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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06. 목요일

Anonym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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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명의 남자 - 0. 로리타 콤플렉스]

[77명의 남자 - 1. 안전지대와 멜빵]

[77명의 남자 - 2. 그에게 가는 막차]






'77명의 남자' 시리즈는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한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인지라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 술술 풀리기 마련이지만, 글을 쓰고 나면 그 시절 나의 찌질함이 또다시 나를 찾아와 꽤 오랜 시간동안 괴롭다. 그래서인지 (물론 변명이지만) 한 편을 쓰고 그 다음 편을 생산해 내기까지는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며, 따라서 글이 나오는 텀이 상당히 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기 있게 나의 변변찮은 글을 기다려 주는 딴지일보 편집부에 감사드리는 바이다.


내 과거에 대한 일련의 글들을 써 가면서 새삼 깨닫는 점이 있다면, 내가 타인에게 저지른 만행은 마치 업보와 같아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결국은 내게 다시 되돌아 온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유부남과의 연애 스토리. 뻔한 듯 뻔하지 않은 이 스토리는 또 어떤 형태로 내게 비수가 되어 되돌아올지 모르겠다. 여하튼. 욕 먹을 각오하고 나의 이야기를 또 한 번 풀어 본다.


0. 로리타 콤플렉스


1. 안전지대와 멜빵


2. 오봉 배달부


3. 음성사서함과 러브레터, 그리고 스토커


4. 첫눈에 반한다는 것


5. 김짱과 노짱


6. 그에게 가는 막차


7. 첫 담배


8. 애기야


9. 감기


10. 벽


11. 수컷들


12.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13. 쓰리썸과 그리스


14. 고목나무의 다람쥐


15. 일본남자는 별로


16. 첫사랑이 돌아오다


17. 이탈리아 남자란


18. 영혼이 닮았다


19. 11살


20. 놓치고 보니 아까운 남자


21. 여행지의 불길


22. 와우폐인


23. 하늘에 별이 보여?


24. 손호영 닮은꼴


25. 청산리 벽계수


26. 자살금지


27. 그의 친구


28. 첫 프로포즈


29. 12년의 우정


30. 꽃돌이


31. 섹스도 사랑이라면


32. 에이즈의 기억

(편집부 주 - 구글이 본지에 라이벌 의식을 느낀 탓인지 본 기사를 에로틱, 선정성 분야로 선정하여 

당분간은 볼 수 엄따. 본지는 졸라 이해할 수 없으나 양해바란다.)


33. 상상인연


34. 부잣집 외동아들


35. 줘도 못 먹는 남자


36. 애 딸린 남자


39. 친구라며?


38. 진심이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닌가 봐


39. 현재진행형?


40. 흑형


바람이 차가워졌음을 새삼 피부로 느끼게 되는 어느 가을날이었다. 낯선 거리를 헤매던 나는 한 까페 테라스로 기어 들어가 잠시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다. 이윽고 한 남자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맥주를 시켰던 것도 같다. 목을 감싸던 스카프를 가지런히 개어 옆의 의자에 정리해 둔 그의 시선이 내가 읽던 책에 와 닿았다. 마크 페로의 『역사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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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단지 '이미지의 제국'으로서의 예술만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의 매체'로 역사의 증언임을 골자로 하는 이 책을, 그 역시 인상 깊게 읽었던 듯 했다.


"책 재미있어요?"


이 한 마디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처음 본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시작하여 서로의 간단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물 흐르듯 이어졌고, 내가 집을 구한다는 이야기에 자신이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다며 남자는 명함을 내밀었다. 어느덧 그는 약속시간이 되어 까페를 떠났다. 느낌이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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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그 날과 비슷한 느낌의 바람이 뺨을 스치자 그 남자가 생각이 났다. 지갑 속에 아무렇게나 넣어둔 남자의 명함을 꺼내어 문자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고, 우리는 함께 식사나 한 끼 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불고기 정식을 먹었던 것 같다. 이윽고 계산할 때가 되자, 내 카드를 내밀었으나 밥값은 이미 지불된 상태였다. 다음번에는 레바논 식당에 함께 가기로 했으므로 그 때는 내가 계산을 하겠노라고 다짐을 받고선 헤어졌다. 하지만 그 다음번에도 그는 특유(?)의 신사정신을 발휘하여 한발 앞서 계산을 해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커피값이라도 내가 내게 해 달라며 빌다시피 하여 함께 간 까페에서, 그는 내게 고백을 했다.

