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4. 11. 25. 화요일

sydney







편집부 주


어느 날, 회사 대표메일로 날아든 한 통의 메일,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다 메일을 보낸다는,

딴지일보 창간부터 독자이며 연식 좀 나간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 편의 글과 함께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이런 류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딴지 밖에 없을 것 같아서 보냅니다.

젊은 세대들이 알아야 할 월남전의 진실, 이제까지 아무 곳에서도 알져지지 않았던

월남전의 실상들을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흥미위주로 썼습니다."


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꿀잼 허니잼이니

함 읽어보시고 의견들 주시면 좋고.


 



 












 

죽으면 어떻게 되나?

 


군대에서는 병사'자원'으로 관리된다. 여기서 병사'계급 구분 없이 모든 군인'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사 문서에는 인원을 '파견' 또는 '충원한다고 하지 않고 '보충' 한다고 적는다. 군대란 어느 나라나 다 그런 거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공군에서는 전사(戰死) 대신 전출(轉出)이라는 말을 썼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유머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갔다'는 종교적 의미였다고 한다.

 

월남전 당시 '영현(英顯) 중대' 라는 부대가 있었다. 전사자를 처리(?)해서 전사자의 유해가 고국으로 안치되기까지 봉안 업무를 맡은 부대이다. 영현중대는 나짱에 있는 주월 한국군의 군수부대인 십자성부대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십자성부대에서 근무하던 전우들에 의하면 맨살 드러낸 황토 흙바닥에 음침한 건물이 서 있었고 높이 솟은 굴뚝에서는 가끔씩 검은 연기가 뿜어 나오곤 했다고 한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도, 우기철이 되어 살갗이 아프도록 내리꽂는 빗줄기 속에서도 주검을 한 줌의 재로 만들기 위해 헬기들이 분주히 오르내렸다고 한다

 

미군 유해보관소의 냉동/냉장 시설은 지금의 종합병원 시설보다 더 훌륭했다. 미군들은 전사자의 시신을 깨끗이 원상복구해서 (심지어 이발까지 시켜) 방부처리하여 알루미늄관에 넣고 성조기로 관을 덮은 후 본국 알링톤 국군묘지로 보냈다. 그러나 한국군은 영현중대에서 화장해서 유골함에 넣어 십자성부대 불광사에 얼마간 안치하였다가 사이공(현 호치민시) 탄소누트공항에서 본국으로 향하는 휴가자 비행기에 실어서 오산비행장을 거쳐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영현을 고국으로 봉송하는 일은 전공이 뛰어난 장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예우이며 보상이었다.

 


kim262.jpg  

전사자들의 유골을 안치하였던 불광사

지금은 사라지고, 월맹군 묘지와 기념탑이 들어섰다고 한다.(편집자 주)



아래는 해병대 사령관 출신 전도봉 장군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영현중대에서 화장을 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본국으로 주검 자체를 봉송하는 일도 있었다. 이때는 미군들처럼 영현 위에 태극기를 덮고 정중하게 장병들이 도열하여 거수경례로 그들을 환송했다. 그런데 김포공항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국립묘지에서 환영 나온 장교들의 안내를 받아 곧장 비행기의 화물 하역장으로 갔다호송할 헌병들과 영현을 봉송할 차량들이 줄을 서 있었다. 경건하고 정중하게 영현들이 옮겨졌다. 그런데 태극기를 덮은 영현들은 내가 처음 퀴논비행장에서 인계 받은 것 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이상하다. 자꾸만 태극기를 덮은 영혼들이 줄을 이어 옮겨졌다. 나는 묵묵히 지켜봤다. 그리고 동작동 국립묘지 영현안치소로 향했다. 차량들이 헌병의 호송을 받으며 불을 번쩍이며 줄지어 이동해 갔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동작동에 도착한 차량대열은 두 갈래로 나누어져 들어갔다. 태극기를 덮은 것이 모두 영현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안내장교에게 저 쪽 차량에 실은 영현들은 왜 이 곳에 함께 오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몹시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다른 짐이라고만 짧게 말하고 자리를 피했다. 나는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되었다.



