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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07. 수요일

sydney






편집부 주


이 글은 필자가 자신의 남아공에 거주 중인 한인 부부를 만나

경험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한국에서 모든 것을 잃고 

맨손으로 남아공으로 건나 가 

고국 땅에서는 꿈도 못 꿀 일들을 이뤄낸 이들로, 

그들과 2주간 머물며 나눈 

남아공 사회에 대한 분석, 토론이 

한국과 남아공, 두 사회를 이해하고

새로운 공동체 생활 양식을 고민해 보는 일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마, 이 정도 의도를 깔고 시작하는 연재라 하겠습니다.

 




지난 기사


남아공을 알려주마 (1) - 흑백 분리

남아공을 알려주마 (2) - 만델라도 해결 못한 문제






어린 시절 보았던 세계전도 중 지형을 색상으로 나타내 주는 종류가 있었다. 그런 지도는 대개 지형이 높으면 밤색, 낮으면 초록색을 칠해 놓는다. 사막은 흰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설마 그 사이에 변하지는 않았겠지?) 무심코 보아온 것들이겠지만 그런 지도를 잘 보면 아프리카 중남부의 대부분은 밤색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지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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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집도 정확히 해발 1,515미터 회사는 1,555 미터이다. 전반적으로 내륙 쪽은 1400 내지 1700미터 사이를 유지한다. 아프리카 지형을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대륙 전체가 산이고 내륙은 산꼭대기라는 말이다. 그래서 다니면서 산을 보기가 어렵고 주로 지평선을 보고 산다. 이런 이유들로 아프리카의 내륙 지방들은 비단 적도 인근이라 해도 여름에도 동남아처럼 그렇게 덥지는 않다.


요하네스버그의 위도는 남위 26 정도. 원래는 아열대여야 하지만 여름 낮 시간의 평균 기온은  27도C 겨울 낮 시간은 14도C 정도 이어서 사실상 전반적으로 연중 기온이 한국의 봄가을 기온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한 가지 신경질 나는 것은 계절 간의 낮 시간의 기온 차이보다는 겨울 동안 밤낮의 기온차가 더 심하다는 것이다. 낮에는 20도 가까이 되었다가 밤에는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이니 잘 못하면 얼어 죽을 판이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얼어 죽는 흑인들이 생기는 것이다.


흑인들은 대부분 실내에서 난방은 전혀 안 하고 영상 5도 정도의 온도에서 밤을 지낸다. 거의 한국 겨울 캠프에서 텐트 생활하는 것과 맞먹는 것이다. 그래서 흑인들이 감기에 잘 걸리고 폐병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흑인은 열등한가


IQ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온갖 지능들 중 주로 과학기술과 관련된 능력을 측정하는 방법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누군가의 잠재력을 평가할 때 IQ를 사용한다. 지금까지 실시된 수많은 IQ 검사들을 볼 때 인종 간 점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대체로 동아시아인이 가장 높고, 그 다음이 백인이며, 아프리카 흑인은 백인보다 훨씬 낮다. (여기서 인종 개념이 거시기 하다면 '개체군(population)'로 바꾸어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흑인들이 대체로 백인에 비해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처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현실이다. 때문에 그들이 처한 환경 등을 무시하고 흑, 백인종을 평균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한국의 선거처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꼴이다. 정확한 결과치를 얻으려면 동일 소득 수준, 유사한 주거 환경, 유사한 교육 환경 등 모든 환경적 요인들을  완벽하게 통제한 후에 IQ를 측정해야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정한 통계의 결과를 가지고 흑인은 선천적으로 백인보다 IQ가 낮다는 주장하고 싶다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반대로 현실을 무시하고 흑인이 백인보다 선천적으로 IQ가 낮을 리가 없다고 믿는 것 또한 자칫하면 도덕주의적 오류(moralistic fallacy)에 빠질 수가 있다. 왜냐하면 개천에서는 용이 아니라 미꾸라지가 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듯, 열악한 흑인들의 생활 환경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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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나가 보면 일자리를 구하며 서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남자들이다. 남아공에서 여자들이 남자 보다 일자리를 구하기 쉬운 것은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정부 자리는 많지만 정원사 자리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흑인 여성들도 흑인 집 보다는 백인 집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만하다. '바람' 부부는 지난 16년간 흑인들을 고용해서 일을 하거나 가르쳐 보면서 때로는 실망하고 포기하고 체념하면서 나름대로의 방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같은 내용을 수 없이 반복 교육하면서도 내가 지치지 않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노하우가 필요했던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의 유명한 인권 대행진 연설에 "우리는 너무나 오래 동안 '안 돼'라는 말을 들어왔다."는 감동적인 구절이 있다. 실제로 백인 치하의 흑인들은 'No'라고 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흑인들은 지금도 비교적 No라고 말을 할 줄을 모른다. 비록 'Yes'라고 하고 행동에 옮기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서 언제든지 지시를 하고는 일이 제대로 되어 가고 있는지 항상 확인을 해야 했었다는 선교사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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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험이 없고 아는 것이 없어 어찌할 줄 몰라 새로운 시도에 겁을 내는 흑인들에게 '바람' 부부는 '안 돼'가 아니라 반대로 '해 봐'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노하우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바람' 부부와 나는 흑인 가정부가 만든 음식을 먹었고 직원들은 각자가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 음식의 질에 있어서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라고 해봐야 다른 직원들이 먹는 것과 별로 다른 것이 없는 밥과 토마토, 오이, 당근, 배추를 썰어 놓은 것이었다. 밥을 먹으면서 "이 정도 음식이라면 어차피 가정부도 있으니까 회사에서 만들어서 다 같이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바람' 부부가 직원들 점심 문제를 논의했던 이야기를 해줬다. '구름'이 '직원들 점심을 해주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냈었지만 평소에 직원들에게 엄격하다고 할 '구름'에 비해서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바람'이 오히려 동의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직원 중에 남아공으로 오기 위해서는 두 나라를 거쳐야만 올 수 있는 말라위에서 온 사람이 4명이 있었단다. 처음에 그들이 교통수단도 불편한데 아침 8시까지 출근을 하려면 밥을 못 먹고 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회사에서 아침 식사를 제공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다른 직원들이 "우리는 왜 밥을 안주느냐?"고 이의를 제기해서 중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단 어떤 것을 제공하기 시작하면 그 이유와 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바라는 심리 때문에 섣불리 시작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 사례는 나로 하여금 가장 기본적인 먹는 문제 이전에 먼저 고려해야할 것은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했다. 물론, 이 문제는 흑인들의 의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사용주와 고용인의 의식의 차이의 문제일 것이다. 비록 사용주가 선의를 가지고 있어도 고용인들의 그 선의를 받아드릴 수 있는 의식이 없으면 실행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식이 어디 피부색에 따라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던가.