 

"사실은 나 결혼했어."


"그런데?

 

사실 그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괜찮은 '남자'라고까지 느껴지지는 않았기에, 당시 내게 그가 유부남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그런 마음을 전달하고 서로 이야기가 잘 통하는 친구 사이로 지내기로 한 이후, 우리의 만남은 점차 잦아졌다. 나보다 7살이 더 많은 그는 자기보다 5살이 많은 아내를 18살 때 만나,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한, 두 아이를 두고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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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혼은 완벽하기 이를데 없어 보였다. 교사인 아내는 가정적이었고, 그는 은행 브로커로 연봉이 몇 억을 쉽게 넘겼다. 정원이 있고 넓은 손님방까지 갖춘 전원주택이 있었고, 그는 우리가 만난 도시에 아파트 한 채를 빌려 비지니스를 위해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를 머물곤 했다. 부부는 두 아이와 함께 바캉스 때면 해외여행을 다녔다. 이들은 크리스마스 때는 모두가 모여 트리를 만들고 즐거워 했고, 할로윈 저녁에는 모두 변장을 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댄스파티를 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그는 결혼을 하고 직업적으로 자리를 잡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으로서만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버거워하는 듯 했다. 그는 내 앞에서 웬만하면 아내의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5살이 많은 그녀는 이미 해 볼 수 있는 방황 혹은 일탈을 자신을 만나기 전에 다 해 보았다며, 자신의 삶을 아내의 그것과 비교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저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었을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만나서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고, 대화의 주제는 역사, 사회에서부터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언제나 넘쳐났다. 때로는 길 위의 껌딱지까지 도마 위에 올랐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말이 참 잘 통하는 사람이었던 듯 하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내게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해 왔다. 그러자고 했다. 이미 내게도 그는 그저 단순한 친구 이상의 존재였다. 동시에 내가 사랑에 빠질 대상이 아님 역시 확실했기에 그에게 나의 마음을 명확하게 전했다. 골자는, 나는 너와 진지한 관계를 목표로 두고 사랑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애인은 할 수 있다. 동시에, 너의 섹스파트너가 될 생각도 없다.

 

나는 영원한 사랑은 믿지 않는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생이던 때, 몇 번의 바람을 피웠고 그 중 한 번은 내게 현장을 들키기도 했다. 그 때 나는 아버지께 "당신의 새로운 사랑 역시 존중한다. 하지만 어머니와 정말로 갈라설 게 아니라면 알아서 정리하시라"고 말씀드렸다. 내게 있어 오래된 커플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기 마련이고, 다만 그 자극은 서로의 합의 하에 공개된 상태에서 누려야 하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나는 아직도 싱글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내 생각을 전달했고, 그는 안도하는 듯 했다. 그는 내게 "그런 사람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야. 너는 결혼은 못 하겠구나"라고 말했다. 이전에도 '바람'을 핀 전적이 다수 있었던 그는 그에게 집착하던 한 여성 덕분에 한바탕 실컷 고생을 했다고 한다. 나는 전제를 붙였다. 그의 아내가 알게 되어 그 가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그것은 그의 책임이라고. 나는 너에게 애인 이상의 어떤 것도 바라지 않겠으니 너 역시도 나의 개인사에 관여하지 말라고. 며칠 후 함께 여행을 떠난 둘은 애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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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정생활에도 충실했고, 나 역시도 다른 남자들과의 데이트를 계속 했다. 그는 나의 애인일 뿐, 내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그가 가족여행을 떠났을 때, 마음에서 질투가 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괜찮았다. 처음부터 그 경계를 정해놓은 관계는 그 한계가 확실했으므로 그 이상의 기대는 불가능했고, 내 이성은 그런 질투 정도는 다스릴 수 있을만큼 나이를 먹어 있었다. 그도 역시 나의 다른 남자들을 경계했지만, 우리의 만남은 오히려 더 격정적이었고 달콤했으며, 그와의 대화는 여전히 막힘 없이 훌륭했다.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지 않았기에 싸울 일도 없었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 해 봐야 일주일에 하루 정도였기에 사소한 다툼 역시 자제할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무겁지 않았지만 깃털만큼 가볍지도 않았기에 그와의 관계는 서로에게 활력소였다. 내게 그는 타지에서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였고, 그에게 나는 젊었던 시절의 자신을 되찾게 해 주는 존재였다.

