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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31.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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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 국민은 바보가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일본은 ‘제국’이란 목표를 향해 바쁘게 뛰어갔고 10년 주기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사이 일본 국민들은 ‘국가’를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바쳤다. 이런 피의 악순환이 언제쯤 끝이 날지 일본 국민도, 그들의 지도자들도 몰랐다. 이 와중에 국민들 사이에서 작은 ‘균열’이 생긴다. 바로,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デモクラシー)


가 일어난다. 다이쇼 천황 시절에 일어난 ‘민주주의·자유주의 쟁취를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시작은 1911년에 있었던 신해혁명이었고(1911년), 보통 마지막은 치안유지법이 제정된 1925년으로 본다.


시작은 간단, 하지 않았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은 1911년에 중국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역사 교과서에 스쳐지나가듯이 나온 그 신해혁명 말이다. 우리에게는 단순히 ‘외워야 할’ 그 무엇이었지만, 신해혁명은 중국 대륙을 미몽에서 깨어나게 만들었고, 일본에 ‘민주주의’의 봄바람을 불게 만들었다.


신해혁명을 간단히 정의내리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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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후 난징임시정부의 내각회의 모습. 가운데가 쑨원이다.


중국 역사에서 군주정치를 소멸시킨 혁명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때까지 276년이나 이어져 왔던 청나라를 끝냈고, 중국 대륙에서 3천여 년간 ‘당연하게’ 지속됐던 군주제를 소멸시킨 역사적인 사건이다. 



변화의 조짐?


신해혁명 소식을 접한 일본 군부는 중국 정세가 혼란스러워졌다면서 이를 중국 침략의 기회로 봤다. 당시 육군대신이었던 우에하라 유사쿠(上原勇作)는 내각에 이런 안을 제출한다.


“식민지 조선에 육군 두 개 사단을 증설해야 한다.”


일본 본토가 아니라 조선에 사단 2개를 창설하자는 건 깊게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그 용도를 알 수 있다. 이 안건은 러일전쟁 직후 일본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군부, 그것도 육군대신의 주장이니 무난히 통과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당시 총리가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였다는 점이다.


사이온지 긴모치의 성격과 식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이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들은 다다미 위에서 죽지 못할 각오를 해둬라.”


그가 죽기 두 달 전이자 한참 미국과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던 1940년 9월에 남긴 말이다. 대대로 천황 조정에 봉직한 명문가 화족(華族)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주변의 눈치를 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줏대 있고 꼬장꼬장한 성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앞뒤가 꽉 막힌 보수주의자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 보수주의자와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그는 나폴레옹 3세의 등장과 파리 코뮌의 실패가 이어지던 ‘혁명의 시대에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다. 그는 유학하는 10년 동안 세계정세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당연히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공부했고, 귀국 후 신문사에 입사해 일본정부를 비난하는 기사를 쓴다.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일본 지도층 중에 드물게 깨어있으며, 박학다식 했으며, 천황에게도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꼬장꼬장한 인물이었다.


이 사이온지 긴모치는 우에하라 유사쿠의 2개 사단 증설안을 거절한다. 


“지금 러일전쟁의 전비 때문에 긴축재정을 하는 마당에 무리하게 군비를 확장할 수는 없다.”


상식적인 의견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긴축재정 중이었다. 하지만 일본 해군과 육군은 무턱대고 함대증설과 병력증강을 외치며 사이몬지를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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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모치


어쩌면 사이몬지는 ‘러일전쟁’의 전비에 발목 잡힌 총리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06~1908년(12대)과 1911~1912년(14대)에 총리를 역임했는데, 12대 때는 <러일전쟁>의 전비 조달을 위해 세금을 못 내렸기 때문에 경기불황이 이어졌고, 그 때문에 사임했다. 역시나 긴축재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14대 때는 육군대신인 우에하라 유사쿠의 ‘몽니’ 때문에 내각 총사퇴를 해야 했다.


당시 일본 군부는 군부대신 현역무관제였다. 다시 말해 현역 장군이 군부대신을 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군부대신이 내각에 선출되지 않으면 내각은 총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에하라 유사쿠는 2개 사단 증설이 좌절되자 천황에게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고 단독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에 따라 사이몬지 내각은 총사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이몬지의 뒤를 이은 이가 바로 가쓰라 타로(桂太郎) 총리다. 그 역시도 군인출신이다(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이다).


