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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1. 화요일

sydney 







편집부 주


어느 날, 회사 대표메일로 날아든 한 통의 메일,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다 메일을 보낸다는,

딴지일보 창간부터 독자이며 연식 좀 나간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 편의 글과 함께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이런 류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딴지 밖에 없을 것 같아서 보냅니다.

젊은 세대들이 알아야 할 월남전의 진실, 이제까지 아무 곳에서도 알져지지 않았던

월남전의 실상들을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흥미위주로 썼습니다."


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꿀잼 허니잼이니

함 읽어보시고 의견들 주시면 좋고.


 



 





 

월남전은 하나의 세계였다월남전은 군대라는 바퀴와 함께 파월 기술자라는 또 다른 바퀴가 함께 굴러가는 수레와도 같았다. 


당시에는 월남에서 제대 한 후 현지 회사에 취직을 해서 눌러 앉은 사병들도 있었다.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일자리를 찾기 힘든 때였기에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몇 달씩 제대를 연기하면서까지 취직을 하기 위해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도 말단 중대에 있는 사병들은 정보가 없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있을 수 없었고, 보직이 좋은 사병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물론 기술자들이나 현지 취업을 한 사병들이나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지만 보직에 따라서는 단순히 월급만 받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미군과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융통성이 많았다. 왜냐하면 총알을 쏘는 것이 아니라 달러를 갖다 붓는 것이 미국이 월남전을 수행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군수물자를 빼돌려서 재미를 보던 사람이 처음에는 현지 실정을 잘 몰라서 엉뚱한 물건을 잔뜩 빼돌렸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었다. 전쟁통이기 때문에 생활용품이 필요한 것인데 당장 필요가 없는 고가품을 빼 돌렸다가 처분을 못해서 낭패를 본 것이다. 보급품에는 책걸상을 비롯하여 침대, 이불, 담요, 식기 등 식품과 소모품들을 제외한 온갖 잡다한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 중이었기에 언제 어디로 피난을 떠나야 할지 알 수 없는 월남인들에게 주로 필요했던 품목은 1인용 모기장, 모기약, 홑이불로 쓸 수 있는 침대 시트 등 어떻게 보면 시시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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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당시 미군 보급품 중 하나인 방충제



다음은 한 파월기술자(이하 A)가 경험한 일이다.

 

보급창에서 짐을 싣는 동안 기다리는데 옆에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그 곳을 관리하는 미군에게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왜? 좀 실어 줄까? 재봉틀인데."


했다. 박스 하나를 뜯어보았더니 '싱거'표 재봉틀이 여러 대씩 들어있었지만 월남에서는 인기가 없으리란 걸 짐작했다. 피난 다닐 때 그 무거운 재봉기를 들고 다닐 리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에 가져가면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만 실어 줄래?" 


A가 부탁하자마자 미군은 그걸 처분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났었던 사람처럼 여러 상자를 차에다 올려 주었다. 보급창을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부두로 향했다. 부두에 한국 LST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걸 실어드릴 테니까 가져가서 알아서 처분하시고 돈이 되면 그중 얼마를 나눠주쇼."


A는 함장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찔러 보았다. 처음에는 딴 사람한테 부탁하라고 고개를 가로젓다가 한 번만 해 보라고 강권하자 마지못해 응낙을 했다.A는 트럭에 실려 있는 박스를 배에다 부려 놓았다.

 

석 달 정도 지나자 그 함정이 다시 돌아왔다. 한국까지 다녀오려면 그 정도 걸린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 A는  때를 기다렸다가 부두로 찾아갔다. 배에 오르자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석 달 전에 실었던 재봉틀이 틀림없었다.


"아니, 왜 도로 가져왔습니까?"


"부산에 가보니까 상륙할 방법이 있어야지요

아무 서류가 없으니까 세관원도 어쩔 수 없더라고요

돈도 돈이지만 재봉틀 한 대가 아쉬운 게 우리 나라 실정 아닙니까

공업용이니까 마산 공단에 갖다 주면 그걸로 엄청난 외화를 벌수도 있는데...

그래서 사정을 해 보았는데 끝까지 안 된다는 거예요."


