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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이발

2014-12-0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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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05. 금요일

정체불명 아직은투아웃








편집부 주



이 글은 체불명에서 납치되었습니다.











아들 녀석(서우)의 머리를 직접 깎아주고 있습니다. 어느새 13년 째입니다. 20024월 생인 아이가 올해 우리 나이로 열세 살이자 6학년이니 사실상 늘 내 손으로 깎아준 셈입니다. 지금까지 미용실에 데려가 아이의 머리를 맡긴 건 다섯 번이 채 되지 않을 거라 기억합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별것도 아닌 일이 그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돌이 되기 전에 이발을 위해 찾았던 미용실의 주인이 보인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미용실에 들어서면서부터 울며 보채기 시작한 아이 때문이었습니다. 우는 아이도 그렇고 울고 있는 아이에게 보이던 짜증스런 미용사의 태도도 모두 참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울어대는 아이의 머리를 힘겹게 깎으면서 계속 신경질을 내는 미용사의 모습에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이 상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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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직 이발중인 아이를 와락 안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그때의 미용사분을 원망하는 건 아닙니다) 그 길로 대형 마트로 달려 나가 이발을 위한 도구 일습을 갖추어 집으로 왔습니다. 그날부터입니다. 즉흥적이긴 해도 그런 식으로 이발을 시작하고 나니 자연스레 그 뒤로는 머리가 좀 길었다 싶으면 깎아 주고 또 깎아 주고 한 게 어느덧 13년입니다.   

 

4주에 한 번 가량 머리를 깎아주는데 1년이면 열네다섯 번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래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서우도 이발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나마 아빠가 해주는 것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은 없어서 한 번 두 번 하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오래 되었습니다. 군대에서 등 너머로 익힌 서툰 이발 기술을 아이에게일 망정 이토록 지속적으로 써먹을 거란 생각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군대 이발이라는 게 솔직히 말해 따로 배울 필요도 없을 만큼 단순하고 평범한 기술이란 걸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이발의 스타일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빠가 군대에서 배운 이발 덕분에 아이의 머리는 13년 동안 스타일이 항상 똑같습니다. 약간 긴 스포츠형 머리 스타일입니다. 그마저도 아빠가 이발하는 중간에 실수를 했을 경우에는 그것의 정도에 따라 더 짧아지곤 하지요. 그럴때면 피해자인 아이는 막상 별 생각이 없는데 제발이 저린 서툰 이발사가 알아서 사죄의 치킨이나 피자를 주문하곤 합니다.

 

이런 식이다 보니 아이의 머리는 늘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빠의 실수가 치명적일 땐 논산훈련소에 갓 입소한 훈련병처럼 빡빡머리가 될 때도 있고, 제법 가위질이 먹혀드는 날에는 잘 깎은 밤처럼 단정한 육사 생도 4학년쯤의 머리가 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짧게 유지되는 아이의 머리 스타일은, 어설픈 이발사가 가진 기술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아빠, 엄마의 성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단정한 게 나도 아내도 좋다는 얘깁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주위 분들 가운데 가끔은 돈을 많이 아끼겠다는 얘기들을 합니다. 뜻밖에 알뜰하게 산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도 하구요. 애초에 돈을 아껴보자는 것도 아니었고 사실상 금전적인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요즘 아이들이 미장원에서 이발을 하면 내는 돈이 7,000~8,000원 정도 하는 것으로 압니다. 이발을 시작한 게 13년 전부터니 평균 5,000원을 생각하고 계산해보면 일 년에 칠만 원을 잡고 대략 90만 원가량 될 듯합니다. 지금까지 절약한 아이의 이발비가 그렇다는 얘깁니다.

 

