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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12. 수요일

sydney






이 연재는 반 세기를 역사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뜻을 지닌 민초들이 지난 반 세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악으로 깡으로


하안동 시절을 얘기를 하기 전에 당시 나의 정신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석관동에서 살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될 것 같다. 


그 때는 주일마다 고아원에 가서 예배를 인도했었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과는 도무지 소통을 할 수 없는 어떤 두꺼운 벽 같은 것을 항상 느끼곤 했다. 아이들의 얼굴은 반응이 없는 박제가 된 얼굴 같았다. 아이들은 아파서 병원을 가서 의사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도 그냥 '괜찮다'고 대답을 한다. 왜냐하면 남이 자기에게 가져주는 일체의 관심을 진실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주일마다 의무적으로 접하는 목사의 설교가 그 애들에게 '껌 씹는 소리'로 들리지 않게 하려고, 나는 무척 고민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 고 3짜리 남자애가 갑자기 죽었다고 연락을 받고 동부 시립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영안실에는 원생들 중에서 중학생 이상의 원생들과 보모들, 그동안 원생들의 학습을 돌보아 주던 자원 봉사자 대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영안실에서 화환은커녕 사과 한 쪽 없는 영결식을 하고 벽제 시립 묘지에 가서 하관식을 했다.


일생 동안 따뜻한 방에서 잠 한 번 못 자 보고 어머니가 차려준 따뜻한 밥 한 끼 먹어 보지 못한 아이가 고아원에서 일생을 보내다가 땅에 묻힌 것이다. 냉정을 유지해서 경건하게 예식을 집전해야 할 나도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생들, 보모들이 모두 울었지만 어려서부터 함께 생활을 해왔던 원생들은 끝내 울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남을 위하여 울어 줄 눈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이 세상에서는 황태자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거지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만일에 천국이 있다면 불평등이 없는 세상이 아니겠느냐? 그런 날을 만들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악으로 깡으로 살자"는 설교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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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설교는 평소 내가 자주 하는 생각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와이에 머물던 시절에도 주말에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래려고 거리를 산책하면서 한 주간의 일을 끝내고 식구들끼리 단란하게 휴식을 즐기는 가정이며, 놀러 가기 위해서 분주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또 태평양 바닷가를 자기 집 풀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하와이 부자들의 그림 같은 집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어떤 천국을 꿈꿀까'하는 생각을 했었다. 


인간은 낙원이라든가 천국은, 자기들이 부족한 것을 채워 줄 수 있는 곳을 그린다. 에스키모들의 천국은 꽃피고 새 우는 곳이지만, 사막을 떠돌아다니는 이슬람교도들의 천국은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종려나무 우거진 오아시스가 있는 곳이다. 자유를 빼앗긴 자들에게는 자유로운 땅이 천국인 것이고, 배가 고픈 이들에게는 배가 부른 것이 천국인 것이며, 병든 자들에게는 건강한 것이 천국일 것이다. 아마도 하와이 부자들이 천국을 원한다면 즉 이 땅에서는 아무리 행복한 부자일지라도 병에 걸리지 않거나 죽지 않을 수는 없을 터이니까 아픔이 없고 죽음이 없는 천국을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들에게는 오직 하나,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천국'이 그리울 뿐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게 은근한 내상으로 남게되는 기억은 이런 '악으로 깡으로' 정신보다 내가 전혀 경험 해보지 못했던 스트립쇼 고문 사건이었다.




자본주의 천국에서 본 스트립 쇼


LA에 갔을 때 미국에 온 나의 목적과 방향을 알 리가 없는 고교 동창생 친구가 접대를 한다는 의미에서 라이브 쇼를 하는 곳을 데려갔다. 친구는 매표소에서 입장료로 7불씩을 내고 10불짜리 지폐 2장을 1불짜리로 바꾸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를 위해 거금을 지출한 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있는 당구대 크기의 테이블에서 난생 처음 쭉쭉 빵빵한 백인 미녀들이 은밀한 부문을 드러내며 흐느적거리듯 춤을 추는 것을 보니 처음엔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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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눈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편하지 않게 느껴져서 결국 친구에게 그만 나가자고 했다. 하지만 친구는 비싼 돈 주고 들어왔는데 더 앉아있자고 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친구가 가자고 할 때까지 스트립쇼를 보면서 명상 상태에 빠졌다. 계속해서 바뀌는 여자들의 몸을 보는 것이 싫증이 나니까 이번에는 자연히 얼굴을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몸뚱이는 다 똑같지만 얼굴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춤을 추는 여자마다 억지로 짓는 웃음이 아니라 정말 즐거운 표정이었다. 아무리 직업이라지만 다리를 넓게 벌려 자신의 은밀한 부분까지 보이면서 춤을 추는 것이 어떻게 저렇게 즐거울 수 있을까? 그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경지였다. 궁금하다 못해 옆에 친구에게 조용히 귓속말로 물었다. 


