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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17. 월요일

홍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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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미국, 두 남녀가 한밤중에 드라이브를 나간다. 으슥한 곳에 도착해 로맨틱한 분위기를 잡으려는데 여자가 어딘가 불안해보인다. 여자가 남자를 마중 나갈 때부터 따라오던 차가 밀회를 나누려고 하는 장소에까지 따라왔기 때문이다. ‘좋게 생각해서’ 경찰이지 않을까 싶어 남자가 자동차 창문을 연 순간, 탄창이 비어버릴 정도의 무시무시한 총알 세례가 이들을 덮친다. 9mm 루거 권총이 불을 뿜은 것이다.


남자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여자는 결국 죽는다. 사람에게 총질을 해 댄 이 살인마는 얼마 뒤 미국의 주요 신문사들의 편집장에게 자신을 ‘조디악 킬러’라고 소개하는 두 장의 편지를 보낸다. 편지 한 장에는 자신의 글을 신문에 제때 싣지 않으면 무차별적으로 독신자 12명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다른 편지에는 이상한 암호를 적어 놓았다. 이 때부터 범인을 잡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경찰과 특종을 놓치기 싫은 언론 사이의 불화가 시작된다.


한편 살인마는 편지를 신문에 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도시를 돌며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여대기 시작한다. 이 살인행각은 어느 정도 일어나다 잠잠해지고 잊을 만하면 또 다시 등장하는 식으로 강산이 한 번 바뀔 때까지 이어진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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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남녀를 살해하고 호숫가에서 또 한 건의 살인을 저지른 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사의 편집장에게 보낸 조디악 킬러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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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디악 킬러가 보낸 암호문. 그리스어, 모스부호, 날씨기호, 해군 수신호, 점성술 기호가 뒤섞여 있다.

미국의 한 고등학교 교사 부부가 일부를 해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살인이 즐겁다. 사람 죽이는 일이 숲의 야생짐승을 사냥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장 위험한 동물이다. 사람을 죽일 때의 짜릿함은 섹스할 때보다 더 황홀하고, 스릴이 넘친다.

나는 낙원에서 다시 태어나고 그 곳에서 죽인 자들을 노예로 부릴 것이다.

당신들에게 내 이름은 알려주지 않겠다.

내 이름을 알려주면 내가 노예를 수집하는 일을 막으려고 할 테니까”


조디악 킬러는 몇 건의 살인을 더 저지르고 여러 장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1978년에 공식적으로 ‘마지막 편지’를 남긴 뒤 자취를 감춘다.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이 살인사건으로부터 37년이 지난 지금,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에서 한 장의 편지를 발견했다. 바로 ‘국정원 직원의 유서’다. 국정원의 불법 해킹과 대선 개입 논란이 계속 논란이던 7월 18일, 갑자기 국정원 직원이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는 마티즈 내에서 번개탄을 피운 채 질식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국정원 직원의 유서는 국정원 직원이 무슨 외압으로 자살까지 이르렀는지, 정확한 신원 파악은 됐는지 등 모든 것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때에 갑자기 공개됐다. (원래 남긴 유서는 세 장 분량이었으나 여기서 나오는 유서는 국정원에게 쓴 유서 한 장을 말한다) 이 유서를 접한 많은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걸 ‘유서’라고 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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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진다. 보통 유서를 쓸 때 자신의 처지보다 몸을 담고 있는 조직을 더 걱정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조직의 회장이면 모르겠다만 그저 ‘직원’이라면? 어지간히 얼이 빠지지 않고서야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유서를 쓴 사람은 그저 직원일 뿐이면서 자신보다 조직을 더 걱정한다. 발표문도 아닌데 유서를 ‘감사합니다’로 마무리 하고 있는 점 역시 경악할 만 하다. 너무 진심 같지 않아서 오히려 특정인을 위한 암호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편지를 본 사람들이 갖는 생각은 두 가지로 나뉜다. 정말 국정원 직원이 유서를 썼다고 생각하거나 국정원 측에서 거짓 유서를 작성했다고 생각하거나. 그러나 어느 쪽이든 사진 속의 저 편지 속에 있는 무지막지한 광기에 전율을 하게 된다는 점은 똑같다. 국정원에서 일할 때 얼마나 세뇌를 받았으면 유서마저도 자기 얘기를 하는 대신 조직 이야기를 하면서 무려 ‘감사합니다’로 끝을 맺었을까. 아니면 얼마나 국민을 우습게 봤으면 이런 싸구려 같은 글을 유서라고 우겨대는 것일까. 살짝 두려워졌다. 국정원이나 정부의 태도를 조디악 킬러와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서다.

다시 조디악 킬러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조디악 킬러 살인사건은 분명 영화소재로 쓰기 좋은 실화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몇 편이나 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두 개의 걸작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살인마가 한창 협박편지를 보내고 있던 당시에 만들어진 돈 시겔 감독의 1971년작인 <더티 해리>와 조디악 킬러로 유력하게 의심 받았던 아서 리 앨런이 심장 이상으로 죽은 지 10여년 후에 만들어진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2007년작인 <조디악>이다. <더티 해리>는 단순히 그 사건을 다룬 것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다른 이유들로 유명해진 부분도 없잖아 있어 사건 자체에 좀 더 집중한 작품은 <조디악>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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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 감독의 <조디악>이 걸작인 이유는 스릴러적인 재미도 충만하지만, ‘어째서 살인범을 잡을 수 없었는지’에 대한 성실한 탐구가 돋보이는 작품이라서 그렇다. 작품의 주인공은 총 세 명이며 모두 실존인물이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의 폴 에이버리 기자(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데이브 토스키 형사(마크 러팔로),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의 만화가인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가 그들이다.


