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9. 수요일
sydney
편집부 주 어느 날, 회사 대표메일로 날아든 한 통의 메일,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다 메일을 보낸다는, 딴지일보 창간부터 독자이며 연식 좀 나간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 편의 글과 함께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이런 류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딴지 밖에 없을 것 같아서 보냅니다. 젊은 세대들이 알아야 할 월남전의 진실, 이제까지 아무 곳에서도 알져지지 않았던 월남전의 실상들을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흥미위주로 썼습니다." 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꿀잼 허니잼이니 함 읽어보시고 의견들 주시면 좋고. |
실패한 탈출 계획
당시 월남을 다녀오면 무조건 병장이었다. 왜냐하면 파월 장병들은 군대 생활을 할 만큼 하기도 했지만 봉급을 미군이 주기 때문에 시간이 되면 무조건 진급을 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나는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돌아왔다.
일병의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한 불운한 군 통수권자
사연은 이렇다.
하루는 본부 중대 서무계가 나를 부르더니 다음 달에 진급을 하게 되는데 상병 진급을 하면 한 달치 봉급을 부관부 사병계를 주어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 한 편에서는 총 맞아 죽는 사람도 있는데 당연히 하게되는 진급을 가지고 행정병들이 그런 부정을 저지른다는 사실에 분노해서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 했다. 서무계가 "너 그러면 끝까지 진급 못해." 라고 했다. 나는 설마 그럴 수 있을까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어떤 때는 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부관부 사무실로 들어가 모두 쏴죽여 버리고 자살을 할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워 포기 했었다. 아니 사실은 더 큰 계획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루는 정훈교육이 있으니 각 참모부의 필수 요원만 남기고 전원이 사단 백마극장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좀처럼 참모부 병력을 동원하는 일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본국에서 유신헌법이 통과되었다면서 유신헌법의 정당성에 대한 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사단 극장에서 정훈대장이 장교, 하사관, 사병의 3개 그룹으로 나누어 연속적으로 교육을 했다. 유인물로 나누어준 헌법 개정안을 본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훑어 보아도 대통령의 임기제한 규정이 없는 것이었다. 무슨 세상에 뭐 이런 헌법이 다 있나 싶었다. 순간 입대하기 전 제6대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씨가 이번 선거가 국민의 손으로 뽑는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고 이번 선거에 실패하면 총통제가 될 것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영원히 끝났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같이 고생하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야 군대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들은 앞으로 한국에서 어떻게 살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돌아갈 다리가 끊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더욱이 일개 사병으로서 무슨 길이 있겠나?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아 철수를 해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가 없는 상황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당시에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나중에 빈민운동 동지가 되었던 고 제정구 선생은 감옥으로, 재야 생활의 동지이었던 고 김근태 형은 지하로 잠적해 있었다. 이역만리 월남땅, 그것도 군대에서 누구와 터놓고 이야기 할 수도 없는 참으로 답답한 시간이 무겁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PX에서 항상 외톨이로 맥주를 홀짝 홀짝 마시고 있는 두꺼비 같이 생긴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사단 사령부 병력은 대부분이 행정병이라서 비교적 차림이 깨끗한 법인데 이 녀석은 군복도 꾀죄죄하고 어벙벙한 것이 한 눈에 척 봐도 고문관처럼 보였다. 내가 접근해서 말을 붙여도 귀찮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나는 그런 모습이 더 재미가 있어서 자꾸 말을 시켜 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정말 놀란 것은 도수가 많이 나가는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이 대학물은 먹었을 것 같아 보이기에 장난삼아 심드렁하게 “어느 학교 다니다 왔냐?” 라고 물으니까 퉁명스럽게 “서울 상대” 라고 하면서 우습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의 처지가 이해가 되었다.
