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4. 화요일
sydney
편집부 주 어느 날, 회사 대표메일로 날아든 한 통의 메일,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다 메일을 보낸다는, 딴지일보 창간부터 독자이며 연식 좀 나간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 편의 글과 함께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이런 류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딴지 밖에 없을 것 같아서 보냅니다. 젊은 세대들이 알아야 할 월남전의 진실, 이제까지 아무 곳에서도 알져지지 않았던 월남전의 실상들을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흥미위주로 썼습니다." 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꿀잼 허니잼이니 함 읽어보시고 의견들 주시면 좋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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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돌아 올 수 있을까?
미군 수송선의 선실은 마치 영화 <빠비용>에 나오는 죄수 호송선 같았다. 누에가 고치를 치기 위해 시렁 위에 누운 것처럼 병사들은 3층짜리 철제 침대 위에 올라가서 잠을 잤다. 코를 찌르는 바다냄새, 병사들의 땀 냄새가 뒤죽박죽이었지만 전쟁터로 가는 길이었기에 불평스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
수송선에서의 하루는 눈을 뜨자마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끼니때마다 식당 앞에서부터 배의 좁은 복도를 따라 줄줄이 늘어서야 했다. 1,000명이 좁다란 선내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니까 밥 한 끼를 먹으려면 두 시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벽의 서울역 대합실처럼 썰렁한 분위기를 풍기는 통로에 줄지어 서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해 밥을 타 먹느라고 하루에 여섯 시간을 보냈다. 아침 먹고 조금 있다가 줄 서서 점심을 먹고, 조금 있다가 또 줄을 서서 저녁을 먹으면 배 안에서의 하루 일과가 끝났다. 줄을 서는 것이 귀찮아서 한 끼쯤 밥 먹는 일을 거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노는 셈치고 줄을 서서 노닥거리는 것이다.
줄을 서는 것은 식사 때만이 아니다. 아침이면 화장실 앞에도 병사들이 길게 늘어서서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밥 먹는 줄인 줄 알고 무턱대고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 보면 화장실 가는 줄이기도 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곳곳에서 사천만의 오락인 화투판이 벌어졌다. 배 안에서는 한국 돈은 쓸모가 없고 달러는 아직 받지 않았기에 배급받은 양담배를 걸고 화투를 쳤다. 나는 화투를 할 줄 모르고 담배도 피우지 않아서 심심풀이로 밑천이 필요한 병사들을 대상삼아 내가 받은 담배를 이용해 이자놀이를 했다. 사흘이 지나자 내 더블백에 다 들어가지가 않을 정도로 담배가 많아졌다. 담배를 벌어들이다보니 사채시장의 돈놀이꾼들이 돈 버는 재미가 이런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나중에 하선 하자마자 정신없이 배치를 받아 가는 판에 큰 더블백을 짊어지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닥치는 대로 주변 전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았다.
1969년 월남에서 돌아온 한 병사의 귀국 기념품
닷새 동안의 불안한 항해가 끝나고 곧 퀴논에 상륙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모두들 마음이 뒤숭숭해서인지 갑판에 나와 하루 종일 서성거렸지만 어두워질 때까지 육지는 보이지 않았다.
부산항을 떠난 지 엿새 되는 아침, 남보다 먼저 잠자리에서 일어나 선실의 문을 여는 순간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바람이 ‘훅-’ 하고 콧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놀라서 어디서 ‘불이 났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배는 이미 밤새 퀴논 항에 도착하여 부두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뜨거운 열기 속에서 호흡을 다시 한 번 가다듬었다. 아직 새벽이어서인지 그런지 쥐죽은 듯한 부두의 모습이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월남 땅을 처음 본 순간 이제까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내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날이 완전히 밝았졌다. 부두에 내린 우리들을 환영하는 공식 행사는 없었다. 그 대신에 야전잠바를 입은 부관부 준위가 어깨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서서 우리를 기다렸다. 찌는 듯 한 더운 날씨에 더욱이 대낮에 준위가 왜 야전잠바를 입고 왔을까 하는 의문은 곧 밝혀졌다. 현장에서 금반지로 된 짜웅 '뇌물' 을 받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소문에 의하면 병력이 도착할 때마다 야전잠바 주머니가 축 늘어질 정도로 금반지를 걷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준위의 야전잠바는 그 후에 내가 목격한 주월 한국군의 엄청난 부패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나는 병사들이 하도 잘 죽는다고 해서 '병력을 보내나 마나' 라는 소문이 붙었다는 일명 도깨비부대로 떨어졌다. 우리들은 닌호아에 있는 사단 사령부로 가는 병력과는 달리 도깨비 부대가 있는 투이호아로 가기 위해서 사단 부관부의 준위가 부르는 대로 대열을 이루었다. 미군이 대부분 철수한 퀴논 비행장은 그야말로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더블백을 어깨에 메고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며 기다리고 있는 쌍발 프로펠러 수송기의 활짝 열려 있는 뱃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원래 화물을 나르던 수송기는 안에서 밖이 훤히 내다보여서 '이 비행기가 날 수는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폭음과 한증막 같은 바람 속에서, 비행기 바닥에 더블백을 깔고 쭈그려 앉은 우리들은 비행기가 날기를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갑자기 뭐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우리들의 염려를 무시하는 듯이 300명을 태운 고철덩어리는 활주로를 힘겹게 벗어나 날기 시작했다.
