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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2. 월요일

빡쳐서 돌아온 벨테브레









관습헌법의 추억

 

각종 자격이나 임용 시험을 위해 헌법 강의를 듣게 될 경우 제일 먼저 배우는 판례가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위헌결정(헌법재판소 2004. 10. 21. 2004헌마554 등)이다. '수도=서울'이라는 공식은 관습헌법에 해당하므로, 이에 반하는 행정수도 이전 법률은 위헌이라고 했던 바로 그 판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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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헌법 운운하는 헌재의 결정을 뉴스로 이해했던 당시에는 나 역시 비웃었던 게 사실이지만, 몇 년이 지나 헌재의 결정문을 진지하게 뜯어보고 나서는 그 논리의 정교함과 치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결정은 헌법적 근거에 의해 관습헌법은 인정될 수 있으며 일정 부분 불가피한 측면도 있음을 밝힌 뒤, 어떤 규범이 관습헌법으로 인정받기 위한 요건을 제시함으로써 수도의 설정과 이전이 이에 해당한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헌법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폐지되거나 변화할 수 있는 것이나 이를 위해서는 국민적인 합의가 필요하며 이는 헌법 개정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 따라서 헌법이 아닌 법률의 형식으로 그 내용을 건드릴 경우 위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딱 한 가지, 관습헌법은 성문헌법과 대등한 효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개정에 있어서도 성문헌법과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관습(헌)법은 개념 자체부터 무엇이 그에 해당하고 무엇이 해당하지 않는지를 가리기 애매한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그런 허깨비 같은 내용을 바꾸기 위해 국회의원 2/3 이상의 찬성과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면 이건 사실상 언터처블의 막강한 규범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판단하고 결정할 권한은 오로지 헌법재판소에게 귀속되는 것이기에 개인적으로는 영 마땅치 않은 논리였다. 아울러 이로 인해 일반 법률로 관습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는 위헌을 면치 못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으니, 톱니바퀴 돌아가듯 정교한 논리체계에서 딱 하나의 나사를 바꿔 끼움으로써 결론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셈이라고나 할까. 사후적으로 보았을 때 결론을 내려놓고 논리를 짜 맞춘 것 같다는 느낌. 그럼에도 막무가내로 결론을 향해 달려가기 보다는 논리와 근거를 들어 접근하는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우리 헌재가 달라졌어요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에 대한 결정이 하필이면 어수선한 연말, 정부 입장에서 절묘한 시기를 골라 선고된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아마도 해산결정을 예상했을 이정희 대표와 통합진보당원들이 국회에서 필사적인 농성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설마 해산결정이 내려지랴 생각했던 건 이 나라 헌법질서의 마지막 보루인 헌법재판소의 논리와 양식을 믿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헌법 조문과 이론에 따르면,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해산결정이 내려졌을 때 난 혹시나 내가 알지 못하는 획기적인 논리와 근거가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아니 적어도 행정수도 이전 위헌결정처럼,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으나 논리의 일관성이랄지 치열한 고심의 흔적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결정문을 살펴보았다.

 

틀렸다.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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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문의 요지는 '통합진보당은 NL이고 이석기 일당이다. 그들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들이 행한 내란 관련 회합, 비례대표 부정경선, 중앙위원회 폭력, 관악을 지역구 여론조작은 오롯이 당의 활동으로 귀속된다. 그러므로 해산'이라는 결론을 향해 힘차게 달려갈 뿐 이를 뒷받침할 아무 근거가 없다.

 

당황스러웠다. 아직 확정판결이 나지 않은 이석기의 행동을 유죄로 전제한다 해도 말이다. 하나도 둘도 아닌, 과반수인 다섯도 정족수인 여섯도 아닌, 달랑 한 명 빼고 전부 다 모인 여덟 명씩이나 되는 헌법재판관이 저런 형편없는 의견에 동조해 정당해산이라는 무서운 결정을 내렸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이제 법은,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수단이라는 탈을 벗어던지고 강자를 위한 강력한 무기라는 날것으로만 기능하게 되었다. 그것도 무려 헌법의 이름으로.

 



정당해산심판제도의 의의와 기원

 

정당해산심판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8조 제4항은 방어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위헌적인 정당을 해산시킬 수 있다는 근거규정이라기 보다는, 헌법에 규정된 엄격한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강제적으로 해산할 수 없도록 하여 정당을 보호하려는 취지가 강하다는 게 학계의 다수설이다. 헌법재판소 또한 이를 부정하지 않았거니와, 이 조항이 헌법에 도입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스토리를 잘 알고 있을 헌재가 해산의 칼날을 그 따위로 휘둘러서는 안 될 일이었다.

