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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05. 금요일

너클볼러







신대철. 시나위의 기타리스트, 그리고 한국 락의 대부 신중현의 장남. 신대철은 한국 음악계의 자신의 이름을 알린 1986년 데뷔, 아니 그 이전부터 늘 그렇게 불려왔다. 그런 그의 이름이 요즘엔 음악이 아닌 다른 기사들을 통해 들려오고 있다. 한국 락 역사의 중요한 이름이기도 한 ‘신대철’ 자신이 결성한 밴드 ‘시나위’를 통해 임재범, 김종서, 서태지, 김바다 등의 수많은 스타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 그런 그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터, 자신의 30년 음악인생과 지금의 터닝포인트를 풀어 놓은 인터뷰집 <뛰는 개가 행복하다>의 출간에 맞춰 논현동에 자리잡고 있는 신대철의 사무실을 찾았다. 인터뷰 내내 웃지 않을 거란 내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신대철은 쑥스러운 듯 웃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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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클볼러]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본론으로 바로 가보자. 요즘 연주가 아닌 대외적인 활동으로 매우 바빠 보이던데?


[신대철] 인터뷰를 많이 하고 있다. 인터뷰만 따지면 지금 하는 게 여섯 번째.


[너클볼러] 여섯 번이라… (웃음) 얼마 전에 모 일간지 보니까 전화 인터뷰도 막 하더라.


[신대철] 오늘 저녁에 또 하나 있다. (웃음)


[너클볼러] 하여간 뮤지션으로서의 본업은 뒷전으로 보인다.


[신대철] (웃음) 기타 쳐 본지가 언제인지 잘 모를 정도다.




기타 쳐 본지가 언제인지 떠오르지 않는 그의 말을 듣고 기타리스트 신대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그는 줄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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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클볼러] 그러면 그 얘기는 이후에 본격적으로 해보도록 하고. 사실 얼마 전에 책이 나왔다. '뛰는 개가 행복하다' 라고 하는 인터뷰집인데… 이 책을 인간 신대철 혹은 뮤지션 신대철을 이해하기 위한 매뉴얼로 볼 수 있겠나?


[신대철] 글쎄… ‘매뉴얼’이라... 그 책은 사실 엉겁결에 이상하게 엮어 가지고 만들게 된 거다.


[너클볼러] 엉겁결에 책을 만들어내다니…


[신대철] 생각해보니 한 30여년 가까이 음악을 하고 있는건데…


[너클볼러] 거의 30년이다. 86년도에 데뷔했으니까.


[신대철] 그렇다. 한국 음악의 어떤 최근대사를 조금 뭐 경험해본 사람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신대철 매뉴얼이라기 보다는 이 책을 통해 한국 대중음악사를 일부지만은 좀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너클볼러] 이제 좀 있으면 데뷔 30년을 맞게 되는데 그 정말 긴 시간 동안 음악 생활을 해오면서 하고 싶었던 얘기들, 혹은 뭔가 생각만으로도 돌던 얘기들이 이 책을 통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고 볼 수 있는 건가?


[신대철] 그 책에 모든 게 다 표현되어 있지 않겠지.

 

[너클볼러] 가오 상하게 뺀 부분도 좀 있어 보이긴 하더라 (웃음)


[신대철] (웃음) 사실은 분량이 상당히 많았는데 많이 걷어냈다. 다 썼다가 고소 고발이 있을 것 같기도 했고… 후배들이 만약에 이 책을 본다면은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그런 정도였으면 좋겠다. 


[너클볼러] 그렇다면 신대철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신대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겼다고 보면 되겠나?


[신대철] 사실 어느 한 가지만을 염두에 두고 한 건 아니다. 이렇게 인터뷰를 하다 보면 약간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실제 책 내용도 그렇고. 뚜렷하게 뭐 어떤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다. 하다 보니 나의 이야기도 있고, 음악계의 이야기도 있고. 그러다 보니 다방면으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섞이게 된 것 같다.


[너클볼러] 30여년을 뮤지션으로 살아왔는데, 음악 활동에 전념해 먹고 살기가 무지하게 힘든 구조라 생각된다.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의 구조는 일부만을, 미디어도 산업도 흔히 얘기하는 아이돌만을 위한 구조로 편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고... 30년 전과 지금 뭔가 달라진 게 있나? 신대철이 딱 데뷔했던 그 때와 지금, 다른가? 같은가?