"저 여자들 약 먹고 춤을 추는 것 아냐?" 


"직업인데 어떻게 매일 같이 약을 먹고 춤을 추겠나?"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생글거릴 수가 있나?" 


"내가 자네가 그걸 깨달으라고 피 같은 돈을 투자해서 여기 온 거야." 


"난 정말 모르겠는데?" 


"이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느낄 수 있는 돈 버는 즐거움이라는 거야."


그랬었구나! 그러고 보니 여자들은 한 차례 춤이 끝날 때마다 손님들이 좌석 앞 테이블에 놓은 지폐를 걷어서 얇은 가운 주머니에 넣고서 다음 테이블로 건너갔다. 그래서 친구가 입장을 할 때 입구에서 미리 잔돈을 바꾸어 온 것이었다. 나는 친구가 라이브 쇼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보였기 때문에 나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 아낌없이 거금을 투자한 것이다. 그랬다. 당시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악으로 깡으로 살고 있었다. 


그 곳은 비알콜성 음료만 주는 곳으로 서빙을 하는 여자들이 완전 나체로 사람들 사이를 마치 물고기가 유영하듯 미끄러져 다니는데도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가만히 손님들의 표정을 살펴보니까 나만 빼놓고는 모두들 희희낙락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친구는 원래가 웃는 표정이어서 그런대로 어색하지 않게 분위기에 어울리는데 내 표정은 내가 생각해도 완전 계엄령이었다. 그런데 주위를 들러보니까 테이블 건너편에 마치 영국의 버킹검 궁전의 근위병 같이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동상 같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려면 여기를 왜 왔나?' 싶은 느낌이 들 만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정장을 하고 007 가방을 가진 품새를 보니 나와 같은 장기체류자도 아니고 바쁜 출장길에 잠시 귀한 시간을 내서 환락가를 방문하신 한국인 같았다. 그 친구 표정을 보는 순간 내 표정이 바로 저렇지 않을까 싶어서 표정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안면근육 운동을 해보려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잘되어지지가 않았다. 억지로 웃어 보려고 애를 쓰니까 나중에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얼굴 가죽이 근지러워졌다. 그러니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나에게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문이지 않았겠는가? 그만 나가자고 해도 본전을 뺄 양으로 늘러 붙어 있는 친구 때문에 나는 점점 깊은 명상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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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자본주의의 현장에서 받은 교육은 나에게 별로 영양가가 없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도덕적 엄격주의에 대해서는 심각한 도전을 받았던 것 같다. 




하안동의 철거민촌으로


물론 나는 곧 자본주의 천국인 미국에서 자본주의 지옥인 고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와이에서는 한국에서 고생을 하다가 왔다고 가끔 식사 초대를 받아 좋은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게 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성의를 다해 대접을 해주는 분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도저히 음식의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따뜻한 밥 한 공기를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한겨울 내내 연탄 한 장 안 때고(못 땐 것이 아니라) 사는 하안동의 후배들을 생각할 때 도저히 입맛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당연히 시련과 번민의 연속이었다. 


86년도 안양천 일대의 범람으로 내가 일하고 있던 광명시 하안동의 철거민촌의 피해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자 기독교 구호단체에서 구호품을 8톤 트럭 한 대에 실어 보내왔다. 구호품과 함께 나중에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어 평양을 혼자서 슬그머니 다녀와서 김대중을 비롯해서 야당을 곤란에 빠트렸던 가톨릭 농민회 회장 서경원,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도 인연이 있었다고 알려진 계훈제 선생 등이 함께 방문해 주었다. 그들의 방문이 수재민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일은 전혀 없었지만 고통 받은 사람들과 함께 하려고 하는 그들의 마음만은 높이 살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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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품 트럭 앞에서 찍은 사진

(왼쪽 두 번째 안경 쓴 인물이 필자)


여러 기독교 단체에서 급히 모은 물건이라서 구호품에 여러 가지가 섞여 있기 때문에 분류를 해서 효과적으로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는 물건을 쌓아놓고 품목별, 상태별로 분류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작업을 하려면 노천에서 할 수가 없어서 비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큰 창고가 있어야 하는데 수소문을 해보니 마침 근처에 최근에 새로 지은 청소년 회관의 지하실이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나 같은 신분의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지만 비상상황이니 만큼 지하실을 사용하도록 허락이 떨어졌다. 청소년 회관은 정부 산하단체인 청소년 연맹에서 운영하는 최신 연수시설이었다.


