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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21. 금요일

펜더









M2 중기관총이란 녀석이 있다. 50 Caliber라고 불리기도 하고, 미국에서는 Browning Machine Gun(BMG)이라는 정식 명칭으로 불리는 녀석이다. 군 생활을 한 남자라면, K-6 중기관총을 생각하면 이해가 더 빠를 것이다. 우리나라의 K-6는 M2의 카피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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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2(왼쪽)와 K-6(오른쪽)


이 M2가 언제 만들어진 물건인지 아는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이다. 무려 100년 가까이 현역에서 굴러다니고 있고, 앞으로도 굴러다닐 거라 예상되는 물건이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물건'과 사회에서 사용하는 '물건'은 그 수명주기가 다르다. M2와 같이 명품으로 인정받으면(전략, 전술적 환경, 시대적 환경이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100년 가까이 사용될 수도 있지만, 전술이나 전략의 방향성이 달라지면 지체 없이 폐기되는 것이 바로 '무기'다. 


전쟁이란 사람의 목숨을 걸고 하는 인류 최대의 소비행위다. 이런 소비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생명'이다. 


내가 안 죽으면서,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무기.


이것이 절대명제가 된다.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지는 무기, 즉, 내 생명을 지킬 수 없고, 상대방을 죽일 수 없는 무기란 결론이 나면 지체 없이 폐기를 하는 것이 '무기'다. 내 생명을 담보로 사용할 무기가 아닌가? M2처럼 100년 가까이 된 무기라도 그 효용이 인정되면 현역에서 굴리지만, 어제 만든 무기라도 현대 전장에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는 판단이 서면 바로 도태되는 것이다. 


드레드노트(Dreadnought)의 등장은 드레드노트 이전에 건조된 수많은 전함들을 단 한 번에 '구식전함'으로 만들었다. 그때까지 피땀 흘려 만든 수많은 전함들이 종이배가 된 것이다. 




교훈


근대 해군끼리의 최초의 제대로 된 '전투'였던 쓰시마 해전은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영국 해군들에게 수많은 교훈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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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해전을 묘사한 그림


프랑스식 텀블홈(Tumblehome)선체보다 영국식 선체 구조가 속도를 내기에는 유리하다. 속도를 빠르면 더 빨리 더 좋은 위치에서 사격을 가할 수 있다.


양측의 화력이 비슷하다면, 결국 그 화력을 견뎌내는 쪽이 이긴다.


똑같은 구경을 사용하는 동일 화포를 동시에 발사한다면, 이론적으론 비슷한 탄착군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교훈들을 모아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드레드노트였다. 이때까진 기술의 미비로 석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최대 속력 21노트, 12인치(304.8미리) 주포 10문(2연장 포탑 5기), 항속거리 6,620해리에 현측 장갑이 최대 280미리에 이르는 이 괴물의 등장은 그 자체로 충격과 공포였다. 당시 영국 해군에서는 드레드노트급 1척이 그때까지의 전함 3척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영국 해군으로서는 경사라고 할 대사건이었지만, 영국 정부와 해군 내부에서 드레드노트급은 '환영'보다는 '우려'와 더 가까운 존재였다. 세계최강의 전함을 만들었는데도 걱정을 했다니, 왜 그랬을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첫째, 비용대비 효과였다. 


기존의 전함을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 정도로 대단한 전함이란 소리는 그 만큼 비싼 '물건'이란 소리다. 물론, 이 비싼 물건이 제 값을 한다면 수긍할 수 있겠지만, 과연 제 값을 할 지에 대해서 해군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특히 문제가 됐던 것은 드레드노트급의 존재 의의라고 말할 수 있는 '동일구경 함포 다수에 의한 원거리 교전'이 과연 실행 가능한가란 부분이다. 일본이 이미 한 번 시도해 봤지만 효과는 없었고, 이를 지켜 본 영국해군 관전무관도 이를 실현하는 건 어려울 것이란 의견을 보냈던 것이다. 물론, 새로운 개념의 무기체계가 등장할 때마다 이런 논란과 의구심은 언제나 따라왔던 문제다. 진짜 문제는 바로 두 번째 '논란'이다. 


 둘째, 드레드노트급이 영국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드레드노트급은 기존의 전함들을 한 순간에 구식전함으로 떨어뜨린 전함이다. 즉, 영국해군이 엄청난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잡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보면, 영국해군에게 엄청난 위기가 도래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것은 영국이다. 다시 말해서 '구식전함'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영국이란 뜻이다. 즉, 영국은 드레드노트급을 건조함으로 인해 기존의 세계1위 해군력 보유국의 위치가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제 해군력은 드레드노트를 기준으로 새로 짜게 됐다. 그렇다는 건 이제까지 피땀 흘려 세워 올린 해군력은 과거의 이야기가 됐고, 이제부터 드레드노트로 건함경쟁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영국이 드레드노트를 처음 건조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나라들이 추격을 해올 것은 불을 보듯 뻔했고, 영국은 기존의 우위를 다 버리고 건함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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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려 속에서 드레드노트는 건조됐다. 물론 여기에는 영국의 '희망'이 섞여 있었다. 