 


전우들의 고귀한 죽음을 이용해서 부정한 돈벌이를 하는 일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들이 사병들이나 영관장교의 힘으로 가능하겠는가? 군 수뇌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해하자! 전쟁통이 아닌가?

 

신체 처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파월 당시 전쟁터에서 죽어서라도 효도하는 길로 여겨졌던 보상 문제는 어떻게 되었던가? 전사자에게는 36 개월치 봉급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정상적인 전투가 아니라 사고나 사건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나 불필요한 희생도 발생하는 법이다. 그럴 경우 민간인과 일반 공무원은 보상금도 받고 국가에 대해 손해배상도 따로 청구할 수 있었으나 죽을 가능성이 더 많은 군인, 군무원과 경찰은 할 수 없었다. 바로 '이중보상금지' 제도 때문이다.

  

'이중배상금지'란 군인, 군무원과 경찰공무원이 직무 중 죽거나 다쳐도 국가에 손해배상을 할 수 없고 법정보상금만 받는 제도이다. 이 제도가 생겨난 원인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이 제도는 2004년 군인연금법, 경찰연금법 개정 이전까지 존속되었다.

 



국가배상법



제2조 (배상책임) 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공무원 또는 공무를 위탁받은 사인(이하 "공무원"이라 한다)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자동차손해배상 보장법」에 따라 손해배상의 책임이 있을 때에는 이 법에 따라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다만,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또는 향토예비군대원이 전투·훈련 등 직무 집행과 관련하여 전사(戰死)·순직(殉職)하거나 공상(公傷)을 입은 경우에 본인이나 그 유족이 다른 법령에 따라 재해보상금·유족연금·상이연금 등의 보상을 지급받을 수 있을 때에는 이 법 및 「민법」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개정 2009.10.21.>

② 제1항 본문의 경우에 공무원에게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으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그 공무원에게 구상(求償)할 수 있다.

[전문개정 2008.3.14.]


출처  - 국가법령정보센터



대한민국헌법


제29조 ①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 경우 공무원 자신의 책임은 면제되지 아니한다.

②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훈련등 직무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


출처-국가법령정보센터




오마이뉴스.jpg

출처-오마이뉴스



1968년 월남전에서 순직한 상이군인의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1,2심에서 패소한 피고인 국가는 '현역 군인으로서 직무 수행 중의 순직이었으므로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에 따라 국가에서 배상하는 것 이외에 별도로 민사소송을 낼 수 없다'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에 대법원은 이중배상금지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렸다.(대판 1971.6.22. 70다1010) 그러나 법관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누구였던가? 박정희 대통령은 7차 개헌 당시 대법관에 대한 재임용을 하지 않고, 위헌 결정이 난 국가배상법을 헌법유보(헌법이 직접 명시적으로 기본권을 제한함_편집자 주) 조치하는 세계 민주주의 헌정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사법 유린극을 벌였다. 이 사건은 1차 사법파동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예 유신헌법 제292항에 이중배상금지를 못 박아버렸다. 그 이전엔 전사 장병 유가족이나 부상 장병들은 법이 정하는 보상금을 받고, 지휘관의 잘못된 지시 등에 대해 국가에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할 수 있었다.

 

남북한의 군사충돌인 2차 연평해전에서 군인 여러 명이 전사한 일을 계기로 보상금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으나 헌법상 문제로 이중배상금지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정부는 2차 연평해전 전사자 유족들에게 국민성금으로 우회적으로 보상했고 2002년 연금법 개정 법안을 발의하여 20041월에야 통과시켰다. 참여정부는 군인연금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적과의 교전과정에서 전사한 군 장병의 유족들이 최고 2억 원의 사망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연금 대상자인 부사관 이상 간부에 대해서는 보상금을 높였다. 이런 헌법 때문에 연평해전이나 천안함 같이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 아니면 현재도 작전 수행 중 사망할 경우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그냥 죽고 끝이었다.