물건 정리, 분배를 위해서 날마다 회관을 드나들면서 이 회관에 취직을 해서 일을 하면서 판자촌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빈민촌의 일이라는 것이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을 해야 하는 일이 아니고 건달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는 일이었다. 




육군 참모 총장 박희도와의 인연


내가 회관 취직을 생각하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안 모 대장이 전역을 해서 청소년 연맹 총채로 있었고 박희도 대장이 육군 참모총창을 하고 있었다. 박희도 씨가 처갓집으로 어찌 어찌 되는 처지여서 군대생활 시절에 덕을 많이 보았다. 월남에서도 큰 신세를 졌지만 귀국 후 군대에서 사고를 쳐서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로 가야만 할 일도 내 인생을 찬란하게(?) 장식하는 2주간 사단 영창살이로 끝내기도 했었다.


물론, 2주간의 영창살이가 편했다는 것은 아니다. 국방부의 호텔, 영창이라는 곳은 다른 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이벤트(?)가 매일 벌어지는 곳이다. 영창의 존재 목적은 병신이 되지 않는 선에서 수감자에게 단기간에 최대의 고통을 주어 다시는 들어오고 싶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영창을 나간 다음 영창에 대한 좋은(?) 소문이 많이 나서 다른 병사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이쯤하면 그 안의 사람들 생활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지내야 하는 곳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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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하고 싶은 인간에 대한 표현으로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은 '쓰레기 같은 인간'이란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쓰레기도 나름이어서 재활용을 할 수 있는 자원의 가치가 있다. 그래서 한층 더 심한 표현을 고른다면 다름 아닌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아무래도 인간이 벌레만도 못할 수는 없으니 '벌레 같은 인간'이 더 정확한 욕일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벌레가 되었다. (실존주의 소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에도 벌레가 된 인간이 나온다. 카프카가 문명고발적인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문제를 다루는 작가라는 점에서 묘한 감정이 생긴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매일 반복되는 힘든 작업뿐만이 아니라 불규칙한 식사, 휴식, 차가운 인간관계 속에서 지쳐갔지만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만두고 싶어도 자신이 책임지는 가정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 자신의 몸이 괴물로 변했을 때 묘한 해방감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역할이 가장에서 짐 덩어리로 변해버리자 가족들이 그를 버리긴 하지만, 영창에서의 내겐 그레고르처럼 당장의 해방감이 절박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냐고? 영창의 구조만 봐도 알 수 있다. 영창의 사방 벽과 천정은 테니스장의 담장처럼 철망이 쳐져 있었다. 처음 감방에 들어갔을 때 '벽의 철망은 부딪쳤을 때 부상을 막기 위해서 쳐놓았겠지만 천장은 왜 철망이 쳐 있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철망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헌병이 "올라타!"하고 명령을 내리면 수감자들은 원숭이처럼 손과 발가락으로 천정에 달라붙어야 한다.60Kg 이상의 몸무게가 철장에 매달리면 손가락 발가락이 끊어질듯 아파서 10초도 못 견디고 떨어지게 된다. 바닥으로 떨어지면 헌병들이 밖에서 긴 곤봉으로 사정없이 짓이긴다. 안 맞으려면 또 올라타고 올라탔다 또 떨어지고...... 마치 뜨거운 가마솥에다 메뚜기를 볶는 꼴이다. 지옥이 따로 없다. 한 번 상상해 보시라. 좁은 감방에서 십여 명이 천정에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광경을. 나는 어떤 잔인한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은 본 적이 없다. 스턴트맨을 써서 될 일도 아닐 듯 하다. 실제로 고통을 겪어야 하니까. (아마 그런 영화를 만들 수도 없겠지만) 하여튼 '단 기간에 고통의 극대화', 이것이 당시의 영창의 목적으로 요약된다는 걸 나는 몸으로 느낀 것이다.


