison 가족, Larry는 딸하고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그의 가정사는 허리우드 낡아빠진 연예인과 다를 게 없다. 20대 금발 여자들과의 공공연한 염문과 별도로 4번 결혼과 4번 이혼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현재 솔로이다) 두 번째 아내 Barbara Boothe와 3년간 결혼 생활에서 아들과 딸을 낳았다. 막내 딸 1986년 생 Megan Ellison는 헐리우드에서 영화 제작자(안나부르나픽처스 설립자)로 유명하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American Hustle>과 <Zero Dark Thirty>, <Her> 등이 있다. 1983년 생 큰 아들 David Ellison은 아버지처럼 대학을 중도 포기하였고 여동생과 비슷하게 허리우드에서 Skydance 영화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다.


래리의 사생활은 다른 IT CEO가 아닌 헐리우드의 잡음 많은 연예인들과 비교된다.(그래서 자녀들이 헐리우드에 서 영화 제작을 하고 있나보다) 이는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가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최고의 마케팅이 되었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말이다 .



4. 래리 앨리슨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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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모(좌), 2살 때(중앙), 캘리포니아 방황 할 때 요세미티 공원에서(우)


1944년 8월 17일 래리 앨리슨은 뉴욕의 유대인 미혼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태리계 미공군 파일럿이었다.(그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던 것 같다) 친모는 래리를 9개월 키우다가 래리가 폐렴에 걸리자 입양을 보내기 위해 자기 이모 집에 그를 맡겼다. 얼마 후 루이스(Louis)와 릴리언(Lillian) 앨리슨이라는 중산층 유대 집안에 래리는 정식으로 입양 되었다. 친모는 래리가 48살이 될 때까지 만나지 않았다.


앨리슨은 양어머니에 대해서 따뜻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 치켜세웠지만 양아버지에 대해서는 배려 없고 엄격한 사람이라 말했다. 절실한 유대신자였던 양부모와 달리 래리는 무신론자였음을 감안할 때, 양아버지에 대한 적대심이 이러한 차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0살 즈음해서 그는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알게 되었고 13살 때 양부모의 의사와 관계없이 유대 성년의례(Bar Mitzvah)를 거부한다.


내 양부가 내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화재가 누군가를 파멸시키지 못하면, 결국 그 화재는 사람을 더욱 단련시키기 마련이니까. 

-래리 앨리슨 인터뷰


래리는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났지만 양어머니의 죽음으로 일리노이 대학교 2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캘리포니아로 와서 반문화를 체험하였다. 캘리포니아에서의 경험은 이후에도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마간 휴식 후 시카고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지만(이곳에서 처음 컴퓨터를 알게 되었다) 1학기만 다닌 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다시 향했다. 결국 그는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처럼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1966년, 그의 나이 22세였다.



5. 사회에서 10년간의 여정


그가 캘리포니아에 정착하게 된 배경에는 쇼클리(반도체를 개발한 사람)와 부시넬(아타리 창업자)처럼 전자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었다고 하기보다는 반문화적인 그 곳(캘리포니아)이 그의 방탕한 삶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그곳에서 10년 동안 여러 일자리를 전전했다. 웰스 파고 은행(Wells Fargo Bank)에서 기술자 감독관, 소방수 연금보험(Fireman’s Fund Insurance)에서 IBM Mainframe 관리(Mainframe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확인) 등 컴퓨터 관련 일자리를 돌아다녔다. 그의 20대 때 직업은 변변치 않아 버는 돈이 없었지만 쓰는 데는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은행 대출의 도움을 받아 첫 요트를 구매했고 성형 수술을 했고 1,000달러 넘는 자전거를 구매했다. 첫 번째 결혼과 이혼도 이 시기였다.


그가 돈을 많이 벌어서 방탕해진 것이 아니라 방탕한 생활을 하기 위해 돈을 많이 벌었던 게 아닐까 싶다.


