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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04. 화요일

trexx








1. 상품 판매 모델


소비되는 것을 흔히 상품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재화라고 해야 한다. 재화는 소비를 목적으로 하고 상품은 시장에서의 판매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그래서 재화는 인류 역사상 언제나 있었던 것이지만 상품은 자본주의 시대에 출현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상품의 분석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남경태 [개념어사전 ‘상품’] 중에서


우리는 이제 데이터의 흐름(스트리밍 streaming)마저도 상품으로 판매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영상, 음악 컨텐츠뿐 아니라 사용자 정보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모든 데이터가 상품이 되었다. 지금 웹이 인터넷의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유형의 상품을 거래뿐 아니라 아닌 화면에 보이는 페이지마저 판매 상품화시켰기 때문이다. 유형의 상품을 팔지 않아도 돈을 벌게 된 인터넷은 스스로 생태계를 확장했으며 네트워크가 미치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서든 전 세계 자본을 끌어 당겼다.


90년대 최초의 상용 브라우저를 만든 벤처기업 넷스케이프는 내비게이터 브라우저의 수익모델을 전혀 알지 못했다. 넷스케이프는 내비게이터라는 브라우저 이름을 알리는데 성공했지만 상품으로써는 완전히 실패하였다. 다운로드 소프트웨어를 기업에게 유료로, 개인에게 무료로 판매하는 건 기존 판매 방식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판매 모델로는 공룡 MS의 윈도 끼어팔기를 이길 수 없었다. 넷스케이프는 웹을 대중화 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자신을 살리는데는 실패한 것이다.


상품은 판매를 목적으로 한다. MS가 괴롭혔든, 어찌 되었든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는 결국 ‘상품’이 되지 못했다. 넷스케이프의 실패는 상품 판매모델의 실패이기도 했다. 아니 사실 넷스케이프는 상품 판매모델을 몰랐다. 웹이 만들 세상이 혁명이 될 것이란 건 알았지만 웹 그 자체가 어떻게 상품이 될지 몰랐다. 네스케이프는 기존의 소프트웨어 판매 방식과 같이 내비게이터를 카피당 라이센스 비용을 기업 고객에게 요구했는데 이는 MS가 이미 자기 방식대로 개척했던 방식이었다.




2. MS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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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게이츠 왈 소프트웨어 복제하지말라


90년대 초 거대기업이 될 수 있었던 MS의 판매(수익) 모델은 의외로 단순했다. 1977년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불법복제에 골머리를 아파했다. 플로피디스크만 있으면 소프트웨어는 원본 손상없이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MS는 자신의 상품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다면 큰 수익을 얻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MS가 80년대 공룡기업이었던 IBM에게 빌붙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한다.) IBM은 대당 라이센스 비용을 MS에게 줄 테고, MS는 카피당 가격이 비록 낮더라도 IBM은 PC를 자신이 구축했던 기반을 활용하여 배포할 것을 알았다. 애플 같은 조무라기하고는 비교할 수 없이 물량공세를 할 것이라 판단했고 이 결정은 빌 게이츠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는다.


컴팩 같은 IBM 복제 PC가 IBM을 골치 아프게 했지만 시장이 커지게 되자 MS에게는 오히려 이득이 되었다. 종속 관계였던 IBM에게는 행사할 수 없었던 권리를 하드웨어 기업들에게는 행사 할 수 있었다. 라이센스 비용 결정은 하드웨어 기업이 아닌 MS 자신이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OS는 DOS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빌 게이츠는 PC 제조업체의 갑이 되었다. 일반 소비자들이 조립PC에 DOS를 복제하여 불법으로 사용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MS의 주 고객은 PC를 완제품으로 판매하는 컴팩 같은 제조업체였고 이 시장은 불법복제가 대부분인 조립 PC 시장하고는 비교할 수 없없다.