 

2012년 아프간에 파견된 호주 병사 3명이 훈련시키고 있던 아프간 병사의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아프간 정부군으로 위장 취업한 탈레반에 의해서 병영 안에서 사살된 것이다. 희생자들의 부모는 호주 정부를 대상으로 피할 수 있었던 사고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소를 했다. 전투가 아닌 관리 소홀에서 빚어진 사고이기 때문에 보상이 아니라 배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공영방송 ABC는 이 사건을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도했다. 한국에서 과연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편집부 주


군인연금법과 공무원연금법은 법으로 마련되어있으나 경찰연금법은 없다. 국가공무원법 및 지방공무원법에 의해 경찰이 받는 연금은 공무원연금법의 적용을 받는다. (공무원연금법에서 제외되는 이는 군인과 선거에 의하여 취임하는 공무원이다.)


'이중배상금지'는 대한민국헌법과 국가배상법에 의해 2014년 12월 현재까지도 유지되고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대법원 판결에 의해(당시에는 헌법재판소가 없어서 위헌법률심판을 대법원이 했다) 위헌으로 판결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헌법에 집어넣은 조항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헌법개정을 하면 된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골치 아픈 헌법개정 대신 연금법 개정이라는 손쉬운 방법을 찾았다. 즉, 이중배상금지는 그대로 두되 지급가능한 보상금 액수를 높여버린것이다.


2002년 발의하고 2004년 시행된 군인연금법은 군인의 사망을 '공무로 사망한 경우'와 '공무 외 사유로 사망한 경우'로 나누었다. '공무로 사망한 경우'는 '전사한 경우'와 '전사 외 공무로 사망'으로 세분화했다. 전사는 '국내에서 전사한 경우'와 '외국에서 전사한 경우' 로 구분하였다. 전사자의 경우에는 최고 2억에 상당하는 금액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2002년에 발생한 연평해전은 법 개정 이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군에서 일시금으로 지급한 금액은 1인당 약 3천~8천만원, 그리고 국민성금으로 모인 금액을 1인당 약 4억원 가량 지급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법 개정 이후에 발생한 2010년 천안함 침몰사건은 전사자가 간부의 경우 1인당 약 3억 400만~3억 5800만원, 사병은 보상금 2억원을 지급했다고 알려졌다.(출처_세계일보)


단순히 보상금을 얼마 받았냐 만으로 따져버리면 군인들의 고귀한 희생 그 자체는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희생에 대한 예우와 적절한 보상은 분리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위헌으로 판결났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시대의 유령이 여전히 살아남아 지금의 우리들에게 효력을 미친다는 사실만은 꼭 기억하자.





 

그들은 어떻게 가스통 부대가 되었나?

 


한겨레 2014 10 02.jpg

출처 - 한겨레신문



최근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월남전 참전 피해자 단체인 '고엽제 전우회'가 각종 정치 현안 관련 집회를 주최하며 회원들을 동원한 정황이 내부 공문을 통해 드러났다.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고엽제 전우회는 관련법에 따라 정치 활동이 금지돼 있다. 하지만 이들은 '세월호 맞불 홍보', '교육감 직선제 폐지 운동' 등에 수시로 동원되는가 하면 '육영수 여사 40주기 추모식' 등의 행사에도 지시를 받고 참석했다. 고엽제 전우회 서울 지부는 또 '종북세력 척결' 등을 이유로 시국사건 집회를 수시로 열며, '728일 오후 1시 서울중앙지법 앞. 지회장 포함 20. 복장은 행사복' 등 지회별로 동원해야 할 인원수와 옷차림까지 명시해서 내려 보냈다이들은 과거에도 종종 각종 집회에 가스통을 들고 나서서 국민들로 부터 '가스통 부대'로 인식되어지고 있다.