거꾸로 그 기간 동안 내 손으로 구입한 대여섯 개의 전기 바리깡과 그 외 이발가위 등의 값을 매겨보면 이건 뭐, 돈 써가며 하는 취미활동이라 해도 무방할 지경입니다이렇게 막상 계산을 해보고나니 좀 허무한 것도 사실이네요. 헛웃음이 나옵니다. 정말 그렇군요. 차 한 대 값은 아꼈을 거라며 늘 아내에게 쳐오던 큰소리도 앞으로는 끝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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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이발하는 날이면 아이의 얼굴을 코앞에서 10~20분 동안 마주보며 정성껏(?) 머리를 만지고 쓰다듬으며 손질해주는 것. 그리고는 곧장 함께 비누칠을 해주며 목욕하고 물장난을 하는 그 기분 좋은 미끄러움의 쾌감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쩌면 이 서툰 이발사 흉내도 아이가 6학년인 올해가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남자 아이들이라는 것이, 워낙 제 머리에 새똥이 내려앉았는지 까치가 둥지를 틀었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는, 덜 떨어진(?) 녀석들이라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도대체가 요놈들은 조숙한 몇몇을 제외하면, 누가 더 신나게 놀고 맛난 걸 먹으면서 하루를 보내는지에 대한 관심 한 가지 말고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녀석들 같습니다. 거기에 더해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는 마치 똥오줌 못 가리는 강아지 새끼들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그랬던 녀석들이 중학생이 되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꼬마에서 소년이 되는 거겠지요. 수컷의 냄새를 조금씩 풍기기 시작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거울도 한 번씩 들여다보기 시작하고, 머리나 옷차림에도 은근히 신경을 쓰고, 전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바라보던 여자아이들을 이제는 쉽게 쳐다보지 못하는 그런 상황들이 시작되는 시기와 장소가 중학교라고 봅니다.

 

초등학생 때와는 달리 중학교에 가면 어설픈 이발사 아빠의 가위질이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이유로 올해를 끝으로 이발기와 가위들을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려 합니다. 아쉽고 서운하기는 하지만 예민한 나이에 친구들의 사소한 놀림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런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기는 해도 이발도구들을 쉽사리 처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한번쯤은 더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커서 성인이 되고 훗날 군대에 가게 된다면 입대 전날 내 손으로 직접 머리를 깎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습니다. 글쎄요. 그렇게 될까요? 스물이 넘었을 아이가 제 머리를 흔쾌히 아빠에게 맡기려고 할까요? 만일 그렇다면 머리를 깎는 그때 아빠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아이의 머리를 깎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도 나와 동생의 머리를 깎아주시던 때가 있었기 때문일까요? 오랜 기간은 아니었고 횟수도 많지는 않았지만 기억에는 또렷합니다. 열 살과 여덟 살과 두 살인 아들 삼형제를 포함한 다섯 명의 가족이 서울로 상경해 봉천동 꼭대기 달동네에 이불 보따리와 짐을 내려놓았던 1977년 가을. 그해 10월부터 다음해 늦여름까지 약 10개월 여의 기간 동안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말하는 배를 곯던 보릿고개만은 못해도 그때 역시 가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돌이켜보니 그렇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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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자식들의 머리를 깎아주던 그 시기는 한 집안의 가장이 된 후 당신 인생에서 가장 가난하고 우울한 생활을 하던 시기였을 겁니다. 벌써 40년이 가까워져가는 1977~1978년의 일입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길거리에서 팔던 이발빗이라 부르던 싸구려 이발도구가 있었습니다.

 

양옆으로 나뉜 두 개의 빗날 사이에 도루코 면도날 두 장을 끼워 넣은 형태의 조악한 분홍 색깔의 빗이었습니다. 그 빗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면 가운데 끼워진 면도날이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형태도 그렇지만 방식도 대단(?)했습니다. 네, 퍽이나 조악했지요. 물론 그 이발빗을 이용해 머리를 깎고서 얻을 수 있는 헤어스타일도 빗의 형태에 못지않게 조악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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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어 두세 달에나 한 번씩 찾곤 하던 봉천동 달동네 아래의 목욕탕. 그런 동네에서조차 보기에 쉽지 않았던 부끄러운 분홍색 빗으로 아버지가 내 머리를 서툴게 더듬거리며 깎아줄 때 나는 눈을 꼭 감곤 했습 니다. 수치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발빗이 신기한 듯 한 번씩 쳐다보고 가는 아저씨들의 눈길이 거북했습니다. 목욕탕 바닥에 수북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쳐다보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시하는 때밀이 아저씨의 눈빛 역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피하고 싶은 건 같은 반의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런저런 여러 이유로 내 고개는 머리를 깎는 내내 바닥을 향한 채였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군요. 그 빗으로 자식의 머리를 깎아주던 그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1970년대 후반, 앞 다투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봉천동이거나 신림동이거나 삼양동의 산비탈에 힘겹게 짊어지고 온 짐을 내려놓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 대부분은 각자가 살다 떠나온 곳에서도 누구 못지않게 가난했던 사람들이었을 테지요. 드물게는 우리 집처럼 조금 살 만하다가 가난해진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을까요? 