 

때는 1958년, 이승만 정권 때의 일이다. 1952년과 1956년 두 번의 대선에서 연거푸 2위를 차지하며 이승만의 정적으로 떠오른 죽산 조봉암. 독립운동가이며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졌던 그는 보수 야당이던 민주당에 입당하는 대신 진보당을 창당하여 독자 노선을 걷는다. 대중적 인기가 높던 그를 두려워하고 꺼려했던 건 자유당만이 아니었는지, 1956년 대선 당시 민주당은 신익희 후보가 사망하여 본의 아니게 후보 단일화가 된 상황에서도 조봉암을 지지하는 대신 '신익희 추모표'(라고 쓰고 무효표라고 읽는다)를 찍도록 독려함으로써 이승만의 3선을 방조하는 졸렬한 선택을 하였다.

 

가까스로 집권은 했지만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과 자유당은, 진보당 창당 과정에서 북한의 공작금이 흘러들어갔다는 이유를 들어 조봉암을 간첩죄로 체포하였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변변치 않았고 결정적인 증인이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는 등 좌충우돌. 결국 1심을 맡은 유병진 판사는 간첩죄는 무죄, 국가보안법위반과 불법무기소지죄만을 유죄로 인정하여 조봉암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였다. 정권 차원의 의지가 엿보이는 사건에서 이 정도의 소신 돋는 판결을 하는 건, 나름대로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쉽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실제로 유병진은 오늘날 일베와 어버이연합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반공청년단의 '용공판사타도'와 같은 비난에 시달린 끝에 법관 연임 심사에서 탈락, 법복을 벗어야 했다.

 

검찰은 당연히 항소했고 2심과 3심은 간첩죄 부분을 유죄로 인정하여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후 국내외의 다각적인 구명노력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명백한 사법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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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판결은 52년 뒤에야 바로 잡힌다


당시 검찰의 지휘권자이며 사형집행을 결재한 법무부장관이 홍진기, 그러니까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의 아버지이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인이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는 것은 그 분의 애국심에 대한 경의의 표시라고 해두자.

 

그럼 진보당은 어떻게 되었나? 위 판결에서 "북한 괴뢰집단의 주장과 같은 평화통일을 정강정책으로 하""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결사"라고 언급된 진보당은 조봉암에 대한 재판이 열리기도 전인 1958년 2월 25일 당시 정당 사회단체의 등록을 주관하던 정부기관인 공보실의 등록취소라는 행정처분으로 허망하게 와해되었다.

 

당시 정부는 위법한 통일방안 주장, 북한 간첩과 접선, 공산당 동조자들을 국회의원에 당선시키려 기도했다는 세 가지를 진보당의 등록취소 사유로 들었으나, 먼훗날 대법원은 "진보당의 경제정책은 사회적 민주주의의 방식에 의하여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부작용이나 모순점을 완화·수정하려는 데 있는 것이지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체제의 골간을 전면 부인하는 취지가 아님이 분명하고, 진보당의 정치형태 역시 주권재민과 대의제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 등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내용이 아님이 분명하다"며 "진보당의 통일정책인 평화통일론이...(중략)...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 당시 우리 사회의 주도적인 통일론이었던 북진통일론에 배치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을 들어 곧바로 진보당의 통일정책이 헌법에 위배된다거나 또는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주창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대법원 2011. 1. 20. 선고 2008재도11 전원합의체 판결)고 하여 당시의 헌법에 의하더라도 해산될만한 빨갱이 집단이 아니었음을 명백히 하였다.

 

이처럼 정권에 위협적인 정당을 용공으로 몰아 손쉽게 해산시켜버린 뼈아픈 경험을 교훈삼아, 4.19 혁명으로 집권한 제2공화국 정부는 헌법 차원에서 정당해산심판제도를 규정하여 반대파라고 막무가내로 해산시킬 수 없음을 명확히 하였다. 2014년의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처럼 법도 논리도 없이 해산결정을 내리라고 준 권한이 아닌 것이다.

 



헌재결정문 디벼보기

 

