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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3. 목요일

돼끼












마지막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베이라 살라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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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르투갈의 혼란


1800년대까지 포르투갈은 왕정을 지속했다. 1891년 공화주의자들은 음지에서 튀어나와 포르투라는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키며 무력 활동을 시작했고, 1908년 리스본 시내에서 돈 카를로스 왕과 돈 루이스 필리프 왕세자를 암살하기에 이른다. 암살 당한 돈 카를로스를 이은 마누엘 왕은 공화주의자들을 탄압함과 동시에 개혁 정치를 펼쳤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개혁정치로 인하여 국민들의 원성은 높아져 갔고, 결국 1910년 10월 4일에 일어난 군사혁명으로 포르투갈 왕정은 막을 내린다.


혁명이 끝난 후 공화주의자는 아폰수 코스타를 수반으로 정부를 구축했으나, 각 계파 간의 싸움과 정치인들의 암살, 독재정치, 그리고 왕정복고 주의자들의 반란으로 사회는 난장판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제 1차 세계대전으로 포르투갈 경제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된다. 결국 공화정부는 사회적 혼란을 해결하지 못하고 고메스 다 코스타 장군을 주축으로 한 군부정권의 쿠데타 아래 종말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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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메스 다 코스타 장군

 


2. 군부정권, 살라자르의 등장


군부정권이 들어섰으나 사회는 여전히 혼란했고 평생 군대에서 지내느라 짱구가 짱돌이 된 군인들이 이 혼란을 헤쳐나가기는 무리였다. 결국 코임브라의 경제학 교수 안토니우 드 올베이라 살라자르가 1928년 재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포르투갈은 기나긴 독재정치의 그늘 아래에 놓이게 된다.


군인들이 주축이 된 정부에서 먹물 좀 먹은 살라자르가 어떻게 최고의 권력자 자리에 올랐는지 궁금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살라자르가 자신이 발탁된 이유를 충실하게 달성했기 때문이었다. 살라자르는 취임 후 4년 동안 디플레이션 정책을 통해서 포르투갈 경제를 재건했다. 당시 살라자르는 자신감 넘치는 말을 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며, 또 내가 가야할 곳이 어딘지도 잘 압니다.”


이런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성공적인 재정 확충으로 살라자르는 군부의 신임을 받으면서 코스타 장군의 뒤를 이은 카르모나 대통령에게 총리로 임명되게 되는데, 여기서 군부 정권은 끝장나게 된다. 군부 정권에는 살라자르만큼 영리한 인물이 없었기에 거의 모든 결제와 정책은 살라자르의 윤허 아래에서만 시행되었고, 살라자르는 막강한 실세로 성장한다.


살라자르는 1930년에 헌법을 개정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그의 행동은 1932년 각료 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이후 시작되었는데 정부에 의하여 개정된 헌법안을 국민 투표를 통해 통과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 헌법의 일부를 보자면,


1. 국가의 원수는 국민에 의하여 직접 선출되며, 7년의 임기를 가지고, 원수의 직능과 임기는 어떠한 국회의 투표에서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


2. 공장의 폐쇄나 파업에 의한 경제 활동은 용인되지 않는다.


3. 국가의 주요한 기능에 모든 사회 활동을 조정하고, 장려하고 관리하는 기능을 포함시킨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왕 되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어이없는 법안 내용에도 불구하고 긴 정쟁으로 정치적 염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포르투갈인들은 결국 1933년에 시행된 국민 투표에서 찬성 580.379표, 반대 5005표, 기권 427,686표를 던졌다. 그리고 기권표는 찬성표로 간주되어 개정된 헌법이 시행됐다. 바야흐로 1933년부터 1974년에 이르는 기나긴 독재정권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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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살라자르의 독재


살라자르의 독재체제의 정책을 분류하자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국가주의, 두 번째는 지식인 독재, 세 번째는 우민화 정책이다


