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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6. 목요일

스케치북 







"독일은 룰에 미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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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독일인들 스스로가 하는 말입니다. '무엇을 하면 안된다', '무엇을 해야 한다' 등의 규제, 규정 등으로 똘똘 뭉친 나라라고 해도 될 정도죠. 그걸 잘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교통표지판이 아닐까 싶은데요.


독일 전역에는 약 2200만 개의 교통표지판과 7만 개의 신호등이 설치돼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매일 매일 이 교통표지판의 양은 늘어가고 있고 여기에 드는 비용만 해도 엄청나다는데요. 최근에도 새로운 교통표지판이 심의를 통과해 설치가 될 모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독일 운전자클럽인 아데아체의 자료에 따르면, 운전자가 1초라는 시간 안에 인식할 수 있는 교통표지판은 3개 정도라고 하는군요. 문제는 독일에서 차량 소통량이 많은 대도시에선 이미 이 한계선을 넘어섰다는 것이죠. (우리는 잘 모르는 독일 교통표지판 <-- 여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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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어느 도시 풍경. <사진=3d-fahrschule.de>



심지어 교통표지판을 흉내낸 이런 것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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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좀, 화장실을 이용하라고!!" 라고 되어 있네요. <사진=autobild.de>



독일 내에서도 이런 복잡한 교통표지판 정책을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많습니다. 특히 그 어떤 나라보다 교통표지판이 많지만 영국이나 스웨덴 등의 국가보다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더 많다는 사실에서 이런 것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요. 우리나라의 교통사고율이나 사망자 수를 생각하면 부러운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느낌입니다.


어쨌든 안전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다양한 논의들은 의미 있다고 보여지는군요. 그런데 이런 논의들 속에서 아주 특별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는 독일의 작은 도시가 있어서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독일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봄테(Bohmte)가 바로 그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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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테 시의 대표 이미지 중 하나가 요런 기차역이라니...<사진=위키피디아>



도시라고 하면 뭔가 좀 화려하고 해야 하는데 이곳은 인구 15,000명 미만의, 우리나라로 치면 면정도 규모밖에 안되는 그런 작은 도시입니다. 주변에 유명한 관광지도 없고, 멋진 고성이나 뛰어난 자연경관도 없는 그런 아주 작은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가 오래 전부터 독일 언론 뿐 아니라 해외 언론들에게까지 소개가 되고 있죠. 왜 그럴까요?


특별한 이유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이 도시엔 어떤 교통표지판도 없다는 점입니다. 교통표지판만 없는 게 아니라 신호등도 없고, 심지어 횡단보도의 흰색 표시도 아예 없습니다. 당연히 인도와 차도의 구분도 없죠.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쉐어드 스페이스의 시범 도시 봄테(Bohm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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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테의 중심 도로. <사진=bohmte.de>



2008년 여름, 봄테의 중심 도로 모습입니다. 회전교차로가 있지만 보통 그 주변에 있는 횡단보도의 모습이 안보이죠? 바로 유럽연합 차원에서 실행하고 있는 쉐어드 스페이스 (shared space, 공유공간) 프로젝트 때문에 봄테는 유명해졌습니다. 쉐어드 스페이스? 무슨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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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어 스페이스 표시. <사진=위키피디아>



쉐어드 스페이스는 보행자와 자전거, 그리고 자동차 등이 모두 한 도로를 공유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스 몬더만이라는 네덜란드 교통공학자에 의해 알려진 도로환경인데요. 보행자 안전과 차량 통행의 원활함을 위해 그동안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고 각종 교통표지판 등을 설치하였으나 오히려 운전자들은 배려심이 없어졌고, 타성에 젖은 운전으로 사고를 더 유발시킬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몬더만 씨는 일정 속도 이하에서 운전자는 보행자와 시선을 맞추고 긴장을 하면서 운전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는 안전하면서도 흐름이 원활한 도로를 만들기 위해 차도와 인도의 구분을 두지 않고 교통표지판을 없애자는 운동을 평생에 걸쳐 전개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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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몬더만 (1945-2008) <사진=위키피디아>



구체적으로 하나 예를 들어 볼게요. 한스 몬더만 씨는 차량이 다니는 도로를 제한하지 않고 인도와 합쳐 그 폭을 넓게 하면 운전자들이 더 집중하고 안전한 운전을 한다고 밝혔는데요. 실제로 영국에서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한곳은 넓은 도로이지만 현재처럼 그대로 두었고, 다른 한 곳은 조금 좁은 도로였지만 도로에 어떤 표시도 해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결과가 나온 겁니다.