30 분쯤 지나 우리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사막에 도착했다. 그곳은 활주로만 있는 야전비행장이었는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앞뒤에서 기관단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는 수십 대의 무장트럭이었다. 마치 소떼를 몰듯 정신없이 몰아치는 인솔 하사관들의 고함소리에 쫓겨 올라타자 트럭은 전속력으로 사막을 가로질러 달리고 또 달렸다.
얼마 뒤 마치 사막 한가운데 있는 외인부대의 기지처럼 겹겹이 두른 철조망 담을 몇 개 지나서 부대 안에 있는 교육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머나먼 월남 땅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는 따뜻한 위로나 격려의 말 한마디는 고사하고 “이 새끼들 좆 빨려고 월남 왔나?” 며 조교들이 정신을 못 차리도록 기합을 주고 숨이 턱에 닿도록 더블백을 짊어진 그대로 뺑뺑이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부터 들고 온 관물들이 가득한 40 Kg 더블백을 둘러메고 뜨거운 모래밭인 연병장을 돌면서 월남에 도착하는 첫 순간부터 기합으로 일관하는 한국 군대는 참으로 구제 불능의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신입병들이 딴 생각 못하도록 군기를 잡는 일종의 일본식 군대의 운영방법이었다.
다시 교육대에서 2 주간 현지 적응 훈련을 받았다. 교육대의 소대 막사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땅을 파고 들어가 반지하 연립 마냥 벙커로 만들어졌다. 마치 움막같이 생겨서 한국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벽에는 모래를 넣은 마대가 차곡차곡 쌓여 있고 지붕위에도 마대를 몇 겹씩 얹어놓았다. 날씨가 더우니까 문이나 창은 없고 밤에 잠을 잘 때는 모기장을 치고 잤다. 밤에도 등화관제를 해야 했기 때문에 불을 켤 수가 없어 막사 안은 항상 어두웠다.
부대가 모래뿐인 사막에 있기 때문에 날마다 땀으로 목욕을 하며 며칠을 지냈더니 온 몸에서 소금기가 버석버석 거렸다. 군복에는 소금기가 허옇게 베어 나왔고 내무반에 들어서면 소금기에 찌든 냄새가 진동했다. 급수트럭으로 물을 하루에 한 번씩 보급해주는데 급수사정이 나빠서 샤워는 고사하고 세수할 물도 부족했다. 어쩌다 운 좋게 수통 3개에 물을 채울 수 있으면 손수건에 물을 적셔서 대강 목욕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조건이었지만 우리들 300여명의 교육생들은 훈련이 끝나면 곧 바로 전투현장으로 투입이 될 처지였기 때문에 보름 동안 한눈 팔 사이가 전혀 없을 정도로 맹훈련을 받았다.
보통 군대에서는 훈련받을 때 적당히 요령을 피우려는 것이 피교육자의 상식이다. 그러나 월남에서의 훈련은 경우가 달랐다. 교육생들 입장에서도 제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훈련에 임해야 할 판이었다. 교육생들이 자발적으로 훈련을 열심히 받으려고 하니 군대의 다른 교육처럼 기합을 받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 심각한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그것은 하사와 병장 사이의 권위 문제였다. 군대 짬밥을 먹을 만큼 먹은 사병들과 6 개월간의 하사관학교 교육을 받고 바로 하사 계급장을 단 일반하사들과의 갈등은 한국의 군대안에 어디에나 존재했다. 짬밥이 많은 병장이 교육 마치고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신임 하사에게 고분고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국내에서는 티격태격 하면서도 그럭저럭 지냈다.
그런데 엄연히 하사가 분대장으로서 지휘권을 가져야 하는 전쟁터인 월남에서는 하사의 권위가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권위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서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론적으로 교육은 그렇게 받았어도 잘되지 않는 것이다. 본국에서 하사와 어영부영 맞먹고 지내던 병장들이 월남에 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하사들에게 고분고분해 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미 고국의 파월 훈련소에서 한 달 동안 같이 훈련을 받고 같은 배를 타고 와서 함께 교육 받는 교육생들끼리 사병과 하사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 한다는 것은 더욱 곤란한 일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파월 장병들의 이런 풍조를 잘 알고 있는 교육대에서 훈련 기간 중에 하루 날을 잡아서 조교인 하사들과 교육생 하사들이 짜고 사병들을 반쯤 죽여 군기를 잡는 비공식 교육과정이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도록 기습적으로 진행되었다.