첫 번째 정책인 국가주의의 핵심은 애국심과 전체주의다. 그러나 국가주의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이기적인 태도 때문인데, 그래서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국가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비밀경찰을 운용한다. 과거 우리나라의 막걸리 법처럼 민간인을 사찰하고 그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이들을 정리하는 비밀 경찰 정책을 살라자르는 '국제 경찰'이라는 기관을 창설하여 시행했다. 국제 경찰은 문제가 되는 이들을 모조리 탄압했을 뿐만 아니라, 반대파의 수장인 움베르토 델가도 장군을 암살하기까지 하였다. 전체주의를 위한 탄압과 함께 살라자르는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과거 신대륙을 발견했던 시기의 포르투갈 역사에 대한 교육을 강화시켰고, 국가적 영웅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때 주목 받은 인물이 리스본 대지진에서 주로 다루었던 폼발 후작 카르발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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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발 후작 광장 안의 동상


두 번째인 지식인 독재는 살라자르와 다른 독재자들과의 차이를 두는 정책으로, 당시 유럽의 정치적 풍토는 전문적인 정치집단, 예를 들어 나치 혹은 파시스트 집단이나 옆동네 스페인의 군부 쿠데타를 통한 군인들의 정치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살라자르는 출신 성분이 교수였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정책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알았고 그가 집권하는 동안 내각 구성원의 21%가 교수일 정도로 지식인들을 많이 기용했다. 이는 전례에 없는 특수한 경우로 나름대로 괜찮은 성과를 내어 안정적인 경제 성장과 혼란스러웠던 포르투갈 정치의 안정을 일구어냈다.


마지막인 우민화 정책은 실질적으로 살라자르가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는 정책으로, 3F 정책으로 불렸다. 여기서 F는 파두(민요), 파티마(가톨릭), 풋볼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민화 정책을 통하여 살라자르는 국민들이 정책에 쏟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했는데, 이는 꽤 성공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당시 포르투갈인들의 문맹율이 40%에 달했다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지적인 면을 외면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정책은 후일 먼 동양의 한 육상 생활에 적응한 독특한 돌연변이 문어에 의하여 3S 정책으로 패러디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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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제정책


경제를 구했다는 명성으로 지지 기반을 얻고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살라자르의 경제정책은 다른 나라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본토와 식민지의 경제적 기반을 다르게 발전시켰는데, 본토의 경우는 농업을 장려하는 농촌 국가를 만들려했고 식민지에는 공장을 건설하여 공업을 발전시켰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포르투갈의 안정적인 성장을 불러왔으나, 장기적으로는 그 성장의 정도가 매우 느려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속도면에서 뒤쳐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와 더불어 식민지에 몰빵한 공업 성장 덕에 식민지의 독립요구는 더욱 거세졌고, 이에 신경질난 독재정권이 식민지에 군대를 상주시켜 폭압적인 행동을 일삼으면서 결과적으로 앙골라의 독립전쟁을 야기했다.


이렇듯 포르투갈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 살라자르였지만 그가 포르투갈에게 남긴 선물은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막대한 양의 금이었다. 당시 살라자르는 금을 사들인 후에 그것이 다시 포르투갈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는데, 그렇게 쌓인 금이 무려 380톤으로 현재에도 이 금은 포르투갈의 국민 총생산의 6.8%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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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해서 다시 보는 금 200톤의 위엄


경제에서도 그럭저럭 성장을 이루어낸 살라자르는 외교 정책에서도 나름의 두각을 드러낸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표방하며 추축국과 연합국 양측에 물건을 팔아먹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교황청이 비밀 경찰집단에게 질서의 수호자라는 훈장을 수여하게 만들 정도로 수완이 있었다. 살라자르의 절대적 중립은 전쟁 이후에도 좋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옆 동네의 스페인이 항구를 나치에게 제공하고 청색군단을 파병했다는 이유로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을 때 포르투갈은 OECD의 전신인 OEED의 유일한 비민주주의 국가로서 창설 회원국에 등록하는 등 국가의 위신을 제대로 세웠다.