2012년 8월 마리카나 지역 백금 광산 파업이 발생해서 경찰이 광원들에게 발포해 파업 노동자 34명을 사망케 하는 일이 일어났다.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폭동은 한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단한 조직력이 있어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광산 폭동 사태에서 본 것처럼 남아공은 노조의 힘이 셀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어찌해 볼 수가 없으니까 조직의 힘이 강한 것이다. 직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노조에 가서 이야기하고 노조에서 사람이 오는 식이다. 이러니 남아공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노조를 매우 두려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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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람' 부부의 회사에서는 아무도 노조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업종을 하는 다른 회사에서도 '바람'네 회사에 자리만 나면 옮겨보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바람' 부부가 이윤을 창출만을 추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을 고용해서 교육하고 훈련을 시켜 그들의 살 길을 만들어 주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첫 연재에서 밝혔듯 그래서 아이디도 '아프리카 '바람'이다. 나는 그들이 이 꿈같은 이야기를 조금씩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남아공에 온 것이고 말이다.)


어떤 존재에 대해 무작정 편견을 갖고 거리를 두기 보다는 마음을 열고 관심을 가져주는 게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선택적 기억


쿠루가 국립공원을 가는 길에 도시를 벋어나자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대규모 농장들을 보면서 투투 대주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왔을 때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함께 기도하자!' 하였고 우리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을 보여주고 생전 처음 듣는 말로 생전 처음 듣는 소리를 하는 것을 고스란히 믿었다가 모든 것을 빼앗긴 남미 원주민들과 달리 남아공의 흑인들은 백인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땅을 빼앗겼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로 만들어져서 더욱 유명한 줄루전쟁이었다. 물론 이 영화는 미국에서조차 흑인 민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했던 1964년도 영국인의 시각에서 제작된 작품이어서 죽창 들고 떼거리로 몰려드는 동학농민군을 기관단총을 든 소수의 일본군들이 물리친 일본 영화 같은 내용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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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을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듯이 투투 주교의 말 역시 사실의 한 단면을 말해 줄 뿐이다.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하면 부유한 백인들이 토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흑인들이 굶주리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정반대로 백인들의 대규모 농장 때문에 흑인들이 그나마 굶어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전통적으로 흑인들이 해왔던 가족농 단위로 농사를 지어서는 현대의 식량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대규모로 농업을 해야 하는데 흑인들은 그럴만한 관리 노하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농장주의 지시를 받아 일만 했을 뿐 언제 어떻게 과학적으로 농장을 운영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좋은 예로 백인을 강제로 내쫒고 땅을 빼앗은 짐바브웨가 나락으로 떨어져 국민들의 대탈주 사태를 빚어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일을 객관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얽힌 잊지 못할 해프닝이 하나 있다.


쿠루가 국립공원에 도착해서 동물을 찾아서 신경을 곤두세우며 초원의 전후좌우를 살피다보니 40년 전 월남에서 목숨이 걸린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거기에 오랜 동안 단련된 택시운전사의 주행 중에 주변 환경을 감지하는 동물적 감각(?)은 '바람' 부부와 원주민인 흑인 운전사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번번이 그들이 미처 보지 못한 동물들이 내 시각에 먼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내가 놀란 것은 나뭇잎 사이에서 코끼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고 남아공 사람인 흑인 운전사가 코끼리를 난생 처음 본다는 사실이었다. (믿습니까? 흑인이 코끼리를 처음 본다는 사실을?) 운전사의 말로는 시골인 자기 동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임팔라라는 사슴 종류 밖에 없다고 한다.