그런데 영창에서는 간혹 밖에서는 전혀 나타날 수 없는 특수한 교육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영창에 들어가면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 그 동안 하지 않았던 공부를 하는 일이다. 그것은 감방 벽에 줄줄이 걸려 있는 액자에 적혀 있는 우리의 맹세, 군인의 길, 국민교육헌장 등등 10여 가지를 입감 첫날 당일 중으로 모두 외워야 하는 것이다.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에는 제한이 없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는가? 한 마디로 '부상' 빼놓고는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는 뜻이다. 인간은 어디서나 머리가 나쁘면 그만큼 몸이 고생하게 되어 있는 것이 감방에서도 역시 진리였다.


하지만 감방에서는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일과 시간 끝날 때까지는 모두 외울 수 있게 되어 있다. 심지어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도 외울 수 있게 되어 있고 아마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인을 집어넣어도 외울 수가 있을 것이다.왜냐고? 매에는 견디는 장사가 없기 때문이다. 정좌한 자세로 온 정신을 집중해서 벽만 바라보고 달달 외우는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어서 어떤 고승의 용맹정진도 거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더위나 추위를 느낀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다. 단시간에 고승들이 깊고 깊은 산 속에서 몇 년씩 수행해야 들어갈 수 있는 완전 선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한다면 사법고시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푸코가 말했던 '폭력의 효율'인 것이다.

 

나중에는 인간이 정말 인간이 되려면 자신이 벌레와 같이 낮아지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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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영창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아무튼 그런 영창 생활에서 나를 빼내준 박희도 대장이 있었기에 부탁만 하면 회관의 말단 직원 자리쯤이야 취직이 되지 않겠나 싶었던 거다. 그러나 당시는 한참 군부독재를 상대로 민주화 투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어 어떻게 하면 박희도 씨도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군사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인가에 골몰할 때였다. 비록 정권과는 상관이 없는 청소년 연맹일지라도 인맥을 따라 취직을 하면 적에게 투항할 꼴이 될 수가 있는 일이었다.

 

나는 집 앞의 청소년 회관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고민을 했다. 그 때 생각난 성경구절이 '명하여 돌들을 떡으로 되게 하라'였다. 광야에서 굶주린 예수에게 돌을 떡이 되게 하라는 사탄의 유혹처럼 이기기 힘든 유혹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청소년 센타에 취직을 하려는 것은 나에게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당장의 경제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하여 박희도에게 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 오래 고민했지만 유혹에는 결국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이긴 것은 아니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더 이상 고민을 하고 말고의 여유 없이 전투를 위하여 거리로 뛰어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도 역시 다른 훈련과 같이 반복되어 다져지지 않고는 도저히 될 수가 없는 일이다. 바르게살기 운동도 훈련을 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어떤 것 보다 꼭 필요한 것은 배고픈 훈련이다. 그래서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살아보니까 정말로 그렇더라. 




수해 마을에 그려진 벽화


수해의 경험은 절대로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영원히 기억될만한 아름다운 사건도 있었다.


당시 서울 교대, 인천 교대, 연세대, 이대 학생들이 와서 한 부분씩 맡아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수해 복구를 할 때 중앙대학교 미술학과에 다니던 정승각이라는 학생이 찾아왔다. 동네 아이들 모아서 수해를 당했던 경험을 벽화로 그려 보겠다고 해서 재미있을 것 같아서 아이들을 모아 주었다. 정승각은 벽화의 재료를 준비해 가지고 와서 아이들과 함께 이틀 동안 벽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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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 작업 중 찍은 사진


흔치 않는 일이라서 이 사실을 방송국에 알렸더니 KBS, MBC TV가 한꺼번에 와서 취재를 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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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벽화


그런데 문제는 인터뷰였다. 지난 회에 썼던 것처럼 장애인 켐프를 MBC에 취재 요청을 했더니 '일반인들은 자유롭게 바캉스를 다니지만 장애인들은 그럴 수가 없다'는 현실을 보여 주는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더위에 장애인들도 이렇게 즐겁게 논다'는 내용으로 방영이 되었다. 그래서 방송이 나가고 난 다음에 함께 참여했던 자원봉사 대학생들에게 왜 방송국을 불렀느냐고 욕을 푸짐하게 먹어야 했다. 