‘군대는 보직’이라는데 서울 상대씩이나 다니던 녀석이 공병대 작업병으로 근무하자니 영 조합이 안 맞았던 것이다. 더욱이 신 상병은 사교적 (집 사람은 사기꾼적이라고 비웃지만)인 나에 비하면 엄청 비사교적인 타입이었다. 그러니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멋대가리 없던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가 슬슬 보따리를 풀기 시작하니 3년 굶은 과부가 꼭 홀아비 만난 꼴이었다.
이런 꼴?
그런데 얼마 있다가 그런 신 상병이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했더니 뒤늦게나마 가방끈을 인정받아 사단 내에 건물수리 용역을 맡고 있던 빈넬이라는 필리핀 회사(당시에는 필리핀이 우리 보다 형편이 나아서 부대 내 용역을 필리핀 회사에서 맡았었다.)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자리는 사단에서 단 두 명밖에 갈 수 없는 자리였다. 가방끈이 확실한데다가 마침 공병대에 근무하다 보니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월남에 있던 한국군 중에서 사고를 내고 간혹 캄보디아로 도망을 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캄보디아는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일단 그 곳을 가면 제3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어느 부대의 경리 장교가 부대의 월급을 수령해 오다가 운전병과 경계병을 살해하고 캄보디아로 튀었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작심을 하고 신 상병이 판단력이 흐려질 정도로 술을 먹인 다음에 나는 앞으로 기회를 보아 캄보디아로 도망갈 생각이라는 것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만일에 신 상병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술기운에 했던 이야기로 돌릴 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신 상병은 대단히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자기는 용기가 없어서 같이 가지는 못하겠지만 적극적으로 도와는 주겠다고 했다. 사실 제대를 해 보았자 불안만 기다리고 있을 뿐인 나와는 달리 경남고에 서울상대 출신인 신 상병이야 한국을 등질 필요가 없었다.
일단 동지가 생겼으니 일이 빨리 진행되었다. 우리 같은 사병들이 캄보디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헬기로 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나는 내 개인 공간이 전혀 없는 내무반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 회사로 파견을 나가 있어 나 보다 행동이 자유롭고 물건을 보관할 공간이 있는 신 상병이 당분간 정글에서 생활할 수 있는 물품들을 준비하기 시작 했다. 물론 부대에서 돈 안내고 구할(훔칠) 수 있는 물건은 최대한으로 구해서.
문제는 헬기를 어떻게 타느냐 하는 것인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꿍꿍이가 있어서 뜸을 들여 놓은 건이 있었다.
한국군은 헬기가 없었고 사단에 미군 헬기 중대가 파견 나와서 사단의 운송을 책임지고 있었다. 백마 사단 사령부는 모든 직할대가 함께 있기 때문에 남산만큼 넓었다. 피터슨이라는 미군 헬기 조종사가 저녁 마다 조깅을 하다가 사단 교회가 있는 언덕에서 돌아갔다. 교회에 자주 갔던 나는 그 동안 그와 친해졌고. 전략적으로 나 보다는 영어가 더 자유로운 신상병과 그의 막사에 자주 놀러 갔다. 전략 적으로 피터슨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신 상병이 제대 후 곧 미국 유학을 갈 계획이라고 꾸며댔다.