선장은 돈벌이보다는 애국심 때문에 더 재봉틀이 아까운 모양이었다.


"그냥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당신이 날 의심할 테니 할 수 없이 다시 싣고 왔지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다시 싣고 갈 수도 없고."


매우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A는 선장을 괜히 부대물건 도둑질에 끌어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장에게 미안했다. 재봉틀을 한국에서 못 내린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장과 A는 머리를 맞대고 재봉틀 처리 방법을 찾았다. 보급창으로 되돌려 줄 수도 없었다. 그들은 궁리 끝에 바다 속에 처넣기로 했다. 그 날 저녁 선장과 A는 땀을 흘려 가며 재봉틀 수십 대를 캄란만 바닷물 속에다 밀어 넣었다.

 

한 번은 자동차 타이어가 많이 쌓여 있어서 싣고 나온 적이 있었는데 월남에서는 '천하에 쓸모 없는 물건이어서 남몰래 숲 속에다 버리느라고 애만 먹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언젠가 인근 지역을 지나다 보니 돼지우리 앞에 타이어를 서로 묶어서 담을 쌓아 놓고 그 속에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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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당시 흔히 신었던 타이어로 만든 신발



1971년 이후 한 때 월남엔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많이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은 잘 모르지만 내 짧은 생각으로는 한국군이 미군 보다 철수가 늦었던 것은 아마도 돈이 필요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려운 국가의 처지에서는 월남에 하루라도 더 있는 것이 돈을 버는 셈인 것이었다. 실제로 733월에 철수 하는데 729월까지 새로운 병력이 충원되었다.

 

1973127일 자정(현지시간 12808)을 기해 휴전이 공표되었다.


전쟁터에서는 후퇴 할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이 상식을 무시했다가 피해를 보는 일이 월남전에서도 역시 벌어졌었다. 1맹호사단에서는 19 번 도로 안케 패스 전투의 치욕을 들 수 있고, 백마사단은 1번 도로 붕로만 사고를 빼놓을 수 없다


붕로만 고개에 대한 경계책임은 제29연대 제1대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휴전을 하루 앞둔 19731 27일 밤 23시경 붕로만 고개의 목교가 베트콩에 의해 폭파되고 베트콩기가 초소에 걸렸다. 베트콩은 '현상 동결의 휴전협정'에 따라 그들의 지배지역을 증명하기 위하여 베트콩기를 휴전 전날 밤 전국적으로 게양하라는 월맹의 비밀지령에 의해 휴전 발효와 함께 베트콩기를 게양한 것이다.


사단장과 연대장의 질책을 받은 제1대대장 유재문 중령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날이 밝아지자 자신이 직접 현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3중대에서 1개 분대를 차출하여 함께 장갑차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 도착시간은 휴전 발효 불과 1시간 5분을 남겨놓은 0655분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대대장 일행은 베트콩을 우습게 알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장갑차에서 내려서 "웃기는 놈들..." 하고 코웃음을 치며 교량에 다가갔다. 맨 앞에서 심재철 중사가 문제의 베트콩기를 뽑아가지고 장갑차로 돌아가려고 할 때 부근에 잠복하고 있던 베트콩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며 B-30적탄통을 발사했다. 순식간에 대대장 유재문 중령과 심재철 중사 등 6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6명이 부상했다.

 

배원식 연대장은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 일대에 포병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베트콩은 암석지대의 천연동굴에 몸을 숨겨 아군의 포병화력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제 연대가 당면한 문제는 적의 제압이 아니라 숨진 시체의 회수에 있었다. 특공조까지 투입하며 시체 회수 작전에 돌입했으나 적의 저항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소탕작전을 명령했지만 막상 저녁 무렵 작전을 개시하고자 하는 시점에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사연은 이세호 사령관이 흥분해서 휴전이 발효된 것을 깜박 잊고 있고 작전을 승인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휴전이 발효된 것을 깨닫고 취소시킨 것이다. 한 마디로 최고 사령관부터 일선 지휘관까지 갈팡지팡이었다.

 

연대장은 닌호와 군청에 파견했던 연락장교 이형관 대위에게 확성기가 달린 장갑차를 빌려오도록 하여 백기를 달고 현장에 보냈다. 그리고 확성기를 통해 적측에 방송을 했다.

