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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글에 달린 댓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보니 원자력 발전에 대한 우리 모두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 같아 그 뿌듯함에 심쿵심쿵한 기분이 든다. 물론 여그 딴지일보에서 존경해 마지않는 레이디 가카께서는 어찌 생각하는지 몰라도 반신반인의 딸이니 만큼 뭔가 특별한 생각이 있으심을 의심해 마지않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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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생각이 많은 뇨자 



무튼 오늘은 독일이 탈핵 국가가 된 과정을 함 디벼보자. 지난번 글을 쓴 이후에도 한국 언론은 상당히 심각한 원전 문제를 새로이 지적하고 제기했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우리의 철밥통 원자력 발전소는 오늘도 불량부품으로 중무장하고 달달거리며 돌아가는 발전소를 통해 힘쎄고 오래가는 전기를 쉼 없이 뽑아내 주시고 있다. 


독일의 현재 스코어는 2021년까지 남아있는 원전 17기를 모두 가동중단 시키고 해체과정에 들어간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원자력 발전이 담당하고 있던 전기를 신재생에너지와 친환경에너지로 대체하여 2021년까지 100% 이상의 전기수급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독일은 유럽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인데도 말이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언론을 통해 많이 들어본 내용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독일의 강력한 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그 안에는 생각보다 길고 지루한 싸움이 이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의 상황에 맞춰 저노무 오늘내일~ 오늘내일~ 하며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불안한 한국의 원전들은 어찌 없애 버릴 수 있는지 각자 함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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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를 드는데 저렇게 힘들어 하는건 불량부품 때문이리라.

<출처: 한수원>




반핵운동


오늘날엔 거의 잊혀진 듯하지만 핵무기도 핵발전도 사랑하는 우리 미국느님이 반핵운동 역시 가장 먼저 시작했다. 역시 미제는 뭐든지 빠름 빠름 빠름 미국의 경우 핵무기 생산, 그리고 무엇보다 핵무기 실험에 반대하던 목소리가 반핵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반핵무기 운동은 핵발전소에 대한 반대 목소리로 자연스레 옮겨 왔고 그들의 시위는 60년대에 이미 그 정점을 이루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시위가 그렇듯 시위를 통해 시민들의 뜻을 관철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가뭄에 콩 나듯 성공한 사례가 있으니 바로 1958년 캘리포니아에서 있던 보데가 베이(Bodega Bay) 핵발전소 건립 반대 시위가 그렇다. 


처음 시위대는 크고 아름다운 거대한 발전소 건립이 아름다운 항구인 보데가 베이의 경관을 해칠 것이라며 핵시설의 입주를 반대했었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시위가 이어지던 어느 날, 원자력 발전소 건립과 관계가 있는 내부자가 시위대에 와서 중요한 자료를 넘기고 사라진다. 그가 알려준 내용에는 이곳은 지형적으로 지진의 위험이 있고, 지진이 일어나면 원자력 발전소는 그걸 견딜 만큼 튼튼하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각계의 사람들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검증되고 실제 위험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에 시위대는 불끈불끈 힘을 얻어 더욱 세차게 시위를 하게 되었다. 보데가 베이가 위치한 샌프란피스코의 북부지역은 이미 1906년 거대한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고 이를 기억하고 있던 시민들의 불안감에 더하여 '지진에 안전하지 못한 원전'이라는 구호는 지역의 여론을 완전히 돌려놓는 데 큰 몫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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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진대비 가장 완벽한 건물을 짓는다고 모두가 인정하는 일본 역시

지진 한방에 원전이 빵빵 터져 버리는데 

지진 따위 전혀 일어나지 않을 일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너, 나, 우리 ~ 오늘도 햄 볶아요.



대륙을 건너 유럽으로 넘어가 보자.