팬티 바람으로 조깅 하다가 만났을 때 이름이 피터슨이라기에 나는 처음부터 이름을 불렀지만 신상병은 군복을 입고 막사에서 만났으니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말끝마다 "sir" 를 붙였더니. 피터슨은 그러지 말고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우리 편에서 생각할 때 상대는 미군 중위고 우리는 미군의 눈으로 볼 때는 보 잘 것 없는 한국군 사병들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먼저 해 본 나라인데다 미군은 업무를 떠나서는 계급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문화의 영향이었던지 피터슨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대해 주었다
나는 피터슨의 비위를 잘 맞춰서 헬기를 태워 달라고 해 일단 뜨기만 하면 사정을 해 보고, 안 되면 할 수없이 총으로 위협을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가능한 한 미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한국의 정치적 상항이 급변해 나는 아무래도 귀국하면 감옥에 갈지 모르겠다고 연막을 폈다. 신 사병이 옆에서 정말로 크게 걱정하는 척하는 연기를 했더니 처음에는 무관심하던 피터슨이 슬슬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피터슨이 나트랑에 나가고 싶으면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사병인 내 처지가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했지만 다른 군인이 타지 않고 피터슨이 단독 비행 하는 기회를 노려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에 떨어지나 일주일 정도는 버텨야 하기 때문에 더블백 안에는 레이션을 쑤셔 넣을 수 있을 만큼 많이 쑤셔 넣었다. 혹시 피터슨이 물건이 가득 든 더블백을 보고 물으면 인도 상점에 내다팔 레이션이라고 하기로 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레이션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피터슨이 2 주 후에 한국군 업무가 아니고 미군의 업무로 나트랑 공항에 단독으로 갈 일이 있단다. 나트랑까지는 헬기로 30분밖에 안 걸린다. 30분 안에 결판이 나야 한다. 국경 너머 아무 마을에 나 내려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시끄러운 헬기 안에서 영어로 피터슨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 하는 생각을 자면서도 하고 잤다. 최악의 경우 피터슨을 총으로 위협해야만 할 경우는 상상하기도 괴롭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신 상병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모레 원대복귀 하란다. 부대가 곧 철수할 모양이다."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신 상병이 원대복귀 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탈출 작전은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을 신 상병이 가지고 있는데 신 상병이 사라진다니 나는 기가 막혀 있는데 신 상병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 쓰고
“그런데 큰일 났어. 나 총을 잃어버렸어.”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내 문제 때문에 멍하고 있다가 그 소리에 정신이 들어
“뭐야? 야! 이 씹 새끼야! 너 군인 맞아?”
“글쎄 이 회사에서 총을 쓸 일이 없으니까 어디다 처박아 두었는데 도저히 몬 찾겠다.”
“뭐 이런 정신없는 새끼가 있나?
할 수 없다.
나트랑에 나가면 살 수야 있겠지만
하루 밖에 시간이 없는데 나갈 수도 없고 피터슨에게 부탁해 보자.”
우리는 허겁지검 피터슨에게로 달려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최대한으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부탁을 했다. 멍청한 우방 군인 국군이 총을 구해달라니 피터슨도 난감해 했지만 '한미우호 방위조약'의 정신에 입각하여(?) “Stupid!"를 연발 하면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서 M16 소총 한 정을 구해왔다. 역시 미군은 부자여서 그까짓 총 한 정 정도 가지고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피터슨에게 감사에 또 감사하면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총을 얻어 들고 돌아온 신 상병으로서는 지옥 문 앞에서 되돌아온 기분이었겠지만 나로선 정말로 기분이 씁쓸했다. 완전히 '원님 지나가려고 길 닦아 놓았더니 거지가 먼저 지나간다.' 는 속담 꼴이었다. 하여간에 캄보디아를 가기 위해 헬기를 얻어 타려고 그 동안 피터슨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였는데 결과적으로 신 상병의 목숨을 건진 셈이다.
이분은 당연히 피터슨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히 무모하고 서툰 계획이었다. 만일에 내 계획대로 헬기를 탔더라도 피터슨이 국경을 넘었다며 월남 땅 아무 곳에나 내려놓으면 나는 도로 잡혀 올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국경이 없기 때문에 항공 지리를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마 계획했던 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캄보디아 어느 산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까무잡잡한 아이들 주렁주렁 낳고. 10월 유신 덕분에...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실제로 참전 군인을 캄보디아로 이민 정착 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 프놈펜에 주재한 한국대사관의 모 인사를 통하여 비공식적이긴 하나 당시 프놈펜 정부의 진심이 담긴 지원요청이 있었다. 주 월남한국군에서 현지에서 제대하는 군인들 중 캄보디아에서 살아보고 싶은 인원들을 모아 편성 장비시켜 약 1개 사단 규모를 캄보디아로 파병시켜 주면 땅은 필요한 만큼 마음대로 줄 터이니 농기구를 가지고 들어와 개발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한국군이 점령한 지역의 소유권을 인정하겠으나 단 한국여자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었다. 이 웃지 못 할 요청인지 제안인지는 청와대까지 보고 되었지만 미군과 한국군이 모두 철군하는 상황에서 당연히 불가능한 결정으로 종결되었다.