 

전국 각지에서 한꺼번에 몰려든 가난한 이들이 꾸역꾸역 인구밀도를 높여가며 힘겹게 짐을 내려놓은 그곳. 봉천동, 신림동, 삼양동. 그 후로 오랜 동안 인구에 회자될 이름을 가진 산비탈 지역들은 그렇게 해서 극빈층 동네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전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 된 동네들.

 

판자로 지었거나 흙을 발라서 지었거나 그도 아니면 이것저것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집들이 가득했던 봉천동 산꼭대기 주변 어딘가에서 우리 가족도 그렇게 달동네의 구성원으로 살아갔습니다한 평이 채 되지 않는, 창문 하나도 없는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모두 누워 자야 했던, 그 집에 살면서 아버지는 자식들의 머리를 깎아주었습니다.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객지였던 서울에서 아버지는 괜찮은 직업을 가질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했습니다. 한동안 공사 현장의 날일을 다녀야 했던 아버지는 힘든 막노동을 하고 돌아와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자식들의 숙제를 봐주곤 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의 아버지는 엄하고 날카로웠습니다. 학교에서 내준, 그리고 아버지가 따로 내준 숙제를 해놓지 않은 날에는 무서우면서도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은 채 가혹하게 느껴질 만큼 심한 매를 때리곤 했습니다. 그때 보았던 아버지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어느덧 나도 되었습니다.


공사판의 일이 없는 추운 겨울이 되자 지금의 숭실대학교 담벼락에 포장마차를 차리고 밤늦게까지 장사를 하시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포장마차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그해 겨울, 학교에서 돌아온 동생과 나는 매일 부엌 아궁이의 연탄을 새것으로 간 후 불이 붙어 있는 연탄을 아버지에게 가져다주어야 했습니다. 돌이 갓 지난 막내동생을 등에 업고 떡장사를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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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연탄집게에 끼운 불붙은 연탄을 교대로 바꿔 들며 20분가량 걸어가 힘겹게 포장마차로 가져다주던, 열 살과 여덟 살 두 아들에게 흐뭇한 웃음과 함께 50원의 용돈을 건네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했습니다. 연탄 배달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버지에게 받은 50원으로 찐만두 세 개를 사서 동생과 절반씩 나눠 먹으며, 즐겁게 걷던 길이었습니다.

 

상도동과 봉천동의 경계선이었던, 지금은 넓은 4차선 차도로 바뀌어버린 그 비탈길에 겨울 내내 쌓여 있던 눈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또 가난하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할 때도 있었습니다. 가난을, 그것의 실체를 아직은 잘 모를 때여서 그랬을까요? 만두는 참 맛있었습니다.

 

우스운 건, 분명 따스했던 만두에 대한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하나씩 먹고 남은 한 개의 만두를 흔쾌히 양보하거나 기분 좋게 나누었던 기억은 많지가 않다는 겁니다. 형제간에 벌어지던 만두 분배의 찌질하고도 첨예한 대치는 한 쪽의 불만이나 투정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는데 그 당사자는 늘 동생이었습니다. 옹졸한 형 때문이었지요. 어느 날인가 한 번은 다툼 끝에 남은 한 개는 차라리(?) 아버지를 드리자는 데 합의하고서 다시 돌아간 아버지의 포장마차.

 

누런 종이에 싸인 채 이미 식어버린 만두를 내미는 아들들을 보던 아버지. 자식들의 유치한 다툼 끝에 도착한 만두임을 알 리 없는 아버지로서는 당신에 대한 호의 말고는 달리 그것을 해석할 수 없었겠지요. 순식간에 눈시울이 벌게지며 고맙다는 말조차 목이 메어 못하시는 아버지를 보자 그제야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던 생각도 납니다. 그때는 내가 아버지를 좋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781월에 맞은 생일에 아버지가 선물한 어린이 종합월간지 <어깨동무> 1월호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활자화 된 읽을거리를 찾아다니고 좋아하는 내 습관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어깨동무>는 비쌌던 가격은 물론 꼭 필요한 학용품 류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도 나 같은 처지에서는 갖고 싶다는 엄두조차 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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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 문방구 주인이 진열대 안에서 꼴랑 겉표지 한 면만을 보여주며 약을 올리거나, 부잣집 아들인 반장 녀석이 순전히 자랑을 할 목적으로 학교에 가져오는 날 외에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어깨동무>. 책도 그렇지만 거기에 더해 매달 아이들의 영혼까지도 녹일 만한 아이템으로 무장한 채 얹어 주던 특별부록들. 주로 신기한 놀이용품 위주로 만들어져 함께 제공되었던 그 특별하디 특별한 부록들은 또 얼마나 갖고 싶었던지요.

