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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7. 월요일
문화불패 홍준호











1. 

부제: 홍준호와 마궁의 사원
빼빼로 데이 지난 기념으로 한 번 써 보는 데이트 이야기. 

2. 

첫째. 나는 당신의 손에 쥐어진 활이올시다.
주님.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둘째.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는 마시옵소서.
주님. 나는 부러질지도 몰라 두렵습니다.

셋째. 나를 힘껏 당겨주소서.
주님.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 <세 가지 영혼, 세 가지의 기도> 중에서


3.
 
이것은 나의 데이트 이야기다. 2008년인가 2009년의 일이었다. 아, 지금 생각해보니 2008년이 맞다. 9월이었을 거다. 그때 나는 대구대학교의 학과에서 과제 발표를 했는데, 듣는 사람들로부터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었을 때였다. 나는 여전히 앞에 나서서 뭘 하는 걸 쑥스러워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신줄을 반쯤 놓지 않으면 발표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고 나면 그전 상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당시 발표가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결국 누군가가 말해줘서다. 그걸 문자로 들었다.
 
"준호야. 오늘 발표 정말 잘하더라."
 
"아. 그래? 고맙다."
 
"준호야. 우리 오늘 밤에 레드 페스티벌 안 갈래?"
 
"뜬금없이 축제 가자고? 뭔 축제인데?"
 
"그냥. 재밌는 축제야. 한 번 가보자. 응?"
 
색깔이 정말 와인에 절인 듯, 와인향이 감미롭게 나는 듯한 헬지 사의 와인폰으로 온 두 개의 문자였다. 보낸 사람은 같은 학과 여학생이었다. 레드 페스티벌? 뭐야, 이게? 가자고?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여자 사람으로부터 어딘가로 가자는 제안을 너무 간만에 받아본 나는 당황했다. 내 장기를 노리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일단 뭔지는 궁금해서, 강의가 끝나고 컴퓨터실로 가서 레드 페스티벌을 검색해 봤다. 
 
너무 다양한 단체와 종교와 사상과 예술단체에서 주관한 '레드 페스티벌' 이 있었다. 그때 내 기억으로는 고추 등의 붉은색 농산물을 홍보하는 취지로 저런 이름을 붙여 개최된 경우도 있었는데, 그 애가 거길 가자고 하는 것 같진 않고. 적어도 '당시 오늘 밤'에 경산과 하양, 대구에서 개최되는 레드 페스티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 대체 뭐지? 뭘 하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축제에 가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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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상상했던 레드 페스티벌 중 하나인 일본 남근 축제.
 


4.
 
"야! 이건 너보고 데이트하자는 거야!"
 
"데이트요?"
 
그 날 난 수업이 끝난 후에 우연히 지나가던 학과 선배와 마주쳐 밥을 얻어먹게 됐다. 마침 선배 되는 사람이 페스티벌에 대해 잘 알 거 같아 레드 페스티벌이란 걸 아느냐며 문자를 보여줬는데, 그는 읽어본 후에 지금 축제가 문제가 아니라고 운을 뗀 뒤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데이트'라는 점을 인식시켜줬다.
 
"이게 어떻게 데이트인 줄을 아시는 거에요?"
 
"당연히 알지. 축제를 같이 가자는 거잖아. 여자들은 자기가 꽃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말 먼저 잘 안 해. 나비가 꽃을 따라가는 거지, 꽃이 나비를 따라가는 게 아니니까. 여자니까 데이트하자고 구체적으로 말 못 하지. 오히려 이렇게 말한 것도 여자 쪽에서 정말 자기 자존심을 많이 굽힌 거라고."
 
"음. 그런 걸까요?"
 
"당연하지! 이건 무조건 가야하는 거야. 무조건 가."
 
생각해보니 그 날 말을 해 준 선배는 얼굴도 여리여리한 귀염상이고 노래도 잘 부르고 컴퓨터도 잘하며 몸이 좋은 반전의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코도 나름 커서 물건도 클 것 같고 섹스 테크닉도 기가 막힐 것 같았다. 말하자면 '마른 장작' 이 아니라 그냥 '오래 타는 장작' 같은 사람이었달까. 흠..저 선배는 분명 숱한 여성편력을 가진 사람이겠지. 그런 사람이 저렇게 말했으니 그 애의 의도를 파악한 게 맞을 거야. 선배의 말을 믿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해가 졌고, 여자 사람 아이가 나왔다. 축제가 개최되는 장소는 대구 가톨릭 대학교였다. 
 