재앙은 달이 뜨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느닷없이 비상이 걸려 집합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필 왜 달이 없는 날이냐 하면 어두워서 사병과 하사들이 서로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병장에 집합 한 후 교육생들과 하사를 분리 시켜놓고 조교 중에 가장 악명이 높은 고참 하사가 사열대에 올라서서
“여기는 전쟁터이기 때문에 오늘 기합을 받다가 너희들 중 한 놈쯤 죽어도 사고처리 하면 그만이다.”
라고 겁을 잔뜩 주었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을 몇 번 하더니 '포복 앞으로!'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는 끝이다. 계속 앞으로 전진이다. 연병장을 무릎과 팔로 기어서 몇 바퀴 도는 것이다. 그러나 훈련소에서 갓 전입해 온 신병들도 아니고 본국에서 나름대로 군대생활에 이력이 붙은 월남 전입병들에게 조교들의 공갈이 쉽게 먹혀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군대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겁주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어쭈? 겁 주는데?'하며 형식적으로 적당히 슬슬 포복을 했다. 그러나 그날은 그게 아니었다.
조교들은 반복되는 교육을 통하여 교육생들의 이런 심리까지 파악을 하고 있었다. 조교들이 점점 살기가 등등해서 날치는 것을 보고서야 ‘어이구. 이거 장난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이날 밤 기합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사병들이 하사들을 무서워하도록 만들 것. 정상적인 교육을 통한 설득으로 위계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루 밤에 사병들을 길들이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하사들의 친위 쿠데타인 셈이다.
조교들은 교육생 하사들에게 기어 다니는 사병들이 요령을 부리면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리도록 명령했다. 하사 조교들은 사병을 감시하지 않고 교육생 하사들을 감시했다, 사병들을 다루는 것이 시원치 않은 교육생 하사들에게 '그렇게 밖에 못해?'하면서 무자비하게 군화발로 걷어찼다. 조교 하사는 교육생 하사들을 조지고 교육생 하사는 사병들을 조지는 것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교육방법이기 때문에 장교들은 전혀 개입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알고도 모르는 척 해주고 있었다. 제법 각본이 치밀하게 짜여 있는 셈이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처음에는 마음에 걸려 머뭇머뭇 거리던 교육생 하사들도 나중에는 눈에 핏발이 서서 사병들을 잡아먹을 듯이 날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중에도 마음이 약한 교육생 하사들은 조교들이 미친 듯이 날뛰는 중에도 차마 연병장 바닥을 포복으로 박박 기는 동기생들을 때리지 못해 흐느껴 우는 이들도 있었다. 삽시간에 평소에 만만하게 보던 교육생 하사들이 퍼붓는 매와 하사 조교들이 퍼붓는 욕설이 난무하는 공포의 밤이 되었다.
야간에는 철모 뒤에 은박지로 표시한 비표로 아군끼리 계급을 구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날 밤은 악을 써대며 닥치는 대로 손과 발로 치는 하사 조교들과 일체 소리를 내지 않고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교육생 하사들과 무릎과 팔뚝이 모두 까지도록 연병장 바닥을 설설 기어 다니는 사병으로 구분이 되었다.
교육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날 아침부터 하사만 보면 저절로 경례를 하기 위해 손이 올라가고 식사 시간에 배식은 물론 취침 시간에 모포를 까는 것까지 분대장을 받들어 모시도록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조교들이 계획한대로 하사들의 권위가 하룻밤에 완벽하게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기성부대에 배치되면 분위기에 따라서 저절로 될 일을 야만스럽게 저지르는 이런 행태가 저질 군대 문화의 단면이라고 하겠다. 힘을 가진 자들이 옳다고 생각하면 야만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단 번에 고치려고 하는 것이 군대문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공 시절 박정희가 국가재건 최고위원회를, 5공 시절 전두환 정권이 국가 보위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해서 사회악을 일소한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삼청교육대로 보내서 원한이 사무치게 만들던 일도 바로 그런 발상에서 나온 일이다.
기다림의 전쟁
보름간의 현지 훈련을 마치고 드디어 중대에 배치되었다. 미군이 연대나 대대 급으로 주둔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중대단위로 작전지역을 나누어 공군이 없는 베트콩이 접근 할 수 없는 고지대에 3, 4 중 철조망을 치고 진지를 지어 주둔 했다. 그 때까지 '뭉쳐야 산다'는 고전적인 전술을 고집하고 있었던 미군은 한국군이 이렇게 "흩어져야 산다."는 전술을 펴자 처음에는 위험한 전술지역에서 소규모의 부대가 고립해서 주둔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 없다며 매우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치 두더지가 굴을 파고 들어가 앉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고립되어 벽을 쌓고 사는 것 같지만 명령이 내려지면 가까운 거리의 기지에서 나와서 작전과 매복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비교적 사상자가 적은 것으로 판명되자 나중에는 미군도 따라 해보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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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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