판매되는 모든 완제품 컴퓨터에 OEM으로 MS DOS, Windows가 포함되어 있었고 소비자들은 MS 제품가격이 하드웨어 가격에 포함되어 있는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OS는 컴퓨터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어야 했다. 빌 게이츠는 이 지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TV광고와는 별도로 MS의 주 고객은 PC 제조업체다. 그러므로 윈도에 포함된 Internet Explorer를 공짜라 하는 것은 눈속임에 불가하다. 일반 소비자들은 완제품 PC를 샀을 때 윈도의 정확한 라이센스 비용을 알지 못한다. PC를 구매하는 기업 또한 마찬가지다. 기업은 PC 완제품을 구매하지, 하드웨어 따로 OS 따로 구매하지 않는다. PC 제조회사만이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할 뿐 구입하는 어느 누구도 윈도 가격을 알 필요가 없다. 그러기에 IE는 따로 지불을 안할 뿐이지 윈도 가격안에 포함된 소프트웨어로, *공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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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ows 10은 무료 업그레이드


* 현재 애플의 OS X, iOS 또한 하드웨어에 가격이 포함되어 공짜가 아니다. 하지만 애플이 노린 건 ‘업그레이드’의 공짜다. 이는 MS를 매우 피곤하게 한다. MS의 주 수입원은 업그레이드에 따른 라이센스 비용 청구였는데 애플이 그 수입에 염장(?)을 지른 것이다. 애플은 아이폰의 성공을 근거로 하드웨어의 확산을 위해 OS의 업그레이드 수익을 포기했고 이는 소프트웨어 전체 시장에 영향을 주었다. MS는 결국 Windows 10에 이르러 업그레이드 비용청구를 당분간 포기하게 된다.


MS는 (좀 야비하긴 하지만) 성공적인 상품 판매 모델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델은 오직 MS 만이 가능했기에 어느 누구도 MS를 상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MS는 네스케이프와의 브라우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웹 시장에서 자신이 입지를 완전히 구축할 것으로 판단했다. MS는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인터넷 ‘서비스’ 상품들을 안이하게 내놓는다. 1995년에 MSN, WebTV, MSNBC로 온라인 서비스를 내놓지만 세상을 바꿀만한 서비스가 아니었다. 윈도와 오피스에서 나온 수익이 엄청났기 때문에 MS또한 인터넷 서비스에 집중하지 않았다.(실제로는 안 그랬겠지만.) MS는 넷스케이프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으로 소위 ‘돈’이 되는 상품 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3. 새로운 서비스, 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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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Yahoo


1995년 스탠포드 대학교 전기공학과 박사과정이었던 26세 대만 출신 재리 양과 그의 동료 29세 데이비드 필로는 취미로 시작했던 카테고리 웹페이지를 정식 상품으로 내놓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Yahoo’다. 1994년 양과 팔로는 하이퍼텍스트가 가능한 모자이크 브라우저에 매력을 느꼈다. 인터넷 주소(URL)을 알고 있으면 어느 웹페이지든 접근 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웹페이지에 URL을 하이퍼링크로 저장하여 하이퍼텍스트로 만들어 놓으면 언제든지 다시 불러올 수 있었다. 박사과정이었던 둘은 취미로 웹페이지를 돌아다니며 기억하기 쉽게 해당 웹페이지 내용을 요약하고, 분류작업을 하던 중 내친 김에 자신들이 공들여 만든 웹페이지를 공개한다. 그리고 이를 ‘모자이크를 위한 제리의 빠른 탐색’(Jerry’s Fast Track to Mosaic)이라 명명했다. 그 페이지는 계층적 구조로 뉴스, 건강, 과학, 예술, 취미 등을 상위 카테고리로 하고 그 밑에 하이퍼 링크로 서브 카테고리를 두어 클릭하여 접근 할 수 있게 하였다. 서브 카테고리는 6단계로 세분화되어 천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웹페이지가 분류되었다. 홈페이지를 방문한 사용자들로 하여금 카테고리를 넘나들면서 새로운 웹페이지를 발견하도록 유도하였다. 마치 컴퓨터 폴더 안에서 자료를 찾듯 클릭하여 각각의 웹페이지를 접근 할수 있었던 것이다.