[신대철] 그 당시엔 구조 자체가 단순했다. 갑(회사)하고 을(뮤지션)만 있는 아주 간단한 구조였는데 지금은 굉장히 복잡하다. 갑 위에 갑이 존재하고 우린 (갑을병)’정’쯤 되고 각종 수수료니 뭐니 뒤에서 떼어가는 게 엄청나게 많다. 뮤지션들이 지금의 구조를 잘 모른다. 내가 만든 음악이 얼마에 팔리고 나한테 얼마의 수익이 오고 이거 자체를 잘 모르는 거지. 너무 복잡하니까 들여다보면 귀찮아지고… 과거에는 음반을 발매, 발표하고 그 음반을 홍보하기 위해서 공연도 하고 그랬다. 지금은 거꾸로 됐다. 그러니까 행사를 하기 위해서 음반을 만드는 거다. 음반을 내서 수익이 안 난다라는 게 이미 증명이 됐고, 다 알기 때문에 그런 거다. 일종의 명함인 거다. 뮤지션들이 자기 음반 나오면 명함이라고 들이미는…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 ‘앨범’의 의미가 사라진 시대. 슬퍼지기 시작했다.




[너클볼러] 책에 보면 데뷔 당시의 제작사와 뮤지션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판매되는지’ ‘도대체 수익이 얼마가 났는지’ 알다가도 모를 구조라고 표현되어 있다. 현재의 음악시장과 크게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좀 있다고 보인다. 그러니까 이 갑 행세를 했던 사람들이 갑을 갑 행세를 하고 있는 그 구조는 여전한데, 다만 같은 갑질인데 좀 세련된 갑질을 한다고 해야 할까?


[신대철] 그렇다.


[너클볼러] 책을 보면서 예전의 꽃미남 시절 사진도 볼 수 있다. 물론 한때지만 (웃음)


[신대철] 아…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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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꽃미남 신대철(좌측)



[너클볼러] 어릴 적 아버님이 갖고 있던 앨범 중에 특히 재즈 앨범들을 상당히 많이 듣고 열광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수많은 앨범 중 지금의 신대철을 있게 한 단 한 장의 앨범을 뽑아본다면?


[신대철] 있다. 초등학교 한 4, 5학년 때였는데 그때 LP를 쭉 듣다가 무심코 그냥 한 장 뽑아봤는데 되게 독특하더라. 음악을 들어봤더니 ‘정말 세상에 이런 앨범이…’ 이런 느낌이 오는 거지. 그게 지미 헨드릭스의 라이브 앨범이었다. 지미 헨드릭스가 죽고 난 다음에 편집 앨범, 라이브 앨범 이런 것들이 제법 많이 나왔을 거다. 그 중의 한 장이다. 영국에서 진행된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인데, 그 앨범을 듣고 엄청나게 충격을 먹은 거다. ‘세상에 기타가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지’ 싶었다. 그 앨범을 듣고 이제 내가 기타를 배워야 되겠다. 나도 이런 기타리스트가 되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다. 아… 그게 몇 년… 어우 벌써 그러면 그렇게 치면 40년 전이다.


[너클볼러] 데뷔 할 때 얘기 좀 해보자. 나름 화끈한 데뷔였는데, 자신의 계획대로 척척 진행된 머 그런 데뷔였나?


[신대철] 그 당시 이태원에 '락월드'라는 공연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임재범씨하고 처음에 같이 몇 차례 공연을 했었다. 관객은 많아야 열 다섯 명 정도되는 소박한 형태였는데, 갑자기 대기실에 어떤 분이 딱 들어오는데, ‘킹박’이라고 지금으로 치면 이수만 같은… 그 분이 들어오더니 대뜸 하는 말이 "야, 너희들 곡 있어?"였다. 아니 그런 사람이 와서 곡 있냐고 물어보는데... 이거 뻔한 얘기잖아. 음반 만들어 보자는 거지. 몇 곡 있다고 대답했더니 바로 그럼 녹음을 하자고 제안을 하는 거다. 그렇게 데뷔 앨범이 나오게 됐다. 앨범이 나오기 전에는 "우리 앨범을 누가 만들어줘?" "우리 같은 음악을 누가 저걸 해주겠어?" “그냥 하고 싶은 음악이나 하자” 그런 생각이었는데 운 좋게 그렇게 시작하게 됐다.


[너클볼러] 일종의 확신 같은 건 없었나? 우리 음악을 안 알아보고 배겨 머 이런… (웃음)


[신대철] (웃음) 그런 확신 없었다. 진짜. 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정도였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이렇게 시작되니까 거의 목숨 걸고 했다. 거의 밤새다시피 하면서 곡 만들고 연습하고 했던 기억이 난다.


[너클볼러] 작곡은 거의 다 한 걸로 알고 있다. 혼자 하거나, 공동으로 하거나.


[신대철] 공동작곡을 많이 했다. 시간이 많이 없었다. 잼을 하면서 같이 곡을 만들기도 했다. 2주 정도 작업을 한 것 같다. 2주 정도 작업을 하고 바로 녹음에 들어갔고…


[너클볼러] TV에 한때나마 자주 나왔던 적이 있지 않나. '탑밴드'라는 유명(?)한 프로. 그 때 비춰지는 신대철의 모습을 보면 말도 별로 없을 것 같고, 누군가와 함께하는 게 안 어울려 보이는 듯한 이미지가 있어 보이긴 하는데. 공동작곡이라… 좀 어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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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느낌.



