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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첩보원)은 신비로운 사람들로서 못 들어가는 곳이 없으며, 없는 곳이 없다. 승리해도 자랑할 수 없으며, 실패해도 변명할 수 없다. 나의 무기는 거짓과 기만이다. 나 자신도 살인처럼 정상적인 사회 규칙을 위반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임무라는 생각에 불안감을 갖지 않는다. "


두스코 포포프 (이중첩자, 암호명 '트라이시클')





첩보왕


1985년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다. 미국계 유대인인 조나단 폴라드(이하 폴라드)가 미국의 초특급 기밀을 빼다 이스라엘에 넘긴 바로 그 유명한 ‘폴라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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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폴라드


폴라드는 사실 엄친아였다. 아버지는 미생물학 교수였고, 폴라드 역시 스탠퍼드와 터프츠 대학에서 정치와 철학을 전공한 인재였다. 폴라드는 25살이 되던 1979년 CIA 취업에 도전하지만 낙방하고 미 해군 정보처와 해군 범죄 수사처(드라마로 유명해진 NCIS)를 거쳐 해군 대테러 경보센터에서 각종 정보를 취급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미국계 유대인의 '아메리칸 드림' 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광적인 시온니스트(시온주의 Zionism :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인 민족주의 운동)였던 폴라드는 주미 이스라엘 공군 무관 아비엠 셀라 대령과 만나게 되면서 미국 초특급 기밀자료 등을 이스라엘에 넘기기 시작한다.  


조사 결과 11차례에 걸쳐 미국 국가안보처의 암호 체계, 아랍국가들의 방공망, 중동 동유럽 주재 미국 정보원 리스트(정보원 리스트에 대해 이스라엘은 부인했다) 등의 특급 기밀을 넘겨준 것으로 밝혀진 폴라드는 1985년 11월 27일 ‘뽀록’의 낌새를 눈치채고 주미 이스라엘 대사관에 아내와 함께 망명을 신청하고자 찾아간다. 하지만 폴라드 부부는 조국이라 믿었던 이스라엘에 시원하게 뒤통수를 맞으며 내쫓기고 만다. 이스라엘이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폴라드는 부인과 함께 대사관 앞에서 잠복 중이던 FBI에게 체포된다. 체포 당시 60여 건의 기밀 문건을 소지하고 있던 폴라드는 1987년 국가 반역죄와 간첩죄로 종신형(30년이 지나지 않으면 가석방 신청이 불가한)을 선고받고 현재 노스캐놀라이나 주에 있는 연방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폴라드는 복역 30년을 맞는 올해, 추가로 15년을 더 복역하는 것이 확정적이었다. 이스라엘이 1995년 폴라드에게 정식 시민권을 주고 오랫동안 사면을 위해 로비를 해왔지만 폴라드가 이스라엘에 넘긴 정보들이 워낙 ‘특급’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소련에 흘러 들어가 미국의 안보에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혔다는 이유로 늘 무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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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올해 7월 28일, 미국 정부가 느닷없이 폴라드의 사면을 결정했다. 언론은 폴라드의 사면을 대서특필하면서 이란의 핵 협상이 평화적으로 마침표를 찍자 이란과 앙숙인 이스라엘의 반발을 달래기 위한 카드로 폴라드의 사면을 선택했다고 전했다. 폴라드가 한 국가의 반발을 잠재울 수 있는 엄청난 첩보원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폴라드는 명함조차 내밀지도 못하는 진짜 첩보왕이 있다. 2차 세계 대전의 향방을 바꿔버린 치명적인 첩보원이었고, 첩보활동만큼이나 여인과의 로맨스에서도 극강이었으며 조국의 배신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첩보원 중의 첩보원, ‘리하르트 조르게’가 바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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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조르게 (Richard Sorge)



'총리대신' 리하르트 조르게


1895년 남러시아 바쿠에서 태어난 조르게의 어린 시절 닉네임은 바로 ‘총리대신’이었다. 아버지가 독일인 정유업 기술자, 어머니가 러시아인이었던 조르게는 어린 시절을 베를린에서 보내며 역사, 철학, 문학, 정치학 등에 관심을 보였고, 특히 정치문제에 있어서는 어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르게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칼 마르크스의 개인 비서이자 절친이었으며, 1852년 도미해 미국에서 사회주의를 뿌리내린 인물이라 알려진 조부 프리드리히 아돌프 조르게에게 이어받은 재능도 한 몫 했을지 모른다. 물론 조르게가 태어날 당시 프리드리히 아돌프 조르게는 곁에 없었다.