유럽에선 의외로 방사선 마피아가 가장 활개를 치고 있다는 프랑스에서 반핵운동의 첫 시작을 알렸다. 프랑스 남자들이 말투가 좀 유들유들해 보일 뿐, 한번 들고 일어나면 무서운 애들 아니던가. 프랑스 혁명을 생각해봐라. 맘에 안 들면 다 때려 부수는 프랑스의 전통은 원전반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1971년 페센하임(Fessenheim)에서 발전소 건설 예정용지를 점령하고 시위한 것을 시작으로  얼마 후 더 큰 점령 시위가 론(Rhône)지방의 뷔제(Bugey)에서 일어났다. 그 해 12월에는 스트라스부르크(Straßburg)의 시위대 대표가 전 세계 50여 명의 반핵 활동가들과 만나 국제적 반핵 조직(antinukleare Internationale)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프랑스는 방사선 마피아의 천국(?) 아닌가. 결과적으로 이 시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시기에 전 세계 반핵 시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아무래도 미쿡 행님이었다. 데이비드 브로워(David Brower 1912-2000)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의 이 아저씨가 주축이 된 반핵운동은 원래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1969년 지구의 친구들(Friends of the Earth)이란 다소 귀여운 이름의 전 세계 첫 환경단체를 만들고 이름과 그닥 어울리지 않게 반핵운동에 온 힘을 쏟았다. 그가 만든 유명한 구호는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 지역적으로 행동하라(think globally - act locally)' 였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마치 지역 이기주의가 막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 구호이다. 하지만 이 말은 반핵 운동에 있어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지역에서의 활동'을 통해 활동가들은 지역의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세계적인 생각'인 반핵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그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저 반핵을 외쳐대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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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생겼다~ 잘생겼다~ 

브로워가 부러워~



그런 브로워씨의 영향을 받아 독일에서도 반핵운동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물론 그 전에 50년대 후반에도 핵발전소 반대 시위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독일에서 초기에 주목받지 못하던 반핵운동은 60년대 말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뷔르가센(Würgassen) 이야기 


1968년 시작된 뷔르가센 원자력 발전소 반대시위는 독일 사민당(SPD)의 국회의원이자 화학과 교수였던 칼 베헤르트(Karl Bechert)에 의해 시작되었다. 62년부터 65년까지 국회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를 이끌던 그는 당시 보고 듣고 모아두었던 내부자료를 68년에 이르러서 언론에 공개한다. 얼마 후 의사이자 활동가인 막스 오토 브루커(Max-Otto Bruker)는 독일 시민신문(Deutsche Volkszeitung)이라는 진보매체에 <뷔르가센 원자력 발전소가 보여주는 -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글을 싣는다. 그리고 그의 글을 통해 독일에서 군사용 핵무기가 아닌 원자력 발전에 대한 논의가 처음으로 불 붙게 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 이러한 것을 지적하는 언론은 한 군데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가 60년대 후반이었으니 지금과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지식도, 사회적 분위기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




뷔르가센의 상황에서 보다시피 우리는 전형적인 그들의 방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언론을 통제하고, 올바르지 않은 정보를 만들어내고 유통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독재정권의 방식은 민주주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뷔르가센 원자력 발전소가 보여주는 - 민주주의의 위기> 中




68년에 반핵 운동 열기가 뜨거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엔 이들의 활동이 그다지 주목 받지는 못했다. 당시 독일뿐 아니라 전 유럽이 68운동의 물결로 물들고 모든 대학은 데모로 인해 개판이 되었던 시기였다. 그런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반핵 운동이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일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활동가들이 마냥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반핵운동은 거리에서 하는 시위를 포기하고 법정으로 끌고 들어갔다. 시민단체와 변호사들이 주축이 되어 뷔르가센의 건설중지를 법원에 호소했지만 아쉽게도 단박에 그들의 뜻을 관철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항소했고 그렇게 법정 공방이 이어지는 사이 아주 운이 좋게도(?) 이제 막 가동을 시작한 뷔르가센 발전소는 몇 번의 고장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72년 뷔르가센 판결이라 일컬어지는 결과를 얻게 된다. 법원은 반핵 활동가들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원자력 발전소 측에 대대적인 안전장치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 판결의 영향으로 국회에선 1959년 제정되었던 원자력 발전 관련 법안도 대대적으로 손보게 된다. 당시까지 핵발전 기술과 발전소의 안전은 똑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법 개정 이후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에 관한 부분이 대폭 강화되었다. 이후 법정에서 활동가들이 에너지 회사들을 상대로 더는 쫄지 않고 싸울 수 있는 기반도 이때 다듬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뷜(Wyhl)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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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2월 18일 수백 명의 시민이 뷜의 원자력 발전소 예정부지를 점령했다. 이들은 72년 조직된 오버라인 지역의 원자력 발전소를 통한 환경파괴 반대를 위한 행동 위원회(Oberrheinisches Aktionskomitee gegen Umweltgefährdung durch Kernkraftwerke) 뭔 시민단체 이름이 이따위로 길어 소속의 시민들이었다. 이들의 점령행위는 그간 원전 반대 시위에서 합법적 테두리를 한 번도 벗어난 적 없는 시위가 과격한 액션으로 넘어간 첫 번째 사건이었다. 