제리와 필로는 발견한 웹페이지들을 컴퓨터를 이용해 자동으로 분류 하지 않고 웹페이지를 일일히 방문한 후 맥락에 따라 카테고리로 분류 하였다. 웹 페이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사용자들은 웹페이지를 일일히 찾아다니는 것이 불가능했다. 제리 양과 필로는 사이트 명을 여러번 바꾸었지만 인기가 신통치 않자, 사용자들이 한번 듣고 외우기 쉬운 이름을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한 사람같이 생긴 짐승의 이름이자, 아무 뜻이 없어 의성어에 가까운 Yahoo라는 단어를 찾고는 마음에 들어 했다. 이 결정은 웃긴 발음으로 주변의 비웃음을 샀지만 야후가 90년대 주인공이 되는 최고의 결정이 된다.


야후는 독특한 사이트였다. 컴퓨터를 통하여 웹페이지를 접근하는 최초의 관문(Portal)이었지만 웹페이지 분류는 사람 손으로 한 것이었다. 이는 인류가 오랫동안 만들어온 컨텐츠인 도서, 음악, 영화를 분류하는 개념과 비슷했다. 다시 말해 컴퓨터로는 절대 구분할 수 없는 ‘맥락’을 분류하는 것이다. 음악과 영화등을 장르로 분류할 때 인간의 감성없이 컴퓨터로 DB화 분류하기 어려운 것처럼. 제리와 필로는 도서, 음악 및 영화 등처럼 웹페이지를 분류할 때 맥락을 근거로 하였다. 야후는 당시 실리콘밸리 IT 기업과 다른 행보를 가게 된다. 맥락 접근으로 기술 보다는 미디어에 보다 집중하게 되고 Yahoo 서비스는 이를 통해 사람들의 감성에 다가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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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2일, Yahoo 20th, Jerri Yang, Filo, Moritz




4. Yahoo! Rising


야후는 외우기 쉬운 이름과 맥락을 통한 카테고리 서비스로 홈페이지를 처음 접근한 사용자들을 붙들 수 있게 되었다. 인기가 올라가자 넷스케이프와 AOL은 양과 필로에게 2백만 달러(각각 1백만 달러)의 금액으로 인수를 제안했다. 하지만 양과 필로는 거절했고 대신 벤처캐피털에서 투자받는 것을 고민했다. 1982년 스티브 잡스를 빡치게 만들었던* 타임지 특파원 모리츠는 몇 년 후 기자를 그만두고 벤처 캐피털리스트가 되어 세콰이어 캐피탈을 설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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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월 올해의 기계


* 타임지는 1983년 올해의 인물로 스티브 잡스를 선정했다. 타임지는 인터뷰어로 모리츠를 잡스에게 보냈는데 모리츠는 잡스를 협오하였다. 잡스가 모리츠의 호감을 사기위해 친히 집을 방문했음에도 인터뷰가 끝나고 타임지 표지에는 “올해의 인물”대신 “올해의 기계-개인용 컴퓨터”를 실었다. 기사에는 잡스를 애플직원의 말을 인용하여 “그가 프랑스 인이었다면, (독단적인 성격으로) ‘훌륭한’ 국왕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조소했다. 빡 친 스티브 잡스는 타임지 편집자에 전화해 해고를 요청했다나. 아이러니 하게도 스티브 잡스가 공식 전기를 인정하여 맡긴 사람은 1978년 부터 타임즈 기자였던 ‘월터 아이작슨’이다. 월터 아이작슨은 1996년 올해의 인물로 내세우기 위해 빌 게이츠를 어렵게 인터뷰 했는데 그해 올해의 인물로 에이즈 연구자인 데이비드 호가 선정되었다. 빌 게이츠 기사는 한주가 밀려 그 다음 주에 발간되었다.