조부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반면에 부친 빌헬름 조르게는 평범한 독일인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출중한 능력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 조르게는 당시 제정 독일의 무료한 학교생활에 권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조르게의 가슴을 뛰게 한 사건이 바로 1914년부터 시작된 1차 세계 대전이었다. 그해 10월 조르게는 부모와 단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독일군에 자원입대했고, 벨기에 전선에 투입되었다. 당시만 해도 조르게는 그저 피 끓는 애국 청년이었다. 적어도 몇 번의 부상과 요양을 거치며 1915년 철십자 훈장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연이은 부상(손가락 세 개를 잃고 평생 다리를 절었다)과 전쟁이라는 참상의 경험은 조국 독일에 대한 염증으로 이어졌다. 포탄 파편에 맞아 세 번째로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에 입원한 조르게는 자신의 인생을 뒤바꾼 첫 번째 여인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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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당시의 조르게


조르게는 자신의 치료를 담당했던 간호사와 관계(?)를 맺고, 의사였던 그녀의 아버지를 알게 되면서 제국주의 전쟁의 본질을 깨닫는 한편 공산주의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 부녀는 모두 급진적인 공산주의자였다. 이를 시작으로 조르게는 공산주의자가 된다. 1918년 키르 대학 1학년이던 조르게는 패전을 앞둔 키르의 수병들과 병사들이 자살작전과 다름없는 출격 명령에 항의하며 일으킨 그 유명한 ‘키르 수병 반란 사건’(결국 무차별한 진압으로 인해 봉기가 확산되었고, 독일 신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때 수병들을 위한 비밀 강의를 진행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후 조르게는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독일 공산당 함부르크 지부 훈련반장이 되었으며, 1924년엔 독일 공산당원이 아닌 소련 공산당원이 되었다. (1925년 소련 국적 취득) 당시 29살의 조르게는 6개국어(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한 정치학 박사이자, 공산주의 유망주였으며 다방면에 박식한 키 큰 미남이었다. 


이렇게 준비된 스파이 조르게는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 조직)의 국제연락부(코민테른 정보조직)와 OGPU(소련 합동국가정치보위부 KGB 전신)를 거치면서 자연인 조르게가 아닌 지구에서 가장 치명적이었던 스파이 조르게로서의 첫 행보를 시작하게 된다. 





‘람세이’ 리하르트 조르게


"리하르트 조르게는 역사상 가장 위험한 첩보원이었다."


이언 플레밍 (007 제임스 본드 원작자)


1928년, 모스크바에서 첩보훈련을 받던 조르게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바로 미국 영화산업계(캘리포니아)에 교사로 위장해 침투한 뒤 공산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한 하부 조직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소련에 복귀한 조르게는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GRU(소련군 참모본부 정보군) 창설자인 얀 베르친에 의해 GRU 정보원으로 발탁된다. 


조르게는 우선 언론인으로 위장해 유럽 각국의 정세를 면밀히 파악하는 한편 정치, 경제, 노동운동 실태 등을 연구했다. 이렇게 완벽한 첩보활동을 위한 전방위적 스킬을 갖춰나가던 조르게에 극동지역의 임무가 떨어지게 된다. 



"내가 이 임무를 떠맡겠다고 결심한 것은 우선 그것이 내 기질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동양의 새롭고 대단히 복잡한 사정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리하르트 조르게의 수기 중>



조르게는 중국으로 향했다. 상황에 따라 독일과 미국 언론인으로 위장한 조르게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많은 이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조르게는 두 번째 여인 미국 출신 좌익 저널리스트 아그네스 스메들리와 관계(?)를 맺은 뒤 그녀의 소개를 통해 아사히 신문의 기자 오자키 호즈미를 알게 된다. 이후 오자키 호즈미는 조르의 강력한 정보 공급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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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스메들리