 

"우리는 휴전협정을 지켜 공격하지 않겠다

그러나 우리는 숨진 장병의 시체를 찾아야 되고 그래야만 철수를 할 수 있다

시체를 돌려 달라."


고 애걸복걸하였다. 아마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저자세로 베트콩에게 사정사정한 예는 이 경우가 유일할 것이다. 이렇게 확성기를 통해 2일간에 걸쳐 그들을 설득시켜 겨우 시체를 회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굴욕적인 과정을 겪어가며 백마 사단 제29연대는 1번 도로를 사용하지 못하고 미군 수송기를 이용하여 도망치듯 빠져 나올 수 있었다29연대는 23일부터 6일 사이에 3.900명의 병력을 39, 화물 3,080톤을 77회 C-130송기로 나르며 냐짱 공항을 통해 철수를 완료하였다.

 

나중에 영현을 수습할 때 대대장의 손목에 있어야할 롤렉스 손목시계가 대대장을 경호해야할 중사의 손목에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마 전사한 중사는 자기가 전사할 줄 모르고 대대장보다는 명품을 사수(?)해야 할 사명감을 더욱 강하게 느꼈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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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세계일보



당연히 한국은 미군이 제공했던 장비를 최대한 보유한 상태에서 철군을 원했지만 미국의 계획은 남베트남에게 이양하려는 것이었다. 미국이 한국군에게 제공했던 장비의 소유권과 철수비용, 국내에서의 운용방안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군은 7112월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197326일 십자성 부대 산하 수송부대는 물건 하나도 베트콩에게 넘어 가지 못하도록 땅에 묻을 것은 묻고, 태울 것은 태우라는 지시와 함께 모든 차량의 부속품을 신품으로 갈아서 완전히 새 차를 만들어서 고국으로 보냈다. 정 병장은 철수 차량 대열의 마지막 후미 5 톤 견인 트럭을 탔다. 냐짱으로 향하는 다리를 이미 베트콩이 파괴를 하는 바람에 월남군이 엉성하게 설치한 부교 위를 차량이 한 대씩 조심해서 건너갔다. 마지막으로 견인트럭이 통과하려고 하자 월남군 공병 장교가 다가오더니 견인차가 지나가면 다리가 무너질 우려가 있으니 자기들이 제공하는 지프차를 타고 견인차는 놓고 가라고 했다. 이미 선두의 모든 차량들은 다리를 건너가 버렸고 무전기도 없어서 누구에게 보고를 하거나 지시를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월맹군 장교의 말대로 견인차를 두고 가거나 끌고 가거나 독자적으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때 운전병이 정 병장에게 "! 공포 쏴!"라고 해서 M16으로 월남군 장교의 발밑에 발사를 하자 월남군 장교가 놀라서 뒤로 물러선 틈에 전진을 해서 월남군 장교의 말대로 금방이라도 걸고 부서질 듯 흔들거리는 다리를 숨도 못 쉬고 건너서 무사히 견인차를 한국으로 가져 올 수 있었다. 견인차를 탐내는 월남군의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 자기들의 안전만을 위해서 지프차로 갈아 탈 수는 없는 일이고 차 한 대라도 고국으로 가져가려는 마음에 생명을 걸고 감행한 것이었다. 정 병장 일행뿐만 아니라 당시 파월 장병 모두는 가난한 나라 살림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했었다.


월남에서 철수 할 때 우리는 가난한 나라 군대답게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간다는 원칙으로 짐을 꾸렸다. 심지어는 베갯속은 버리고 베갯잇까지, 깔판으로 쓴다고 탄약상자를 분해해서 챙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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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박스쌀때 저런식으로 비닐을 넣어 방수처리를 했다고.