사실 철수 계획이야 오래 전에 잡혀 있었겠지만 나 같은 사병이 군사비밀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단 철수 명령이 떨어지니까 부대가 갑자기 정신없이 돌아갔다. 신 상병은 공병대로 원대 복귀가 되고 나는 밤낮 없이 부대 철수를 위해서 짐 싸는 작업에 동원 되어 우리는 그 후 만나보지도 못했다. 갱상도 사나이답게 무뚝뚝했던 신 상병!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들은 몇 개월 동안 각 참모부의 필수요원만 남기고 전체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반은 호 속에 들어가서 경계근무를 서고 반은 컨테이너에 짐을 채웠다. 하루 종일 짐을 싸다가 교대시간이 되어 호 속으로 들어가서 근무를 서면 그대로 총을 든 채 잠이 든 적도 있었다. 모든 짐을 다 싼 다음에 이미 트럭도 모두 보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단독 군장을 한 채 월남 정부가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나트랑 공항으로 향했다.
나트랑 비행장에는 처음 보는 민간 항공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군을 수송하는 용역 비행기이었다. 탑승 교육 시간에 인솔 장교는 바로 앞 비행기에서 한 병사가 승강구를 올라가면서 승강구 입구에서 서 있는 스튜어디스의 미니스커트 속을 쳐다보다가 철모가 벗겨지는 바람에 역시 뒤에서 입을 벌리고 미니스커트를 쳐다보던 전우의 앞니가 부러졌다는, 지어냈을 것이 틀림이 없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철모 끈을 단단히 매고 역시 처음 보는 미국 여자 스튜어디스의 친절한 미소에 넋을 빼앗기며 차례로 승강구를 올라탔다. 갈 때는 배로 1 주일이 걸렸는데 비행기로 4 시간 만에 돌아오는 것이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돌아올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진 않았겠지만 이런 분위기 일까.
실제로 베트남 민간항공사 비엣젯에서 비키니쇼를 했다가 벌금을 냈다고... ㅎㄷㄷ
이렇게 해서 결국 나는 끝까지 일병으로 있었던, 일병으로 갔다가 일병으로 귀국한, 30만 파병군인 중에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내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귀국을 하고 육군본부 중앙경리단에 월급을 수령하러 갔을 때였다. 담당자가 내 계급을 보더니 “뭐야? 일병? 이 자식! 천연기념물이네!”라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는 월남전에서의 내 개인적인 경험이었으나 이후부터는 월남전에 대한 일반적인 비전투상황에 대한 기록이 될 것이다. 월남전의 전투상황은 사관학교 교육과정에서 전략 전술에 대한 학습을 위해서는 필요할지 모르겠으나 역사적으로는 부끄러운 전쟁, 더욱이 지고 온 전쟁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다. 물론 전투에 참가한 개인들의 삶에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지만.
PS. 딴지의 창간 이념인 '똥꼬 깊수키' 정신으로 월남전의 속살을 파헤치기로 작심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변변한 내용에 비해 편집진의 현란한 짤방 신공으로 글이 더욱 빛나게 된 것은 가히 태극무공훈장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내가 해줄 것은 없으나 혹시 시드니에 온다면 숙박은 책임져 줄 능력은 있음을 밝힌다.
(독구 왈_ 편집장님, 보고 계시죠? 그럼 내년 엠티를... )
다음에 계속...
sydney
편집 : 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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