나는 이들의 모습에서 1950년대 한국 전쟁 직후 다리나 팔이 없는 몸에 계급 없는 군복을 입고 목발을 집고서 상점 마다 다니면서 물건을 강매하거나 행패를 부리던 상이군인들이 떠올랐다. 한국 전쟁 전상자들이었던 상이군인처럼 정도가 심하지는 않지만 고엽제 단체 회원들은 정부에서 보조를 받거나 각종 수익 사업에 관여하는 이익단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전략적으로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스통을 들고 서 있을 위치 선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IE000925760_STD.jpg



고엽제 문제는 1970년대부터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던 미군과 호주 뉴질랜드 참전군인들이 1978년 미국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고엽제 소송은 미국 의회 청문회가 열리고 전 주월 미군 총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 육군대장이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할 만큼 큰 문제가 되었던 다국적 초대형 소송이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이길 수 없는 재판이었다. 왜냐하면 '정부조달계약자 항변원칙'(Government Contractor Defense)이라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정부조달물품 제조사는 제조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엽제 제조사들은 법정화해를 한다. 재판이 시간을 끌면 끌수록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 재판으로 인해, 엄청난 재판비용과 판결보다 더 무서운 기업 이미지 추락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1984년 미군과 호주(7,000명 참전) 뉴질랜드(600명 참전) 참전 고엽제 환자들은 24,000만 달러를 피해 보상금으로 받는다호주에서 살기 때문에 외국 언론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던 고 최영환 전우에 의해서 이 사실이 중앙일보에 보도 되었으나 전두환 정부는 제보 기자를 해고시키고 타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여 국민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결국 88개월 동안 미군 다음으로 많은 장병이 참전했기 때문에 당연히 미군 다음으로 많은 고엽제 환자가 발생한 대한민국은 단 돈 1달러도 받지 못했다. 한국은 철저한 보도통제 때문에 재판이 열리는 사실조차 몰라서 소송의 일원으로 참여하지도 못했다. 유신시대는 말할 것도 없었고 전두환 정권은 베트남전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미국을 '겨우' 고엽제 문제 따위로 또다시 심기를 어지럽게 해드리는 불경죄를 저지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 고엽제 피해 전우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고엽제 제조 회사에서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에서 보상을 받게 되었다. 고엽제 피해 단체가 '대한민국 고엽제 후유증 환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 에 의하여 비로소 공법단체가 된 것은 연대장, 대대장으로 월남전을 다녀왔던 훈장을 탄 전두환이나 노태우 때가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71221일이었다.

 

지난 105일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워싱턴을 공식 방문한 팜 빈 민 베트남 외무장관에게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군무기 베트남 수출 금지 조치'를 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이미 20149월 마틴 뎀프시 미국 육군참모총장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하며 미국과 베트남의 군사 협력 개선에 돌파구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베트남이 중국에 대항하여 군사협력을 하는 이 시대에 미국이 '우리는 자유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월남전에 참전했었다.'고 주장하겠는가? 전쟁을 벌인 미국에서도 하지 않는 생각을 지금 한국 참전용사들이 하고 있다는 것은 비록 몸은 늙었어도 뇌는 늙지 않아 주름이 없는 탓이 아니겠는가?

 

도대체 월남 참전 전우들이 참전의 권리를 요구해야 할 상대는 누구인가? 당연히 국가이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정부 여당이다. 파월 전우들은 어떤 정당이 집권을 하던 정부 여당을 상대해서 권리를 찾기 위해서 압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야당을 비난할 일이 아니라 연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항상 보수 세력의 편을 들어 각종 어용 집회에 동원되는 들러리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순진이 사람 잡는 경우인 것이다.


참전 한국군은 양민학살을 했다는 오해를 피할 수 없는 것은 베트콩과 양민을 구별할 수 없었던 전쟁의 성격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참전 군인들이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 평범한 참전군인 가운데 섞여 있는, 일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맹활약을 하는 자칭 고엽제 피해자 난동꾼들 때문에 참전군인 전체가 가스통 할배들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힘을 가진 자에게 아부해서 푼돈이나 구걸하는 앵벌이 집단일 뿐인데...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시절 자신이 당선되면 월남참전군인들을 6.25 참전 군인들처럼 국가유공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물론 월남전 참전군인들은 이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앞장서서 '묻지 마!'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 그야말로 이명박답게 명찰만 국가유공자로 달아주셨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세상에 돈이 없지 뜻이 없나? 어떤 정부가 피를 흘려 한국의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던 월남 참전 군인들에게 혜택을 주고 싶지 않겠나? 문제는 예산일 뿐이지. 언제나 모자라는 예산 집행의 우선순위는 급한 것, 요구가 강한 것부터 하게 되어있다. 예산을 따내기 위해서는 권력에 호소하거나 비위를 맞추어서 될 일이 아니고 국민적 공감대를 얻은 투쟁만이 효과가 있는 것이다.

