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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9. 금요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편집부장 쫄깃한기타

 




 

발붙일 공간이 없는 비정규직


이 땅의 비정규직들에게는 발붙일 공간이 없다. 있다고 해도 그곳은 생계 불안과 부당한 대우를 짐짝처럼 들쳐 맨 채 외줄 타기를 해야 하는 곡예장이거나 한겨울 칼바람이 몸을 쑤시고 마음을 파고드는 광고 전광판 위거나 '육지 멀미'를 감수해야 하는 크레인 위거나 고압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 위이다.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간도 쓸개도 다 내어놓은 채 순응하고 살든지, 당장 생계를 포기한 채 지난한 투쟁의 길로 나아가든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들은 '법'이라는 실체 아닌 실체와 맞닥뜨려야 한다. 자신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족쇄처럼 옭아매기만 하는 법. 중소기업중앙회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자살은 법이라는 족쇄와 그 족쇄를 허용치 이상으로 휘두른 악마들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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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멀미를 자아내는 비정규직의 땅



정부 추산 600만, 한국 비정규노동센터 추산 900만에 이르는 비정규노동자들에게는 배제와 차별이 일상화되어 있다. 헌법 제32조와 제33조에는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허울 좋은 소리다. 금과옥조의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헌법이 비정규노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하니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질 리 만무하고,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말 같지도 않은 명분으로 만들어 낸 약칭 기간제법은 되려 비정규직을 더욱 늘리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상황이 이렇기에 비정규노동자 중 일부는 앞서 말한 두 가지의 선택지 중 후자, 투쟁을 위해 거리로 나선다. 그들은 우리의 생활과 아주 밀접한 케이블방송·인터넷 설치 수리기사이거나 가전제품 서비스센터 기사, 대형마트 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청소노동자들이다. 고용 불안, 열악한 노동 조건, 인간 이하의 대우 등 여건이 워낙 열악하기에 이들의 투쟁에는 소위 진보적이라 일컬어지는 단체들이 고질적인 정파적 이해를 넘어서서 함께 연대하게 된다. 자연스럽고,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중에는 (개인적으로 꼴도 보기 싫었던) 통진당원들도 있었다. 이때 만난 통진당원들은 난리를 겪고 난 뒤 재편을 위한 뒷수습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 한때 통진당원이었던 나로서는 그들이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짠하기도 하더라. 빛바랜 보라색 당 깃발을 보며 왠지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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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당 정당해산 심판 결정과 그 여파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이 지난하게 이어지고 있는 오늘, 헌정 사상 최초의 정당 해산 심판 선고가 내려졌다. 예감이 맞아떨어진 것. 6대 3 정도로 해산될 거란 예상은 했지만 8대 1이라니.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다 태워 버리는 꼴이 우습다 못해 증오스럽다. 수구 세력들의 지랄병에는 약도 없다.


87년 6월 항쟁으로 이루어 낸 성과 중 하나인 헌법재판소 설치가 되려 민주주의를 갉아 먹고 있는 아이러니 속에서 자칭타칭 민주 세력들의 힘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절감하는 순간이다. 900만에 이르는 비정규직들의 아픔도 제대로 어루만지지 못하는 민주 세력들이니 무슨 힘이 있겠느냐만은.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으로 난장판이 됐을 때부터 이석기를 비롯한 통진당 내부 세력에게 진절머리가 나 완전히 등을 돌리긴 했지만, 그에 대한 심판은 시민들의 몫이고 자연스레 도태될 거라 믿고 있었다. 그게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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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에 뿌리를 둔 수구 세력들의 칼춤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저들의 생존과 이익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쳐낸다. 가증스러운 건, 친일 행적을 옹호하고 독재정권에 협력하고 시민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눌러 왔던 망나니들이 되려 민주주의 운운하며(정확히는 '자유' 민주주의다) 또다시 자기 합리화를 꾀한다는 점이다. 비정규직들의 투쟁에도, 세월호 참사 유족들의 한 서린 외침에도 '종북' 세력들이 침투하여 '자유 민주주의'를 교란시킨다며 똥 싸는 소리를 해 댄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자기 합리화, 모순이라는 DNA가 이 세력들에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제 이 정신병자들은 더더욱 '자유 민주주의'와 '법치'를 입에 올려가며 시민 단체, 노동 단체들을 탄압할 거다. 이미 그런 상황은 만연해 있다. 집회나 시위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가고,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마구잡이로 벌금을 때려댄다. 나 역시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동자 장례식 때 쳐들어온 경찰과 마찰을 빚은 건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아 마냥 기다려야 하는 처지다. 연대 단체 직원이 이러할진대 비정규직 당사자들은 어떠하겠는가. 요샌 석방 탄원서 쓰는 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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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당 정당 해산 심판 결정은 2014년 현재 대한민국 정치적 민주주의의 바로미터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절차적·정치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확보했다며 이젠 실질적·경제적 민주주의의 외연을 확대해야 할 때라고 평가하던 분위기는 무색해져 버렸다. 헌법재판소가 헌법이 견지해야 할 가치들을 스스로 짓밟았다. 통진당은 해산 절차를 밟게 되었고 비정규노동자들은 기약 없는 싸움을 계속 해야 한다.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진보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도 발붙일 공간이 없어질지 모른다. 또 어디론가 올라가야 하나.

 

상식과 최소한의 정의와 공존. 이 소소한 삶의 원칙을 지켜나가기 위해선 투사가 돼야 하는 사회라니. 빌어먹을.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편집부장 쫄깃한기타


편집: 나타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