 

매달 책이 새로 나올 때마다 전봇대나 신문에 나붙은 광고만 보아도, 갖고 싶은 마음에 심장이 콩닥이며 뛰지만 결국 침만 꼴딱거리며 삼켜야 하는, 내게는 행복의 상징과도 같아 보이는 그것이 <어깨동무>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막을 헤매고 있는 목마른 조난자 앞에 펼쳐진 어마어마하게 큰 코카콜라 광고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 마른침만 삼킬 뿐. 그것은 내 손에 쥘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머리 깎을 돈은 물론 몇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갈 돈조차도 지출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용기를 내야 하던 당시의 우리 집. 아이들의 생일을 맞아 뭔가 신경을 쓴다는 일 자체가 드물던 시절이긴 했지만, 따로 신경 써 차린 음식 한 가지 없는 저녁상을 조용히 물리고 우울하게 잠들어야 했던 생일의 다음날 아침. 자고 일어난 머리맡에 조용히 놓여 있던 크고 두툼한 <어깨동무>와 특별부록들을 발견했을 때의 엄청난 그 감동을 어떻게 하면 그대로 전할 수 있을까요?

 

미칠 듯이 좋았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열 살의 어린 아이에게도 고단했던 당시의 가난이 기쁨의 크기를 몇 배로 뻥튀기 시켜준 커다란 선물이었고, 살면서 지금껏 받아본 그 어떤 귀한 것들보다 감사하고 소중한, 그것은 가난한 아버지가 사준 선물이었습니다.

 

지금의 여성지만한 크기에 주로 만화와 재미있는 읽을거리들로 가득 차 있던 <어깨동무>. 800페이지에 육박하던 그 책에 실린, 만화를 포함해 표지의 제호부터 맨 뒷면의 광고까지, 단 하나의 글자도 빼놓지 않고 나는 적어도 백 번을 넘게 읽었습니다. 김원빈의 <주먹대장>과 신문수의 <로봇 찌빠> 그리고 길창덕의 <꺼벙이>는 당시 <어깨동무>의 대표선수들이었습니다.

 

<어깨동무>. 반짝이고 빳빳하던 표지가 색이 바래고 구겨져도, 책이 낡고 해져 너덜거려도, 접히고 말린 곳을 다시 펴가며 나는 그 책을 1년이 넘게 매일 같이 보았습니다. 하도 봐서 다음 페이지를 모두 외울 지경이 되자 나중에는 맨 뒷장부터 거꾸로 읽으며 내려오는 변태스런(?) 짓까지 해가면서도 그 책을 끼고 살았습니다. 그만큼 좋기도 했지만 책을 보고 있자면 그런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기꺼워하던 표정이 사실은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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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아버지에게 받은 첫 생일 선물이었습니다. 다음해에 맞은 나의 생일에 우리 가족은 그곳에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가난한 가장이 아니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난 아버지는 더 이상 아들들의 머리를 깎아주지 않았고 숙제 검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깨동무>는 내가 아버지에게 받은 단 한 번의 생일 선물이 되었습니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봉천동 달동네의 기억. 불과 1년도 되지 않았던 그곳에서의 시간이 나의 기억 속에는 유난히 선명합니다. 열 살에 서울로 올라온 나는 다섯 군데의 학교를 거친 후에야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생업을 따라,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을 제대로 외우기조차 힘들 만큼 정신없이, 떠돌아야 했던 나에게는 어쩌면 당시의 봉천동 그곳이 고향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의 삶에 있어 가장 가난했던 봉천동에서의 그 길지 않은 시간. 아마도 당신께는 힘들었을 시간들. 가능하다면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을 우울한 순간들이었을까요? 하지만 내 기억 속에 담긴, 나를 향해 웃는 얼굴의,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그때의 시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2006년에 개봉해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신기록을 세우며 흥행에 크게 성공한 <괴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흥행만큼 상복도 많아서 대종상을 비롯해 여러 가지 상을 휩쓸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남우조연상입니다. 수상자는 극중의 아버지로 열연했던 변희봉 선생이었습니다. 시상식의 현장은 아니었고 어떤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분의 수상소감을 듣는 순간 귀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변희봉 선생은 생전 처음으로 받아보는 소중하고 큰 상이라며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무척 보고 싶다, 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하시더군요얼핏 평범한 수상소감처럼 들릴 만했지만 나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저렇게 나이를 많이 드신 분이 수상소감으로 저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더군다나 어머님도 아니고 아버님이라니? 나로서는 뜻밖의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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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봉 선생이 1942년생이시니(내 아버지와 같으시네요) 당시 연세가 예순 다섯. 그만큼의 연세를 드신 분이 수상소감으로 아버님을 보고 싶다고 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변희봉 선생의 아버님이 어떤 분이셨을지 궁금해지기도 했었습니다. 모르긴 해도 좋은 아버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순 다섯의 나이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그분의 아들 또한 좋은 아들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햇수로 8년을 병상에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만으로 육십구 년을 살다 가신 아버지의 삶에 빛나던 한때의 시기가 얼마나 존재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버지는 당신의 삶 자체로 나에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 눈에 비친 모습들로만 기억될 뿐입니다. 하긴 누군들 그러하지 않을까요?