"가톨릭 대학교? 천주교 행사니? 난 종교 없어서 종교행사 별로 안 내켜."
 
"응? 아니 아니. 그냥 장소만 거기로 잡은 거고, 실제로는 서로 모여서 대학생활에 관해 얘기하고 닭 먹으면서 영화 보는 거야."
 
"아.. 그렇구나."
 
"그런데 준호야. 너 혹시 지금 예수님 나오는 영화, 가진 거 혹시 없니?"
 
가톨릭 대학교에 예수가 나오는 영화라. 그 애는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대충 지레짐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 행사에 나를 데려가려는 거구나. 전도하려고 드는 건가. 근데 뭐, 그것도 데이트라면 데이트려나. 어차피 기왕 만났는데 파토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히려 '대학생활에 관해 얘기하는' 이라는 말에 부담이 덜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좀 덜 강경한 집단의 축제인가보다 싶었다. 뭣보다도 닭이 있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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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내가 갖고 있던 '예수가 등장하는 영화'가 하나 있었다. 당시 난 기숙사 생활을 할 때였는데, 그 때 유일하게 갖고 있던 종교영화 DVD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예수의 마지막 유혹>이었다. 나는 자신감 있게 그걸 들고 나왔다. 그냥 젊은 사람들이니까 이 작품 가지고 소란 나지는 않을 듯하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드는 생각은 '종교 행사를 가톨릭 대학교에서 하는데' 종교적 색채가 짙지 않을 리 없지 않는가. 그걸 재생할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한거냐...이지만.
 
페스티벌이라서 얼마나 클까 싶었는데 의외로 규모는 상당히 소박했다. 붉은색 전구들로 하트 모양이 만들어져 있었고, 안에는 색 도화지에 붉은색으로 'I Love Jesus'라는 영어 문구가 쓰여 있었다. 문제는 전구들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낮은 조도의 오렌지색 조명만 그 방에 켜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 상황으로 인해 레드 페스티벌은 묘하게 밀교의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님의 <인디아나 존스와 마궁의 사원>의 아주 약간 밝은 버전을 생각하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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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느낌적인 느낌. 물론 영화 틀기 전까지는 위 장면처럼 저 정도로 음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 빼고는 전부 아는 사람들 같았는데, (왜냐면 서로서로 근황을 물었기 때문이다.) 조금 배신당한 느낌이 없지 않아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막 기분이 싫어지고 하지는 않았다. 붉은색으로 빛나는 기름과 국물이 좔좔 흐르는 맛 난 찜닭을 얻어먹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이런 풍경이 꽤나 신기했기 때문이다. 난 무신론자라 굳이 자진해서 가지 않는 한은 이런 풍경을 볼 일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난 닭 요리를 너무 사랑한다.
 
축제 대부분은 사실 제삼자 입장에서는 뭔가 이야기적인 면에서 특출날 게 없는 것들이었다.​ 모인 사람들이 거의 1시간 30분 가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계기와 그 이후로 바뀐 자신의 삶' 을 얘기하고 있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힘든 일이 있었다고 얘기는 한다만 그게 뭔지는 정확히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힘든 일이 있었다'  '그때 예수님이 내게로 왔다'  '그 덕에 난 지금 행복하다'로 언제나 끝이 나곤 했다. 이건 아마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가 가진 매력이 '아무 의미 없는 듯한 지난한 수다에 있다'라고 하면 이해 못 할 사람의 심정과 비슷할 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의 리액션이 대단해서 지루하지가 않았다. 감정의 파고가 버라이어티하게 흘러가는 이 리액션에서, 뻔한 레퍼토리를 메워버리는 간증의 매력이 나오는 건가 싶더라. 누군가는 눈물을 훔쳤다. 누군가는 공익광고 톤으로 힘내라고 외쳤으며, 화룡점정이 어느샌가 툭 튀어나왔다. 누군가가 CCM의 한 소절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청년들의 신앙 간증은 갑자기 너무도 자연스럽게 한 편의 뮤지컬로 전환되어 끝이 났다. 와! 이건 아주!! 신앙 간증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구먼. 붉은 조명 아래서 찜닭을 자비 없이 뜯어 재끼는 게 누군가가 보면 되게 이상한 그림이겠다 싶어 잠시 씁쓸해진 것 빼면, 사람의 감정을 끝없이 고양시켜서 좋았던 그런 축제였다.
 


