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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8. 화요일

물뚝심송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관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수많은 해고 노동자들의 피와 땀, 그리고 사라진 생명까지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는 판결문이 나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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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예상은 했을 것이다. 이 대법원이 결코 노동자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 사용자의 편을 들 때 들어주더라도 최소한의 법리는 맞추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생각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발표된 대법원의 판결을 보고 일제히 어이를 상실해 버렸다. 


대법원도 법원이고 대법관도 법관이다. 심지어 대법원장 양승태 역시 평생을 법과 함께 살아온, 사법고시 12회에 합격하여 1975년부터 법관으로 생활해 온 그런 오래된 법조인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런 판결을 내린다는 것, 그 판결의 수준이 모두를 당황케 만들어 버렸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어이가 없냐고? 이제부터 얘기를 시작해 보자. 



법원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일은 정치와 연관이 되어 있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정치만으로 가동되지는 않는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법원은 입법, 행정과 함께 사법을 담당하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세 가지 축 중의 하나이다. 어떤 관점, 그러니까 법치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법원이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들어진 법을 해석해서 그 법이 제대로 가동될 수 있도록 유지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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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법원과 정치권과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아무래도 정권이 바뀌면, 법관의 성향도 바뀔 수밖에 없다. 법원에서 일하는 법관들이 산 속의 스님들이 아닌 이상, 이들 역시 정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룰이고 법이고 다 무시하는 깡패 정권을 만나게 되면 이 법관들 역시 자기 보호를 위해 정권의 시녀질을 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정권이 무섭고, 그 정권이 법관들의 임명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다 하더라도 법관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가치가 있다. 법의 해석, 법 질서, 아니 법 그 자체일 것이다. 


법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문장을 해석해서 실질적인 어떤 사건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법관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법 지식을 총동원하고, 법관으로서의 자기 양심에 비추어, 법 철학에 비추어 어긋나지 않는 판결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백 보 양보하자. 양심에 어긋나는 판결을 정권이 강요하더라도, 거기에 맞서 법복을 벗어던지고 나올 수 없다면, 그 어떤 기기묘묘한 논리를 강구하더라도 최소한의 법리는 맞춰 놓는 것이 직업적 사명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결론이 억지 판결이라 하더라도 그 과정은 남들 보기에, 법을 처음 배우는 학부생들 보기에, 기존의 다른 법조인들 보기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판결문에 법관으로서 자신이 서명을 해야 하고 그 내용이 역사에 남을 텐데, 최소한 후대의 사람들이 보고 비웃을 짓을 해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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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판결문은 최소한 '말은 되게' 만들어 놔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양승태 대법원장이 이끄는 대법원은 이런 아주 최소한의 기대도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정리해고


해고는 고용계약의 파기를 의미한다. 사람의 일인 만큼 그 어떤 계약도 파기될 수 있다. 고용계약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모든 계약의 파기에는 일정한 책임이 따른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제공받기로 하는 고용계약은 특수한 계약이다. 노동력을 제공하기로 한 사람의 일생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계약을 사용자의 마음대로 쉽게 파기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부분은 아무리 우리 사회가 열악한 노동환경을 자랑하는 미친 사회라 해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사업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업의 형편에 맞춰 고용의 총량을 자유롭게 변경하고 싶을 것이다. 이른바 고용의 유연성이다. 그 유연성을 확보해 주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경영에 도움이 되라고 노동의 환경을 양보한 측면이 많다. 그 결과 비정규직도 양산되고, 정리해고의 요건도 만들어진 것이다. 


노동자의 과실이 없어도,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를 해야 할 필요가 생기면 적법한 절차를 거쳐 정리해고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정리해고 자체가 금지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이다. 물론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이 있어야 하고, 해고 회피 노력을 다해야 하며, 성실한 노사 협의가 선결과제로 주어진다. 즉, 정리해고가 꼭 필요하다면 사측은 그 과정상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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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차를 지키지 않는다면 불법 해고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한다. 돈 주고 사람 쓰는데 내 맘대로 해고도 못하는 게 무슨 법이냐고 말이다. 그러나 그게 사회다. 돈 주고 사람 쓸 때에도 지켜야 할 룰이 있고,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돈 주고 썼다가 당신 꼴리는 대로 짤라 버리고 싶어 하는 그 대상이 당신과 똑같은 권리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준의 인식도 없이, 절차적 정당성도 없이 대량으로 노동자를 해고해 버린 것이 쌍용차 사건의 본질이며, 그 과정에서 사측은 정리해고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강변을 했으나, 고법에서 그 사실관계조차 입증을 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사측의 변호인들 사이에도 서로 말이 맞지 않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그 수많은 사람들을 그 긴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복직시키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 그건 문제의 본질을 벗어난 주장이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쌍용차를 상대로 싸우고, 또 그 와중에 생활고를 못 견디고 절망해서 스스로 생을 마감해 버린 사람들이 나오고 한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따지는 것이 법이 할 일이라는 얘기이다. 