 

 

폴리뉴스.jpg

출처 -폴리뉴스





나는 장군이 싫다

 


40대 때 고교동창들이 모여서 룸살롱을 갔었는데 육군 대령이었던 동창생이 물 찬 제비 같이 허슬을 잘 추었다. 내가 ! 너는 군인이 무슨 춤을 그렇게 잘 추냐?”고 했더니 친구는 계속 춤을 추면서 이런 걸 잘해야 출세를 하는 거야.”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그 친구는 장군이 되어 소장까지 지내고 예편을 했다. 아마 춤 실력이 그 정도 밖에 안됐는가 보다.


장군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인 내가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역사에 기록 될 만한 두 사람의 주월 사령관에 대하여 평가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줍잖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주제로 글을 쓴 사람은 이제까지 아무도 없었고 아마도 한국 역사상 내가 최초인 것 같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2013년 작고했고, 아직은 역사적 평가를 하기에 이르다는 우려 때문인 듯 하다. 그러나 절대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고, 현 시점에서 분명히 평가해야 할 부분이 있는 까닭에 아무도 나서지 않아 고발을 하는 마음으로 내가 감히 나섰다.

 

국군의 8년여의 월남 참전 기간 동안 전반기에 채명신, 후반기에 이세호 두 사람의 사령관이 재임했었다. 나는 이세호 장군이 주월남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시기에 파병이 되었기에 초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후반기에 파병되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에도 사령관이 이세호가 아닌 채명신으로 남아 있었다. 왜 그럴까? 나는 검증의 차원에서 이 글을 먼저 월남참전용사 사이트에 올리면서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 같은 사병이야 높고 높은 사령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을 리가 없지만 장교들 사이에서 이세호 장군의 별명이 '돈세호' 라는 것이다. 별명이라는 것이 그냥 붙여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아마도 이 장군은 돈을 무척 아끼고 애지중지 하셨던 모양이다. 하기사 그렇게 돈을 사랑하는 분이야말로 한 푼이라도 더 챙겨와야 했을 철수 부대 지휘관으로서 적임자가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나는 박통의 용병설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a0007341_523311f274c5c.gif

 


나는 월남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 때문에 채 장군과 장시간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시드니 방문 때는 며칠간 수행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때 이미 출판되었던 그의 자서전 <베트남전쟁과 나>라는 책을 일부러 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누가 나에게 주었던 책마저 버렸다. 이유는 우리나라 군 출신들이 쓰는 뻔한 자기 자랑의 책을 귀중한 내 서가에 꽂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어느 퇴역 장군의 자서전을 대필해 준 적이 있는데 비교적 흠 잡을 데가 없는 인격과 소양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군인 특유의, 자기 성찰이라고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기술 방식에 질려 버렸다. 그런데 그 후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채 장군의 자서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읽지 않은 전우들이 여러 명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에 온라인에서 만난 한 전우는 2006년 서점가에서 채 장군이 미소를 지으며 지휘봉을 들고 있는 책 표지를 보고서 "이 양반이 정말 전쟁을 지휘한 장군인가? 내가 이런 사람의 작전 지휘를 받고 정글 속에서 고생을 했다는 말인가?"하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책을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전우는 참전전우회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내 글을 접한 후 다시 채 장군의 책을 주문해서 읽은 다음에야 비로소 표지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과는 다르게 나름 고뇌하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천으로 만든 실내 모자에 지휘봉을 들고 웃는 모습을 볼 때 심장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왕이면 전쟁터에 나간 장군답게 철모를 쓰고 방탄 조끼를 입은 무장 모습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백 년 후 우리의 자손들이 월남 전쟁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의 모습을 보고 월남전을 어떻게 평가할까


선조들의 전쟁 모습을 겪지 않은 후손들이 갑옷에 큰 칼 옆에 차고 의연히 서 있는 장군의 동상을 대할 때 우리들이 느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6.25 전쟁 중 미국 맥아더 장군에 인천 상륙 작전 중 망원경을 들고 전운을 살피고 있는 모습과 비교를 해보자. 월남전 당시 찍은 사진이 수없이 많을 터인데 월남전을 상징하는 사진이 그것 밖에 없었을까? 열 마디 글보다 단 한 장의 사진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데..."