[신대철] 밴드의 경우 구성원들과 함께 공동작업을 하는 게 사실 좋을 때가 많다. 근데 그게 되는 사람이 있고, 좀 힘든 사람이 있고, 그 차이다. 합이 잘 맞는 사람하고는 조금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다.


[너클볼러] 86년 데뷔 앨범을 통해 '크게 라디오를 켜고'와 같은 불후의 히트곡들이 나오게 된다. 책에도 보면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더라" 뭐 이런 표현들이 있는데… 갑자기 인기가 몰아쳐오면 반응을 받는 당사자가 변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데. 당시 신인 신대철은 어떤 상태였나?


[신대철] 그때 앨범이 나오고 나서 갑자기 킹박 선생님이 난리가 난 거다. "야, 얼른 회사로 들어와" 해서 갔더니… 지금 난리가 났다는 거다. 초판 벌써 다 나가고, 새로 찍고 있다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 후에 공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몰려오고, 막 찾고 난리가 났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당황스러웠다. 전에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 들국화의 형님들이 한창 인기를 얻고 있을 때, 들국화 공연의 오프닝 공연을 했었다. 앨범 나오기 전이었다. 당시 분위기는 '쟤네들 언제 내려가나' 머 이런 거였는데 


[너클볼러] 이거 먼 듣보잡이야! 이런… (웃음)


[신대철] 그렇지. (웃음) '어우~씨! 관객들은 우리 음악을 모르는가 봐' 이러고 말았는데, 그러고 몇 달 후에 우리 앨범이 딱 나온 거다. 그리고 반응이 완전히 달라진 거지.


[너클볼러] 말 그대로 대박?


[신대철] 그렇다. 순식간에 바뀐 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곧 깨닫게 됐다. 항상 좋은 일만 있진 않다는 걸.


[너클볼러] 신기하다. 그걸 그렇게 빨리 깨닫기가 쉽지 않은데?


[신대철] 매우 자연스럽게 깨달은 것 같다.




인기를 얻고 있는 순간, 그 인기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다는 거. 그거 쉽지 않다.




[너클볼러] 락밴드나 뮤지션들을 먹여 살리는 건 사실 여성팬들이라고 얘길 많이 한다. 그땐 어땠나? 내가 보기엔 데뷔 당시의 비주얼이나 옷 입은 모습들을 보면 여성팬들을 공략하기 위한 치밀한 전술로 보이기도 하는데… 당시 반응은 좀 어땠나?


[신대철] (살짝 쑥스러워하며) 여성팬들이 한 80%. 뭐…  좋았던 것 같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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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클볼러] 가장 영광스러운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


[신대철] 지금 아이돌이 등장하면 오빠 부대들 있잖나. 딱 그런 모습이었다. 그때 내가 불과 만으로 열 아홉 살인데, 그 나이에 나와서 그렇게 하니까 당시 중고딩들이 그렇게 열광할 수 밖에…  그 즈음 부활도 나오고, 백두산도 나오기 시작했다.


[너클볼러] 여성팬들이 많았다는 나름의 확신이 느껴진다.


[신대철] 왜 자꾸 여자 얘기를…  (웃음) 아니 뭐… 한 때 

 

[너클볼러] 가족이 신경 쓰여서 그런 건가?


[신대철] (웃음) 그런 건 아니고… 뮤지션한테 여성팬이 많다는 건 참 좋은 거다. 정말 좋은 거다. 구매력도 있고, 적극적인 분들이니까 참 좋은 건데…  그게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올라갈 일이 있으면 내려갈 일도 있으니까. 요즘 아이돌 스타들을 보면서 느끼는 게 그런 거다. 사실 그때 나이에는 그게 영원할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이냐가 사실은 중요한데, 정상에 있을 땐 그걸 잘 모른다. 언젠가 내려와야 되는데, 내려와도 여전히 20대인 거다. 그때 그 느낄 상실감 같은 것들을 과연 추스를 수 있는 정도의 멘탈이 있을까 싶은 거지. 사실 그걸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친구들도 있다. 안타깝기도 하고, 세상 참 냉혹하다 싶기도 하다.


[너클볼러] 자신의 경우 아무리 많은 인기와 기대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 ‘신중현’의 이름 석자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 같다. 졸라 잘해봐야 그저 ‘본전’이다 머 그런 생각. ‘신중현’이란 이름 석자가 신대철에게는 어떤 의미로 작용했다 보나?