 

누구는 어떠한 사람이다, 라는 이야기는 결국 그 사람은 나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어떤 모습과 인상으로 인식되고 기억되는가,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인식과 기억에 대한 또다른 한 가지 이야기를 해보자면, 남자가 군대 시절을 돌이켜 기억하는 방식이 늘 일관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군대시절에 대한 기억은 상황에 따라 그리고 많은 경우 의도에 따라 적지 않은 내용의 차이를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되새겨 보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자랑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부정하고 싶거나 부끄러운 것일 수도 있을 테지요아버지에 대한 기억에도 그런 부분이 존재하지 않나 싶습니다.

 

군대에 대한 기억이 대개 그렇듯, 아버지에 대한 자식들의, 특히 아들들의 기억은 많은 경우 모순 투성이입니다. 좋은 아버지와 그렇지 않은 반대의 경우로 기억은 극단을 오갑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으로 애틋해 하다가도 서운했던 기억을 끄집어내 불러오고, 농담 섞어 아버지의 흉을 보다가도 때로는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 오는 그분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내뱉는 자식들의 입에서도 가만히 지켜보면 말끝에 사소하나마 그래도 무엇 하나는 있으셨던 분이다라는 식으로 마지막 자존심 한 가지는 챙겨드리고 싶은 게 자식이 아닐까 합니다. 미우나 미워만 할 수는 없는, 그렇게만 하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은 그런 대상이 아버지이고 또 그런 것들이 아버지에 대한 애증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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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리석고 부끄러운 말입니다. 그리고 아픈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거나 존경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자식으로 사는 동안 당신께 가졌던 감정은 어려서는 아마 두려움이거나 거부감이거나 집을 벗어나고 싶다거나 부자의 관계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그런 류의 마음들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와 성인이 된 어느 순간부터는 적개심이거나 안타까움이거나 실망감이거나 가엾음이거나 그런 쪽의 감정들이 아니었을지요. ,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한 번씩 내 속에서 툭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만들곤 하는 부자간의 유전적 동질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구나'라는 느낌이 가장 강하게 들 때입니다.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일 뿐입니다. 졸렬한 나의 자존심 때문에 타인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럴 듯하게 미화하는 경우가 많았고, 반대의 경우에는 악의적으로 아버지의 단점만을 떠올려가며 이야기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순간이면 말을 하는 나조차도 잠깐이나마 그 감정에 빠져들어 스스로 그렇게 믿곤 했지만 사실상 내가 기억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얘기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봉천동 시절 이후의 나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입니다.

 

아버지는 정이 많고 의리를 중시하는 분이었으나 그 정이라는 것은 기분과 상황에 따라 좌우되기 십상이었고 예측하기 힘들었으며, 대상에 대한 호불호가 지나치게 갈렸습니다. 당신이 평생을 통해 굳게 지키고자 했던 의리 역시 몇몇 사람에게만 지독히 편중되었던 탓으로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반감을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반감은 서운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늘 호기롭고 당당했으며 입담이 좋았고 재미있는 분이셨으나 그것은 집밖에서의 경우였고 집안 가족들 ,특히 자식들 앞에서의 당신은 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폭탄 같은 존재였습니다. 당신의 통 큰 호의와 깊이 있는 애정과 대범한 너그러움은 늘 타인들만을 향해 존재했습니다. 자라는 동안 나에게 그것은 늘 아픈 상처였습니다.

