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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4. 화요일

산하 








신라의 걸출한 문화재는 상당 부분 백제 예술가의 힘을 빌린다. 한반도 동남방에 고립돼 있던 신라는 문화적 후진국이었다. 이를테면 선덕여왕 대에 완공된 황룡사 9층 목탑은 백제 장인 아비지가 만들었다. 한창 발전 도상에 있던 신라는 층마다 인근 나라 이름을 적어 넣고자 했는데 그렇게 하면 그 나라 모두가 신라에 조공하게 되리라는 야심 찬(이라고 쓰고 맹랑한 이라고 읽는다) 포부를 드러냈다. 그런데 공사가 진행되질 않았다. 이유를 알아본즉슨 백제 장인 아비지가 태업을 한 것이다. 그 층 하나에 백제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 그래서 백제의 이름을 빼고 응유국이라는 이름을 넣어 아비지를 달랬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불국사 석가탑을 지을 때에도 신라에는 쓸만한 석공이 드물었던 모양이다. 이미 백제가 멸망한 지 오래였지만 석가탑을 지을 인물로 옛 백제 땅에 살던 아사달이 불려 와야 했다. 아사달에게는 갓 결혼한 아내가 있었다. 아사달이 3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자 아사녀는 불원천리 서라벌로 찾아오지만, 국가지대사인 석가탑 공사에 들어간 아사달을 만날 길이 없었다. 완성되면 저 연못에 탑 그림자가 비치리라는 문지기의 말에 연못 앞에서 목이 빠지던 아사녀는 신라의 귀한 가문 처녀와 아사달이 결혼한다는 소문에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만다. 이를 알게 된 아사달 역시 그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만다는 슬픈 전설. 그래서 석가탑은 그림자가 없는 탑, 무영탑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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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천 년을 버텨 온 석가탑은 뜻밖의 수난을 당한다. 일제 시대 이래 한국은 도굴의 천국이었다. 도굴꾼들은 귀신같은 직감과 안목으로 유물이 있을 곳들을 지목했고 그곳들을 파헤쳐 수많은 유물들을 캐낸 뒤 팔아먹었고 유물들은 또 다른 지하로 실종됐다. 신안 보물선의 도자기들은 도굴꾼들이 와서 쓸어낸 것을 경찰이 체포했으나 도무지 그 해역을 알 길이 없어 도굴범을 초빙(?)하여 그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으니 더 할 말이 없겠다. 도굴범들은 간 크게도 불국사의 상징인 석가탑을 노린다. 당시 경주 일대에서 악명 높은 골동 상인 윤모였다.

 

9월 3일, 윤 씨와 그 일당들은 밤 11시에 불국사로 침입했다. 당시 불국사에는 다른 유물 보수를 위해 사다리 등 장비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는데 범인들은 천연덕스럽게 그 분위기를 이용했다. 중장비까지 동원해 삼층석탑을 들추고 그 안에 든 사리장치 유물 등 보물들을 빼내겠다는 의도였다. 첫날은 실패했고 다음날엔 기어코 1층 옥개석을 들어 올리는 데에 성공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하건만 그들은 다음날 또 불국사에 들어가 3층 옥개석을 들어 올린다. 그들에게는 통탄할 일이지만 거기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것은 2층이었다. 내일은 기필코 보물을 손에 넣으리라 발도 굴렀을 것이다.

 

불국사 승려들은 갑자기 탑에 금이 가는 등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지진에 의해 기울어진 것으로 보았고 경찰도 손을 놓고 있었다. 심지어 풍화작용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문제 제기와 경찰 수사 결과 도굴꾼들이 드나들었음이 드러나자 온 나라가 뒤집히고 말았다. 경찰은 눈에 불을 켜고 수사를 벌인 끝에 도굴꾼들을 잡아들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실패했다고 고백했지만 이걸 곧이들을 수는 없었다. 정말 무엇이 있었고, 무엇이 없어졌는지, 현 상태가 어떠한지는 탑을 해체하고서야 흑백을 가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문화재 당국은 문화재 보수 기술자를 동원하여 작업에 나선다. 1966년 10월 13일의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이 대목의 상세한 묘사는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잘 나와 있음) 전신주 2개와 로프로 탑재를 해체해 가는 과정에서 전주 하나가 부러지면서 무거운 2층 옥개석이 중심을 잃고 3층 탑부 위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3층 탑부는 세 동강으로 깨져나갔고 옥개석도 일부가 파손돼 떨어져 버렸다. 최악의 참사였다. 전봇대로 천년 석탑을 해체하려던 슬픈 시대의 귀결. 공사 책임자 김천석 씨는 “전봇대 속이 썩은 줄 몰랐다.”고 통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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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0월 13일 무구정광다라니경, 빛 보다.




모두가 아연실색했고 조계종에서 파견된 스님은 대성통곡을 했다. 지켜보고 있던 관광객들은 인부들에게 몰매를 주려고 달려들어 경찰이 막아서는 촌극도 빚어졌다. 그러나 이 비극 속에서도 다행한 일은 있었으니, 이날 해체 작업 와중에 도굴꾼들이 그렇게 찾아내려고 했던 금빛 사리함과 함께 현존 최고의 목판본으로 추정되는 다라니경이 발견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목판본으로 지칭돼 오던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세련된 인쇄술로 인쇄된 다라니경이지만 그 작성 시기부터 만들어진 장소까지 아직도 많은 논란에 휩싸여 있다. 중국 학자들은 자신들이 인쇄해서 신라에 준 것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그래서 다라니경은 그 가치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되지 못하고 있다.

 

2013년부터 석가탑은 보수 공사에 들어간 줄로 알고 있다. 아무렴 40년 전에 있었던 그 참사를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고 이제는 그 안에서 발견될 것도 남아 있지 않겠지만, 전봇대로 석가탑을 들어올리려던 시도가 버젓이 행해졌던 사실 자체는 석가탑을 완성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아사달과 아사녀에게 정말로 미안한 일이고 천 년을 버틴 탑에 대해서도 송구한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혀를 차지만 아마 우리 후손들은 우리를 두고 혀를 찰 것이다. “아니 어떻게 4대강 유역을 문화재 조사 제대로 하지 않고 싹 쓸어버릴 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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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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