5.​
 
"오늘 저와 같이 온 친구가 영화를 너무 좋아해요! 우리 페스티벌에 이 친구를 꼭 초대하고 싶었어요! 레드 페스티벌의 마지막은 언제나 기독교 영화를 보는 걸로 끝냈는데, 오늘은 이 친구가 우리를 위해 영화를 갖고 왔어요. 틀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꼬셔서 데려온 그 아이도 폭풍 같은 신앙 간증 덕에 최고로 High 한 기분을 가진 상태였다. 그러다 어느새 레드 페스티벌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왔다. 바로 기독교 영화를 보는 시간. 내게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작품이 없느냐고 물어본 건 이것 때문이었다. 나는 곧 <예수의 마지막 유혹> 크라이테리언 콜렉션 DVD를 롬 드라이브에 삽입한 뒤 프로젝터를 통해 재생시켰다. 굉장히 자신만만하게. 여기에는 또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첫째. 그 날 모인 사람들은 전부 이 작품이 개봉한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거나, 나이가 많아 봐야 개봉 당시엔 다들 어렸으니 이 작품의 존재에 관해서는 잘 모를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둘째는 이 작품이 상영금지 논란 끝에 2002년에 한국 개봉을 하긴 했다만 예상외로 상당히 소리소문없이 (애초에 관을 몇 개 배정받지 못한 점도 있지만) 끝났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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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신 나는 피터 가브리엘의 스코어와 함께 <The Last Temptation Of Christ>라는 제목이 떴을 때, 페스티벌에 모인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와!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나 봐!" 

어어.. 그.. 그렇지. 그래. 

사람들은 작품에 집중했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작품을 다시 보며 나는 왜 이 작품을 좋아하는지 다시금 생각해 봤다. (물론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짤막하긴 하지만 바바라 허시가 연기하는 마리아의 섹스 시퀀스가 막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원작소설을 그 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읽지 못했으니까.. 마틴 스콜세지 때문에 좋아하는 건가? 아님 윌렘 데포가 예수 그리스도를 연기해서? 어쩌면 둘 다. ​맞어. 데포 형님은 대포같은 성기를 가지셨지. 저 때는 몰랐지만 난 분명 <안티크라이스트>에서 그것을 봤어. 그러니까 데포 형님은 적임자셔. 

....이 끄적임의 맨 위에서 니코스 카찬차키스가 지은 짤막한 시를 언급했다. 지금 다시 그 시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카찬차키스의 시에는 해당 신앙과 벌이는 파워 게임에서 절대 매몰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보이지만, 경의도 같이 느껴진다. 해당 신앙에 대한 경의. 하지만 난 당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할 수 없다. 사람들이 왜 당신에게 의존하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거기에 맹목적인 충성은 없다. 당신은 분명 나름의 판단을 한 후에 그 엄청난 신념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싶어. 그래서 난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면 '알고 싶다'는 내 학구적 신념이 부러질 것만 같아. 그런 느낌이 뒤섞여 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 역시 니코스 카찬차키스가 했을지 모르는 고민을 충실히 따른 듯하다. 물론 그 와중에 배우 캐스팅이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이 가진 정서를 보면, 이 논란많은 원작의 아우라 속에서도 감독 특유의 색깔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게 보여서 관심이 간 부분도 있다. 

이를테면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다양한 소재와 장르의 작품들을 만들었지만, 뭘 해도 갱스터 장르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있는데 이 작품도 그렇기 때문이다. 가끔 인터넷의 바다를 정처없이 항해하다 보면 '예수 갱스터설' 같은 이론을 보게 되는데, 그 기본은 분명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이 영화 버전이 끼친 영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 독특하게도 이런 갱스터스러움이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피터 가브리엘의 스코어 음악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세상의 독특한 악기는 다 모아놓은 것 같은 그의 음악은 희한하게도 작품을 통틀어 제일 '악마적' 이다. 심장을 쿵쿵 뛰게 하는 타악 리듬이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본능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영화 내적으로 아주 대놓고 '인간다움'을 부르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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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제자들을 늘려가는 시퀀스.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전파하는 걸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퀀스인데 중앙에 윌렘 데포, 양쪽에 늘어가는 제자들을 담은 쇼트를 보고 있으면 이게 종교 철학을 전파하러 가는게 아니라 다른 세력 집단 영업장을 휘어잡으러 가는 것 같다.

말하자면 '한 따까리 하러' 가는 풍경이랄까? 당장이라도 윌렘 데포의 입에서 김성균의 대사인 
"자.. 드가자~!!" 가 나올 것만 같다.



 
6.
 