[신대철] 사실은 참 부담스럽다. 거대한 산 하나가 있는데 넘사벽인 거다. 나라는 사람, 그러니까 어떤 독립적인 하나의 인격체로서 표현이 되거나, 사람들한테 어필하는 게 아니라 항상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니깐.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걸 매일 듣다 보면은 사실 싫어진다. 그래서 한때는 그게 싫어 미디어랑 멀어지기도 했다. 근데 내 동생을 보니까 나보다 2~3배는 힘들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든 거다. 나는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지만, 동생은 신중현의 아들이자 신대철의 동생이 되는 거다. (웃음) 그래서 내가 힘들다면 안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나이를 좀 먹으니까 이젠 그게 뭐 그리 나쁘지만도 않다. (웃음) 사실 음악가로서 아버지의 업적을 내가 뛰어 넘는다는 건 좀 힘들다. 그래서 일단 그건 포기했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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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



[너클볼러] 그럼 아버지의 이름 석자가 주는 부담감을 떨칠 수 있었던 계기는 95~96년에 아버지와 함께 진행했던 ‘신중현 트리뷰트 공연’으로 볼 수 있나?


[신대철] 2005년도에 ‘대한민국 음악 축제’라고 속초에서 열렸던 게 있다. 그때도 신중현 트리뷰트 공연이 있었는데, 주최측에서 20여 곡들을 “당신이 아들이니까 제일 잘 알 거 아니냐. 당신이 한 번 전체 한 번 편곡 한 번 해봐라” 그래서 내가 편곡을 했다. 그 공연에 당시의 최고 스타들이 많이 나왔다. 김건모도 있었고, 김종서도 있었고 또 누가 있었나... 하여간 당대 최고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나왔다. 그들하고 맞춰서 편곡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20여 곡들이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만들어졌던 곡들인데, 그 시대엔 절대 나올 수 없는 곡이다, 정말 위대한 뮤지션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인간 신중현, 뮤지션 신중현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너클볼러] 넘사벽을 넘어서려는 생각을 하지 말자는


[신대철] 동시에 그런 생각도 좀 했다. 나도 5공(전두환) 때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나도 좀 평가를 해줘야지. 아니 5공 시절에 그런 걸 들고 나와서 나도 뮤지션으로서 뭔가를 했다, 해본 사람이다. 그런 평가가 좀 아쉬운...


[너클볼러] '나도 먼가를 했단 말이다.' 머 이런?


[신대철]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이 든다. 왜냐면은 아버지가 저렇게 위대한데 음악을 하는 아들이 정말 별볼일 없었다면은 참… 그랬다면 죄송스러웠을 거다.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아서 좀 위안이 되더라.


[너클볼러] 아버지 신중현은 아들 신대철의 행보나 음악에 대해서 잘 표현을 안 하실 것 같은 느낌이다.


[신대철] 그런 거는 안 하신다.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은 항상 애티튜드에 대한 거였다. 음악인의 자세 같은 거, 부담 없이 그런 말씀들을 하시곤 한다.


[너클볼러] 아버님 입장에선 음악적인 조언이나 충고 같은 것이 오히려 음악을 하고 있는 아들에게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신대철] 그건 모르겠다. (웃음) 근데 뭐 그런 생각을 하셨을 수도 있겠다.


[너클볼러] 아버님이 활동이 정지되셨던 74년 즈음 아버님께 직접 기타를 배웠다고 알고 있다. 부부간에도 운전을 가르쳐 주지 마라. 아무리 부부라도 빡친다. 뭐 그런 얘기들을 종종 하곤 하는데, 아버님께 기타를 배운다. 그것도 신중현에게… 어땠나?


[신대철] 글쎄. 기타를 처음 배운 게 한 두 달 정도였다. 내가 레슨을 받아 본 건 딱 두 달인 거다.


[너클볼러] 두 달?


[신대철] 딱 두 달이었다. 그 두 달 동안 레슨 받았던 것들을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굉장한 거였다. 보통은 저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러지만 레슨을 하면 일주일에 한 번이다. 일주일에 한 번인데, 보통 대학교 한 학기가 15주, 뭐 16주 그렇잖나. 두 달치 60회면… (웃음) 몇 년 치인가 그게. (웃음)


[너클볼러] 그것도 무상으로… (웃음)


[신대철] (웃음) 일년에 30회라고 치면 한 2년치인 거다. 엄청난 레슨을 받은 거다. 그게 지금의 나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됐고… 가르치실 때 보면은 좀 전에 가르쳐 주셨던 걸 또 하게 한다. 계속 반복적으로… '아, 그거 할 줄 아는데 또 얘기하시네' 뭐 이런 거 있잖나. 집요하게 가르치시는 그런 성향이 좀 있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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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함께 무대에 오른 신대철과 신중현.