래리는 자존감을 위해 ‘돈’을 벌었고 무엇보다 번 돈을 쓰는 것에 더 많은 신경을 집중하지 않았을까하고 주변인들은 말한다. 자신을 나타내는 유일한 수단으로 허접한 어린시절을 감추기 위해 ‘돈’을 추구했을지도 모른다. 20대 시절부터 엿보이는 래리의 통 크게 돈 쓰는 버릇이 오히려 그가 사업을 꾸려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6. 앨리슨의 조력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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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페이긴(좌), 밥 마이너(중앙), 에드 오츠(오)


래리는 IT 업계에서 '컴퓨터 기술에 대하여 허풍을 떠는 CEO'라는 놀림을 받곤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진 매력으로 주변 인물들을 설득하는 데 천부적이었다.(대부분의 말이 사기 였을지라도)


1970년대 초 Mainframe 제조사 암달(Amdahl)에 들어가 훗날 오라클 창립 맴버가 되는 프로그래머 스튜어트 페이긴(Stuart Feigin)을 꼬드겨 오라클로 오게 만들었다. 이후 암달을 그만 두고 암펙스로 자리를 옮긴 다음 직책만 상사인 밥 마이너(Bob Miner)와 프로그래머 에드 오츠(Ed Oates)를 만난 것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었다. 래리는 마이너, 오츠 그리고 다른 기술자들과 협력하여 CIA에서 자금을 댄 데이터베이스 관리 소프트웨어 코드명 ‘오라클’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고 래리는 마케팅 부서로 옮긴 다음 얼마 있다 퇴사한다. 그 후 데이터베이스 회사 프리시전 인스트루먼트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감독역을 하던 중 마이너와 오츠를 꼬드겨 자신의 회사를 차리기로 결심한다. 데이터베이스의 미래에 대한 확신보다는 CIA에서 직접 계약을 따내는 것이 목표였다.



7. 그의 회사 소프트웨어 개발 연구소(Software Development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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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 "Ted" Codd와 그가 제안한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모델 구성도


1977년 6월 16일, 산타클라라에서 래리 앨리슨은 개발자 오츠, 마이너와 자본금 $2,000로 소프트웨어 개발 연구소(Software Development Lab)을 창업하였다. 지분은 래리가 60% 마이너와 오츠가 각각 20%씩이었다. 마이너와 오츠는 사기꾼에 가까운 래리야말로 영업에 적격이라고 생각하였다.


컴퓨터 기술의 산실인 IBM에서 데이터를 관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는 보고서가 나왔다. 일명 System R Database로 IBM 연구원 Codd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래리는 이 보고서에서 ‘금광’을 보왔다.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는 기존의 데이터베이스를 뛰어넘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자료를 재배열하고 검색할 수 있었다. 그 보고서 이론을 바탕으로 IBM 연구원 들은 기본적인 영어로 데이터베이스 언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SQL(Structured English Query Language : 구조화된 질의 언어. 즉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관리시스템(RDBMS)의 데이터를 관리하기 위해 설계된 특수 목적의 프로그래밍 언어로 데이터베이스로부터 정보를 얻거나 갱신하기 위한 표전 대화식 언어이다. SQL은 전체 데이터베이스 여러 테이블(입력된 자료)에서 질의를 통해 관련된 하나의 테이블(출력된 자료)로 얻게된다. 많은 수의 데이터베이스 관련프로그램들이 SQL을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다.)이었던 것이다.


IBM은 1976년 여러 잡지에 일급 기술을 공개하였다. 래리는 이를 바로 낚아채서 자신이 팔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ORACLE 2.0>에 본 기술을 도입하여 세상에 선보인다. ORACLE이 본격적으로 입지를 다지는 1982년까지 IBM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를 도입한 소프트웨어를 내놓지 않고 있었다.