좁지만 바닥에 어떤 표시도 하지 않은 (심지어 중앙선 표시도 없는)도로를 주행하는 운전자들이 양 옆으로 더 떨어져 조심스럽게 운전을 했던 것입니다. 속도 역시 당연히 줄어들었죠. 도로에 어떠한 표시도 없다는 건 결국 운전자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실제로 사람들은 이런 공간에서 더 조심했던 것입니다. 이를 하나의 시스템화 시킨 것이 바로 쉐어드 스페이스인 거죠.


2003년 한스 몬더만 씨에 의해 네덜란드에서 가장 먼저 이 운동이 시작됐지만 쉐어드 스페이스라는 용어는 영국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결국 이 시스템을 유럽연합 차원에서 후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현재는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독일 등의 유럽 일부 국가에서 부분적으로 시행이 되고 있고 호주에서도 이 운동을 수용해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봄테는 도시 전체에 이 쉐어드 스페이스 운동을 적용한, 제가 알기로는 유일한 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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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공사 중인 봄테의 모습. <사진=bohmte.de>



2006년인가 2007년 봄테의 도로 공사 모습입니다. 당시 16~18억 정도의 비용을 들여 도시 도로를 쉐어드 스페이스에 맞게 바꿨는데요. 일부 금액은 EU에서 지원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처음엔 주민들도 걱정이 많았죠. 시 당국은 공청회를 열어 주민들에게 자세히 취지를 설명했고 시민들은 총회를 여는 등 사전 준비 작업을 거쳐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공식적으로 전면적 시행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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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전 도로 모습 1. <사진=bohmt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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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후 도로 모습 1. <사진=bohmt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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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전 도로 모습 2. <사진=bohmt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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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후 도로 모습 2. <사진=bohmt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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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공사 전 모습 3. <사진=bohmt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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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공사 후 모습 3. <사진=bohmt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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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적으로 완성됐을 당시. <사진=bohmte.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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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2008년 회전교차로 모습. <사진=bohmte.de>



동등한 공간, 그러나 보행자 중심


쉐어드 스페이스에서는 운전자와 보행자, 자전거 등 도로를 이용하는 모두가 균등한 권리를 갖게 되는데요. 사고 시에 책임을 누구에게 더 물어야 하는지 등의 문제점을 갖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운전자가 기존 도로에서와는 전혀 다른 운전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행자 중심의 도로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횡단보도 표시가 따로 없기 때문에, 봄테에서는 사람이 손을 내밀거나 횡단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차는 멈춰서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보통 이런 도로는 교통량이 적은 곳에서 적용이 가능하다고 알려졌는데요. 봄테의 일일 중앙로 이용 차량 수는 평균 12,000대 수준이어서 이런 기준에 적합했습니다. 하지만 영국 런던의 쇼핑타운 중 한 곳인 켄싱턴 같은 곳은 비록 부분적으로 시행이 되고는 있지만 일일 통행량이 4만 대가 넘지만 차량 통행이 많아도 지자체의 홍보 교육, 그리고 운전자들의 의식에 따라서 얼마든지 쉐어드 스페이스의 적용 범위가 확장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줬습니다.



정말 효과 있나?


봄테에서 도시 전체에 신호등과 표지판, 횡단보도를 없애고 난 직후에는 사고 수가 전년에 비해 몇 건 더 늘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실패한 정책이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사고는 늘었지만 이전의 사고에 비하면 피해 정도는 눈에 띄게 작아졌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도시에서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 발생이나 정도가 심각한 수준의 교통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봄테의 부시장은 언론에서 자신 있게 밝혔습니다.


부분적으로 이 정책을 시행 중인 네덜란드의 Drachten에서는 사고율이 떨어졌고 교통 흐름은 40%가 더 빨라졌습니다. 영국 켄싱턴 역시 복잡한 쇼핑거리임에도 95%의 교통표지판이 사라졌고, 그 후 보행자 사망사고가 이전보다 60% 줄어들었다고 보고 됐습니다.


그렇다면 봄테와 같이 교통표지판과 신호등을 없앴을 때, 어떤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슈피겔>의 설명에 의하면 2200만 개의 교통표지판 중 1/3줄어들면 우리 돈으로 2조 4000억 이상을 절약할 수 있고 신호등 역시 1/3이 없어지면 1조 8800억 원을 아끼게 되는데, 매년 전기세로만 536억을 줄일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경제적 효과는 이것 뿐이 아니겠죠. 신호대기 시, 혹은 정체 시 발생하는 비용도 줄일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안전과 환경, 그리고 경제성까지 모든 면에서 현재까지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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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테스트를 하는 모습. <사진=bohmte.de>