[너클볼러] 그럼 그때 레슨을 받았던 두 달은 아주 생생하게 남아 있겠다.


[신대철] 당연하다. 처음에 배웠던 그 기타 교본 자체도 굉장히 어려운 거였고


[너클볼러] 초급자에 전혀 맞지 않는?


[신대철] 조금 그랬던 것 같다. 지금 기준으로 치면 좀 어려운 교본이었다. 그걸로 처음 배우고 한 두 달 하니까 혼자서도 하겠더라. 그때부터 소위 말하는 카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연주를 흉내 내고 연주를 해보는 것들을 할 수 있게 된 거다.


[너클볼러] 그렇게 기타를 시작해 본격적인 활동한 시간이 30년이다. 그 기간 동안 정규앨범 10장이면 다작이라고 볼 수 없는 것 같은데…


[신대철] 게으른 거다. (웃음) 게으른 거. 오래하다 보니 조금씩 겁이 난다. 내가 이렇게 만들어도 되나? 혹은 이게 좋은 걸까? 재는 게 많아지니까. 어렸을 때는 무조건 돌직구였는데, 나이를 먹으니 힘도 슬슬 빠지고, 직구보다는 커브나 포크볼을 던지게 되고, 인터벌도 길고, 사인도 신중하게 보게 되고 뭐 그런 입장이 되더라.


[너클볼러] 10장의 앨범 중 한 장을 뽑아 볼 수 있나?


[신대철] 그건 잘 모르겠다. 그저 그 시대마다 그냥 좋아했던 걸 한 것 같다. 물론 지금 들어보면 참 유치한 것도 많고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도 있지만, 나름 최선을 다한 앨범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변하고 바뀌기도 했고… 하나를 뽑기는 좀 어렵다.


[너클볼러] 오랜 활동 기간 동안 결정적인 위기가 있었나?


[신대철] 위기 많았다. 지금도 위기인데 뭐 (웃음)


[너클볼러] (웃음) 그냥 넘어가지 말고 하나 콕 찝어 보자.


[신대철] 시나위 4집 앨범을 내고 나서 큰 위기가 있었다. 그 때문에 좌절했던 경험도 있고… 2000년대 후반 와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내가 이걸 계속 할 수 있을까? 뭐 이런 생각이 위기였던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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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김종서와 함께 한 시나위 4집 시절.


[너클볼러] 시나위 4집 하면은 당시의 정현철. (웃음) 지금의 서태지가 함께 했던 것으로도 유명한데 4집 당시가 가장 큰 위기로 느껴지는 이유는 뭔가?


[신대철] 앨범을 내자마자 팀이 거의 와해가 됐었다. 김종서하고 서태지가 팀을 탈퇴하려고 했다. 사실 4집 같은 경우 당시 굉장히 의욕적으로 만들었었는데 뭔가 해보지도 못하고 바로 그렇게 된 거다. 그 때문에 좌절감도 느끼고 배신감도 느꼈다. 한동안 활동도 안했다. 그때가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


[너클볼러] 어떻게 보면 시나위의 경우 멤버들의 잦은 교체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도 제법 많았겠다.


[신대철] 당연하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왠지 운명인 것 같다. 내가 잘못한 거겠지. 어디 못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거는 그거 같다. 내가 자꾸 매니아 취향으로 달려가는 경향이 있고 그러다 보니 멤버들하고의 관계 같은 전체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게다가 내가 음악적인 고집이 세다 보니까 양보를 잘 안해. 그러다 보니 '아.. 쟤랑 음악 하면 힘들어 진짜. 진짜 어울리기 힘들어' 뭐 이런 게 있었을 것 같다. (웃음)


[너클볼러] 신대철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신해철 얘기를 좀 해볼까 한다.


[신대철]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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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신해철



[너클볼러] 1집을 내고 첫 방송 출연이 라디오였다. 책에 그 라디오들을 당시 어린 신해철이 극찬을 했다는 일화가 나오기도 하는데… 신해철과의 첫 만남, 어떻게 기억하나?


[신대철] 첫 만남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너클볼러] 수많은 팬 중의 한 명이었을 테니까?


[신대철] 해철이 말로는 우리 데뷔하기도 전부터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더라. 경쟁자였던 부활이랑 저희랑 같이 몇 번 공연 했었다. 예전에 그때 옆을 지나가다 봤다고도 하더라. 나중에 무한궤도로 대학가요제 나가서 뭐 대상 받고, 아마 넥스트 초기 시절 대기실에 찾아와 인사를 했던 모습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다가 신해철이 라디오 DJ로 활동하면서 그때부터 조금씩 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탑밴드 이후로 교류를 하기 시작했고, 작업실에 놀러 가게 되고, 가서 얘기 좀 하다가, 술도 먹고… 뭐 그랬다.


[너클볼러] 신대철에게 신해철은 어떤 느낌이었나?