시위에 참여한 대부분의 시민은 근처에 사는 농부들이었으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근처의 와인 생산자들이었다. 시위기간 내내 와인을 홀짝댈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리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근처 프라이부르크 대학생들과 지역의 사냥 동호회가 이 시위에 합류했다. 당시 대학생들이 합류한 것을 두고 고맙긴 하지만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할까 걱정을 하던 시위참가자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대학생들의 좌파운동이 많이 과격했던 것도 사실이고 언론을 통해 그들의 과격성이 더욱 두드러진 것도 이에 한몫했을 것이다. 시위대는 내부적인 회의를 통해 당시 좌파운동을 최일선에서 이끌던 대학생들을 설득하여 그들의 시위를 평화적으로 하기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 


시위대가 공사 예정부지를 점령하고 이틀이 지나자 경찰은 약 650명의 인원과 물대포를 동원하여 공사 예정부지에 있던 시위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사전에 계획한 대로 폭력적인 행동을 전혀 취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경찰에게 진압되어 갔다. 이 장면은 언론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고 다음날 신문에는 끌려나가는 시위대의 모습이 일면을 장식하게 된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독일 전역에서 경찰과 원자력 발전소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18일 시작된 시위가 23일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사람이 합류하여 2만 8,000명의 시위대로 늘어나게 되었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건너온 활동가들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 시위대는 독일 안티 원자력 발전소 캠프(Anti-AKW-Camp)를 만들고 더이상 평화적이지 않은 저항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시위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나고 시위대의 몸과 마음이 지쳐갈 즈음 프라이부르크 행정 재판소는 뷜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부분적 건설허가 취소 처분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공사는 중단되고 만다. 에너지 회사 측은 계속해서 법정에 항소했고 2년이 흐른 후 행정재판소는 조건부 공사재개를 허가해 준다. 다만 공사를 진행하기 전에 안전을 위해 대규모 보강시설을 추가 지으라고 명령했다. 결과를 받아든 에너지 회사는 갑자기 높아진 건설가격 때문에 계산기를 두드려 보더니 이내개 뷜 원자력 발전소 프로젝트를 취소한다는 결정을 하고 만다. 당시 프라이부르크 행정 재판소의 판사는 대단히 용기 있는 판결을 내렸다고 많은 사람에게 추앙을 받았다. 당시가 70년대 중반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 판사 대부분은 원자력 발전소에 우호적인 판결을 내리기에 십상이었다. 그리고 이 시위는 시민들의 승리로 역사에 기록된다.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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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신도 나쁜 놈 큰사진은 없더라.

(열분덜 잘 보시라고 일부러 확대했습니다 - 편집자)



당시 판사가 대규모 보강시설(이름이 Berstschutz라고 하는데 이게 뭔진 모르겠다. ㅜ.ㅜ)을 짓고 공사를 계속 진행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에 대한 또 다른 비화가 있다. 


당시 뷜 지역에서 발전소를 계획하던 회사의 이름은 BASF라고 한다. 그들은 화학 관련 대기업이었는데 이들은 핵발전소를 직접 지어 힘세고 오래가는 전기를 맘껏 사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근처에 RWE라고하는 전기회사가 또 다른 원전을 계획 중에 있었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말이다. 이 계획을 위해 RWE에서는 하인리히 만델(Heinrich Mandel)이라는 사람을 내세우게 된다. 그는 후에 일명 '핵교황'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여기서 교황이 요즘의 교황처럼 꼭 좋은 의미만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그는 근처에 지어질 예정이었던 뵐 발전소를 무너뜨리기 위해 독일 연방 학술부(Bundesforschungsministerium)에 대도시 인근 원자력 발전소는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슬쩍 흘린다. 그리고 그걸 보강할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조언을 하고는 공사 가격을 확 높아지게 만듦으로써 경쟁회사가 프로젝트를 취소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의 입김에 따라 당시의 장관이 장단을 맞추며 BASF사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공공연히 반대하고 나서게 되었다.


BASF사의 사장은 RWE에 대해서 야비하고 잔인한 행위라고 욕을 해댔지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거의 없었다. 현역 장관이 반대하고 시민들이 반대하니 사실 판사로서는 판단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적 느낌이 들지만, 판사는 시민들의 안전을 위한 권리라는 대명제하에서 이러한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핵교황은 그 이후에도 거침없이 자신의 핵사업을 확장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모든 일이 핵교황 만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미 60년대에 미쿡에서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기술적인 우려가 담긴 자료들이 많이 나왔고 그로 인해 뉴얔 근처에서 진행되던 원자력 발전소 프로젝트 레이븐스 우드가 안전을 이유로 중지된 일도 있었다. (뭐 그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것은 찾아서 자세히 읽어봤으나 아무리 사전을 뒤지고 따져봐도 까만 건 글씨요 하얀 건 종이일 뿐이더라. 무식한 문과생이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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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발전은 누군가의 경제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너님은 절대 아니다. 