이번에는 속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벽화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단순히 아이들이 미술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어려움의 경험을 트라우마로 남기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단단히 강조했다. 내가 '도시빈민'이라는 단어를 계속 쓰니까 인터뷰를 하던 PD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목사님 심정은 잘 알겠는데요. 목사님이 그 단어를 써도 1초 만에 지나가서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제발 쉽게 갑시다"라고 사정을 했다.


인터뷰는 하는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었다. 결국 방송은 수해복구 현장에서의 미담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 무조건 밝게만 보도 하려고 하는 것이 제도 언론의 고질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수 이남이와의 인연


벽화 보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때 만난 MBC PD와의 인연 때문에 그 다음에 재미있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 후 어느 날 수해현장을 취재하러 왔던 PD로 부터 연락이 왔다. MBC 홍보용 잡지에 시청자가 제작 현장을 보고서 기사를 쓰는 꼭지가 있는데 한 번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맡게 된 프로는 황인용이 MC를 하고 가수 이남이가 고정 출연하는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무슨 프로(편집부 주: MBC 토크쇼 '세상사는 이야기'로 추정)였다. 그 프로에서 이남이는 자기 밴드를 데리고 와서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날 몇 시간 동안 녹화를 하는데 막간을 이용해서 이남이와 대화를 하다가 나와 동갑이고 동대문상고출신으로 응원 단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나와 동급생이었던 이광한 감독이 4번 타자로서 활약했을 만큼 야구를 잘하는 학교였기에 중, 고교의 3,000명이 동대문 운동장에 응원을 하러 동원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봄가을로 진행되는 전국 고교야구 리그 경기에서 준준결승에 올라갈 때면 수업을 중단하고 야구장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야구부가 시합을 잘 해서 수업을 빼먹고 야구장으로 갈 수 있기를 학수고대 했었다. 재수가 좋으면 봄가을로 나누어 한 시즌에 준준결승, 준결승, 패자결승, 결승전을 합해서 4경기를 구경할 수 있는 행운이 오기도 했다. 그런 학교에서 나는 응원단장이었다.


그랬던 우리 학교의 라이벌이 바로 동대문상고였던 것이다. 두 학교는 경기를 여러 번 치렀으니까 이남이와 나는 각기 반대편 스탠드에서 응원전을 펼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당시 그 놈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는 와중에도 '저 놈 보다는 잘해야 되겠다'고 투지를 불태웠던 상대, 그를 수십 년 후에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니 어찌 반갑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남이는 내가 하고 있는 빈민운동에 대하여 대단히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도 돕고 싶다며 필요할 때 언제든지 자기를 꼭 불러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남이를 꼭 한 번 써먹어야지'하고 벼르기만 했지, 그를 초청할 만한 규모와 성격이 어울리는 기회를 못 만들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약속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다 나중에 들으니 그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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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현장과 기득권


이남이와 동갑이라는 진술에서 드러나버렸겠지만 나는 386세대가 아니고 컴퓨터 이전 세대이다. 실제로 내가 컴퓨터를 접한 것은 40대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80, 90년대 한국에서 내가 빈민운동을 하는 동안 실제로 나를 도와서 손과 발이 되어 주었던 이들은 모두 대학생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386 시대의 젊은이들과 함께 했던 8, 90년대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산다. 지금은 486이나 586이 되어 버린 이 세대가 어찌된 판인지 한국 사회의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린 느낌이지만 그들은 실천이 따르지 않는 편안한 관념에 안주하지 않고 약자를 위해서 투쟁하며 땀을 흘렸던 대아적(大我的) 세대이었다.


그들은 젊은 혈기에 '욱'하는 심정으로 진보, 개혁, 민주를 부르짖으며 '데모'를 잠깐 했던 것이 아니라, 大我的 시각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해서 시대의 어둠과 장기간 조직적으로 싸운 경험을 가진 세대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 역사에서 언제 젊은이들이 자기를 희생해서 대의를 위해서 집단적으로 투신했던 시대가 있었던가? 종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386세대가 활동했던 그 시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거룩한 시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386세대는 대학생이라는 기득권의 버리는 일부터 해야 했다. 기득권을 버리는 것!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다. 


기득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철거현장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재개발이 벌어지고 시간이 흐르면 가옥주와 세입자에 갈등이 벌어졌다. 사연은 이렇다. 불럭으로 지은 보잘 것 없는 집 한 채를 가진 가옥주가 있다고 하자. 가옥주는 건축비 20~30만 원을 들여서 남의 땅에 무허가로 허름한 집 한 채를 짓는다. 가옥주가 살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쩌다가 이사를 가게 되면 보증금 20만 원에 월세 5만 원에 세를 놓고 나간다. 그렇게 해서 월세를 사는 사람은 10년이면 6백만 원의 월세를 주인에게 내게 된다.