중국에서 첩보망 구축은 물론 마오쩌둥과 장제스의 전술, 동아시아와 독일 간의 관계 등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입수한 조르게의 최종 목적지는 일본이었다. 우선 조르게는 일본에서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독일로 이동, 선전당의 나치 고위 간부들과의 친분을 맺고 이를 통해 프랑크푸르트 자이퉁지의 일본 특파원 자리를 얻게 된다. 나름 경찰국가의 위엄을 뽐내고 있던 독일 선전당 수뇌부 그 누구도 그가 ‘독일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렇게 완벽하게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의 언론인으로 신분을 세탁한 조르게는 1933년 프랑크푸르트 자이퉁지 특파원으로 일본 도쿄에 상륙한다. 조르게의 위대한 첩보는 이렇게 시작된다. 




위대한 첩보


1930년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르게가 입수한 수많은 정보 중 소련을 경악시킨 내용은 바로 독일과 일본의 방공협정 체결에 관한 내용이었다. 조르게의 첩보가 사실이라면 그건 곧 옆으로는 독일, 밑으로는 일본에 의해 공산주의가 봉쇄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의미했다. (조르게의 정보는 정확했다. 1936년 11월 25일 독일과 일본은 소련에 대한 소위 방공협정에 서명했다) 소련은 독일을 위시한 유럽의 상황은 물론,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될지도 모를 동아시아 정세를 한 큐에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소련의 선택은 일본이었다. 독일에선 히틀러에 의해 소련 첩보망이 붕괴된 상황이었고, 동시에 조르게라는 적임자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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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자이퉁지> 기자증


1933년부터 시작된 조르게의 첩보활동은 세계 제2차 대전이 본격화되던 1941년까지 계속됐다. 시작 당시엔 정보를 본국으로 타전할 독일인 무전기사 막스 클라우젠 뿐이었지만 1941년 일본 당국에 의해 검거된 일명 ‘조르게 그룹’의 조직원만 무려 34명이었다. 그 중엔 상해에서 만난 당시 아사히 신문의 기자이자,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의 비공식 정책자문이기도 했던 오자키 호즈미, 독일대사 유진 오트 대령 등 독일과 일본의 최고급 정보를 취급하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르게는 이 둘을 통해 일본과 독일의 극비 정보를 취합해 본국에 타전했다. 이미 상해 활동 당시 독일과 일본의 방공협정 체결에 관한 특급 정보를 입수한 바 있는 조르게는 역사상 가장 위험한 첩보원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일본에서도 초특급 정보를 입수하고야 만다.


2차 세계 대전의 향방까지 바꿔버린 초특급 정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독일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는 정보(1940년, 1941년 3월 2차례에 걸쳐 입수), 또 하나는 독일과 동맹국이었던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만주 이남으로 병력을 철수할 것이라는 정보(1941년 10월)였다.


이 두 가지 정보는 조르게가 독일과 일본을 대상으로 입수한 특급 중의 특급 정보였다. 독일 침공에 대한 정보는 당시 '독소 불가침조약'을 신봉한 스탈린에 의해 무시됐다. 만약 소련이 정확한 침공일(조르게는 1941년 6월 20일 독일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 보고했다. 독일은 날씨 기상악화로 이틀 뒤인 22일 소련을 침공했다)까지 제시한 조르게의 정보를 믿고 대비했더라면 2차 세계 대전은 조기 종영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조르게의 정보를 불신했다가 독일에 일격을 맞은 소련은 일본의 병력 이동에 대한 조르게의 두 번째 정보는 믿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소련은 일본의 침공에 대비해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40개 사단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하게 된다. 소련 침공 이후 거침없이 진격, 모스크바까지 둘러싼 독일군이 50년 만에 찾아온 강추위에 살짝 주춤하던 타이밍에 투입된 시베리아 병력 40개 사단은 결국 독일에 첫 패배를 안겼다. 이유는 40개 사단이라는 물량도 물량이지만 시베리아 병력이 스키부대 운용 등 추위에 최적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소련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모스크바 함락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2차 세계 대전의 전세는 서서히 뒤바뀌기 시작한다. 조르게의 첩보에서 그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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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에 최적화된 소련군의 진격


이렇게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을 만들어낸 코드명 ‘람세이’ 조르게는 1941년 말 일본 내 공산당을 조사하던 일본 헌병대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고 만다. 이즈음 조르게는 일본이 12월 진주만의 미국 군대를 공격, 태평양 전쟁을 개시할 것이라는 내용의 초특급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하지만 그 정보를 타전하기도 전에 조르게는 체포된다. 


