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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7. 목요일

산하







산하의 가전사


끔 하는 쟁 이야기 랑 이야기의 줄임말입니다. 

왜 전쟁과 사랑이냐... 둘 다 목숨 걸고 해야 뭘 얻는 거라 그런지 

인간사의 미추, 희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얘깃거리가 많을 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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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25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통령 행정명령 8802호’에 서명했어. '정부 기관과 연방 사업자들은 국가 방위사업에서 인종, 종교, 국적에 따른 고용 차별을 할 수 없다.'는 게 요지였지. 일단 공식적 문호는 열린 셈이고 그 해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자 흑인들에게도 그들의 '나라'를 위해 싸울 권리가 주어지게 되지.


미 육해공군 해병대 가운데 흑인에게 가장 늦게 문호를 개방한 건 해병대야. 월남전 때 한국 해병대 청룡부대와 미군 육군이 쌈박질을 벌이면 미국 해병대는 '웬 땅개가 해병대한테 개겨?' 하면서 한국 해병대 편을 들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만큼 쓸데없는(?) 긍지가 높았던 탓이야. 루즈벨트의 고용 차별 금지 선언 때 해병대 사령관 토머스 홀컴의 말을 빌려 볼까.


“만일 백인 해병 5000명과 검둥이 해병 25만명 가운데 어느 쪽을 지휘할 거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단연코 백인 부대를 택하겠다.” 


빌어먹을 흰둥이 자식 같으니.


흑인들의 입대가 허용됐지만 흑백 차별은 극심했어. 미국을 위해 싸우겠노라 기세 등등해서 입대하고 나면 기다리는 건 백인 교관들의 살인적인 괴롭힘, 시민들의 외면, 동료 군인들의 멸시였지. 병과도 전투병과는 거의 허용되지 않았어. 취사병이나 공병, 보급병 등 허드렛일만 도맡았지. 2차대전을 그린 영화에서 흑인 용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유야. 하지만 태평양 전쟁 개전 후 최초로 훈장을 받은 사람은 흑인이었어. 도리스 밀러(Doris Miller). 웨스트 버지니아라는 전함의 요리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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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을 받은 도리스 밀러



역대급으로 지루하다가 막판 전투신에서만 번쩍 눈이 뜨이던 영화 <진주만> (벤 에플렉 나온) 에서도 도리스 밀러가 등장해. 쿠바 구딩 주니어가 맡았지.


도리스 밀러는 일요일 아침 수병들의 식사를 챙겨 주고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천둥같은 소리와 함께 일본군의 공습이 시작돼. 12월 되면 이 진주만 얘기도 해 주겠지만 미국은 '도저히 당할 수 없는 기습'을 당해. 그만큼 징후도 많았고 예상된 공격이었고 심지어 레이더에 일본군 비행기 떼가 잡혔는데도 무심하게 그냥 넘어가 버린 뒤 받은 공격이었으니까. 저공비행으로 함대 위를 지나는 일본군 비행기를 보고 "야 저거 너무 낮게 난다. 어느 놈이야?"라고 불평을 토하는 병사가 있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겠지?


삽시간에 미국 태평양 함대는 반신불수에 빠져. 천만다행인 건 (음모론에 따르면 계획된 거지만) 항공모함 3척이 모두 진주만에 없었다는 것이지만 한동안 태평양에서의 제해권을 일본에게 내 줄 정도의 크나큰 피해였지. 도리스 밀러가 타고 있던 웨스트 버지니아도 일본 항공대의 직격을 받아 함장이 치명상을 입어. 밀러는 함장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뒤 기관총좌를 잡고 일본 비행기들을 향해 필사적인 사격을 시작해. 이 분노한 요리사의 기관총탄은 전쟁을 선포한 일본에 대해 미국이 펼친 반격의 시작이었어. 자신은 확실히 1대는 떨어뜨린 것 같다고 겸손해 했지만 주위 사람들은 여섯 대까지 떨어뜨리는 걸 봤다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어.


그는 최후의 퇴함령이 내려질 때까지 배에 남아 있었고 물과 불과 기름구덩이를 피해 수많은 사람들을 피신시켰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함대에 대한 공격에서 임무에의 특별한 헌신, 놀라운 용기, 그리고 개인의 안전을 개의치 않았다. 브릿지의 함장 곁에 있으면서, 밀러는 적의 사격과 폭격에도 불구하고, 중포화에 직면해서도, 치명상을 당한 함장을 안전한 곳으로 부축하곤, 브릿지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지기까지 기관총을 잡았다.”


니미츠 제독의 치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지.


도리스 밀러는 진주만의 참혹함 속에서 우뚝 빛나는 영웅이었지만 다른 미군의 영웅들 같은 대접은 받지 못해. 그 활약을 다룬 영화가 만들어진다던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전시 국채 구매를 팔러 다닌다던가 하는 건 다른 백인 영웅들의 몫이었고 그는 식당 요리에서 급사로 승진한 게 다였지. 왜? 흑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웨스트 버지니아가 아닌 다른 배에 타고 임무를 계속하게 돼. 1943년 11월 그는 호위항모 리스컴 베이에 타고 있었어.