[신대철] 처음엔 그저 단순한 동료 뮤지션일 뿐이었다. 근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이 친구가 프로듀서이기도 하고, 기타리스트이기도 하고, 작곡가이기도 하고, 작사가이기도 하고… 다방면에 어떤 재능이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2년 전에 내가 기타솔로앨범을 하나 만들고 싶었다. 만들려고 보니 내 연주와 음악을 객관적으로 들어보고 조언해줄 사람, 그러니까 프로듀서가 필요하다 싶어 고민하다 신해철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제안을 했더니 바로 OK를 하더라. 그래서 데모 보내주고 몇 달간 신해철 작업실에서 함께 밤 새고 그랬었더랬다.


[너클볼러] 그 앨범 지금 어디로 갔나?


[신대철] 마무리하지 못했다. 신해철의 작업방식은 정말 집요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길어졌다. 신해철에게도 내 앨범 외에 다른 일정이 있었고, 나 역시 시나위 앨범 작업도 병행하고 있던 터라 ‘홀딩’되고 말았다.


[너클볼러] 아니 홀딩 할 게 따로 있지.


[신대철] 그러다 신해철이 자기 이름의 해가 ‘바다해’고, 내 이름의 대가 ‘클대’니까 합쳐서 ‘대해’ 그렇게 ‘DH프로젝트’를 해보자고 하더라. 아시는 분들은 좀 아실텐데 두 번인가 공연도 했었다. 넥스트 곡에 내가 기타를 치고, 시나위 곡에 신해철을 노래를 부르는, 나름 독특한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한참 뒤에 ‘나는 가수다’ 출연했을 때, 해철이를 게스트로 부르려고 만나서 얘기하기도 했었다. 결국 무산되긴 했지만…


[너클볼러] 함께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할 만큼 각별한 인연으로 보여지는데?


[신대철] 그랬다. 뭔가를 같이 해볼라고 그랬는데 다 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미완으로 그냥 남아버렸다.

 

[너클볼러] 활동기간이 30년이 되니 동료들과의 인연도, 헤어짐도 제법 많았겠다. 헤어짐에서 오는 상실감도 많았을텐데, 신해철의 부고소식은 정말 큰 상실감이었겠다.


[신대철]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다. 사실 병원 입원하기 열흘 전에도 같이 만나서 얘기하고 그랬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확 가버리니까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제 법정까지 가게 갈 텐데… 사실 의료사고 같은 건 늘 남 얘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하는 정도였는데 이제 남 얘기로 들리지가 않는다. 생각해 봐라. 환자가 신해철이다. 그럼 병원 입장에서는 VIP아니었겠나. 그런데도 이런 사건이 발생한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거다. 신해철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이를 계기로 뭔가 바뀌었으면 싶다.


[너클볼러] 바뀐다면 어떻게?


[신대철] 일종의 ‘신해철법’이라도 만들자는 거다. 대형병원에는 전자 차트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수기로 작성한다. 여기서 오는 조작 등을 방지해 의료사고를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게 하자는 거다. 모든 병원이 전자 차트를 의무화해 보다 투명하고 깨끗하게 판단 할 수 있도록… 슬프고 힘들지만 그렇게 바뀌는 계기가 되었으면 싶다.


[너클볼러] 혹시 언젠가 신해철과 함께 작업했던 결과물을 만나게 될 수 있겠나?


[신대철] 글쎄. 마음의 정리가 좀 필요할 것 같다. 하더라도 거기에 과연 손이 갈까이런 생각이 단다. 뭐 언젠가 가능할 때가 있겠지. 좀 정리도 되고, 시간도 좀 지나고 그를 추모하고, 추억하는 계기로 해 볼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너클볼러] 언젠가는 그 결과물로 신해철을 추억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신대철] 기회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신해철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신대철은 상당히 조심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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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클볼러] 내게 사실 신대철과 관련한 추억이 하나 있다. 96년인가 ‘자유’라는 페스티벌이 있었는데, 그때 진행요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한적이 있었다. 그 때 대기하면서 캐치볼하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고, 당시 보컬이었던 김바다의 목소리를 듣고 상당히 강렬한 느낌을 받기도 했었다. 내가 보기엔 그때가 전환점이었던 것 같은데…


[신대철] 상처와 영광이 공존했던 시기였다. (웃음) 그 당시 발표한 ‘은퇴선언’이란 곡 때문에 서태지 팬들의 상당한 공격도 받았었고… (웃음) 당시 락 팬들에게는 그 앨범이 상당히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동시에 기획사와 문제도 있었다. 사실 그건 개인적으로는 얘길 안 했다. 번잡하더라고요. (웃음) 저한테는 굉장히 좋은 기억도 있고, 안 좋은 기억도 있던 시기였다.