1995년 지인의 소개로 모리츠는 제리와 필로를 만난 후 야후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많은 벤처 캐피탈리스트들이 이름을 바꿀 것을 종용했지만 모리츠는 예외였다. 모리츠, 제리와 필로는 야후를 사용자들이 계속 머무르는 사이트가 되도록 합의했다. 수많은 광고판이 번쩍이며 행인을 유혹하는 뉴욕의 타임스퀘어처럼...


세콰이어는 지분 25%로 200만 달러를 투자한다. 기업공개 직전 일본의 소프트뱅크(손정의)에 34% 지분으로 1.5억 달러를 투자 받는다.(95년 5%, 500만 달러, 96년 29% 1억 달러) 그리고 제리와 필로는 소프트뱅크로 받은 돈으로 가장 성공적인 서비스를 개설하는데, 그것이 바로 야후 메일(1997년 10월 Four11의 Rocketmail 인수)이다. 웹 브라우저에서 실행되는 야후 메일은 많은 사용자 계정을 끌어 모아 보유하게 된다.(시기적으로는 MS가 인수한 hotmail.com이 먼저다) 소프트뱅크 손정의는 발 빠르게 자신의 모국으로 돌아가 지분 51%로 야후 재팬을 설립한다.(97년도 설립, 지분 49%는 야후 본사)

 

성공적인 기업 공개 후 천문학적인 돈이 확보되자 야후는 사용자들이 계속 야후 홈페이지에 머물도록 다양한 시도를 했다. 사용자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자신의 브랜드를 각인하고자 500만 달러를 투자하여 “너, 야후하니?(Do you Yahoo?)” 캠페인 TV광고를 선보였다. 그리고 광고를 실을 수 있는 것이라면 잡지 뿐 아니라 야구장 광고판, 공사장, 자판기 등등 에 Yahoo! 로고를 넣었다. 또한 당시 인기 미드였던 ER에서 간호사실 컴퓨터에 야후 홈페이지가 떠 있도록 하기도 했다. 이런 스팸 광고는 나름 효과를 보았고 이는 비열하고 부지런한 MS도 못했던 시도였다. Yahoo!의 인지도는 삽시간에 미전역 뿐 아니라 웹사이트 전체로 퍼져나갔다.




5. 새로운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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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ner Yahoo (2002)


사용자들은 야후 홈페이지를 웹 브라우저 실행 후 가장 먼저 접근하는 사이트로 인식하였다. Yahoo!는 사용자들이 사이트에 더 머물도록 검색기능을 넣는 등 서비스를 확장하였다. 야후는 진정 포털이 되길 원했다.


야후는 야후가 만든 홈페이지 그 자체로 돈을 벌고 싶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유저들은 야후를 통하여 자신이 필요한 웹페이지에 접근하고 있었다. 야후는 홈페이지 자체를 수익 모델로 하였다. 사이트 방문자 수가 많은 것을 이유로 광고주를 유혹하기 쉬울 것으로 판단했고 이는 적중하게 된다. 물론 배너 광고는 야후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웹과 배너가 합쳐지자 기존 보다 훨씬 고부가가치인 새로운 수익 모델이 만들어졌다. 야후는 배너 하나당 (무려) 백만 달러에 판매하였다. 당시 많은 기업들이 대세를 웹으로 판단하였기에 배너 광고에 기꺼히 투자하기 시작했다. 웹은 야후를 새로운 상품으로 만들었다.

 

야후는 MS가 어찌할 수 없는 상품이었다. 네스케이프는 브라우저 기술을 내세웠고 MS는 인터넷 익스플로어 브라우저를 만든 다음 공짜라 광고하여 OS에 끼워 넣어 네스케이프를 무너트렸다. 하지만 야후는 비슷한 사이트를 만든다 한들 MS가 독점할 수 없었다. 웹은 그 특성상 방문자를 자신의 사이트로 억지로 오게 할 수 없다. 수익 구조도 라이센스 개념이 아닌 방문자 트래픽을 근거로 광고를 유치하는 것이다. MS가 그 많은 배너 광고주의 마음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MS는 배너로 벌어들이는 자잘한 수익 모델에 관심이 없기도 했다. 2000년까지 MS는 야후와 비슷한 인터넷 서비스를 준비했지만 넷스케이프와의 경쟁처럼 전투적이지 않았다. 내비게이터는 MS의 핵심사업인 OS를 위협했지만 인터넷 서비스는 아니었다.

