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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03. 수요일

sydney







편집부 주


어느 날, 회사 대표메일로 날아든 한 통의 메일,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다 메일을 보낸다는,

딴지일보 창간부터 독자이며 연식 좀 나간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 편의 글과 함께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이런 류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딴지 밖에 없을 것 같아서 보냅니다.

젊은 세대들이 알아야 할 월남전의 진실, 이제까지 아무 곳에서도 알져지지 않았던

월남전의 실상들을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흥미위주로 썼습니다."


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꿀잼 허니잼이니

함 읽어보시고 의견들 주시면 좋고.


 



 












 



 

월남 참전전우들의 사이트와 딴지일보에 참전기를 연재 하면서 댓글을 통하여 내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고, 다양한 피드백(feedback)도 받았다. 그 중에는 놓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서 정리를 해 보았다.

 

전우들의 댓글 중 가장 많았던 것은 장군부터 사병까지 월남전에서 하나라도 챙기자는 철두철미한 정신 무장(?)덕분에 벌어진 무용담이었다.


그 중에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오랜 기간 잉여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여 자료를 모으던 나조차 놀래서 "허걱" 소리를 내지를 수 밖에 없었던, 고엽제를 마시고도 정신이 멀쩡한 어느 전우의 놀라운 자백이었다.


투이호아 공항으로 물을 수송하는 트럭을 경호하러 가면서 미군 부대 내무반을 털었다고 했다. 미군 내무반은 주간 경비병이 없다는 것을 듣고서 두 번 정도 미제 정글화, M16 까지 털었단다. 물탱크 트럭을 미군 내무반 근처에 대 놓고 누가 먼 곳에 나타나면 운전병이 트럭 문을 '땅땅땅' 세 번 두들기고, 가까이 오면 '-타당' 하고 신호를 했단다. 급할 경우에는 아무 것도 건들지 않은 것처럼 태연히 M16을 '옆구리 총'자세로 들고 나오면 미군들이 그냥 비켜주더란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한국군 물탱크가 나타나면 내무반 경비병들이 나타나더란다. 이렇게 서로 간에 숙주와 기생관계가 잘 유지되는, 한미 우호정신(?)이 철저했던 것이 월남전이었던 것이다.

 

우방군 막사를 털다니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해프닝이 아닌가? 이처럼 월남에서는 다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논산 훈련소에서 바로 월남으로 가서 36개월 군생활을 마치고 현지 제대를 해서 3년을 더 머무르다 돌아온 전우는 내 글을 보고 전혀 이해를 할 수 없다며 소설을 썼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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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월남전의 성격 문제다.

 

아래는 참전기 마지막회에 달렸던 의미 있는 댓글을 요약한 것이다.


 


이념적으로 갈린 형제들끼리 서로 무자비 했던 전쟁

결국 그들이 흘린 피로써 얻어진 결과물은 가난과 굶주림이었습니다.

가난과 굶주림을 위해 그렇게 피를 흘렸다면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그들이 전쟁의 결과물로 가난을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는 그렇게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들이 피를 흘린 땅 위에는 자본주의 적들이 다시 들어와 공장을 지었고요.

공산치하가 싫다고 떠났던 보트피플은 그동안 자본주의 나라에서 배웠던 기술을 가지고 돌아와

그 공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새옹지마인 것이지요.

베트남 전쟁을 어느 한쪽에 치우친 시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전쟁의 피해를 겪은 베트남 또한 옆의 캄보디아를 침공했었구요.

미군과 같이 싸웠던 베트남과 중국은 나중에 자기들끼리 또한 피를 뿌리는 전쟁을 했습니다.

지금도 아옹다옹 거리고 있고요.

원수로 싸웠던 미국과 베트남은 적의 적은 친구다 라는 이유로 가까워지고 있고요




 

월남전은 이념 전쟁이 아니고 베트남의 민족 통일 전쟁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념 전쟁이라고 딱지를 붙인 것은 전쟁 당시의 미국 측이다. 한국은 희생을 치루면서 그 사이에서 개평 좀 뜯은 셈이고.

 

여기에 대해서 다시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통일전쟁이었다면 그렇게 서로에게 무자비했을 이유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통일전쟁이었다면 그렇게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바다 위를 떠돌았을까 십구요.

통일 후에 닥친 베트콩에 대한 숙청 등에서도 그렇고요

시장경제 체제로 돌아선 베트남에서 진행되고 있는 요즘의 현실은 

빈부 차이가 자본주의가 오래 진행된 곳보다도 더 심한 듯 싶더군요



 

전쟁의 성격만 정의하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어차피 역사는 절대로 인간이 계획하고 의도한 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인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 때문에. 멀리 갈 것도 없이 순수한 종교적 열정으로 출발한 탈레반이 막장으로 치닫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지 않는가?

