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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직후 일본 육군과 해군은 서로 다른 적을 만들었다. 대륙진출을 전제로 한 육군은 러시아를 계속 가상적국(국방 정책을 세울 때 적국으로 상정하는 나라)으로 두고, 해군은 미국을 가상적국으로 선정한다. 이 때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지는데, 러일전쟁 직후인 1907년에 일본은 ‘제국국방방침’을 확정한다. 이 제국국방방침은 1918년, 1923년, 1936년 3차례에 걸쳐 개정되는데, 일본의 군비증강과 누구와 싸울지를 결정하는 고민의 흔적이었다.


1907년의 제국국방방침을 보면, 육군의 평시 25개 사단, 전시 50개 사단 체제로 되어있다. 해군의 경우 그 유명한 ‘88함대 프로젝트’를 내놓기도 했다. 해군은 전함 8척, 순양전함 8척으로 구성된 ‘88함대’를 편성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88함대.jpg


1907년 이미 일본의 군부는 민간의 통제 밖에 있는 조직이 돼 있었다. 군대란 국가가 휘두르는 합법적인 폭력이며 한 국가의 주권이다. 이 폭력을 다루는 군대가 ‘합법적으로’ 정치까지 개입한다면?


당시 일본은 합법적인 군사 국가였다. 문제는 이 군사 국가의 두 축이었던 육군과 해군이 서로 다른 적(敵)을 상정해 놨다는 것이었다.  육군의 경우는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한결 같이 ‘대륙팽창’을 말했다. 조슈번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대장(훗날 수상의 자리에까지 오른다)은 참모본부 시절 국방방침을 입안했다. 


“섬나라를 탈피하여 대륙국가가 되어 국운을 신장해야 한다. 조선과 남만주는 이런 대륙국가의 중요 부분이며...”


보면 알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대륙을 고집했다. 그 결과가 육군 주도로 이루어진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이었던 것이다. 러일전쟁 말기부터 구체적으로 만주 진주와 통치에 대한 구상이 나왔고, 의화단 사건이 터진 후에는 만주에 ‘신일본’을 건설해야 한다는 보고가 나올 정도였다.


만주.jpg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꿈에 그리던 만주를 정복한다.


반면 일본 본토의 경우는 일본 육군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해군 역시도 러일전쟁을 치른 이후 일본의 미래를 구상하는데,


“동아시아의 해양 주도권은 이미 일본이 쥐고 있다. 이제 남은 건 태평양으로 서진(西進)하고 있는 미국을 견제하며, 동아시아의 일본 세력권을 지켜내는 것이다.”


똑같은 전쟁을 치렀음에도 육군은 대륙으로의 진출을, 해군은 해양으로의 진출을 원하고 있었다.


하나의 국가에 있는 두 개의 군대가 서로 다른 적을 상대로 싸우겠다고 말하며 서로 다른 국가전략 목표를 내놓는다는 게 가능할까? 현대 국가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군대가 국가전략 목표를 내놓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만약 러일전쟁 직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본의 이 무모한 구상과 전략은 물거품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도움이었는지 세계는 전쟁의 화마에 휩싸였고, 일본의 이 무모한 구상과 전략은 구체화됐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질 때까지 일본은 ‘전쟁국가’의 길을 걷게 된다.



러일전쟁이 남긴 것


국제정치학적으로 러일전쟁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국제정치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전쟁’


이라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라는 대제국을 상대로 보여준 일본의 승리는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컸다. 흑선에 의한 개항 이후 불과 60여년 만에 국제 사회에 당당히 그 이름을 내밀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는 점, 아시아 국가로서 최초로 근대의 길을 걸었다는 점, 식민지가 아닌 제국으로 발돋움 한 최초의 아시아 국가라는 점, 그레이트 게임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전쟁이란 점, 조선의 최후를 결정지은 전쟁이자 제국주의 시대 마지막 제국을 결정짓는 전쟁이란 점 등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러나 국제정치가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 본 러일전쟁을 정리하자면,


‘지옥’


이었다. 러일전쟁은 그 자체로 지옥이었으며, 그 이후의 사람들에게도 지옥을 선사해줬다.  아울러 전쟁 당사자가 아닌 주변인들에게 20세기의 전쟁이 어떤 양상으로 벌어질 지에 대해 예비견학을 시켜줬다.


<언덕위의 구름>에서 이를 잘 표현한 문구가 하나 있다.


‘근대의 힘’


산업혁명의 힘은 군대의 전략과 전술을 순식간에 뒤바꿔 놓았다. 기차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속도의 향상, 기관총과 중포의 등장으로 인한 압도적인 대량살상 능력은 인간의 예상을 뛰어 넘었다. 근대의 힘은 공격자보다는 수비자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안겨주었다.