결국 세입자는 무려 집값의 30배의 값을 내는 셈이지만 재개발이 되면 가옥주는 아파트 분양 입주권을 받게 되고 세입자는 임대 아파트 입주권을 받게 된다. 세입자는 애초에 가옥주가 투자한 돈의 수십 배를 내고 살았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다. 사유재산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남의 땅에 무허가 주택이라도 가진 사람과 가질 기회를 놓친 사람의 차이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먼저 들어와 무허가 집을 지은 사람에게 기득권이 있기 때문이다. 재개발이 되면 가옥주는 집을 철거해야 하는데 세입자는 가능한 한 집을 비워주지 않고 버티게 된다.


이런 세입자들을 보고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 '그것 순 떼쓰기 작전이구먼'하고 생각을 할는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다. 재개발을 하면 막대한 이익이 생긴다. 재개발이 되는 땅은 파면 자원이 나오는 광산이 아니다. 사람이 이제까지 그 지역에서 살아옴으로 해서 어떤 형태로든 그 지역의 발전에 기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도 마땅히 개발이익을 나눠야 옳은 것이다.


철거투쟁의 공식은 땅이란 기득권 뿐 아니라 그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도 기득권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에 그렇게 되지 못하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점점 더 심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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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건물 잔해 앞에 서있는 필자


일본의 경우 땅값 형성 과정에 주인뿐 아니라 거주자와 임차인의 기여도를 인정한다. 이에 따라 재개발 때 30%의 기여보상비를 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개발될 땅에서 오랜 기간 장사를 하면서 부동산 가격을 높인 데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즉 보이는 땅만 인정하지 보이지 않는 시간은 기득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용삼 참사의 원인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내 임무는 힘 있는 이들과 한판의 승부를 건 싸움을 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에게 싸움의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즉 주민들을 조직하고 훈련해서 단결된 힘으로 싸워서 그들의 권리를 찾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데 돈 안 받고 기술자문을 해주는데도 장애가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며 우왕좌왕하고 갈피를 못 잡으면서도, 평소에 교육을 워낙 잘 받아서 '외부세력' 과는 손을 잡으면 안 된다고 나의 도움을 거절하기 일쑤이다. 외부세력은 곧 불순세력이라는 식의 공식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개입하면 당국에게 나쁘게 보여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이 깔려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진정으로 자기들을 위하는 것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만은 아니다. 부천시 고강동에서 김포 공항확장 사업 때문에 철거가 되는 주민들을 위하여 철거민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때 마침 1기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온갖 노력을 다해서 대책의원장을 시의원으로 당선시켰다. 그러나 시의원이 되더니 정신은 물론 육질 자체가 변해 버려서 황당한 적도 있었다.


대게의 겨우 세입자들이 실제로 싸워야 할 대상은 가옥주가 아니라 개발의 주체인 주택공사이었다. 한 번은 주민들이 주택공사 사업단에 몰려갈 일이 생겼다. 주민들이 가기 전에 사업단장과 협의를 하기 위해서 내가 먼저 가서 갔다. 그 자리에서 단장은 "목사님! 사실은 제가 요즘 너무 골치가 아파서 부부생활도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뒤이어 주민들이 몰려와서 성질 사납기로 유명한 아줌마가 단장을 보고서 삿대질을 하면서 "야! 이 씹할 놈아!"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주민들을 진정 시킨 다음 "방금 아무개 아줌마가 단장님에게 하신 말씀은 욕이 아니라 격려입니다. 사실은 조금 전에 단장님께서 요즘 여러분들 때문에 신경을 쓰시느라고 그것도 못하신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농성장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하안동 시절 처음으로 광명 경찰서에 불려가서 '존안자료'라는 것을 작성했다. 잡범이나 형사범이 아닌 경찰의 관심을 가질 인물이 처음 불려 가면 무조건 '존안자료'라는 것을 작성해야만 했다. 대한민국 경찰과 정보기관에는 공적인 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의 존안자료가 작성되어 있다. 존안자료에는 대상자의 모든 것이 시시콜콜한 것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나도 이제 드디어 정식으로 경찰이 관심을 가지고 보호(?)와 감시를 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많이 출세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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