'조르게는 최고 수준의 모험가였지만 행운도 따랐다. 독일 대사의 고문이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의 지나친 의심을 피할 수 있었고 동시에 당시 일본은 이런 수준의 첩보원에게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러시아 일본학 과학자 협회’ 알렉산더 쿨라노프


1933년부터 첩보활동을 시작한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왕의 시대



“언제나 사소한 것들이 문제다. 방첩요원들이 흔히 말하듯이 제아무리 조심성 있는 스파이라 할지라도 바로 인간 본성의 아주 작은 약점들 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스파이라고 불릴만한 리하르트 조르게 역시 매우 인간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치러야만 했던 인물이다.”

어니스트 볼크먼 <20세기 첩보전의 역사-인물편>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첩보기록은 기원전 2000년경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명령을 받은 바눔이 적군의 동향을 탐지,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뿐 아니다. 손자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용간론’을 펼친 것이 기원전 600년경, 우리나라의 최초 첩보원이라 불리고 있는 도림(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의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바둑 고수 도림을 백제로 보내 개로왕의 환심을 산 뒤 백제 내정에 간섭하는 등 고품격 첩보활동을 시전)이  활약한 시기도 329년이니 무당, 창녀와 더불어 첩보원이 인류문명 초기에 등장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라 해도 무리는 없겠다. 




손자의 '용간론'


향鄕간 : 대상국의 국민을 스파이로 활용

내內간 : 대상국의 관리를 스파이로 활용

반反간 : 대상국의 스파이를 생포, 설득하여 이중 스파이로 활용

사死간 : 적을 기만하기 위해 그릇된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파견하는 스파이

생生간 : 대상국에 파견되어 정보활동을 한 후, 돌아와 보고하는 스파이




그렇다면 각종 첩보활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첩보기구의 창설 시기는 언제쯤일까. 미국의 CIA(중앙정보국)가 1947년, 영국의 SIS(비밀정보국 = MI6)가 1912년, 구소련의 KGB(국가보안위원회)는 1954년, 이스라엘의 MOSSAD(중앙공안정보기관)가 1951년에 각각 창설되었으니 영국의 SIS를 제외하고는 모두 1945년 2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시작된 냉전 시대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각국을 대표하는 이들 첩보기관은 막대한 자금과 최첨단 장비, 방대한 첩보인력을 바탕으로 운영됐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지금의 첩보기관들을 있게 했던 전신은 대개 20세기 초반에 출범되었다. 많은 이들이 20세기를 ‘첩보원 의 시대’라 부르곤 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이었던 첩보원들의 무대는 바로 콕 찝어서 '20세기 초'였다. 


1914년 시작된 1차 세계 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연합국과 휴전을 맺기까지 병사만 900만 명이 희생된 최악의 참사였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찾아온 것은 ‘평화’가 아니라 2차 세계 대전이었다.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남긴 전쟁이 다시 시작되는데 20년이 채 걸리지 않은 것이다. 1918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된 2번의 전쟁으로 전사자만 4천만 명에 육박했고,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하면 희생자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게다가 20세기 초는 1~2차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과 동시에 나치와 공산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사상의 격돌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해야 했으며, 내부적으로는 체제의 수호가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시대였다. 그 어떤 직업군보다 첩보원이 절실했던 이유다.