예수의 인성을 부각시키는 <예수의 마지막 유혹>은 그런 점에서 나로 하여금 최소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에게 관심은 갖게 한 작품이었다. 작품 속을 한창 보던 중에 예수가 한 손에 도끼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뽑는 시퀀스가 나올 때 함께 작품을 보던 누군가가 혼자 읊조렸다. 저거.. 맑시즘 아닌가..? 
 
호오? 난 순간 그 사람이 대단히 흥미로운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유시민이 자신의 작품인 <청춘과 독서>에서 언급했듯 '혁명가 마르크스는 이론가 마르크스를 망가뜨렸다.' 작품 속의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그런 결함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예수의 마지막 유혹>을 볼 때 감탄했던 지점들이었다. 그런 결함과 시행착오들 말이다. 

자신은 사랑으로 만사형통이라 얘기하는데 정작 듣는 사람들은 가진 자들을 죽이자고 곡해하여 흩어지게 한다든가, 가롯 유다로부터 너의 생각은 틀렸다며 이야기를 듣는다든가. 나 죽기 싫다며 운다던가 하는 것들. 사람은 자기 혼자 산다고 쳐도 결국 세상과 주변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때 내가 사람으로서 보고 싶었던 인물형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에서 본 걸지도 모르겠다. 영향을 받아가면서 마모되는 게 아니라 더 단단해져 가는 인물. 심지어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인간'이 되고 말았지만, 마리아와 결혼해서 애 낳고 살 만큼 살다가 맞이하는 죽음 앞에서 이 인생도 괜찮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그렇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은 신념과 더불어 끊임없는 의심과 자기부정도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 '신념만 갖고 있었을 때' 알게 됐다. 그건 바로 막연할 정도로의 신념이 때로 사람을 대책 없는 도피처에 머무르게 한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난 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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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품 속에서 좋아하는 시퀀스 중 하나. 예수가 죽은 라자로를 살려내는데, 
그가 안기자 순간 두려움과 경이로움으로 흠칫 놀라는 순간.
 
 
동시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미심쩍게 바라봤던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때때로 기독교를 전파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그들이 찾아오면,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절륜한 능력 앞에 무릎 꿇으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무릎 꿇으면 뭐가 오는데? 당장 내게 행복이나 깨달음을 주지도 않는데.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공감을 하고 납득을 시켜야 할 거 아닌가. 대체 이 양반은 뭐가 그리 확신에 차 있길래 저리 거리낌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한 거지? 자신이 결정을 내린 순간순간마다 고민하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예수는 광야로 나가 악마의 유혹을 받는다. 누가복음인가 어디 부분에서 묘사됐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때 세 가지 유혹을 모두 넘기고 난 뒤, 악마가 잠시 물러나면서 말하는 한 구절이 있다. 원작소설을 쓴 니코스 카찬차키스는 거기서 <예수의 마지막 유혹>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 작가가 한 구절로부터 자신의 모든 영감을 총동원해 위대한 문학을 탄생시킨 셈인데, 그렇다고 악마한테 속아 넘어가서 작품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다시 깨닫고 거듭나는데, 심지어 피터 가브리엘의 음악도 정말 희망적인데!

오히려 나와 같은 위치가 된 그의 모습을 보면서 개인적으론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한창 그 생각에 도취하였다가 문득 내 주변을 돌아보니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다들 표정이 심상찮았다. 누군가는 경악스러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보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눈은 스크린에 집중한 채 손을 모으고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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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끝나고 난 뒤, 레드 페스티벌은 적막만 휩싸이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이긴 했지만, 느꼈다. 아.. 이게 좀 젊다고 다른 반응을 보인다거나 하는 건 아니구나.. 혼자 스르륵 일어나서 롬 드라이브에 있는 DVD를 빼내어 다시 케이스에 담았다. 그러고는 '저 먼저 가볼게요'를 소심하게 외친채 어여 자리를 빠져나갔다. 날 데려온 애 역시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이미 걔한테 속아서 온 것이기도 하고 사는 곳도 달라서 같이 갈 이유는 없었다. 어찌 보면 나는 그 페스티벌에 수류탄을 던진 것이다.

새벽녘의 '대구 가톨릭 대학교'는 적막했다. 차도 다니지 않았고 나 혼자 걸어 내려갔다. 그런데 뒤에서 누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한 남자가 뛰어오고 있었다. 레드 페스티벌에 같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같이 가자고 말한 뒤에 활짝 웃으며 영화 잘 봤다고, 아주 좋은 영화였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댔다.