애초에 해고 시점에서부터 사측은 죄를 지은 것이고,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들이 싸워 온 것이고, 이 모든 문제들의 발단이 된 사측의 책임을 묻고 합당한 보상을 강구하는 것이 법이고 정의인 것이다. 그렇게 엄정하게 옳고 그름을 가려 주어야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측면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무산시켜버렸다. 


사측의 정리해고는 합당했다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아무런 절차적 정당성도 입증하지 못했고, 해고 자체가 부당했다는 고법의 판결을 뒤집어 버릴 만한 법리도 내놓지 못 했다. 오히려 법리만을 심판해야 하는 대법원이 사실심을 담당하는 고법의 역할을 침해해 가면서까지 사실 관계 자체를 뒤집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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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도 묻는다. 도대체 어떤 정리해고가 위법하단 말이냐고...

(출처 - 민변 홈페이지)


오직 한 가지, 경영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우기면서 말이다. 


잃어버린 어이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건가? 



부끄러움


하급법원에 근무하는 판사들이 이런 한탄을 한다고 한다. 


"아무리 사실심리를 열심히 해 봐야 대법에서 뒤집을 건데 어쩌겠나. 대법에서 뒤집히지 않을 판결을 하는 수밖에.."


이번 한 번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 정신을 고민하며 법이 추구해야 할 바를 찾아 고뇌하는 판사들은 이제 자신의 고민이 대법까지 이어져 법이 사회에 해 줄 수 있는 역할을 성사시켜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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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법리를 만들면 뭐 하나. 어차피 위(대법원)로 가면 다 깨질 건데

(출처 - 한겨레)


오로지 정권의 이익, 아니 정권이 지켜줄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정치판사들이 장악한 대법원이 법의 가치를 땅에 떨구고 짓밟고 있는 현실 앞에서 정직한 판사들은 자신의 고민을 속으로 숨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게 오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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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악의 대법원장 양승태

(출처 - 로이슈)


양승태 대법원장이 임명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권력의 전횡을 다시 따져볼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또한, 이렇게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사건을 13명 대법관의 전원 합의체에서 다루지도 않고 대법관 4인이 담당하는 소부에서 심의한 이유도 따질 힘이 없다. 아마도 이 사건을 전원 합의체에서 다루게 되면 판결이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내더라도 분명히 이 판결에 반대하는 소수 의견이 판결문에 명시되었을 텐데, 그조차도 용납하지 못한 옹졸함이 작용했을 것이다. 


법관이 법을 논하기 이전에 정권의 이익과 그에 걸린 자신의 이익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정권에 의해 임명되는 대법관들이 그렇게까지 정직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도 이해는 해 줄 수 있다. 결국 어떤 대법원도 당시의 정권에 편향적인 판결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는 현실까지도 인정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편향 판결을 내리는 과정에 있어서도 법관이라면 최소한의 법리는 맞추어 놓는, 그런 최소한의 자존심은 있어야 한다. 그런 최소한의 자존심을 버리게 되면 부끄러움은 최대화 된다. 


당신들은 도대체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뭔지를 알기나 하는지 궁금하다. 하급법원의 판사들이 당신들의 판결을 대신 부끄러워하고 있고, 변호사들이 집단적으로 대법원의 판결을 비난하고 비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궁금하다. 당신들이 그 부끄러운 짓을 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그리고 소중한 생명들이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알기나 하는지 궁금하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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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이 사회에 정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사회의 정의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인 대법원이 이토록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이 땅에서 정의를 찾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수준 높은 도덕이나 윤리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그깟 돈 몇 푼에 사람들의 목숨을 짓밟는 행위는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사회적으로 규명해 달라고 법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것뿐이다. 


그게 법이고, 그게 우리 사회가 법을 만들고 법원을 유지하고 세금을 걷어 판사들을 먹여 살리고 변호사를 먹여 살리고 검찰을 운용하는 이유이다. 그 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우리 사회에 정의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면, 그 법이 존재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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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때문이라고? 억울하면 정권 잡으라고? 


만약에 정권이 바뀌고, 그 정권이 임명한 대법관들로 대법원을 채운 뒤, 그 대법원이 또 이런 부끄러운 짓을 한다면 당신들은 그래도 그 정권을 지지할 생각이신가? 최소한 나는 어떤 정권이 임명한 대법관들이라 해도 이따위 기본도 안된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다면 그 정권을 지지할 생각은 없다. 


이건 정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정권을 넘어선 사회의 도덕적 수준, 가치의 수준, 그리고 정의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정권의 안위를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을 불순분자로 몰아 순식간에 사형에 처해버린 사법살인의 기록 이후, 우리 사회의 법의 역사에 오늘의 이 판결을 가장 수치스러운 판결로 기록해 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우리는 이미 망했더라도, 최소한 우리의 후손들이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또박또박 역사 책에 기록해 줄 것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판결이 나오자마자 법원 앞마당에 쓰러져 울음을 터트리는 저 수많은 쌍용차 노동자들의 슬픔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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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죽어가는 생명들을 살리지 못하는 사회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되었다는 말로 마치겠다. 


하늘 색이 참으로 참담하게 푸르다. 



끝. 








물뚝심송

트위터 : @murutukus


편집 :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