'드레드노트급 한 척이면, 기존 전함 3척의 전력이다. 전함 숫자가 적더라도 충분히 타국 해군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착각이었다. 드레드노트의 등장에 전 세계는 경악했지만, 이는 한 순간이었다. 모두 입을 맞춘 듯 너나할 거 없이 드레드노트급을 건조하기 위해 뛰어들었고, 전 세계는 때 아닌 건함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영국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었다. 


드레드노트급은 영국의 힘을 상징하는 최신예 전함이기도 했지만, 이를 상대할 타국 해군(대표적으로 독일)에게는, 


'기존의 총 배수량은 의미 없다. 이제 세계의 바다는 드레드노트라는 새로운 기준으로 통일 됐다. 영국 해군을 추월할 절호의 기회다.'


이런 잘못된 사인을 보냈던 것이다. 가뜩이나 국가 경제에 주름을 잡히게 했던 건함사업이었는데, 이제 건함사업은 국가 재정을 휘청이게 할 정도가 돼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영국 해군이 이 건함경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드레드노트급이 나온 지 몇 년 되지 않아 세계열강들은 드레드노트급을 찍어내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독일도 있었다. 아니, 가장 의욕적으로 찍어 낸 곳이 독일이었다. 이미 빌헬림 2세는 공공연하게 영국해군을 추월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했고, 실제로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세계 2위와 3위의 해군력을 가진 나라가 연합을 해서 공격해도 이를 능가할 만한 전력을 확보하는 게 영국 해군의 기본 방침이었던 상황에서 이런 독일 해군의 대두는 불편을 넘어 '불안'을 조성하기에 충분했다. 드레드노트라는 새로운 전함이 가져온 정치적 파장이었다. 


건함경쟁이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일본의 정치적 손익계산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이 될 것이다.


- 영국의 소설가인 허버트 조지 웰즈 



1914년 7월 28일 사라예보에 울려퍼진 한 발의 총성으로 시작된 전쟁은 그 후 4년이란 시간 동안 9,381,551명의 병사가 죽었고 23,143,015명의 병사가 부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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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에서 왕위 계승자를 암살한 세르비아인 자객이 체포당하는 모습


아이러니한 건 당시 거의 모든 유럽인들은 전쟁을 '환영'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쌓아놓은 엄청난 물질문명의 힘을 그들은 사용해 보고 싶어 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 마지막 전쟁이라고 해봤자. 독일과 프랑스가 붙은 보불전쟁이 다였다. 그게 언제인가? 자그마치 반백 년이 다 돼 가는 이야기였다(1870년 7월에 시작해 이듬해 5월에 끝났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엷어져만 가던 그때. 그들은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전장의 공포나 근대의 힘이 보여준 '러일전쟁'의 공포는 안중에도 없었다.


"길어봤자 몇 개월 안에 전쟁은 끝날 것이다."


이런 근거 없는 낙관에 빠진 젊은이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전장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이 낙관은 불과 몇 개월 사이에 한 없이 절망에 가까운 비관으로 변하게 된다. 그 사이 가장 기뻐했던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일본 정부에서 제일 발 빠르게 움직였던 이가 바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였다. 초대 외무대신을 역임했던 이노우에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마자 일본의 참전을 독려했다. 그의 상황판단은 간단명료했다. 


"아시아에서 열강들의 힘이 빠져나간 이때가 일본의 기회다. 열강이 빠져나간 자리를 일본이 차지해야 한다."


세계열강들이 유럽에서의 전쟁에 모든 관심을 쏟는 그때. 일본은 빈집털이를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이때 도움이 됐던 것이 바로 '영일동맹'이다. 러일전쟁으로 그 효용성이 떨어진 영일동맹이지만, 일본에게는 '꽤' 괜찮은 명분이 돼 주었다. 일본은 1914년 8월 23일 영일동맹을 명분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다. 


이후의 행보는 속전속결이었다. 일본 육군은 독일의 조차(租借)지였던 중국의 청도를 점령했고,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는 남태평양의 독일령인 마리아나, 카롤라인, 마샬 군도 등등을 점령하게 된다. 청도를 점령함으로써 육군은 산동성으로의 세력 확대를 가능하게 했고, 남태평양의 제해권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해군은 미국의 태평양 횡단 루트를 차단할 수 있게 됐다. 


일본으로서는 손 안대고 코 푼 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세계열강들이 참호 안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때 일본은 본격적인 만주 지배의 수순을 밟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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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월 18일. 유럽 전선이 고착화 되던 그때. 일본은 중국에 대해 21개조에 대한 방대한 요구를 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21개조 요구'였다.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1. 중국 정부는 독일군이 산둥성에 관한 조약 또는 기타 에 의하여 중국에 대하여 소유하는 일체의 권리·이익·양여 등의 처분에 대하여 일본국 정부가 독일국 정부 와 협의할 일체의 사항을 승인할 것을 약정한다.