 


루시퍼.jpg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1971년도에 일어난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감옥의 상황을 알기 위해 시행한 이 실험은

실험자들이 간수와 수감자 역할에 몰입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몇 해 전에 라이 따이한에 관한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었다. 감독은 처음에 영화를 시작하면서 시드니에 있는 월남 커뮤니티가 큰 관심을 가지고 도와 줄 것을 기대했었지만 기대와는 정반대의 반응이 나타났다. 영화중에 월남인 배역이 5 명이나 되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연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영화를 만드는데 필요한 협력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한 마디로 흔히 한국 군대에서 통용되는 '모른다', '없다' 태도였다. 나의 이익과 관계없으면 철저하게 무관심한 자세는 역시 전쟁을 통과한 민족은 성질마저 버린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 같았다.


평생 아프리카 대륙을 상대로 장사를 했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아프리카인들이 식민지 경험을 했느냐 또는 침략을 당한 경험이 있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한다. 범죄에 물들면 인간을 버리듯이 식민지 경험을 하거나 전쟁을 한 번 치르게 되면 민족 전체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세계의 온갖 민족이 사는 호주에서 제일 인상이 더러운 민족은 레바논계일 것이다. 이 사람들 인상이 왜 그런지는 설명이 필요없다. 레바논 계는 60 년대 내전 때 대거 호주로 피난 온 사람들인데 그 때 찌그러진 인상이 아직도 안 펴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애를 먹었던 일 중의 하나는 영화 속 베트콩 지원병 배역을 아무도 하려 하지 않고 심지어 소개도 해 주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20 대 배우를 구해야 하는데 자기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졌던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기피하는 것이었다. 끝내 배우를 구하지 못해서 할 수 없이 시나리오를 수정해서 아예 배역을 없애 버렸다. 물론 월남 커뮤니티도 둘로 나누어져 있어서 현 공산월남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도 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는 당시에 적이었던 그들에게 협력을 구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집에 페인트를 칠해 보았더니 아무리 조심해도 여기 묻고 저기 묻고, 묻으면 즉시 지워야 하고 어떤 것은 끝내 지워지지를 않아서 결국 옷을 버려야 하는 바람에 정말 골치 아팠다. 역사에도 색깔이 칠해지면 바로 잡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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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작을 통해서  또 한가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월남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따져 본다면 실제로 시드니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월남인들은 보트 피플로 온 사람들이어서 현재의 월남 정권을 반대하는 입장이고 한국은 자기들을 위해 싸워준 나라임으로 고맙게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월남전 당시의 애매모호한 위치였던 한국군의 위치에 대하여 월남인들은 이미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한국군이 돈 때문에 자기 나라에 왔었고, 자기 나라 전쟁 덕을 톡톡히 본 나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평가에 얼렁뚱땅 넘어가는 방법은 없다. 결국 한국은 월남의 친공계나 반공계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지난번에 중국이 베트남의 어느 섬을 찝쩍거렸을 때 시드니의 월남인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현 월남계와 구 월남계가 시간과 날짜를 달리해서 각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아마도 영문을 모르는 이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현 월남계가 일본의 조총련처럼 북한의 지원을 받거나 지령을 받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도와줘야 하는 형편인데 말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인 호주에서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살면서도 각기 역사적으로 맺어진 인연이 다른 탓이다. 물론 역사 속에서도 자기의 운명을 꾸려가는 것은 개인의 역할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어떤 인연들은 가스통을 들고 남에 밥그릇을 지켜 주는 일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월남전은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처럼 엄청난 피해를 남긴 전쟁이 아니라 한 마디로 남는 전쟁이었다. 전쟁의 당사자이기는 하지만 미국에게는 미안할 것 없고 월남 민중들에게는 한 없이 미안한 일이지만 실제적으로 이익을 본 나라는 (비록 희생이 있었지만) 한국 밖에 없는 것이다.



  CongressBuilding_SEATO.jpg

1966년 마닐라에서 열린 SEATO(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 회담

 왼쪽부터 월남(대통령), 호주, 한국, 필리핀, 뉴질랜드, 월남(부총리), 태국, 미국의 정상들

이 7개국은 월남전에 참전한 국가다.

한국은 주도적 지원국가로 대접받아 박정희 대통령이 기조연설을 하였다.

 













sydney


편집 : 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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