 

그렇게 10개월 가량이 흐른 어느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친 목소리의 그는 이제 우리의 만남을 그만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남긴채 전화를 끊었다. 상황 설명도 없었지만 나는 그냥 납득을 해 버렸다. 그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부남이라는 그의 위치를 인지하고 시작한 관계여서인지 나는 갑작스러운 마지막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그렇게 그의 존재를 마음에서 지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달 여쯤 지났을까,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만나자고 했다. 만났다. 그는 한눈에도 초췌해진 얼굴로 나타나 그간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다고 한다. 나와의 관계를 알게 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저, 그의 전적들이 아내로 하여금 그를 믿지 못하게 하였고, 그 신뢰의 부재를 채워준 다른 누군가가 나타난 듯 했다. 그를 위로해 주었다. 우리는 이전처럼 함께 식사를 했고, 커피를, 술을 마셨다. 하지만 내 몸은 더이상 그를 원하지 않았다. 내 이성은 한 달의 기간동안 그를 애인의 지위에서 완전히 내려 놓았고, 따라서 나의 육체 역시 그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스킨십에 실패한 그는 점차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와 진지한 관계로 발전했으면 좋겠다고도 했고, 이제는 여자들을 못 믿겠다며 남녀관계 전체를 비난하며 혼자 지내겠다고도 했다. 이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했다가 얼마 못 가 이혼은 못 하겠다며 마음 아파 하기도 했다. 흔들리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이제 내게 있어 그는 '남자'가 아니라 그저 상처입은 한 마리의 동물과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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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때마다 스킨십을 시도하고, 거절당하기를 몇 차례. 결국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그는 내게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선언해 왔다. 아련하면서도 미안하고,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그는 몇 주 후 또다시 연락해 와 사과를 했고, 나는 그제서야 더 이상 그를 남자로 보지 않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전달했다. 그는 유부남과의 연애가 더 스릴있는 것이냐며 나를 비난했다. 그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에게 나의 마음을 설명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은 무의미해 보였다.

 

그 이후로 나는 그를 몇 번 더 만나 보았는데, 그 때마다 만나는 여자들이 바뀌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여자들과의 가벼운 만남을 통해 타인에게 전가하고 싶어 했다. "너를 만나는 여자들은 무슨 죄냐"고 가벼운 비난을 했더니, "네가 할 소리는 아니"라며 일축했다. 이혼을 하고 대부분의 재산을 아내에게 넘겨 준 지금도 그는 충실하게 다정한 아버지 역할만은 잘 해내고 있다. 그에게 있어 어릴적 겪은 부모의 이혼으로부터 받은 것과 같은 상처를 자신의 아이들에게만큼은 주고 싶지 않다는 의지는 그 모든 불행보다 강한 듯 했다.

 

그의 사례는 조금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어쩌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공고한 현대사회의 부부 내에서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이란 스스로 하자없음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증명이기도 하며, '결혼이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이니 하는 것이 낫다'는 말로 종용되는 하나의 숙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경제공동체'로 거듭나는 오늘날의 결혼에서 '사랑'이라는 흔한 말로 당연한 듯 포장되는 부부의 관계는 불안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는 '부부'라는 관계를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기를 원했고, 결국 결혼생활은 그를 버렸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찾지 못했다. 그가 바란 작은 일탈은 아내와의 합의 위에 성사된 것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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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나는 결혼을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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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점수를 한 번 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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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남의 점수는 100점 만점에 91점. 내 주관적인 기준에 따르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의 점수 내기도 사실상 별로 의미가 없다. 경계와 한계를 명확히 그어놓고 시작한 관계였으므로. 


처음에는 걱정도 있었다. 열정이란 결국은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갈망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매력적인 그에게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우려가 컸다. 주변의 지인들도 너의 결정은 존중하지만 걱정스럽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우려와 달리, 나이를 먹어버린 내 이성은 그 경계를 비교적 완벽히 인식해 냈고, 적어도 내게 있어 그와의 관계에서 결핍은 제거되었다. 관계를 물잔에 비유한다면, 그리고 잔의 비워진 부분을 채우고자 하는 갈망이 열정으로 표출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관계는 이미 가득 찬 물잔이었던 것이다.

 

언제쯤 위의 점수가 의미있어지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Anonymous


편집 :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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