그 전우는 이렇게 뼈가 아플만한 지적을 했다.


나는 처음 그 책을 보았을 때 그 전우만큼 깊이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닌데 별 셋 달린 중장 모자에 30대 청년 같은 채 장군의 얼굴이 전혀 전쟁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정도의 생각 밖에 하지 못했다. 자서전을 채 장군이 직접 기획했을 리는 만무한 일이기에 "어떤 놈이 기획을 했는지 전쟁의 자도 모르는 놈이 책 기획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나중에 채 장군을 만났을 때 책에 대한 내 소감을 이야기 했더니 출판에 대해서 잘 몰라서 누구한테 맡겼더니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020222_mkd3.jpg         cmsbook.jpg




이 연재를 하기 위해서 채 장군의 책을 꼼꼼이 읽어 보았지만 처음 내가 가졌던 선입관에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새롭게 알려질 만한 비사도 없고 역사에 기록으로 남을 만한 귀중한 증언도 없는, 그저 국방부 전사 보관소에나 보관하면 적당할 만한 평범한 책이었다. 서두에 베트남전과 관련된 국제정세의 변화 등에 대해 상당히 길게 언급해 놓았지만 여전히 객관적이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쉬웠다.


일반적으로 유명한 군인들의 전쟁회고록은 당사자들의 얘기이기 때문에 사실적이고 흥미진진한 법이다. 물론 자서전은 자기 자신을 항변하거나 자신이 했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설파하려는 가능성이 농후한 법이다. 그러나 훌륭한 책은 자신이 이루어 놓은 잘 알려진 업적을 자랑하기 보다는 어떻게 큰 실수를 저지를 뻔하고 또한 저질렀으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왔는가 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자신들의 회고록인 만큼 오히려 더 냉철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 반성하고 비판하며 '그 때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했어야 했다.' 라는 내용이어야 후손들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책은 한낱 홍보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채 장군의 책은 자신의 생각은 원래 이러해서 그 뜻을 그렇게 관철시켰으며 난 그렇게 생각했지만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변명조의 내용들이 간간히 섞여 있고,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나 잘못된 판단과 결정, 간과했던 사항들은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자신에 대하여 너무 관대했다. 회고록 안에 펼쳐진 인간 채명신은 너무 완벽해 보여서 왠지 믿음이 덜 갔다.

 

그런 면에서 <롬멜전사록>의 경우와는 매우 비교가 된다. 그 책도 물론 롬멜이 직접 쓰지는 않았고 롬멜의 아들이나 부관, 참모들이 그 상황에서의 주석을 달아 놓은 책이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앞서 말한 그런 기록들 때문에 오히려 더 믿음이 간다.

 

월남전으로 국민영웅이 되었던 채명신 장군은 사령관직에서 물러난 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철저히 견제를 당했고 생을 마칠 때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면서 살아야 했다. 후임 이세호 장군은 개인적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친구 사이이기도 했지만 박 대통령 치하에서 47개월 최장수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후 자신의 옛 부하였던 전두환한테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흥미 있는 일은 두 장군들의 개인적인 인격의 차이에 대한 평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할 일이 우연하게 발생한 것이다.



 30000243355_700.jpg



그 사건은 20124월 18일 오전 730분부터 9시까지 약 2시간 동안 서초동 전자랜드 12층에서 벌어졌다. 이세호 장군은 자신의 전력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통일교의 2대 교주 문국진(문선명 아들)의 안보 강연에 축사를 하는 들러리 자리에서 엄청난 이야기를 했다. 즉 월남전에서 한국군 병사 1인당 봉급을 매월 500달러(당시 US 달러)를 미국한테 받았으나 그 돈의 50달러만(병장 기준) 지급하고 나머지 450달러는 국고에 귀속시켜 버렸다는 역사의 비밀을 누설해버린 것이다. 정부는 그 돈을 가지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새마을사업, 국가 기간산업에 투자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발언을 하고 1년 후에 사망했다.