[너클볼러] 시나위의 리더, 혹은 기타리스트 신대철의 모습은 언제쯤 또 볼 수 있겠나?


[신대철] 하긴 해야지. (웃음)


[너클볼러] 뭔가 구체적인 계획인 있는 건가? 아님 뭐 ‘해야지, 해야지’ 그러고 있는 건가?


[신대철] 계획해 놓은 건 많이 있다. 구상하는 것도 많이 있고. 음악활동 외에 일정이 빽빽하다 보니까 솔직히 음악에 손이 안 간다. 사실 빨리 하고 싶은데 말이다. 내가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겠다만 뮤지션은 체력만되면 7-80대가 되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좀 더 롱텀(long-term)으로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다. 지금 내게 가장 큰 이슈는 바로 ‘바음협’(바른음원협동조합)이다. 불합리하게 조성된 음원사업계를 바로 잡아보자. 이게 더 중요하다. 이런 생각인 거다.




인터뷰 하는 내내 음악이 생업이었던 그에게 이젠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 있어 보였다.




[너클볼러] 뮤지션이 음악을 통한 수익으로 음악활동을 꾸준히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나?


[신대철] 가능하다고 본다. 사실 그 동안 꾸준히 우리가 요구하고 있었던 게 우리 나라 디지털 음원 유통에 있어서는 사전 승인제가 있다. 쉽게 얘기하면 가격을 사전에 승인을 받아야 된다는 거다. 지금 한국 음악이 절대적으로 싼 이유는 지금의 어떤 가격 결정권 자체가 음악 권리자에게 없고 서비스 사업자가 결정권을 갖는 구조기 때문이다. 스트리밍 가격이 지금 권리자에게 3.6원을 적용해주는데 나는 한 3년 사이에 1원짜리 본적이 별로 없다. 1원짜리, 3원짜리 뭐 본적 있나?


[너클볼러] 없다.


[신대철] 10원 짜리도 요새 본적이 없을 거다. 3.6원을 또 나눠서 저작 인적권 2.1원, 저작권 0.6원 또 실연권 0.35원 뭐 이런 식의 정산 금액이 발생하는 거. 이렇게 된 구조는 이제 좀 잘못 됐으니까 바꿔보자라고 하는 거. 이제 그래서 저작권 법 105조 개정 하자는 게 하나 있고…


[너클볼러] 그리고?


[신대철] K-POP에 열광하는 해외팬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유튜브를 통해 접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기를 수익으로 이어지게 하는 채널이 없는 거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나라의 음원서비스와 마찬가지로 덤핑으로 하고 있고…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지금의 인기가 곧 위기로 바뀌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글로벌 마켓을 만들자는 게 하나 있다.


[너클볼러] 아이돌로 대변되는 K-POP시장의 유통 기간이 어느 정도 남았다고 보나? 위기가 곧 올 거라고 말 했는데…


[신대철] 글쎄. 위기가 반드시 올 거라고 본다. 길어야 10년 정도. 일본의 예를 보면 딱 그렇다 일본 음악이 세계적으로 주목 받았을 때가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딱 20년이었다. 한국의 K-POP이라는게 뜨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10년이라고 보면 아무리 길어야 앞으로 10년이라는 거다.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라 볼 수 있고, 제대로 된 토대와 플랫폼 만들어야 할 때라 볼 수 있다. 이런 기형적인 구조로는 10년은 넘기지 못하지 않을까 싶은 거다.


[너클볼러] 얼마 전 아이튠즈를 보니 하드한 장르 음악을 선보이는 슬림 낫이라는 밴드가 앨범 챠트 1위를 한걸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우리 음악시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음원서비스 차트 100위 안에 대부분이 아이돌로 빼곡히 들어차는 획일화된 구조가 만들어 진 이유가 뭐라고 보나?


[신대철] 음원서비스를 자체를 그런식으로 만들어 놓은 거다. 전문장르음악들을 차트에 절대 올라갈 수 없도록


[너클볼러] 애초에 설계를 그렇게 했다?


[신대철] 예를 들면 멜론은 로엔이 보유한 플랫폼인데 소위 추천곡이란 게 있잖나. 추천곡이 3개가 있으면 2개는 로엔 거다. 하나는 CJ나 KT로 정해 진다. 두 개는 항상 자사 음원으로 고정인 거다. 그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넘사벽인 거다. 그런 구조에서 장르음악들은 들어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매장에서 앨범을 사서 소장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새로운 곡의 경우 음원서비스의 추천을 통해 접하게 되는데, 이런 구조에서는 만들어진 순위가 되풀이 될 뿐이다.