러일전쟁은 이 근대의 힘을 ‘육탄돌격’으로 상대했던 전쟁이기도 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일상화 된 자본주의의 삶 속에서 전쟁도 자본주의에 따라 흘러가게 되었고, 인간의 생명은 총탄 앞에서 한 없이 가벼워졌다. 재미난 사실은 이 모든 걸 지켜본 유럽의 제국들이 10년 뒤에 이와 똑같은 전투를 치렀다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4년 반씩이나 말이다.


어쨌든 당시 일본 국민들은 러일전쟁을 ‘승리’라고 생각했다. 승리를 했기에 오히려 불행해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 이전에 러일전쟁을 ‘승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전략적인 면에서의 승리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 전투에서의 모습을 보자면 이건 ‘대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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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3고지>의 한 장면)


203고지로의 닥치고 돌격은 일본 군부의 무능함을 고스란히 보여준 하나의 촌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어떠한 교훈도 도출해 내지 못했다. 오히려 이를 확대재생산해서 일본군의 교리로 받아들인다.


“정신력이 화력을 이겨낼 수 있다.”


“사람보다 물자가 더 소중하다.”


란 이상한 논리가 일본군에게 확고하게 박힌 것이 바로 러일전쟁 때다. 일본은 가난한 나라였고, 소모전 양상으로 흐르는 근대전의 물량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강조된 논리였다. 육군대학 출신들의 참모들은 일본 최고의 엘리트들을 자부하는 이들이었지만 그들이 내놓은 논리는 전쟁에 미친 광신도들의 헛소리처럼 들렸다. 이제 일본 국민들은 세금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목숨까지도 국가에 헌납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지옥이 열린 것이다.


일본 국민들은 청일전쟁으로 시작된 전쟁국가의 길을 러일전쟁에서 확립했고, 이후 2차 세계대전까지 전쟁국가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전쟁터에 끌려 나가지 않아도 전비로 내놓아야 하는 세금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전시 때에는 세금과 생명을 같이 내야했고 평시에는 생명보다 소중한 돈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이는 농담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덕분에 한숨을 돌릴 수 있긴 했지만 대공황이 터지면서 일본은 다시 위기에 빠져들었고 이후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순을 밟는다.


일본 국민들은 경기가 좋든 나쁘든 전쟁을 하든 하지 않든 언제나 희생을 해야 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지금의 기준으론 이해하기 어렵지만, 평시 때에도 일본인들은 과도한 세금부담 속에 살아야 했다.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해 딸을 팔거나 생명을 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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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건조된 최초의 전함인 사쓰마 전함


그 중심엔 ‘전함’이 있었다.



전함...그 피할 수 없는 유혹
 
북한이란 나라를 한 번 떠올려 보기 바란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 독재를 하는 나라(공산주의는 옛날에 물 건너갔고, 이 정도면 왕조국가로 봐야 한다)에서 제일 먼저 내세우는 게 뭘까? 바로 ‘군대’다. 김정일 시절부터 내세운 ‘선군정치’는 국가의 모든 정책결정 사항에서 군대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군대를 최우선에 놓고, 군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병영국가다. 재미난 사실은 이렇게 챙기는 군대를 김일성 3대가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말일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총부리를 자신에게 겨눈다면 권력은 물론 생명까지도 위협받을 테니 말이다. 때문에 북한은 지휘관을 감시하기 위해 정치장교를 두고 이 정치장교를 감시하기 위해 보위부원을 둔다. 이런 구조라 당연히 지휘체계는 복잡해지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에 시간이 걸린다.


북한은 병영국가이다. 모든 사회시스템이 군대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돌아갔고, 그 결과 전체 예산의 1/3을 군대에 배정한다. 놀라운 건 그 병력의 숫자다.


국가의 평시 상비군 수준의 마지노선은 전체 국민숫자의 7% 수준이다. 이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사회는 심각한 압력을 받는다. 사회에 나와 생산과 소비를 해야 할 인구를 군대에 집어넣어 사회가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어떠한가? 현역군 119만, 예비군 77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 달 안에 1천 만의 병력을 동원하는 나라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겉으로 보이는 북한의 모습은 어떤가? 정상적인 국가로 보이는가? 앞으로 발전가능성이 보이는가?


러일전쟁 직후의 일본이 이러했다. 북한처럼 인원을 뽑아간다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국민들의 세금을 쥐어짰다. 명목상 북한의 군사비 예산은 전체 예산의 1/3이다. 물론 다른 예산에 숨어있는 국방예산을 포함한다면 그 비율은 올라가겠지만, 명목상은 전체예산의 1/3이다.