이 세 사람은 조디악 킬러 사건을 접한 뒤 놈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때로는 위험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끝내 검거에는 실패한다. 누군가는 위험을 감당하지 못해 폐인이 되고 누군가는 커리어에 문제가 생긴다. 오직 그레이스미스 만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추적하여 진실에 다가간 듯 보이나 역시 검거를 위한 증명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조디악>에서 묘사하는 살인마는 일종의 ‘관심종자’다. 자신이 관련되지 않은 살인사건마저도 직접 했다는 식으로 편지에서 언급하고 스스로의 행적을 알리려 든다. 이에 언론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범죄자의 불확실한 고백마저도 대중에게 알리면서 그를 전국구 스타로 만든다. 조디악 킬러는 한 명이지만 어디서든 볼 수 있고 거론될 수 있는 익숙한 유행 같은 존재가 된다. 너무나 익숙한 존재가 되면 이상할 정도로 무심해지는 법이다. 심지어 그것이 살인마일지라도. 조디악 킬러는 그의 바람대로 종자를 이곳저곳에 뿌려대어 마치 전국에 다 존재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여기에 시간의 흐름으로 인한 망각까지 가미될 경우, 사람이라면 분명 한 번쯤은 이상하게 여길만한 여건이 된다. 법이 있는 사회에서 살인마가 자신이 살인마임을 드러내면서도 살 수 있는 여건 말이다. 가령 누구인지 굳이 거론은 하지 않겠지만 사형대에 섰어야 할 사람이 추징금을 내놓지 않고 골프를 치러 다닌다거나, 아니면 국부로 추앙받는다거나... 사람들 혹은 세상이 관심을 잃은 사건은 그 무엇보다 빠르게 잊힌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는가? 없는 건 아니다. 관심종자 때문에 골치 썩지 않으려면 먹이를 주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나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이 살인마가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다. 마치 애초에 지구상에 없었던 사람처럼 말이다. 작품은 시간의 경과가 인물들의 의지를 꺾고 살인마의 존재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사라져버리는 과정을 묵직하게 지켜본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잊히는 것도 어찌 보면 조디악 킬러의 계략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국정원 직원의 사망사건에 대한 국정원의 대처는 조디악 킬러와 닮아 보인다. 국정원도 이 유서 같지 않은 유서로 사람들에게 굉장히 욕을 먹겠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욕을 감수하면서도 사람들이 여기에 집중해주길 바라는 것 같다. 그러면 이전에 있었던 민간인 계정 해킹과 대선 개입, 세월호 소유 의혹 등에 대해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한 사람이 자살한 국정원 직원이라는 등 CCTV에 찍히면 녹색의 번호판이 흰색으로 변한다는 만만찮게 믿기 힘든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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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하지는 않아도 여태껏 이와 관련해서 나온 개소리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임팩트 있었다.


국정원 뿐만 아니라 정체 모를 누군가는 많은 사람들의 힘이 지금의 헛소리가 헛소리였음을 증명하는데 빠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면 또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누군가는 조직 내부에서 개혁하겠다고 외치며, 모든 게 다 정상으로 돌아가겠지.


그렇게 조디악 킬러의 편지와 국정원 직원의 유서가 겹쳐 보이는 이상한 기분이 지속되고 있다. 국정원 직원 이전에 어느 한 가장의 편지이지만 무섭다. 한 국가의 정보기관이 미치광이 살인마의 방식을 응용하고 미치광이 살인마의 바람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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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가 묘사한 조디악 킬러의 모습



P.S


1) 요새 롯데 문제 때문에 국정원 이슈가 쏙 들어가서 잊히지 않게 하려고 끄적거렸다. 잊어버릴까보냐.


2) <조디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무섭게 봤던 시퀀스 하나를 링크해놓고 끝을 내겠다.


조디악 킬러가 자취를 감춘 후에도 추적을 계속하던 그레이스미스는 한 극장용 포스터에 적힌 필체가 조디악 킬러의 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필적 감정가에게 이 글씨가 조디악 킬러의 것과 거의 흡사하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그레이스미스는 ‘자신이 알고 지냈던 사람이 조디악 킬러 같다’는 한 남자의 전화를 받는다. 포스터의 필체와 관련된 질문을 하면 큰 단서를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캘리포니아로 간 그레이스미스는 그곳에서 협조를 부탁한 남자 증인으로부터 예상 밖의 대답을 듣는다.


“그레이스미스 씨. 이 포스터는 내가 만든 겁니다. 내 필적이에요.”


그리고 남자는 더 확실한 기록을 찾기 위해서 지하실로 내려가자고 권유한다. 증인을 자처한 남자의 말에 그레이스미스는 섬뜩한 대사 하나를 읊조린다.
 

“캘리포니아에는 지하실 있는 집이 거의 없는데...”


이어지는 시퀀스가 손에 땀을 쥐게 만들 정도로 무섭다.







홍준호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