 

몇몇 조카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어리고 철없는 마음에 혹시 내가 아닌 저이들이 아버지의 자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과 눈에는 온기가 담겨 있곤 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어린 때부터 나 역시 집 밖의 다른 어른들을 좋아했습니다. 어쩌면 그때 아버지에게 느꼈던 서운함이 10대와 20대 시절 내내 나로 하여금 바깥세상에서 아버지 같은 분이나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분을 찾아다니게 만든 게 아닐까요?

 

돈을 벌고 그것을 불리는 능력보다는 돈을 쓰는 쪽의 능력이 출중했던 아버지. 뒷주머니에 꽂힌 아버지의 지갑은 늘 두툼한 상태로 집 밖을 나가 홀쭉해져서야 귀가하기 일쑤였으며, 그것은 어머니의 긴 한숨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그래도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두툼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당신의 지갑은 여러 상황과 많은 사람들을 향해 열리곤 했지만 그 대상이 가정이거나 가족인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호기롭게 꺼내던 당신의 지갑을 보며 함께 즐거워하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당신의 장례식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내 눈에도 익숙했던 여러 얼굴들이 그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것은 사실 훨씬 오래 전, 당신의 인생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할 것 같은 신호를 보이면서부터,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그 사람들이 서운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인심이란,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참으로 당신 편한 방식대로 사셨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고 아버지의 삶에는 그 누구도 간여하지 못했습니다. 쓰다 보니 갑자기 무섭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시각은, 이것은 어쩌면 나의 얘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환갑이 되기도 전에 이미 많은 것을 잃고 건강까지도 잃은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누운 채로만 생활해야 했습니다. 환갑을 지나 1년쯤 되었을까? 사소한 부상 때문에 다리에 걸린 봉와직염을 당신의 고집으로 방치하다가 의식을 잃을 지경이 되어서야 중환자실로 실려 간 것은 기나긴 투병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얼마 후 찾아온 뇌졸중은 당신 몸의 반쪽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움직일 수 있는 다른 한쪽의 팔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며 당신은 큰소리로 가족들에게 화를 내곤 했었습니다. 곧이어 찾아온 버거씨 병으로 당신은 그나마 성한 쪽의 다리를 무릎 위까지 절단해야 했고 그로부터 1년 뒤에는 남은 한 다리마저 허벅지 중간에서 절단해야 했습니다.

 

짓궂은 아이들에게 잡힌 곤충의 몸뚱이마냥 하나씩 해체되어가는 아버지의 신체에서 작동이 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머리와 몸통과 한쪽 팔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좁은 방 안에서 의료용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의 형광등만 바라보며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평생을 어머니 위에 군림하며 윽박지르고 또한 외면하고 무시하며 살던 아버지는 비로소 어머니 품 안의 남편이 되었습니다. 병원의 소각장으로 보내졌을, 아버지를 먼저 떠나가 버린 두 다리가 원래 붙어 있었던 자리를 한 번씩 들여다보는 일은 눈에도 마음에도 편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이승의 아버지도 안타까웠지만 어쩌면 저승에 가서도 잃어버린 다리를 못 찾아 누운 채로만 계셔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경스런 마음이 들곤 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남아 있는 것은 죽음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을 한 게 나 혼자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리를 잃어버려 죽음을 향해 걸어갈 수조차 없게 된 아버지가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된, 죽고 싶다는 차라리 죽여 달라는 아버지의 서글프고 힘 빠진, 애원은 들을 때마다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시골의 아버지를 찾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나. 고작해야 그런 식으로 마음보다는 머리를 쓰며 얄팍하게 죄책감을 덜고자 했던 나.


그런 나조차도 아버지의 비통한 애원을 들을 때면 무거운 추가 수없이 가슴 속에 들앉은 것 같았으니, 매일 아버지를 보살피고 식사를 챙기고 기저귀를 갈았던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길, 천장만을 보고 꼼짝없이 누운 채 매일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그 길에 묵묵히 곁을 지키며 마지막 문턱까지 동행한 이는 어머니 단 한 사람입니다.

 

이후로도 아버지는 가만히 누워 있는 것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여생을 사셨습니다. 욕창에 시달린 탓에 이제는 시커멓게 색이 변해버린 등짝과 엉덩이는 손에 조금만 힘을 주어 만져도 살갗이 벗겨질 정도였습니다. 아래에는 늘 요도관을 꽂아 놓은 채로 생활해야 했던 때문에 주위에 고름이 비치곤 했습니다.