1982년 래리 엘리슨은 사명 또한 ORACLE로 개명한다. ORACLE은 IBM이 가지고 있는 기업시장에 도전하여 IBM의 점유율을 갈취하였고 IBM시스템 뿐 아니라 UNIX OS로 구동되는 미니컴퓨터와 업무용 PC인 Windows 버전까지 개발하여 선보였다. 어느 컴퓨터에서나 돌아가는 소프트웨어를 만든 오라클은 IBM의 절대 고객이라 생각했던 정부기관과도 계약을 하게 되었다.(첫 번째 정부고객 오하이오 라이트 패터슨 공군기지, CIA 등이 었다.) 수없이 많은 부침이 있었지만 오라클은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하나로 MS 다음으로 큰 소프트웨어 기업이 되었다. 그 이후 2010년 자바를 만들고 서버 하드웨어를 생산하고 있던 '선 마이크로시스템'을 인수하였다.(웹 환경 데이터베이스 언어인 MySQL도 '선' 소유였다)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하드웨어 제조까지 영역을 넓힌 것이다.



8. 허풍쟁이 작품 NC(Network Compu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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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orn에서 제작한 Network Computer


오라클은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선을 인수하기 전까지 오라클은 오직 데이터베이스만 판매하였다. 래리는 빌 게이츠를 숙적이라 생각했다. 그를 2위로 만든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겠다. 래리 입장에서 보면 빌은 매우 지루한 인물이다. 그가 이끌고 있는 PC 산업이 영 탐탁지 않았다. NC의 실체가 없을 때부터 그는 매스컴을 통해 NC가 PC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사실 NC라는 개념은 Mainframe에 연결된 단말기와 같은 개념이다. 하드웨어 성능 보다 네트워크 속도를 빠르게 하여 중앙 컴퓨터에서 동영상 등 컨텐츠와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구조이다.


ORACLE이 1996년에 처음 NC를 선보이자 시장은 냉담했다. 이미 가정용 컴퓨터는 PC가 점령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개념을 애플에 돌아온 그의 친구 잡스에게 열심히 설득하기도 했다. 사실 잡스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지만 래리에게는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흠모하기도 했다. 일례로 잡스는 래리의 걸프스트림 비행기를 보고는 '흠모'하기 시작, 애플이 어느정도 성공하자 잡스 자신의 출장용 걸프스트림 비행기를 애플이사회를 설득해 구매한 뒤 자신의 걸프스트림의 내장을 래리의 걸프스트림보다 뛰어나게 꾸몄다는 내용이 잡스의 전기에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말년에 필립 스탁에게 의뢰한 요트를 보더라도 래리의 영향(요트광인 래리를 통해 잡스도 요트에 관심이 가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이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잡스는 iMac을 처음 기획 했을 때 래리의 의견을 따라 NC를 모델로 했다가 이내 변경하게 된다. 아직까지 네트워크 속도가 만족할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iMac은 internet을 염두해 둔 데스크탑 컴퓨터로 발표하였다. 방향은 달랐지만 애플은 아이패드를, 구글은 크롬북을 내놓으면서 래리의 NC 모델이 결국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오라클이 주인공이 아니었을 뿐이지.



9. 은퇴


래리 앨리슨을 마지막으로 70년대 IT 업계에 등장했던 창업자들은 CEO 자리에서 모두 물러났다.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금광을 발견하여 제대로 즐긴 사내 래리 앨리슨은 오라클 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후임자는 그와 태도(?)가 비슷한, HP에서 성희롱으로 곤욕을 치르고 사퇴했던 마크 허드다.(래리는 메스컴을 통해 허드를 적극 옹호했따. HP에서 허드를 사퇴하게 하자 애플에서 쫓겨난 친구 잡스의 예와 같다며 항변하기도 했다. 결국 허드를 위하로가 위해서인지(?) 그를 오라클로 모셔오게 된다)


자신의 기행으로 회사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래리 앨리슨과 비슷한 경력을 가진 CEO가 나오려면 아마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이 시리즈는 그때 그때 꼴리는대로 계속 될 예정이다.




trexx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