이렇게 군부의 입맛에 맞게 돌아가는 정치판을 보며 시민들은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벌족타파와 헌정옹호를 외치기 시작했고, ‘혁명’의 분위기가 스믈스믈 올라온다. 이런 움직임에 따라 일본 정부도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폐지하며 군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했지만, 덜컥 ‘방산비리’가 터진다.


일본 역사교과서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지멘스(Siemens AG) 사건’이 터진 것이다.



지멘스 사건


드레드노트급의 등장은 전 세계 해군 관계자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이 충격에서 겨우 빠져나온 뒤에 떠올린 생각은,


“우리도 드레드노트급을 확보하자!”


였다. 영국을 제외한 전 세계 해군 관계자들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문제는 ‘기술’이었다. 독일의 경우, 비스마르크가 재상으로 있던 시절부터 외쳤던 ‘식민지 대신 화학’이란 구호처럼 당대 최강의 과학 기술력을 보유했던 터라 드레드노트급을 생산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일본이었다.


러일해전 직후에 88함대 건설이라는 장대한(!) 프로젝트를 내놓은 일본이었지만, 현실이 녹록치가 않았다. 우선 예산이 받쳐주지 않았고(1906년 88함대 예산은 내각에서 부결됐다), 설사 예산이 지원된다 하더라도 이를 만들어 낼 기술이 없었다.


해군의 예산이 통과된 건 1910년이었지만, 일본에 드레드노트, 그리고 이후 전 세계 해군관계자들을 집단 패닉 상태에 빠지게 만든 순양전함 인빈시블을 만들 기술력은 없었다. 결국 일본은 영국에 ‘주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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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급


제작사는 비커스(Vickers), 주문한 모델은 영국의 순양 전함 라이언(HMS Lion)급이었다. 척수는 4척. 제작 방식은 1번함은 영국에서 건조(그 유명한 공고, 金剛), 2번함은 설계도를 바탕으로 일본 국내에서 조립생산(히에이, 比叡), 3번함(하루나, 榛名), 4번함(기리시마, 霧島)은 일본에서 라이센스 생산을 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여담이지만 3번함을 제작하던 가와사키 조선소의 공사 책임자가 시운전 날짜를 겨우 며칠 못 맞췄다고 할복을 하는 미친 짓을 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본 해군의 건실한 ‘건함계획’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부패한 뒷거래’가 숨어 있었다. 1913년 10월 17일 독일의 지멘스社 직원인 카를 리히터가 지멘스 도쿄의 지사장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멘스 요코하마 지배인의 조카가 일본 해군 조선 감독관의 아내란 점을 활용해서, 사전에 해군 입찰정보를 입수했고, 경쟁사를 제치고(빅커스, 암스트롱 社) 입찰에 성공한 걸 알고 있다. 입찰의 대가로 일본 해군에게 매출이익의 15%를 건넨 것도 알고 있다.”


카를 리히터는 이 ‘정보’를 가지고 회사를 협박했는데, 안타깝게도(?) 도쿄 지멘스는 이를 거절했다. 화가 난 리히터는 관련서류 일체를 로이터 통신 도쿄 특파원이었던 앙드르 플레에게 팔아넘긴다. 이 앙드레 플레라는 ‘기레기’는 지멘스 社에 이 기사를 50,000엔(약 5억원)에 되판다. 지멘스 社는 회수한 관련서류를 소각하면서 이야기를 일단락 짓지만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불거진다.


당시 수상이었던 야마모토 곤베에(山本 權兵衛)의 해군 강화 정책에 반감을 품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이자 일본의 국가성격을 완성한 인물. 3대 총리를 지냈다)가 독일정부에 이 사실을 전달한 것이다. 결국 리히터는 독일에서 체포 돼 재판을 받는데, 이때부터 일본 해군의 ‘지옥’이 열린다.