헌재 결정에서 통합진보당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는 근거로 제시된 사안은 내란 관련 회합, 비례대표 부정경선, 중앙위원회 폭력, 관악을 지역구 여론조작 등이다. 물론 이 가운데 잘했다고 칭찬할만한 일은 하나도 없으나, 관악을 지역구 여론조작의 경우 개별 지역구에서 일어난 일탈적 행위로 당 전체에 책임을 묻기에는 무리가 따르며 비례대표 부정경선이나 중앙위원회 폭력사태의 경우에도 당내 문제로 엄밀히 따지면 통합진보당과 당원들이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사안이다. 당내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당해산을 명할 것 같으면 '새'자로 시작하는 정당들 또한 자유롭지 않다는 걸 헌법재판관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내란 관련 회합은 아직 상고심 계속 중이지만, 항소심 판결을 전제로 해도 RO의 실체나 구체적인 내란음모 여부가 입증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굳이 문제를 삼는다면 이석기의 내란선동 정도인데, 그가 당 소속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의 언동이 당을 대표해서 이루어졌다고 볼 근거는 없다. 헌재의 주장처럼 이석기와 추종자들이 당을 장악하고 있다면 비례대표가 되기 위해 부정경선을 해야 할 필요까지도 없었을 터. 정의당과 분당 전의 일이기는 하나 이석기는 부정경선 사유로 당에서 제명되기 직전까지 갔었다. 이는 통합진보당이 헌재의 주장처럼 순결한(?) NL 빨갱이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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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국회의원이 간첩이라니

 

그럼에도 당 소속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내란음모같이 숭악한 일에 연루되었다면 그 당에도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이들에게, 진보당 사건 말고도 현직 국회의원이 간첩죄로 사형을 당했던 흑역사를 알려주고 싶다.

 

1969년 중앙정보부는 유럽과 일본을 거점으로 한 북한 지하 공작단 사건을 발표하며, 현직 국회의원 김규남,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초청연구원 박노수 등 다수의 관련자를 구속하였다. 이 가운데 박노수와 김규남은 영국 유학 시절 동베를린을 왕래하다가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지령을 받고 금품을 수수하였으며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72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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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현직 국회의원이 간첩이었다는 점 때문에 1969년 국내 10대 뉴스에 오를 정도로 센세이션한 사건이었는데, 더욱 놀라운 건 김규남이 야당이나 무소속이 아닌 여당(민주공화당) 소속이었다는 점. 간첩을 국회의원으로 공천했을 뿐 아니라 남로당 출신의 당 총재를 모시고 있던 공화당은 얼마 뒤 소위 3선 개헌안이라 불리는 헌법개정안을 날치기 처리하는 등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활동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으나, 당시에는 헌법재판소가 없었기 때문에 위헌정당으로 해산당하기는 커녕 이후로도 10년 동안 위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불법구금과 가혹행위 등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결정을 내렸고, 201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에선 두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나 이미 40년이 지난 일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책임질 수도 없었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북한의 위협이 여전히 남아 있는 분단국가에서 국가안보를 위해 어느 정도 자유와 권리의 제한은 불가피하며, 그 옛날에는 더욱 그러했을 거라고. 그러나 정작 김규남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은 박정희 정권 18년 가운데 북한의 위협이 가장 적었다고 볼 수 있는 7.4 남북 공동선언 발표 9일 후(1972년 7월 13일)였다. 북한 탓도 어디까지나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법도 논리도 없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종북 논란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이 겉으로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실제로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다고 단정 지었지만, 현실적으로 선거를 비롯한 정상적인 정당 활동을 통해 달성하기엔 불가능한 목표로 보이므로 남아 있는 방법은 폭력 뿐. 헌재는 이에 대해서도 '(통합진보당 주도세력은) 저항권적 상황이 전개될 경우 무력행사 등 폭력을 행사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헌법제정에 의한 새로운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여 집권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헌재의 주장대로라면 당이 강제로 해산당하고 재산이 몰수되는 정도의 '저항권적 상황'이 발생했는데도 폭력투쟁으로 나가지 않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설령 그들이 정말 과격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해도 일정한 세력을 갖추고 있고 실제로 조직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이상, 정당해산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 제도권 밖으로 내보내 지하화하는 것과 제도권 안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수용하고 선관위의 회계감사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직간접으로 통제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사회 안정에 기여할지는 자명한 일이다.

 

법도 논리도 없는 결정을 진지 빨며 반박하려니 참, 개그콘서트 정명훈의 말마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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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모든 건 법보다는 힘의 문제. 우리는 완벽하게 패한 것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게 패배가 아니라, 10년씩이나 집권을 했으면서도 국가보안법을 일자일획도 고치지 못한 것이, '천안함은 북한 소행이라고 볼 수 없다'도 아니고 '북한의 소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부의 발표를 신뢰한다. 그러나 법률가로서 직접 보지 않은 사안에 대해 확신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 야당 추천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지키지 못한 것이, 그러면서도 공안검사 출신 헌법재판소장이 취임하는 걸 막지 못한 것이, 임기도 한참 남은 헌법재판관이 검찰총장이 되겠다고 검증 동의서에 사인할 정도의 검찰 공화국을 만든 것이 우리의 패배다. 정치적 유불리만을 따지며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하거나 혹시나 불똥이 튈까 싶어 선 긋기 하려는 이들이여, 다음 차례는 당신이라는 걸 잊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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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테브레

트위터 : @backtalkking


편집 :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