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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0. 수요일

정치불패 고래엄마






편집부 주


이 글은 정치불패에서 납치되었습니다. 


고래엄마 님은, 글이 1회 더 납치되실 경우 

삼진 아웃 원칙에 따라

딴지 필진으로 임명되어 강제 노역에 동원됩니다.






아들네 학교는 한 학기에 한 시간씩 독도교육이란 걸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 고래도 독도가 동도와 서도로 이루어진 바위섬이란 것도 알고 경제수역 200해리와 어마어마한 해저자원과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울릉도와 독도 조경 수역의 풍부한 어족자원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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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도지원센터 건설을 두고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백지화시켰다가 국민의 아우성에 못 이겨 다시 하는 척한다는 일련의 뉴스를 보며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윗것은 귀찮으니 그냥 내비 두자 하고 아랫것들은 어떻게든 지켜보자 하는 식으로, 물과 기름처럼 따로 노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들 녀석이 불쑥 이렇게 내뱉었다.

 

"사람이 살기 힘든 바위섬인데 자원값 물고기 값 제대로 조사해서 제 값 받고 팔면 안 돼요?"

 

총으로 권력을 잡아 자기네들이 합법적인 정부라 공인 받고 권력을 유지하며 국민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개발을 하려면 일본에서 돈을 꾸어야 하는데, 이에 '방해가 된다며 독도를 폭파하자'고 했던 김종필 할아버지보다는 나은 생각이긴 하지만 참 어이가 없어서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아들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독도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느낌 없는 두루뭉술한 '우리 땅임'과 애국심 때문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배웠던 것이다. 급박한 전시상태도 아니고, 태극기만 봐도 눈물 난다는 이역만리 타국살이를 한 적도 없는 아이에게 두루뭉술하고 단순한 애국심만으로 무얼 느끼길 바라는 것 자체가 더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간 사람들의 행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따라가고 그들의 삶의 무게에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 문제가 여전히 울릉과 독도에 기대 살아가고, 그곳을 지켜내려 하는 현재의 우리와도 맞닿아있으니까.

 

독도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안용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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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전봉준처럼 그 역시 살아생전에는 한 번도 장군이 되지 못한 사람이다. 장군이 되기는커녕 국법을 어기고 울릉도와 독도에 들어갔다는 죄로 형장에서 매를 맞았고, 일본에서 국가가 파견한 사신임을 사칭했다는 죄로 참수당할 뻔하다 목숨만은 겨우 건져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귀양보내져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된 사람이다. 안용복이 장군이 된 것은 그가 죽은 지 250년쯤 지난 1954년 부산의 애국단체인 대동문 교회가 그를 '독전왕 안용복 장군'으로 추존하면서부터이다.

 

두 번이나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받아 온 안용복은 장군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동래부 경상좌수영 소속 격군이었다. 군선에 태워져 빡세게 노를 젓는 노잡이인 격군은 농사짓는 양민보다 낮은 상놈이나 하는 천역 중의 천역으로 격군에 징발되지 않으려고 도망가는 일도 많았다. 워낙 고된 일이다 보니 이탈자와 쓰러져 죽어나가는 이도 많아 이순신도 전투가 없는 날에는 쉬게 해 주는 등 격군에 대해 특별 배려하며 관리했다.


격군에서 해방된 안용복이 동래포와 울산포에서 고기를 잡는 걸 봐도 자기 땅 한 뙈기 없는, 그래서 농민보다 못한 어부로 밥을 먹고산 것을 봐도 우리가 말하는 양민 이하의 신분임을 또 한 번 짐작할 수 있다.


동래에 있는 왜관을 드나들어 일본말에 능했다는 것은 고기 잡아먹고 살기 힘드니 울릉도나 독도로 배를 몰고 나가 울릉도에서 많이 나던 전복과 약제, 독도의 명물 강치 등을 잡아다 왜상에게 파는 부업(?)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여기서 질문 하나, 국민의 안위와 영토를 지켜야 할 국가와 장군님들은 대체 무얼 했기에 천한 어부 따위가 일본까지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야 했을까? 국가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윗대가리들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 내 땅이니 남 주기는 아깝기도 하려니와 아랫것들 보기에 체면도 깎이지만 그렇다고 군대를 주둔시켜 힘써 지키자니 너무나 수고로운데 험한 파도를 뚫고 동해 외딴 섬까지 건너가 거둬들일 세금과 백성 징발권은 수고에 비해 너무 미미해서 굳이 하고 싶지 않은 곳, 울릉도는 그들에게 그런 계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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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문제는 건국의 어수선함과 권력 다툼의 피바람이 잦아든 태종 대부터 논의되기 시작했다. 태종은 우선 김인우를 보내 울릉도 상황을 살피게 했고, 김인우는 거친 파도를 해치고 울릉도에 들어가 주민 몇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땅이 넓고 아름드리나무도 많고 물고기도 많으니 능히 마을을 이루어 살만한 땅이니 백성을 더 많이 이주시키고 농기구를 주고 군대를 보내 지키자고 했다. 다른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 우리 국민의 영원한 정승 황희 할아버지가 결사반대를 외치고 나섰다(당시 그는 아직 정승이 아니라 공조판서였다.) 망망대해 외딴 섬까지 군대를 보내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위험부담도 큰데 그곳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조세와 역은 너무 적으니 그런 수고는 국력 낭비에 지나지 않으니 불가하다 했다. 그렇다고 백성들을 그냥 두면 왜구들에게 노략질의 빌미를 주는 데다 백성들이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나라가 할 짓이 아니니 울릉도 주민을 육지로 내보내고 섬 자체를 비워두자고도 했다. 일명 공도정책이다.