50 년 전 한국군에게 월남전은 새로운 세계였다. 한국보다 더 가난하고 후진적인 월남과 물자가 풍부하고 선진적인 미국 사이에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월남에는 적과 동지가 있었고, 한국군의 물주인 미국한테는 감시와 후원을 받아야 했다. 월남과 미국 사이에서 비록 병력 5만 정도의 군단 수준이었지만 넓고 큰 세계가 있어서 사령관이라고 해도 전체를 알 수 없고,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이 아니면 전혀 알 수가 없는 일들이 무수하게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참전의 경험이 있는 이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서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할 정도로 놀랄만한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한국군으로서는 믿을 수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는 월남과의 사이에서 보다는 미국과의 사이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80 년대 젊은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던 <전환시대의 논리>의 저자 이영희 교수는 최초로 월남전에 관한 흑과 백의 이분법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비로소 베트남전을 '이성의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정권에 의해 금서가 된 이 책에서는 베트남전 개입은 공식적으로는 월남 정부의 요청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미국에 월남전 카드’ 를 제시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민주주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 승인을 받기 위해 196111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해서 미국에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먼저 밝혔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전면 철수, 두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었던 케네디는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결국 케네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댈러스에서 암살되고 만다.

그러나 후임 존슨 정부는 1964년 봄부터 베트남 전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최대 54만 명까지 병력을 늘리는 한계에 도달하자 한국 등 25개 우방국에게 베트남 파병을 요청했다. 여기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나라는 한국과 태국, 호주, 필리핀, 뉴질랜드에 불과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적극적으로 한국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1965516일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어 다시 미국을 방문 하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사정이 달라졌다.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들은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낸 대통령 전용기 보잉 707에 몸을 실었다. 그 당시 가난한 한국은 대통령 전용기가 없었지만, 미국 대통령이 자기가 타고 다니는 전용기를 이 작은 나라에 보낸 것은 매우 드문 사례였다. 그만큼 당시 베트남 전쟁이라는 개펄에 빠진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다음날 워싱톤에 도착한 박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영접한 존슨 대통령은 큰 리무진에 동승해 영빈관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13만 명의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앞차에는 양국 정상이, 뒤차에는 양국 영부인이 타고 21대의 모터사이클이 선도하는 행렬이었다. 이날 오후 5시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렸다.


이틀 후 뉴욕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시내로 들어가면서 또다시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번화가인 브로드웨이를 지나가는 동안 고층 건물에서 오색종이들이 눈처럼 쏟아졌다. 한국 대통령에 대한 이 같은 융숭한 대접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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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나들이 매니아이신 따님 생각이 절로 난다능...



그러나 월남은 힘을 가진 놈들끼리 서로 정권을 강탈하는 곳이었다.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도둑놈 투성이었기 때문에 그 탓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죄 없는 민중들뿐이었다


미국은 월남전을 핑계로 군수산업이라도 일으켰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 아쉬울 일이 없는 한국군이 하는 일은 도둑질뿐이었다. 군대 안에서 상납을 하는 풍토가 고질화된 것도 월남전 참전 이후부터라고 하니 월남전이 한국군을 얼마나 병들게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다못해 내가 겪은 것처럼 때가 되면 일등병이 상병으로 자동적으로 진급이 되는 것 -월급은 어차피 미군이 주는 것인데도에서도 진급한 첫 달 월급은 사병계에 상납을 해야 되는 판이니 다른 일을 말해 무엇을 하겠는가?


잘못된 전쟁답게 전투에서 죽는 사람은 죽고, 조금이라도 힘을 이용하여 08 (헌병 주특기가 80으로 시작되는 것에서 연유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다는 군대 은어, 즉 헌병은 '도둑'이라는 의미을 쳤다. 국가는 국가대로 미국을 상대로 08을 쳐서 막대한 군사 장비를 한국으로 빼돌렸다.

 

장교 사병할 것 없이 돈을 만질 일이 전혀 없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전투원들을 빼놓고는 조그마한 특권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최대한대로 이용해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긁거나 뜯어서 한 살림 장만하기에 급급했다. 차만큼 흔해빠진 헬리콥터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주야로 높은 사람들의 구두나 닦고, 아침이면 치약까지 짜서 바치며 입맛 없는 장교를 위하여 땀을 흘리며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고 팬티까지 다림질을 해서 줄을 세우던 딱까리 (당번병) 들의 머릿속에도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갈까?" 하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원들은 귀국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본국의 은행에 송금한 몇 백 달러짜리 저금통장을 손에 쥐거나, 눈치껏 모은 일본제 전자제품 몇 점을 베니어로 짠 귀국 상자에 넣어서 배에 싣고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철수 병력인 우리들은 더블백만 짊어지고 돌아왔다.