첩보원의 역사에 빠지지 않는 이름들이 있다. 최고의 무희이자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이중첩보원으로 활동했던 우리에겐 마타 하리로 알려진 마가레타 젤러(1876~1917), 영국과 독일 사이에서 이중첩보원으로 활동하며 독일에 영국의 군사력을 과장한 정보를 흘림으로서 히틀러의 영국 침공 계획인 ‘바다사자작전’을 포기하게 만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더블 크로스 시스템(Double Cross System : 역정보작전)을 수행한 두스코 포포프(1912~1981), 당시 최고의 기밀 중 하나였던 영국과 미국의 원자폭탄 정보를 소련에 전달한 물리학자이자 첩보원이었던 클라우스 푹스(1913~1988), 영국 첩보계의 거물인 킴 필비를 포섭해 영국의 에니그마 해독 정보(히틀러는 죽을때까지 알지 못했다)는 물론 수많은 정보를 KGB에 빼돌리게 한 가보르 페테르(1898~1993) 등등 이들 모두 1~2차 세계 대전 당시 활약했던 첩보원들이다. 007의 원작자로도 알려진 이언 플레밍(1908~1964),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 달과 6펜스의 윌리엄 서머싯(1874~1965) 역시 당시 활약했던 첩보원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당시 활약했던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첩보원의 정점에 있는 첩보왕은 바로 조르게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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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원으로서 능력은 허접했다고 하나 나름 첩보원이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사상 가장 강려크한 정보를 캐낸 조르게는 1941년 말 체포망이 서서히 좁혀져 오고 있음을 눈치깠다. 하지만 그에겐 일본인 무희인 연인이 있었다. 조르게는 일본에서 극비의 첩보활동을 펼쳐나가는 와중에도 수많은 여인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자신을 신임했던 독일대사의 부인과도 ‘썸’이 있었다고 할 정도니 말 다했다. 그는 일본 탈출 직전 연인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거기서 체포되고 만다.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으니 서둘러 튀라’는 동료의 쪽지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헌병대는 조르게가 스파이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르게가 무심코 버린 쪽지로 인해 모든 게 확실해졌다. 1941년 10월 18일, 연인과의 로맨틱은 성공적이지 못한 채 첩보원으로서의 활약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일본은 조르게와 그의 조직에게서 활동에 대한 모든 것을 수사 한 뒤, 소련에 검거된 자국의 첩보원과 조르게를 교환하자는 요청을 보냈으나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은 이미 조르게를 통해 얻을 만큼 얻은 상황이라 판단했을 수도, 조르게의 정보를 무시하고, 조르게의 충성심을 의심하기도 했던 스탈린이 그의 귀환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게 조르게는 자신이 조국이라 믿었던 소련을 위해 가장 위험한 첩보활동을 가장 완벽하게 수행해냈고, 그렇게 조국에 배신당했다. 언제든 애국을 이유로 포섭하기도 배신하기도 했던, 인류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비정했던 그런 시대였다.


1944년 11월 7일 조르게는 자신의 수기를 통해 '해박하고 판단도 확실한, 정보에 확신이 없을 때는 의지하기도 했던, 직접적인 정보의 공급원이자, 빚진 게 너무 많은 이.'라고 표현한 오자키 호즈미와 함께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조르게는 처형 직전 일본어로 "소비에트, 적군, 공산당"이란 말을 두 번 반복했다고도 하고, 나즈막이 "나무아미타불"을 두 번 읖조렸다고도 한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처형이 집행된 11월 7일이 러시아 혁명 기념일이라는 것만이 확실할 뿐이다.


가장 위험한 격변의 시대에 가장 치명적인 정보를 모두 빼돌린 조르게는 체포 당시 이런 말을 했더란다.


“일본에게 내가 더 이상 빼낼 정보는 없다.”


필요한 모든 것을 쟁취한 역사상 가장 능력 있고 위험했던 첩보원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조르게는 1944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사진이 박힌 기념우표가 발행되고 2차 세계 대전의 판세를 뒤집은 소련의 위대한 영웅이 되는데 25년의 시간이 걸렸다. 동경에 있는 조르게의 무덤엔 늘 꽃이 놓여있다고 한다. 조르게가 일본을 반대해서가 아닌 일본과 소련의 전쟁을 막기 위해 활약했다고 인식하는 일본인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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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조국이라 믿었던 소련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은 독일인 리하르트 조르게, 2015년 조국이라 믿었던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30년간 옥살이를 한 조나단 폴라드.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비정하고 냉혹한 첩보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조국과 애국이라는 미명아래, 온갖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되면서 말이다.




*참고문헌

- 100명의 특별한 유대인 (박재선)

- 20세기 첩보전의 역사:인물편 (어니스트 볼크먼)

- 비밀과 음모의 세계사 (조엘 레비)

- 일본의 백년 <8> 끝없는 전선 1937~1945 (하기카와 분소우 / 이마이 세이이치)






PS. 다음 편엔 '탈세왕'으로 찾아뵙겠다. 그게 언제인지 장담은 못해드리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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