 

누운 채 삼켜야만 하는 음식들은 제 역할을 감당하기 힘든 위와 장에 부담을 주어 심한 위궤양과 악성 변비를 가져왔습니다. 돌아가시기 1년여 전부터 몇 차례나 검붉은 피를 갑작스레 뿜어내게 만든 아버지의 위궤양은 결국 당신의 사인(死因)이 되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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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부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자주 나곤 합니다. 이상하다고 말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당시에는 그다지 크게 느끼지 못했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과, 죄송한 마음이 갈수록 커지는 것은 왜일까요? 공교롭게도 늘 곁을 지키던 어머니조차 잠깐 방을 비운 사이에 눈을 감으신 아버지의 죽음은 외로우셨을 겁니다.

 

당신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회한도 있지만 그보다 큰 것은 방 안에 혼자 누워 죽음을 맞으셨을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아닙니다. 사실은 진짜 속마음은, 외로이 눈을 감으신 아버지보다, 당신께서 너무나 힘겹게 당도해 마침내 떠나시는 마지막 그 길을 배웅하고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내게는 더 큽니다무엇보다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꼭 드리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염치없고 부끄럽지만 그 인사로 당신께 진 마음의 빚을 덜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기적이게도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편한 마음을 갖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께서 들으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또한 너무 늦었지만, 지금 이 자리를 빌어 못한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께 무릎 꿇고 꼭 드리고 싶었던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집 큰애는 중학교 3학년 딸아이입니다. 해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아빠인 내가 예전부터 이해인 수녀님을 좋아하기도 했고 어렸을 때 그분의 책들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정말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딸아이를 낳으면 꼭 그 이름을 주고 싶었고 실제 그렇게 했습니다. 해인은 그런 마음이 담긴 이름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행복해 보이는 그분처럼 세상을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3이니 지금 나이가 열여섯 살입니다. 돌이켜보면 아이에게는 벌써 5~6년 전쯤부터 사춘기가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쯤부터 딸아이와의 사이가 조금씩 벌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딸아이에게 아빠의 어떤 모습들이 거북했을지 혹은 싫었을지 전혀 모르지는 않습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딸아이는 아빠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요?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그것을 굳이 따로 설명하거나 알려주지 않아도 신기할 만큼 상대방에게 잘 전달된다고 믿는 편입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사랑이나 미움의 영역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품행은 방정하고, 공부도 못하는 편은 아니고, 성격은 내성적이지만 그래서 차분하고, 친구들과도 별 문제 없이 지내는 것 같은 내 딸 해인이. 한 발 떨어져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인 딸아이와 나는 안타깝게도 친한 편이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들보다 더 원했던 딸이었고 어렸을 때만 해도 늘 흐뭇하게 바라보며 항상 안아주던 아이였는데 둘 사이가 왜 이렇게 된 걸까요? 무섭고 싫다는 느낌만이 아버지에 대한 감정의 전부였던 나의 학창 시절. 그때부터 막연히 꿈꾸었던, 내가 아빠가 된 가정은, 그리고 나의 아이와 나의 관계는 적어도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작년으로 기억합니다. TV에서 했던 <내 딸 서영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우연히 처음 한두 회를 보고났더니 이후에 전개될 이야기가 궁금해 계속 챙겨서 보게 되더군요. 아버지와 딸의 애증관계라는 기본 설정이 왠지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어 나름 성실하게 드라마의 본방송을 사수하려 노력했습니다. 어쩌다 저 딸은 저토록 아버지를 미워하고 경멸하게 된 건지 또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가 참 궁금했습니다. 무엇보다 참 재미있더군요.

 

개인적으로 아버지 역을 맡았던 천호진 씨의 연기를 좋아합니다. 그분이 출연한 작품들을 많이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작을 하시는 분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고작 영화나 드라마 몇 편밖에 그분의 연기를 볼 기회는 없었는데, 천호진 씨의 연기는 강렬하지 않지만 깊이 스며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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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서영이>에서도 여러 차례 느꼈지만, 그분의 표정 연기는 뭐랄까요, 다양하고 복잡한 마음들을 얼굴 표정 하나만으로도 깊이 있게 잘 표현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인 딸 역할을 맡은 이보영 씨나 다른 여러 연기자들도 훌륭했지만, 천호진 씨의 역할과 연기가 드라마에서의 가장 큰 성공요인이었다는 생각을 나는 합니다.