미드웨이와 과달카날에서 이미 일본군의 예봉을 꺾은 미군은 일본 본토로 진격하기 전 태평양에 뿌려진 많은 섬들에서 방어 태세를 굳히고 있는 일본군들을 격파해야 한다고 봤고 타라와(Tarawa)는 그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사전 폭격과 상륙 작전, 죽을 고생 끝에 일본군 소탕'이라는 도식의 첫 번째 무대가 돼.



편집자 주


타라와(tarawa)는 오세아니아에 있는 섬나라 키리바시(Kiribati) 공화국의 수도이다. 키리바티 공화국은 30여개의 산호초 섬들로 이루어져있으며 인구는 약 10만명이다. 1788년 영국 해군 길버트가 상륙해 점령한 뒤 1892년부터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79년 독립하였다. 이러한 역사로 인해 현재도 영연방에 속한다. 우리나라와는 1980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수몰위기에 처해있으며 이미 섬 2개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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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바시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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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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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와 환초





언젠가 얘기한 적 있는데 전쟁이란 누가 누가 잘하나가 아니라 누가 누가 삽질을 적게 하나의 문제로 승패가 결정될 때가 많지. 초기 미군은 엄청난 삽질을 했어. 상륙작전 하는데 조수 간만과 수심의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았던 건 그야말로 최악이었지. 일본군은 환초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게 된 미군들을 아주 손쉽게 처치했지. 미군은 1943년 11월 20일부터 23일까지 단 나흘간 벌어진 전투에서 1,696명의 전사자를 낸다. 이건 해병대 최악의 악전고투라는 6.25 당시 장진 전투에서 중국군에게 당한 것보다 더한 수치야. 이후 이 참혹함에 대해 언론과 의회가 시끄러웠고 니미츠 제독은 '내 아들을 돌려다오'라는 분노의 편지 수백 통을 받아야 했지.


해병대는 그나마 제 몫을 해 냈지만 함께 투입된 육군 27사단은 일본군이 좀 드세게 나오면 이내 엎드려서 움직이지 않았고 제대로 된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어. 자연히 상륙 지원부대가 제 시간에 현장을 떠나지 못했고 호위 항모 리스컴 베이는 필요 이상 근해에 떠 있었지. 이걸 일본군 잠수함이 놓치지 않았고 리스컴 베이는 일본군의 어뢰의 밥이 되고 말았어. 어뢰가 무기고를 직격해서 대폭발을 일으켰고 30분도 안돼 바다로 곤두박질쳐 들어간 거야. 그리고 도리스 밀러는 그 배에서 나오지 못했어. 전쟁 영웅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칭송과 명예를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다지 얻지 못했던 도리스 밀러는 남태평양 바다 속에 잠들었지.


그 이후 전개된 여러 상륙작전에는 1942년 6월 창설됐던 흑인 해병대원들도 참전했지만 그들은 가장 빛을 보지 못하면서 가장 위험하면서 가장 귀찮은 임무에 주로 투입됐고, 그들은 일본군 만큼이나 싫은 동료 백인 병사들의 눈길과 입놀림과 때로는 주먹질에 시달려야 했지. 2012년 미국 해병대 사령관 제임스 아모스 대장은 이들 흑인 해병대의 기억을 되살리고 생존자들에게 의회 금메달을 수여했어. 70년만에 그들의 공적을 공식 인정한 거지. 경향신문 기사(클릭하면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를 보면 이때 금메달을 수여받은 조지프 스미스의 기묘하지만 절절한 수상 소감이 나와. “마침내... 빌어먹을 해병이 됐군.” 통렬한 반어법 속에 담긴 한과 기쁨의 조화랄까.


해병대에 자원한 흑인들은 기차에 실려 '몽포드'라는 지역에 도착했는데 말이 훈련소지 그곳에는 일체의 건물이 없었대. 흑인들은 '훈련하면서 건설하는' 악전고투를 치러야 했다지. 그렇게 2만 명의 흑인 해병이 배출됐지만 그들은 전쟁 후 즉시 제대했어. 그들도 원치 않았을 테지만 아마 미군 당국도 그랬겠지.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잊혀졌고 70년 뒤에야 이 몽포드 마린(해병대)의 역사가 인정을 받은 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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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타라와 전투, 도리스 밀러가 전사하고 미군 해병대가 곤욕을 치른 이 전투는 우리도 기억해야 할 전투야. 일본군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토치카와 요새에서 집요하게 저항했고 미국 해병대는 해변에 야자수로 만들어진 방어벽을 기어 오르느라 죽을 힘을 다 해야 했는데 그 섬의 요새화를 진행한 건 바로 2,200여 명의 조선인들이었거든. 듣도 보도 못한 남양의 섬까지 끌려와 죽을 고생을 다한 조선인들 가운데 살아남은 건 단 126명이었어, 나머지는 영문도 모르는 싸움에서 폭격을 맞아, 또는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 때 총알받이가 돼서 '반자이' 대신 '어머니'를 울부짖으며 달리다가 총을 맞아, 동료를 잃은 미군의 핏발선 총검에 맞아 죽어갔지.


도리스 밀러는 지금도 미 해군 함정 이름으로 남아 있고 흑인 해병대, 몽포드 마린도 미국 최고의 영예인 의회 금메달에 빛나지만 우리는 타라와에서 죽어간 조선인들의 이름도 몰라. 그들의 혼령은 수천 킬로 북쪽 고향으로 날아들 수 있었을까.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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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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