[너클볼러] 소장이라는 개념이 테이프에서 CD로 넘어갔고 CD마저 거의 판매가 없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다 보니 이제 곧 소유하는 개념의 LP로 넘어가게 된다는 의견들이 나오는 상태고, 이미 음원시장도 음원에서 스트리밍으로 넘어가면서 다운로드라는 파일 소유의 개념마저도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상황인데, 이런 상황을 타개하겠다고 하는 신대철이 가지고 있는 동력은 뭔가?


[신대철] 다른 개념의 서비스를 해볼 생각이다. 다른 패턴의 음악 소비 구조를 만들면 좀 결과가 달라질 거라 믿고 있다.


[너클볼러] 기타리스트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한 리프에도 뭔가 ‘훅’ 같은 사람들의 귀를 한번에 땡길만한 그런 멜로디라든지 테크닉이라든지 그런 게 필요한데, 현재 기획하고 있는 서비스에도 사람들을 확 잡아땡길만한 ‘훅’이 있나?


[신대철] 있다. 그게 없으면 미친놈인 거지. 내가 이게 지금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지금 그러고 있는 거다. 나중에 정식으로 오픈을 하면 알게 되실 거다.


[너클볼러] 뻥카 아닌가? 뻥카면 삐질 수도 있다. (웃음)


[신대철] (웃음) 이런 거다. 새로움이라는 것이 사실은 전혀 없던 것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은 아니고 항상 있던 건데 그 중에서 뭔가 조금만 조합을 다르게 하면 새로운 것이 되지 않나. 그런 것을 느끼시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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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클볼러] ‘음원서비스’로 대변되는 구조에 대한 고민과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보면 뮤지션으로서의 신대철이 잊혀질까 두렵지 않나? 기타리스트 신대철이 아니라 바음협(바름음원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신대철] 아. 그렇다. 나 신사장인데 자꾸 이사장이라고 하고… (웃음) 한번 뮤지션은 영원한 뮤지션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음악을 하는 시간을 뒤로 좀 미루더라도 일단 지금 불을 지른 게 하나 있으니 이걸 다 태워버릴 생각이다.


[너클볼러] 기타 연주력으로야 인정을 받았지만, 사업가로서도 인정 받을 만한 능력이 있다고 보나? 연주와 사업은 엄연히 달라 보이는데…


[신대철]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권리를 찾는 일이기 때문에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 원래 자유롭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계속 살고 싶은데 어떨 때는 아침 8시 회의 때문에 6시에 일어나기도 한다. 아…




아침 8시 회의. 그건 정말 하기 싫어 보였다.




[너클볼러] 대표적인 갑질의 표현 중 하나가 바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라나’는 건데 어떻게 보면 신대철은 문제의 절을 떠난 중들이 모일 수 있는 절을 하나 짓고 있는 파계승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웃음)


[신대철] (웃음) 그렇게 표현해도 되겠다.


[너클볼러] ‘나는 가수다’에 아이라인 그리고 나와 화끈하게 기타를 연주하던 신대철의 모습도 그립긴 하다. 86년 음악만을 향해 달리던 신대철과 지금의 신대철 여전히 같은 신대철인가?


[신대철] 달라진 건 사실 숫자밖에 없다. 열정은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어렸을 때는 내가 책임져야할 것이 별로 없어서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런 시기였고 지금은 책임져야할 것들이 많은 거다. 이제 뒤도 좀 돌아보고 나뿐만 아니라 나를 보고 음악을 시작한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겠다. 그런 생각도 있고 나중에 세월이 조금 더 지나서 야 정말 신대철이라는 선배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없었으면 우리 어떻할 뻔 했냐 이런 얘기 듣고 싶다. 진짜.


[너클볼러] 너무 원대한 꿈 아닌가?


[신대철] (웃음)


[너클볼러] 진심으로 의미 있는 결과가 있길 바란다. 끝으로 짧게 인사를 전한다면…


[신대철] 음악을 더 잘하고 싶어서 이러고 있다고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음악 한다는 놈이 오죽하면 저러고 있을까 뭐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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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사는 짧고 간단했다. '기타리스트'로 30년을 달려온 그는 기타를 잠시 내려 놓았을 뿐 여전히 뮤지션으로 살고 있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가 인터뷰 내내 강조했던 것은 음악을 만드는 생산자들의 권리였고 그런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좋은 의미가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린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뮤지션 신대철, 바음협 이사장 신대철의 행보가 살짝 궁금해지는 이유는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시간여의 인터뷰를 마치고, 신대철 사무실 근처의, 신중현씨가 서울에 오면 꼭 들린다는 냉면집에서 냉면 흡입했다. 신중현, 그리고 신대철의 음악만큼이나 냉면 역시 일품이었다.







편집부 주



본 이너뷰는 

인터파크 북디비(링크) 작가 이너뷰어

본지 기자가 용병으로 뛰게 된 겸사겸사 

인터파크 북디비 측과 협의하에

본지 동시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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