처음엔 단순히 해군의 통신장비 비리 스캔들인 줄 알았는데 파고 들어가다 보니 그 실체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일본 해군은 리베이트 비용을 관리하기 위해 런던 은행에 영국인 명의의 차명 계좌까지 만들어 놓고 ‘본격적으로’ 상납을 받고 있었고(이는 해군만 탓할 게 아니다. 당시 일본 육군도 이를 ‘관례’로 생각하고 ‘마음껏’ 뇌물을 받았다), 일본 해군이 장차전을 위해 구입했던 공고(金剛)에도 비리의 얼룩이 묻어 있었다. 빅커스가 공고의 수주를 위해 일본 해군 지도부에 뇌물을 뿌렸고, 빅커스의 일본 내 영업을 총괄했던 미쓰이(三井) 물산은 뇌물을 보전하기 위해 공고의 판매대행 수수료를 2.5%에서 5%로 인상했다. 당연히 그 비용은 고스란히 일본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일본 국민은 분노했다. 전체 국가예산의 30% 이상을 건함사업에 쏟아 붓느라 일본 국민들은 허리가 휠 정도였다.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딸을 팔고 가족을 버리는 상황에서 이런 비리가 터져 나왔으니 그 기분이 어떠했을까? 일본 국민들은 도쿄 히비야 공원에 모여들었다. 화가 난 이들은 국회의사당으로 쳐들어가 국회 경비원들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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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에 난입하는 일본 국민


일본 해군의 야심찬 건함계획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고, 군부는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해야 했다. 일본 국민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처음으로 현실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통치수단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는 계기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은 당시 일본이 민주주의(民主主義)란 말 대신 영어 ‘democracy’를 가타카나로 차용한 점이다. 민주주의라 하면 ‘국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당시 일본의 주권은 ‘천황’에게만 있었다.


혹시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간단히 말해서 천황을 국가 최고 기관으로 설정한 것이다. 일본의 헌법학자였던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가 독일 게오르그 옐리네크가 내놓은 <국가법인설>을 기반으로 내놓은 것으로, 기존의 천황주권설이 왕권신수설의 일본판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헌법이론이다. <국가법인설>이 인민주권론에 대응해 군주주권론을 옹호하기 위해 등장한 이론이란 걸 생각하면 천황기관설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천황기관설의 핵심은 간단하다.


“통치권을 행하는 최고권한인 주권은 천황이 갖는다.”


이 천황기관설이 최초로 등장한 것이 1912년이었다. 중국에서 신해혁명으로 군주제를 폐지한 그때, 일본은 왕권신수설을 보완하겠다고 나섰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체겠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국민들은 민주주의란 말을 쓸 수 없어서 ‘데모크라시’라고 에둘러 말했다. 일본 국민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위한 첫 번째 발걸음을 뗐다. 



짧았던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 デモクラシー)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생명은 겨우 10여 년이었다. 신해혁명으로 시작해 지멘스 사건으로 불이 붙었던, 짧은 ‘도쿄의 봄’은 1925년 하나의 ‘법률’로 막을 내린다.


1925년 5월 12일에 발효 돼 1945년 10월 15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령으로 폐지되기 전까지 20여 년 간 75,000명이나 되는 이들을 고문하거나 처형한 악법, ‘치안유지법’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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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유지법은 우리나라 국민을 탄압하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신해혁명으로 군주제를 버린 중국과 1차 세계대전 중에 볼셰비키 혁명으로 차르를 몰아 낸 러시아로 인해 일본 내에 군주제를 부정하는 기류가 서서히 싹튼다. 뒤이어 꼬리를 물 듯 이어져 나온 것이 공화제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본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긴장한 일본 정부와 군부는 천황제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만들었다.


재미난 사실은 이 ‘치안유지법’이 우리나라 ‘국가보안법’의 모태가 된 법이라는 사실이다. 이 두 법의 공통점은 민주주의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치안유지법은 천황제를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이들을 단속하고 처벌하는 법이었다. 천황을 옆에 끼고 있어야지만 방해를 받지 않고 전쟁을 치를 수 있었던 군부로서는 천황제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제도였다. 만약 천황기관설이 아니라 ‘국민 주권론’이 득세해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면 일본의 주권은 국민이 가진다. 일본 군부가 내각의 통제 밖에서 제멋대로 움직일 수 없고, 마음대로 전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군부와 정부는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공화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해 처단한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때 일본 국민들이 ‘데모크라시’라는 말이 아니라 ‘민주주의’란 말을 쓰고, 천황이 아닌 국민에게 주권이 돌아갔다면,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일본은 그렇게 전쟁국가로서의 체계를 굳혀나가고 있었다.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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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