5. 독재의 종말


살라자르 정권은 60년대에 이르러서는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되는데, 우민화 정책을 통해서도 억누르지 못한 지식인 계층과 공산당 지하조직의 반발, 1961년에 시작된 앙골라의 독립운동이 살라자르 정권을 괴롭혔다. 포르투갈은 식민지를 잃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경제적 타격을 입기에 막대한 양의 전비를 들여가며 식민지에서 전쟁을 해나갔고, 전쟁 수행으로 인한 경제적 여파는 국민들의 불만을 일으켜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허나 독재는 실로 황당하게 끝난다.


1968년에 상투 ‘안토니우 드 바라’라는 성채에서 휴가를 즐기던 살라자르가 테라스의 해먹에서 잠을 자다가 떨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심하게 부딪히는 바람에 중태에 빠지게 된다. 일설에는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는데 어찌되었건 중요한 건 떨어졌다는 것이다. 당시에 이런 사실을 살라자르의 측근들은 최선을 다해서 숨겼는데, 8월 3일의 사고를 국민들은 9월 6일이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결국 9월 16일에 살라자르는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게 되고 그는 권력자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의 후임으로 리스본 대학 총장 출신의 카에타노 박사가 수상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이렇게 길고 긴 살라자르의 독재가 끝났다.


수상 직에서 쫒겨난 채 사경을 헤메던 살라자르는 머리에 응고된 피를 제거하는 대수술을 통해서 기적처럼 회생하나 이미 반신불수에 반쯤 실명된 상태였다. 의료진은 환자에게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고 진단내렸고, 살라자르의 추종자들은 살라자르가 수상 직을 잃은 것에 충격을 받을까 걱정되어 수상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처럼 가짜 신문과 가짜 서류를 살라자르에게 제출했다. 살라자르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현실을 알지 못하고 아무 의미 없는 서류에 서명을 하다가 죽게 된다.



6. 살라자르 사후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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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자르 사후에는 식민지들의 독립투쟁이 더욱 격화 되어 결국 독립을 성취했고,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여 결국 카네이션 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카네이션 혁명은 군부의 좌파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혁명으로 포르투갈의 많은 시민들이 이들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행동을 함으로서 카네이션 혁명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군부는 혁명을 통해 이스타두 노부 정권을 쫒아내고 국민에게 권력을 이양하여 국민 투표를 통해 민정을 이끌어냈다. 그리하여 카네이션 혁명은 성공적인 혁명, 피를 흘리지 않은 무혈 혁명으로 평가 받고 있다. 물론 민정으로 이양된 이후에 투표 결과에 불만을 품은 몇몇 군부 좌파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민정의 조속한 대처로 반란을 진압했고,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인 포르투갈이 탄생했다.



7. 필자의 평


살라자르는 매우 독특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세계 최초로 지식인 독재를 달성하고 세계 최초로 우민화 정책을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독재자들 중에서도 유달리 반대파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자비를 보여준 인물이다. 물론 그 자비가 생명을 빼앗지 않는 정도였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실제로 36년 간의 긴 통치기간 동안 혼란에 빠진 국가를 그렇게 안정화시켰다는 것을 봐도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얼마나 살라자르에게 호의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살라자르 본인도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기대치를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다만 그가 지지를 받았다고 해서 그의 독재정치가 옳다고는 절대로 할 수 없다. 그가 온건하고 지적인 독재자였을지라도 독재자는 독재자라는 점을 알아야한다.


우리가 살라자르를 보면서 배워야할 점은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이 어떠한 사태를 불러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에 저 기권표를 던진 이들이 조금이라도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면 지금의 포르투갈은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져버리고 노예가 되는 쪽을 선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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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지겹게 느껴진다면 왜 그것이 지겨운지,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바꿔야할 의무가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에게 부여된 책무라는 것을 말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PS 1. 후에 포르투갈에서 시행된 '위대한 포르투갈인과 최악의 포르투갈인을 뽑는 투표'에서 살라자르는 둘 다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PS 2. 마지막 독재자란 말은 살라자르가 최초이자 마지막 '지식인 독재자'였기에 적었다.


PS 3. 다음편은 스페인의 프란시스 프랑코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프랑코에 대한 이야기는 스페인 내전을 다뤄야하기에 2편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






돼끼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