 

월남에서 물자와 함께 들어온 것이 바로 짜웅문화이다.


베트남에서는, 할아버지나 손윗사람인 남자에게 인사를 할 때, Chao (안녕하세요) Ong (할아버지) 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 짜오 옹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이것이 한국인에게 좀 더 발음하기 편한 한국화(?)된 베트남어로 변해서 짜웅이 된 것이다.


미군은 막대한 예산을 써가면서 대민 사업을 진행하였지만 소수 부정부패한 권력층에게만 혜택이 집중적으로 돌아갔다. 한국군도 대민사업을 했지만 가난한 사정을 알기에 주로 초등학교 설립, 교량/배수구 공사, 도로건설, 의료사업 등 주로 지역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유익이 가는 것으로 위주로 대민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아무렇게 해도 이러한 대민사업에서 '떨어지는' 각종 콩고물(?)을 챙겨보고자, 몇몇 베트남 관료나 지방 유지들은 끊임없이 한국군 요새를 드나들었다. 콩고물을 챙겨먹기 위해서라도 이들 베트남 인들은 한국군에게 무조건 잘 보일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요새에 드나드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한국 병사들에게 나이와 계급을 불문하고 계속 "Chao Ong!"이라는 인사를 던졌다.


대민사업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담당자에게라면 그렇다 치더라도, 나이 지긋한 아버지뻘 되는 베트남 사람이 20대 초반 한국 병사들에게 굽실거리며 인사를 하고 기분을 맞추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좋게 보이지만은 않아서 병사들은 "저 쌔기 또 짜웅하러 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각종 아첨, 부패, 비리, 뇌물의 상징어인 '짜웅'이란 말은 월남에서 돈을 만지다 돌아온 한국 군대에 급속하게 퍼진 부패와 함께 '공용어(?)'로 확산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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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 한국군의 아사무리한 관계

  

모든 전쟁에서와 같이 월남전에서도 처음에는 무공훈장은 적 사살자의 수를 기준으로 삼았었다. 그랬더니 베트콩으로 확인되지 않은 양민의 희생이 늘어났다. 이러한 부작용이 심해지자 훈장 수여 기준에 무기의 노획 수를 적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수품을 팔아 그 돈으로 월남군이나 민병대로부터 소총 등 각종무기를 구입해서 노획무기라고 전투상황을 꾸며 보고하는 또 다른 병폐가 생겨났다. 전쟁터에서 지휘관들의 공명심에 사로잡힌 지나친 경쟁이 가져온 허위전과보고는 사령부를 골치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골치가 아픈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한국군이 전사했을 경우이다. 전공에 따른 훈장이야 한국 정부가 주는 것이지만 한국군이 전사하면 보상은 미국에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돈으로 싸우는 기묘한 전쟁에서는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724월에 벌어진 악명 높은 안캐패스 전투는 과거와 달리 월맹 정규군과의 전투였기 때문에 포격을 당하여 아군의 피해가 심했다. 이전의 전투처럼 총알이나 적이 설치한 지뢰 때문에 전사를 해도 비교적 신체가 온전히 보존된 채로 전사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조각이 나서 전사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한국군이 전사자 숫자를 부풀릴 우려가 있다고 보고 훼손 되지 않은 시신을 요구했다. 그 결과 지옥 같은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전우들이 전사자들의 시신을 조립하기 위해서 멀리 날아 가버린 팔 다리, 목을 찾을 수가 없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월남군의 시신을 야전삽으로 찍어서 숫자를 맞추는 곱빼기 지옥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었다. 생사가 갈리는 것 이상 의미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터이지만 한국군의 월남전은 훈장과 전상보상금이 걸린 이상한 전쟁이었다.