 

내 식으로 해석하자면 그곳 말고도 우리가 먹고살 밥그릇은 많으니 쓸데없는 데 힘쓰지 말고 섬을 비워 외국에도 분쟁지역화될 불씨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었다.

 

태종은 애써 외딴 섬을 빙비하는 수고로움보다는 황희의 이 편한 길을 쫓았고 이후로도 조선은 이 공도 정책을 계승했다. 1883년 김옥균이 울릉도와 독도를 아우르는 동남제도개척사가 되어 울릉도를 개척해보겠다고 고종에게 건의하기 전까지. 


그런데 아닌 거 같다. 마빡에 올라간 내 글에 편집진이 <아직도 우리는 조선시대>라는 제목을 붙인 것처럼 현재 우리 정부도 이 정책을 계승하고 있다. 남의 나라 눈치 보여서 우리 국민이 내 땅에 안전하게 놀러 갔다 오게 해 주는 독도 입도지원센터 건립을 취소하질 않나, 일본이 뭐라고 해도 국제 분쟁지역이 되면 안 된다는 핑계로 가만히 있으라고 하질 않나, 내 땅 앞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측량해보겠다는 것도 눈치껏 하지 말자고 하는 점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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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시스


태종과 황희의 합작품, 울릉도 공도정책 이후 대마도 도주는 수시로 조정에 뇌물을 보내어 '당신들이 지킬 의사가 없으면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에게 달라'느니 '대마도 주민이 그곳에 이사 가서 살수 있게 해 달라'고 청원했다. 땅이 좁고 경사가 심한 대마도보다 땅도 넓고 기름진데다 어장과 약초, 목제가 풍부한 울릉도가 더 살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조정에서는 '울릉도는 우리 땅이니 불가하다' 말만 하고 군대와 관리를 보내 호시탐탐 울릉도를 노리는 일본인이 실제로 섬에 들어왔는지 안 왔는지는 살피지 않았다. 여론이 들끓으면 일본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말 한 마디 해 놓고 일본이 국제 사회나 자국에서 무슨 말을 하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있는 것을 보면 당시 상황이 충분히 그려질 것이다.

 

국가에서 울릉도에 들어가는 걸 법으로 금지했기에 먹고살아 보겠다고 울릉도와 독도 앞바다에서 나는 고기와 전복을 따다 왜구에게 도륙 당해도, 과도한 군역을 피해 울릉도에 도망 와 살다가 왜구의 노략질에 죽어나도 죄인 신분이기에 국가에 보호해 달라 할 수 없었다. 국가는 몇 년에 한 번 건너가 약초 나부랭이나 캐올 뿐 그곳을 호시탐탐 노리는 왜구가 드나들어도, 아니 그곳에 몇 년 눌러 살아도 모르는 일이었고, 소란이 있었다 해도 죄인들이 경거망동했다며 눈 감아 버리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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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을 둔 부모가 아이와 게임과 TV를 놓고 협상하고 적절히 통제하고 대안을 제시하기가 피곤하니 집에서 스마트폰과 TV를 금지해 놓고 엄마가 없는 시간이나 친구네 집에서 게임 하고 TV 보는 것에 대해서는 눈 감아 버리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친구 탓만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나라가 자기 당 하나 관리하지 못한 탓에 1614년 광해군 6년에는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울릉도에 눌러 살고 있던 왜인들이 조정에 '죽도(요즘은 독도를 죽도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울릉도를 죽도, 독도를 송도라고 했다)를 보러 가고 싶으니 뱃길 안내를 부탁한다'라는 공문을 보내 조선 정부를 떠보는 일까지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때 역시 윗선들은 '죽도는 우리 땅'이라는 말 한마디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넘어가 왜인들은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았다는 건 국격이 떨어져서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1618년 일본 막부 정부에서 오키도라는 섬에 근거지를 둔 오타니와 무라카와 두 가문에 울릉도와 독도에 건너가 고기를 잡아도 된다는 공식 조업 허가장을 내준 것이다. 우리 국민은 우리 땅인데도 법으로 막아놓아 못 가고 일본인은 자기네 땅도 아닌데 공식적으로 허가받고 당당하게 들어가는 촌극! 내 나라가 말만 내 땅이라 하고 가꾸고 관리하고, 지켜내지 못했기에 주인 없는 땅 취급받아 벌어진 일이다.


1614년 울릉도 왜인들이 조선 정부를 가지고 놀 때 제대로 대응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정부가 제대로 못하면 아마 우리 다음 세대에서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우리 정부가 여론 무마용으로 우리 땅이라고 말만 하다 보면 1618년 때처럼 독도가 다케시마가 될 날이 오지 않으리라 장담할 이 누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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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북매일


외교부에서 독도에 쏟는 노고보다 민간단체나 개인이 돈을 모아 외국 신문에 광고를 내고 돌 투성이 섬에서 노래를 부르고, 독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널리 알리는 일을 하는 노고가 더 크듯 조선 정부가 제 역할을 못했기에 격군이었고 어부였던 천 것이 일본까지 건너가 내 땅을 지켜야 했다. 리더를 잘못 만난 백성이 쓸데없이 고생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는 씁쓸함에 이제는 장군으로 불리게 된 그의 삶의 무게가 더 무겁고 씁쓸하게 다가온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자기 삶의 무게만 감당하고 국가나 자치 정부, 지역사회가 해야 되는 일까지 짊어지고 가는 국민은 나오지 않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나머지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려 한다.







정치불패 고래엄마


편집: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