헛발질의 시대


무튼 그런 미쿡의 똑똑한 활동가들과 반원자력 전문가들의 연구로 인해 독일에서도 원자력 발전소의 대형사고에 대한 우려가 점점 커져갔다. 당시에도 수시로 일어나던 자잘한 사고들을 통해서 언젠가 대형 재난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었고 그럴수록 시위대와 원자력 업계의 싸움은 점점 더 급진적으로 변해갔다. 당시의 원자력 발전을 반대하던 사람들의 분위기는 현재 전 인류가 핵무기에 반대하는 상황과 비슷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핵운동에 대학생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다. 


당시 대학생의 분위기를 살펴보자. 아무 의미도 명분도 없는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학생들은 서방세계의 정책에 대해 특별히 크게 반대할 명분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게다가 68운동 이후 극좌파는 그들의 테러와 폭력성으로 인해 명분도 실리도 잃은 사회의 악이 되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당시 68운동을 했던 학생 중 일부는 자신들을 이론적으로 또 철학적으로 단단히 무장시키려 도서관에 처박히기 시작했고, 이전처럼 어디선가 데모가 있다고 무작정 참여하기를 거부했었다. 당시 이러한 분위기는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원자력 발전 반대를 위한 이론적인 또는 정신적인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거기에 당시 유행하던 네오막시즘 내에서는 '사회적 발전은 생산력의 향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는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학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퍼져있었고 이는 지식인들이 새로운 20세기의 신기술들을 찬양하도록 유도했다. 그러한 이유에서 원자력 관련 기술은 진보된 기술의 결정판으로 취급되었으며 많은 지식인이 이 신기술을 앞다투어 찬양하기도 했다. 독일 68운동의 아이콘이었던 루디 두치케 조차 이러한 원자력 기술을 신봉하며 원자력 업계 사람들보다 더욱 열심히 원자력 발전을 찬양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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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그룹도 종북은 아니네..



그렇게 68세대의 주축 세력들이 힘을 잃고 또 누군가는 원전을 찬양하고 다른 누군가는 도서관에 처박혀 철학책을 읽기 시작하자 시위현장에는 급진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마오쩌둥을 따르는 케이그룹은 원전 반대 시위 현장에서 그들의 급진성과 폭력성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당시에도 원전은 규정상 농부들이 주로 있는 곳 즉 인구밀도가 높지 않은 곳에 주로 지어졌다. 설령 그런 시설들이 농민들의 삶을 터전을 파괴할지라도 경제라는 미명하에 소수에 불과한 농민들은 항상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 농민들의 원전 반대 동맹이 어느새 마오이즘의 물결로 뒤덮이고 시위는 점점 더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농민들과 학생들의 쌈박질연합은 트랙터로 원전 공사부지 입구를 막고 조직적으로 경찰들과 폭력적인 충돌을 벌이며 상황을 키워갔다. 


1977년 브록도프(Brokdorf)와 그론데(Grohnde)지역에서 경찰과 시위대의 무력충돌은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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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록도프의 시위대와 경찰.

양보는 없다



1975년에 있었던 대학생들과 와인 생산자들의 평화롭고 알흠다운 꼴라보레이션인 뷜 연합의 시위는 성공한 역사로 기록되어있다. 그로 인한 문학도 많이 나왔고 반핵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날도 멀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케이그룹이 시위에 참여함에 따라 학생 - 농민 연합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여론도 등을 돌리고 만다. 마치 전쟁과 같은 반원자력 시위 장면들은 연일 언론을 도배했고 시위대의 자극적인 행동과 폭력성은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사법당국의 역시 그러한 시위대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진 않았고 법정에서 브록도프와 그론데의 원자력 발전소 반대소송은 번번이 패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시위대의 폭력성에 비례하여 경찰력의 과잉진압도 점점 더 심해졌고 평화적인 원전 반대자들의 집회조차 경찰들의 무자비한 곤봉이 날아들었다. 그로 인한 양측의 충돌이 점점 더 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시위대의 폭력성에만 처벌을 내리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 언론이, 사법당국이 그리고 시민들의 여론이 원전 반대자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자 자연히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힘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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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후반 이렇게 원전에 반대한 시위가 거의 사그라질 즈음 독일 반핵 운동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고를레벤 프로젝트(Gorleben-Projekt)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