 

드라마를 보다 천호진 씨가 나오는 장면에서 몇 번이고 눈물을 몰래 닦아내곤 했습니다.(안 그래도 눈물이 많은 편인데 갈수록 흔해지니 큰일입니다. 더 심해지면 안 되는데요자신을 경멸하는 딸을 바라볼 때의 아버지의 표정과, 자신과의 관계 때문에 갈등하는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과, 결국 자신을 용서하고 이해해주는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 그리고 자신을 위해 가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을 극의 흐름에 따라 차례로 연기하는 천호진 씨의 모습에 푹 빠져들어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내 딸 서영이>는 천호진 씨의 연기와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기억될 드라마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원래의 방송으로는 놓쳤던 부분인데 몇 달 전 우연히 스치듯 지나가는 재방송에서 보았던 장면입니다.


뒤늦게야 본 이 장면이 어쩌면 이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선지 지금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장면은 드라마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듯합니다. 아버지인 천호진 씨가 병상에 누운 채 이제는 화해한 딸 서영이한테 건네는 말이었는데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좋은 부모가 돼라. 좋은 부모가 된다는 건 인생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의미야.”

 

드라마의 대사 그것도 지나간 지 한참 된 재방송에서 나오는 대사였지만 그 짧은 말이 그대로 날아와 내 마음 속에 박힌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내 딸 해인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른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지만 딸아이에게는 유독 좋은 아빠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많이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그 장면과 대사가 마음에 와 닿은 모양입니다. 좋은 부모... 글쎄요.


4년쯤 전에 벌어졌던 어떤 사건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강을 만든 결정적 계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건의 경위를 말하기는 힘들지만 나는 그때 아이에게 손찌검을 했습니다. 지금껏 후회하고 있는 일입니다당시에 딸아이의 잘못도 없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상황 인식도 한몫을 했고, 모든 일의 발단 자체가 나에게 책임이 있는 일이었습니다.(물론 결과까지도 모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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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아빠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을 겁니다. 모든 것은 나의 잘못입니다. 그렇게 아빠답게 넘어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솔직히 당시에 나도 아이에게 상처를 입은 모양입니다. 그날 입은 내상이 쉬 나아지지를 않습니다.

 

고백컨대 한동안 딸아이를 보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가장 큰 문제는, 머리로는 나의 잘못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딸아이에게 받은 내 맘속의 상처를 가슴 한구석에 꼭꼭 담아놓은 채, 그것을 풀어 이해하거나 잊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아빠답지 못하게 말입니다.

 

좀처럼 따뜻한 눈으로 딸아이를 보기가 힘들더군요. 한동안 그랬습니다. 솔직히 말을 하자면 아직도 그런 상태인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장점이 많이 있는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쩌자고 자꾸 단점만 눈에 들어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못마땅한 점이 한둘이 아니고 좋지 않은 말투로 잔소리만 자꾸 하게 됩니다.

 

냉담한 시선을 던지거나 아니면 그조차도 없이 눈길을 외면하는 아빠의 감정을 아이는 분명 느꼈겠지요. 아이라고 해서 그것을 못 느낄 리는 없을 테지요. 얼마나 서운하고 아빠가 밉겠습니까. 동생과의 차별로까지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요.(실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더군요) 그러다보니 아이도 아빠를 피하고 엄마가 없을 때는 제 방에서 좀체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또 그것조차 못마땅합니다. 악순환이지요.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라는 마음으로 지어놓고, 나는 아이에게 지금까지 무엇을 해주었을까요?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행복과 불행의 감정은 상당 부분 부모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비겁한 아빠였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나는 모르겠습니다. 또 그것들을 안다고 해도 지켜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위선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걱정입니다. 그리고 큰일입니다. 힘겹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면서 당신께 좋은 자식이 되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고 속상했었는데 좋은 아빠도 결국 못 될 모양입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베짱이와도 같이 하루를 매일처럼 개념 없이 놀고 마시며 인생을 낭비해 오다 문득 돌이켜보니 어느새 적다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나이를 먹어버린 나를 발견합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아내와 함께 가정을 꾸린 이 집의 가장으로서 내가 그 역할을 얼마나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는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아내와 아이들은, 나를 의지하고 내가 사랑하고 지켜주어야 하는 그들은 우리 집이 행복한 곳이라고 생각할까요? 나의 사춘기 시절, 집 밖으로만 시선을 향한 채 살고 있다고 느껴지던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가졌던 서운함과 아쉬움의 마음들. 이제는 나를 바라보는 가족들이 또한 그것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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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내 몸과 정신의 주인으로서 나에게 나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나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를 정면으로 그리고 깊이 바라본 채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더 늦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마 전 젊어 모시던 국장님과의 술자리에서 듣게 된 워렌 버핏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겨보며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워렌 버핏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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