2. 중국 정부는 산둥성 내 또는 그 연해 일대의 토지 또 는 도서를 어떠한 명목으로도 타국에 양여하거나 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약정한다.


3. 두 체약국은 여순(旅順)·대련(大連) 조차 기한 및 남만주 및 안봉(安奉) 양 철도의 기한도 다시 99개년씩 연장할 것을 약정한다.


4. 일본국 국민은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고에서 각종 상공업 건물의 건설 및 경작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토지의 임차권 또는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다.


5. 중국 정부는 중국 연안의 항만 및 도시를 타국에게 양여하 거나 대여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


6. 중앙 정부에 정치 재정 및 군사 고문으로 유력한 일본인을 초빙할 것.


7. 종래에 중·일간에 경찰 사고의 발생이 많았으며 불쾌한 논쟁이 적지 않았으므로 차제에 필요한 지방에 있어서의 경찰 을 중·일 합동으로 하든가 또는 이러한 지방에 있어서의 경찰 관청에 일본인을 초빙하고 또 중국 경찰 기관의 쇄신 확립을 도모하는 데에 힘쓸 것.


주요한 조항들만 간추려서 확인해 봤다. 몇 개 조항만 확인했음에도 이 요구가 불평등을 넘어 가혹한 착취와 수탈이란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중국 정부는 이 요구를 거절했지만, 1915년 5월 7일 일본의 최후통첩을 받은 이틀 후인 1915년 5월 9일 이를 수락하게 된다. 당시 중화민국의 대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일본의 중국에 대한 행동은 독일이 벨기에게 행한 것보다 훨씬 나쁘다."


라고 말하면서도 일본의 요구조건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위안스카이의 정치적 패착이 된다. 


만약 이때 위안스카이가 21개조 요구를 거절했다면 중국의 역사는 어떻게 흘렀을까? 이 21개조 요구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인 위안스카이는 중국 민중들의 마음에서 지워지게 된다. 누가 봐도 중국의 주권을 유린하는, 아니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선언으로 봐도 무방한 이 요구조건을 선선히(!) 받아들이는 지도자를 누가 따를까? 위안스카이의 몰락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중국 민중들의 반일감정은 덤이었다. 이 '덤'이 4년 뒤 5.4운동으로 분출되게 된다. 




오스발트 슈펭글러 (Oswald Spengler)


독일의 문화철학자인 오스발트 슈펭글러. 그는 그의 저서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에서 기존 역사학의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혁명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그는 그때까지의 발전사관을 부정하고, 역사의 시대구분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그는 그때까지 제국주의의 전가의 보도였던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부정하고, 모든 문화에는 각각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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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발트 슈펭글러


그의 종말론적 역사관은 그의 출신(독일인이지 않은가.)을 가늠케 했고, 그가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었다. 


이 모든 걸 차치하고 그의 주장은 파격 그 자체였다. 언제나 그렇지만, 거대한 '전쟁'이 끝난 직후의 지식인들은 비관주의적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가운데 슈펭글러는 '서구문명의 몰락'을 예언했던 것이다. 


덕분에 그의 책은 엄청나게 팔렸다. 1918년, 1922년에 각각 출간된(2권이다.) '서구의 몰락'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에는 140판을 찍는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의 예언은 비관주의에 물든 지식인의 단순한 선언이었을까? 당시 상황을 보자면 선언이라기 보다는 '현실분석'에 가까웠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 불렸던 이 '대전쟁'은 유럽의 열강들을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뜨렸다. 이제 유럽은 더 이상 세계문명의 중심이 될 수 없었고, 국제정치의 주도권은 전쟁의 화마를 비껴간 미국과 일본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경우는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국가의 잠재력을 생각한다면), 일본은 의외였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 내내 열심히 수출을 했고, 그 결과 채무국에서 채권국이 됐다. 


1914년 수출액이 6억 엔에 불과하던 일본이 전쟁 막바지인 1919년이 되면 21억 엔의 수출액을 자랑하게 됐다. 무역 외 수입도 전쟁 4년 만에 14억 엔의 흑자를 보았고, 러일전쟁의 채무로 허덕이던 일본이 1919년이 되면 어느새 27억 엔의 채권국이 돼 있었다. 


일본으로서는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쉬워 할 수만은 없었던 일본이었다. 전쟁은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최대한 남은 이익을 긁어 와야 하는 것이다. 국제정치상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존재는 희미하지만, 일본은 엄연한 '승전국'이었다. 일본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고, 파리강화회의에서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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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강화회의 참석자들의 사진

(앞줄 오른쪽 끝에 한국 대표 김규식도 보인다.)


일본의 주장은 간단했다.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획득한 '권리'의 인정이었다. 즉, 확보한 산동성과 남태평양 제도의 권리 인정이었다(부차적으로 인종차별 철폐가 있었지만, 넘어가기로 하자). 일본은 승전국이었고, 승전국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였다. 비록 중국의 반대는 있었지만, 무난하게 일본은 자신의 권리(!?)를 확인 받을 수 있게 됐다. 


일본은 그렇게 제1차 세계대전 최대의 수혜국이 됐다.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http://hohodang.com/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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