 

1970년 주 월남미군사령부가 돌연 군표개혁, 즉 군대 내에서 화폐개혁을 단행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군표가 미군이 한국군에게 할당한 군표의 액수보다 엄청나게 많은 액수를 보유했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기업과 기술자들이 보유한 군표액수도 엄청났고 또한 미 군표를 이용하여 미국 본토 달러와 교환하는 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으니 그 액수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연히 우리정부의 지시는 어떻게 해서든지 미군과 협상하여 군은 물론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군표까지도 전액을 교환하라는 것이었다. 주월사령부 부사령관이 협상대표로 나서서 앞으로 한국군은 미 군표를 사용할 때 주 월남한국군이 발행하는 쿠폰을 같이 사용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한국인이 보유한 막대한 미 군표를 전액 교환하여 휴지조각이 될 번한 한국인의 돈을 살려내는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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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월남미군사령부로부터 퀴논지역에서 담배가 가득히 적재되어 있는 미군 PX 대형 컨테이너 1대가 실종되었는데 컨테이너가 한국군 부대의 영내로 들어갔으니 조사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요청이 정식으로 들어왔다. 우리 사령부에서 현지부대에 나가 조사할 때는 이미 컨테이너 자체를 통째로 땅에 파묻어버린 후였다. 이 사건은 고급지휘관까지 인지된 사건이었기에 사령부의 입장에서는 문책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미군 측에는 사실무근이라고 통보한 것은 물론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72년 여름의 어느 날 주 월남미군 항만사령부는 귀국 Box를 실고 퀴논 항을 출항하여 항해중인 수송선을 돌연 귀항시켰다. 그 이유는 수송화물의 적재 착오로 재점검을 실시하기 위해서라는 핑계였다. 그리고 한국군의 귀국 Box를 다시 하역하면서 기중기로 Box를 들어 옮기다가 실수인 것처럼 3개를 떨어트리자 Box가 깨지며 물건들을 쏟아졌는데 특히 탄피들이 우루루 쏟아졌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미군측은 한국군이 주 월남한국군에게 지급한 미군의 최신무기와 장비를 귀국 Box속에 담아서 한국으로 운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공작이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미군은 한국군을 어떻게 평가했던가?


스탠리 로버트, 제임스 라우톤 콜린스 공저의 <베트남 참전 동맹국(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에서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여러 동맹국의 참전배경 및 주요 전투성과를 설명하고 있다.


참전 초반에는 한국군 지휘부가 지나치게 신중하게 준비하는 모습에 미군 수뇌부는 '한국군이 적극성이 결여되어 있고 사상자를 내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오해를 하였으나 19661'플라잉 타이거'작전에서 11명의 한국군이 192명의 베트콩을 사살한 전과를 보자 단숨에 뒤집어졌다그러나 초반의 이런 긍정적인 평가와 달리 파병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미군의 평가가 점차적으로 나빠졌다


70년부터 71년까지 제1야전군 사령관이었던 콜린 중장은 


"한국군은 헬기를 비롯한 각종 지원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한 번의 작전 종결 후 다음 작전까지 너무 소극적이다."


"한국군 2개 사단의 성과는 미군 1개 여단정도에 불과하다."


"이전과 달리 한국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자 

오히려 소극적이 되었으며 덜 주는 쪽이 오히려 더 낫다." 


라고 혹평했다.


콜린의 후임인 브라운 중장 역시


"한국군은 융통성과 창의성이 없으며 자기 책임구역에 대해서만 치중하고 있다."


"한국군은 자기 책임구역에 대해서는 

베트콩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성과를 냈고 안전을 확보했으나 

남베트남군과의 협력이나 지역 주민과의 관계에서는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고 평가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군을 필요로 할 때에는 매우 효율적인 군대라고 높이 추어올리다 한국군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여야 할 필요가 생길 때에는 한국군이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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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딴지 편집진에서 내 글을 소개 하면서 발뺌용(?)으로 '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본 글에서는 단 한 글자의 허위나 심지어는 과장 조차 없다. 왜냐하면 만일에 그렇다면 함께 떠났다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온 5099명의 전우들의 명예를 욕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체 내용은 주변 전우들 사이에서 교차 확인한 것이거나 오랜 시간을 거쳐 온라인에서 확인된 내용들이다.

 

 







sydney


편집 : 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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