 

채 장군은 파월 전우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수십 년간 논란이 되고 있는, 국가가 삥땅 친 일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있는 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채 장군이 은인자중 신중한 처세의 보신주의로 일관하다가 밝혀야 할 것을 밝히지 않고 비밀을 무덤속까지 가지고 간 것은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채명신 장군과 달리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어쩌다가, 얼떨결에, 우연히, 공교롭게, 나도 모르게, 부지중에, 무심코, 아무 생각 없이 중요한 말을 흘리게 되어 있다. 그날 아침이 이세호 장군에게는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그날 행사의 정황상 이세호 장군의 폭탄 발언은 본인이 사전에 계획했던 것이 아니고, 당일 행사에 참전군인들이 많이 참석한 분위기에서 불식간에 나온 즉행적 발언이라고 본다. 그가 그렇게 중대한 발언을 하려고 했다면 통일교 집회 같은 음성적인 모임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선명이 직접 등장하는 자리를 비롯해서 통일교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취재를 목적으로 몇 번 참석을 했던 내 경험으로 볼 때 통일교 행사란 주로 주류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돈을 듬뿍 주고 초청하거나 그럴듯한 명분을 걸어놓고 둘러치기 식으로 행사를 치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가 진심으로 국가가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엄청난 숙제에 대하여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보다 더 공식적인 자리에서 명분을 가지고 했을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비록 세상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비록 실수로라도 진실을 알게 만든 이 장군의 업적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의 실언으로 역사적 진실의 한 부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경위야 어떠하든 사실이 확인되었으니 이제 국가로부터 삥땅 뜯긴 돈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야 말로 가스통 부대가 해야 할 일이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그들이 무엇을 하겠나?


이제 드디어, 어떤 이에게는 무척 길었던 글을 마무리할 때이다.


비록 잉여가 과잉인 입장이기 하지만 지금까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월남에서 보낸 시간 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세대가 50년 전의 월남전의 실상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라 하겠다.


혹시 수능 시험이나 공무원 시험에 나올 것을 대비해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첫째, 박정희의 월남 파병 결단은 논란이 있으나 결과적으로 유익한 판단이었다.

둘째, 월남 참전 병사들은 국가로부터 삥땅 뜯겼다.

셋째, 이제 먹고 살만해 졌으니 국가는 삥당 친 돈 이자는 그만두고라도 원금만이라도 돌리도!



돈 이야기로 끝나니 좀 거시기 하다마는 월남참전은 처음부터 돈 때문에 시작된 것이니만큼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현재 참전자들에게 주는 돈은 명예수당이라는 이름으로 월 17만원씩 지급하고 매년 1만 원가량 올라가고 있다.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11만 명에게 지급되는 돈이 연간 2,400억 정도이니 그것도 적지 않은 액수일 것이다. 그러나 원래 돈이라는 것이 영수증 없이 주고받으면 받는 사람 계산과 주는 사람 계산이 다른 법이지만 월남전 효과가 당시 시가로 10억불 수준이라던데 이건 좀 너무 적다는 계산이다.


 글을 읽는 젊은 세대들은 가끔 출몰하는 가스통 부대들을 보면 손가락질 보다는 불쌍히 여기기를 바란다. 어떡하겠나? 그들 대부분이 요즘 세상처럼 자료가 풍부한 시대에 살지 못했던 세대여서 정보가 뒤떨어진 탓이니. 혹시 길 가다가 가스통 부대를 만나거든 노인들이 애를 쓰는데 그냥 지나치지 말고 무거운 가스통(아마도 속은 비었겠지만)을 대신 짊어주고. 왜 있잖은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어준 젊은이가 나중에 복을 많이 받았다는 전설이?






PS. 이글이 완성되도록 도움을 준 몇몇 전우들과 이 글을 읽어주신 딴지스들과 글을 때갈 나게 편집해준 편집부 노예에게 감사를 드린다. 시드니의 늙은 잉여.




Screen-Shot-2012-06-05-at-20.13.09.png   














sydney


편집 : 독구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