1921년 일본의 해군 건함사업예산은 일본 전체 예산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국가 예산의 1/3을 전함을 만드는데 쏟아 부은 것이다. 이게 정상적인 국가일까? 물론 같은 시기에 다른 세계열강들도 건함경쟁에 뛰어들어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다. 그 와중에도 일본은 상황이 심각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얼떨결에... 소 뒷발에 쥐 잡는 격으로 세계 5대 열강의 자리에 올라선다. 러일전쟁과 뒤이은 제1차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으로 일본 육군은 러시아의 남하걱정 없이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카드를 쥐었고, 덕분에 ‘영일동맹’은 의미가 없어졌다. 러시아란 적이 사라짐에 따라 일본은 마음 놓고 대륙에 진출 할 수 있는 상황이 온 것이다.


해군 또한 쓰시마 해전을 통해 러시아 해군력을 전멸 시킨 일본 해군도 동아시아 최강의 함대를 꾸릴 수 있게 됐다. 상식적인 국가라면 여기서 국가의 역량에 걸 맞는 군사력을 갖추려 했을 것이다. 눈앞의 적이 사라졌으니 팽창보다는 지금 확보한 영역에서 내실을 다지는 방법으로 군사력을 조정하고, 여기서 남은 힘을 사회의 다른 분야에 돌리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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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함대의 1번함이었던 나가토 전함


쓰시마 해전 이후 일본 해군의 발언권은 엄청나게 강해진 데다 군부의 팽창주의적 사고가 결합됐다. 최종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돈의 힘’이라는 혜택이 일본 사회 전체에 뿌려졌다. 러일전쟁 직후에는 채무국이던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채권국으로 발돋움 했고, 일본에 돈이 돌기 시작했다. 그 돈을 목격한 일본 해군은 88함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물론 아무리 호경기라 하지만 당장 88함대를 건설한다는 건 무리였다. 때문에 1916년에는 84함대, 1918년에 86함대에 이어 1920년에 88함대를 편성할 것을 의회에 ‘요구’했다.


1920년대까지의 일본 경제상황을 고려한다면 8척의 전함과 8척의 순양전함을 갖추는 88함대 계획안이 무모하다고 보긴 어려웠다. 문제는 전함의 가격이 계속해서 올라갔다는 것이다.


다음에 기술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러일전쟁의 여파로 세계 해군은 전혀 다른 ‘도전’에 직면한다. 바로 드레드노트급이다.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한 것과 같다.


이 드레드노트의 탄생에 일조한 것이 바로 ‘쓰시마 해전’이다. 드레드노트 건조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영국의 피셔제독이 쓰시마 해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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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나온 영국의 HMS 드레드노트


실제로 이 드레드노트급의 등장으로 세계의 모든 함선들은 한순간에 ‘구식전함’이 됐고, 각국은 이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만들기 위한 건함경쟁에 뛰어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과정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드레드노트급의 등장이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원인이기도 하다. 바다를 지배하는 것이 곧 세계를 지배하던 당시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드레드노트급의 등장은 그것을 뒤집었고, 세계의 모든 군사전략가와 관계자들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당장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급함이 건함경쟁을 불러 일으켰고, 점점 벌어지는 드레드노트급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해 차라리 전쟁을 일으키는 게 낫다는 판단까지 이어졌다. (다음 연재물인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시리즈에서 20세기 초반의 건함경쟁과 이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를 소개하겠다)


러일전쟁은 그렇게 새로운 전쟁을 잉태했다.





연재를 마치며


러일전쟁 시리즈가 끝났다. 전쟁의 뒤에 숨어있는 ‘정치의 세계’를 끄집어내는 것이 시리즈의 목적이었는데 잘 전달됐는지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러일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많이 해 왔으니 다음 시리즈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며 마무리 할까 한다.


러일전쟁은 20세기의 시작을 알린 근대국가간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양상은 그 후 10년 뒤에 스케일이 확장 돼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러일전쟁이 뿌려놓은 정치적 문제, 군사적 문제가 그대로 표출되어 국제정세가 요동친다.


다음 시리즈(?)라고 할 것 까진 없지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통해 세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일본이 어떻게 전쟁국가의 길을 이어나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하다 보니 계속 일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지금의 동북아 정세를 지켜보면 20세기 초중반의 동북아를 소개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거창하게 역사를 알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판단근거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썼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남자다움’의 결정판인 전함들의 전쟁을 이야기 해보겠다. 그럼 그때 보자.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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