그러고는 갑자기, 정말 갑자기 아무리 위대한 감독이 만들었어도 이것은 결국 '사단'의 영화이기 때문에, 칭찬은 했지만 난 좋아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뭔 소리여. 방금 전엔 칭찬했으면서. 난 사단이 뭔 말인지 알지 못했다. 사단 났다고 할 때의 그건가? 근데 그건 '사달'인데? 뭘 말하는 거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군. 그가 내게 물었다.
 
"사단이요. 사단 모르세요? 하나님의 대척점에 있는 모든 악의 근원 말이에요."

(잠시 생각하다) "아! 사탄. 사탄을 그렇게 부르나요?"

(버럭 화를 내며)"사탄이 아니라 사단!! 사단!!!"

"아.. 예. 예.. 사단..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단이라고 할게요."

남자는 만족한 듯 진지하게 앞으로는 기독교를 열심히 믿으라고 얘기한 뒤 나와는 정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 남자는 상당한 거리를 따라와서 그 말을 남기고 갔다. 이 남자는 자신이 돌아가는 방향이 아닌데도 따라온 것이다. 그런데 그 장시간의 대화에서 남은 거라고는 "이 영화 잘 봤다. 잘 만든 영화였다. 그러나 사단의 영화이므로 난 좋아할 수 없다."라는 이상한 평가와 "사단!!!" 이라는 외마디 분노의 외침 뿐이었다.

한참 뒤에 아는 형님에게 들은 얘기지만, '사단'은 100여 년 전 번역된 성경에서의 표현이 그대로 이용된 것이란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7.


나 같은 경우에는 예수의 '인성' 을 두고 멋있다고 생각해서 인물에 흥미를 느낀 것이지만, 반대로 그것을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신적 존재가 자신들과 같은 급이 되어버리면 신앙을 믿는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자신이 때로 의지하고 픈 존재, 아니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존재가 언제나 항상 고민하고 의심하는 자신과 동급이라면 얻어낼 게 뭐가 있겠나 싶겠지. 

자신이 신처럼 믿어왔던 존재가 어느 날 의외로 평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걸 믿어온 그 사람의 인생은 무엇으로 보상받겠나. 가만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 날 레드 페스티벌의 일원들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작품들을 원했던 것 같다. <예수의 마지막 유혹>의 마지막도 으레 다 아는 것처럼 "다 이루어졌도다" 라고 외치는 예수의 모습에서 끝이 난다. 하지만 '악마로부터 깨달음을 얻은' 예수의 모습은 이들에게 '나의 그리스도찡은 이렇지 않아' 가 되고 말았다. 난 그게 되게 멋있던데. 장소가 어디든, 깨달음을 준 주체가 누구든 간에 거기서 무언가를 느끼고 얻어낸다는 게. 어찌 보면 난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서 본의 아니게 엿을 먹인 셈이다. 막판에 나만 카니발 치렀다.​
 
문득 살짝 미안해져서, 혹시 내년에 또 이 페스티벌에 가게 된다면 그때는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 라든가, (나만 좋아라 하는) 존 부어맨 감독의 <엑소시스트 2>를 들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신부 두 명이 악령 들린 소녀를 구해내는 이야기잖아? 정말 바람직한 종교영화지. 비록 1편에서 십자가로 국부를 찌르는 시퀀스가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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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종교영화.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73년 작, <엑소시스트>. 나는 이 작품을 올해 8월에 대구 물레 책방에서 주최한 호러 영화 감상회에서 감상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기념으로다가.
 

8.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뒤로 토익 시험 한 번 치러 갔던 거 빼면 대구 가톨릭 대학교에 간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이 레드 페스티벌이라는 정체불명의 축제가 치러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게 됐다. 그 덕에 여전히 내게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윌렘 데포가 왕좌를 유지하게 되었다. 

참고로 읽다가 잊어버리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거 <인디아나 존스와 마궁의 사원> 삘이 나는 나의 데이트 이야기다. 데이트라고 알고 갔다가 본의 아니게 그 사람들을 엿 먹이고 끝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뭐, 나도 속아서 간 거니까 SAME-SAME 이여. ​아마 그때 같이 작품 봤던 사람 중에서 누군가는 윌렘 데포의 치명적 매력에 매혹당해 <님포매니악>이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작품을 보러 가지 않았을까 하는 하찮은 상상을 하며 위안 삼고 있다. 그냥 가끔 다른 사람들하고 얘기하다 테마가 종교로 빠지게 되면 한 번씩 이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그래서 정리를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신다고 고생 많았다. 자. 예배 보러 가시라. 응? 이미 보고 왔다고? 음 그럼 만화나 영화 한 편 보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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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해!






문화불패 홍준호

편집: 나타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