 

MS는 새로운 상품 판매 모델에 별 관심이 없었다. MS는 Yahoo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정확히 예측했다. 하지만 야후가 그냥 돈을 벌기 위해 구성했던 상품 판매 모델를 완전히 탈바꿈시켜 새로운 상품 모델로 만든 또 다른 혁명아인 Google이 MS에 위협이 될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하편에서 다룬다) 이 안이함이 브라우저 2차 전쟁의 시발이 된다.




6. 기술 보단 상품을 추구하다 빛바랜 Ya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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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hoo! 빙 보다 못하다.


창업자가 명문대 공대 박사과정이었지만 야후는 자신의 기술로 유명해진 기업이 아니다. IT 기업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이름과 ‘맥락’으로 분류하는 카테고리는 뛰어난 아이디어였다. 뛰어난 아이디어로 사용자를 끌어 모으게 되자 서브 카테고리는 더욱 세분화되어 2만 개로 늘어났다. 더 이상은 카테고리로는 원하는 웹페이지를 빨리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야후는 검색엔진을 홈페이지에 삽입하는데, 자신의 기술이 아닌 이미 개발된 기술을 차용하였다. 처음에는 Open Text, 그 다음 AltaVista 그다음은 Inktomi 순 이었다. 


2000년에 Google의 검색엔진을 사용하게 되었고 2004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검색엔진을 개발하게 된다. 90년대 중 후반 잘나가던 야후는 검색엔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돈을 벌어주는 건 검색 기능이 아니었다. 야후라는 포탈이었다. 기술보단 홈페이지라는 상품에 집중한 야후는 홈페이지를 사용자들에게 알리는데 있어서 IT 기업이 아닌 미디어 기업과 같은 방법으로 마케팅에 투자하였다. 초기 야후는 뛰어난 마케팅으로 실리콘밸리 IT 업계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야후 스스로도 자신이 기술기업이 될 수 없음을 알아서 였을까? 야후의 첫 페이지는 점점 배너 광고로 현란해 지기 시작했다. 야후의 수익이 전적으로 광고에서 나오기 시작하자 야후는 스스로를 ‘미디어 기업’이라 칭하기에 이른다. 이는 그들이 처음 홈페이지를 열었을 때 컨텐츠를 컴퓨터 기술이 아닌 ‘맥락’ 분류한 방식의 연장선이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홈페이지 운영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였다는 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제품 관리자들은 스스로를 미디어 기업에서나 어울리는 직함인 '프로듀서'라 칭했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자 스스로 미디어 기업이 되고자 뛰어난 프로그래머를 영입하지 않게 되었고 그로인해 소프트웨어 질은 계속 떨어지게 되었다.


MS, 구글 및 페이스북은 모두 인터넷 서비스를 하고 있었지만 야후와 달리 ‘기술’이 중심에 있었다. 야후는 배너라는 수익 모델이 지속 될 것이라 생각했다. 기존의 인쇄 잡지의 광고 지면과 같은 효과가 지속될 것이라 지레 판단했던 것이다. 배너광고가 사용자들에게 효과가 있는지 분석하는 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품 판매 모델을 만들고 수익 기반을 얻었다 해도 나태함은 실패를 부른다. 야후는 기술주도 IT업계에서 미디어 기업이라는 헛된 방향전환으로  좌초되고 말았다. 결국 야후는 구글에 여지없이 패한 후 구글 기술에 중요 역할을 해왔던 전 구글 부사장 메리사 마이어를 CEO로 모셔 온다.


다음시간에는 구글이 어떻게 Yahoo가 넓혀 놓은 광고 수익 모델을 기술로 혁신했는지를 다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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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