보행자를 위한 도로들


봄테 시에서 전면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쉐어드 스페이스는 사실 보행자를 위한 도로의 개념들 중 가장 최근에 등장한 것인데요. 1968년 네덜란드에서는 본엘프라는 도로 형태가 등장했습니다. 쉽게 말해 주택가에서 자동차들이 보행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표시를 만들고, 화단이나 도로의 폭 등을 조절하여 시설물을 통해 자연스럽게 감속을 유도하는 도로 형태입니다. 이것을 바로 독일이 뒤따라 도입하면서 현재는 이 두 나라에서 가장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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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는 곳은 이렇듯 보행자와 차가 같이 다니고 주변에 벤치나 조경수 등을 통해 차량이 속도를 낼 수 없도록 해놨습니다. 실제로 저 표시가 있는 곳에선 시속 30킬로미터 이상으로 주행을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놓았고, 심한 곳은 10~15킬로미터 정도로밖에 주행할 수 없게 해놨습니다. 이것은 보행자, 특히 아이들과 노약자들을 보호하는 데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영국의 홈존이란 개념으로 다시 발전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아파트 단지에서 특히 이런 표시를 세워두고 법적으로 명확하게 운전자가 조심해야 하는 곳임을 알렸으면 하는 생각인데요. 어쨌든 이런 개념이 1982년 일본에서는 그들 현실에 맞게 커뮤니티 도로라는 이름으로 변형돼 적용되었습니다. 또 독일 등에서 아주 익숙한 '템포 30존'이 있는데요. 시속 30km/h를 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또 영국에서도 비슷한 개념의 20마일 존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보행자 우선도로의 종합편이 바로 '쉐어드 스페이스'가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인사동길이 이와 비슷한 시스템으로 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너무 제한적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최근 독일의 정론 주간지 <슈피겔>은 쉐어드 스페이스와 관련해 이런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모든 교통표지판을 없앨 수는 없겠지만 너무 많은 교통표지판은 분명 문제가 있다. 여전히 교통표지판을 신앙처럼 믿는 정치인들이 있는 한 독일에서 이런 논의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대충 이런 주장이었습니다.



보행자 중심 도로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


저는 이런 의견들을 보면서 우리나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시스템이 가능할까?' 하고 말이죠. 물론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에선 기본적으로 보행자 보호를 철저하게 배우고 운전을 시작합니다. 그러니 그런 차이를 감안 해야겠죠. 하지만 몇 가지 조건들만 갖춘다면 작은 읍면 단위나 대도시 일부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도로의 절반 가까운 수가 폭이 좁은 생활도로고, 여기에서 차량과 보행자 사이의 사고 중 70% 이상이 발생한다는 보고도 있으니 이런 곳에 우선적으로 적용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다면 만약 이를 시행하기 위해 어떤 것들이 먼저 해결되어야 할까요?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운전자들의 배려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행자의 안전, 또는 자전거 통행의 안전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의식 말이죠. '내 가는 길 막는자는 누구인가?' 하는 마음으로 운전대를 쥐어서는 '쉐어드 스페이스'는 '사고 스페이스'로 돌변하고 말겁니다.


이런 배려심 운전은 일단 면허 취득 과정에서 철저한 교육을 통해 이뤄져야 합니다. 단순히 기능인을 만드는 면허취득 과정이 되어선 안되고, 공동체 일원으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교육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이런 교육에 이어 정책 당국의 홍보와 강한 의지가 뒷받침 되어야합니다. 우리나라도 안전한 교통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주도적이지 못하고, 뭔가 적극적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있죠.


예전 회전교차로 문제, 신호등 위치 문제 등에 대해 글을 썼을 때에도 드린 말씀이지만 모든 걸 운전자들에게만 책임지워선 안됩니다. 교육과 홍보, 시스템, 그리고 운전문화 등의 삼박자가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야 성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느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특히 잘못된 시스템, 혹은 과도한 제도의 도입을 방지하기 위한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정부가 잊어서는 안될 겁니다. 이와 관련해 한스 몬더만 씨의 이야기가 와 닿았는데요. 마지막은 그의 말로 대신할까 합니다.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면 우리는 결국 그에 맞게 행동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쉐어드 스페이스)는 다들 자유롭게 자기 의지와 판단에 따라 운전을 할 수 있다. 단, 그 의지와 판단 속에는 배려가 들어가 있다"




참, 봄테 시에는 없어지지 않은 표지판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도시 진입하는 곳에 <우선 순위가 변경됨>이라는 알림판이죠. 끝으로 13분짜리 동영상 하나를 올립니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어떤 사거리에 조성된 쉐어드 스페이스 오픈일의 모습입니다. 얼핏 보면 중국이나 인도 어딘가의 풍경처럼 보이겠지만 철저한 조사와 준비 끝에 적용된 도로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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