국립공원 안에서 볼 수 있는 관광객은 대부분 백인들이었다. 보통 흑인들은 근처에 살아도 비용 때문에 들어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보호되는 국립 자연 공원 안에서도 동물을 보기가 어려우니 밖엔들 오죽하랴? 아프리카에 동물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껴졌다. 실정이 그렇다보니 이틀을 헤매도 동물의 왕인 사자를 알현하는 기회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사건은 이 때 벌어졌다. 캐빈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에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출발해서 한 시간 쯤 지났을 때였다. 길가에 동물들이 있어서 찍으려고 캠코더를 찾다가 소형 캠코더와 여권, 비행기 표가 들어 있는 가방을 두고 온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바람' 부부를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가자고 했다. 가방 안에 돈은 거의 없었고 그동안 찍은 자료가 아깝기는 하지만 캠코더는 50불짜리 싸구려이고 비행기 표는 없어도 되고 조금 번거롭지만 호주 영사관에 가서 임시 여권만 다시 발급받으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남아공에서, 더욱이 관광지에서 여행객이 두고 온 물건을 다시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람'이 무조건 돌아가 보자고 주장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가면서 생각하니까 분명히 숙소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나왔고 레스토랑에서는 '여기서는 캠코더를 찍을 일이 없으니 가방을 차에 두고 내리자.'는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러므로 내 기억으로는 가방을 숙소에서 가지고 나왔고 식당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차에 있어야만 하는데 없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추리를 해 보자면 내가 숙소에서 가방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나는 식당에 들어갈 때 '캠코더를 찍을 일 없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숙소를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쓰레기를 버리려고 한 손에는 쓰레기를 들고 다른 손으로 쓰레기통을 열다가 무심코 가방을 쓰레기통 옆에 놓고 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헛수고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거의 체념한 마음으로 다시 한 시간을 달려서 숙소에 도착하니 흑인 여성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내가 설령 숙소에 가방을 두고 갔어도 떠난 지 이미 2시간이나 지났으니 가방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쓰레기통까지 뒤져보고 관리실에 전화도 해 보고 했다. 그 사이에 '바람'은 내가 분명히 식당에는 가방을 들고 가지 않았다고 계속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숙소에 없으면 식당에 가보는 것이 순서'라고 차를 타고 식당으로 갔다.


얼마 후에 운전사가 혼자 오더니 내 가방 비슷한 것이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다시 차를 타고 식당을 가니까 '바람'이 내 가방을 들고 그거 보란 듯이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다. 나는 남아공에서 주인을 잃은 가방이 2 시간이나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 믿기 어려운 미스터리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히려 손님이 많은 식당이기 때문에 보는 눈이 많아 웨이터가 가방을 숨길 수가 없고 매니저에게 가져다 맡겼을 것이라는 추리를 해 볼 수 있었다.


가방을 찾은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정말로 충격적인 것은 내 기억이 어떻게 그렇게 잘못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기억을 하고 정작 손으로 가방을 들고 들어갔던 행동은 기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나는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소위 '선택적 기억'을 했던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증인들의 잘못된 기억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유죄 판결을 받아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고 심지어는 사형까지 당하는 일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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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에 '바람'이 내 기억을 존중해서 그냥 돌아갔다면 나는 영원히 가방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우리 일행은 '인간의 기억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라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불과 몇 시간 전의 기억도 이런데 수십, 수백 년 전의 기억이 단면화 되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배고픈 흑인들


쇼핑센터에 갔다가 우유 값이 호주보다 많이 싸지 않은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국민소득이 호주의 1/3밖에 안되고 평균 흑인들의 수입이 1/10에 불과한 나라의 우유 값이 호주와 비슷하다니 가난한 흑인들이 어떻게 우유를 먹을 수가 있단 말인가? 호주에서는 아이들이 우유를 마음대로 먹지 못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최근에는 우유도 몸에 별로 좋지 않다고 해서 다른 대체 음료를 찾는 판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면 우유는커녕 물조차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환경도 많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출근길에 '바람'은 하루 종일 거리에 서서 먹지도 못하고 일거리를 구하고 있는 흑인들에게 일요일에 샌드위치와 음료수라도 나누어 주었는데 좋겠다고, 그렇지만 한 주간 내내 힘들게 일하고 일요일 하루를 쉬는데 그 날마저 일을 하면 몸이 감당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 도와준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질만한 곳이 없다는 판단이다. 교민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너무 많아서 걱정인 교회들이 있지만 그들을 참여시켰다가는 선교를 내세울 것이 뻔하기 때문에 순수하게 봉사할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바람'이 2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을 가야 하는 건강 상태에서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하면서 한국에 있는 조카들의 생일까지 일일이 챙기고 주변에 있는 사람 병원까지 데려다 주고 하는 것을 보면 그 조그만 몸뚱이에서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에너지가 나오지는 탄복할 지경이다. 쉴 사이 없이 움직이며 일하면서도 늘 베풀고 배려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오죽하면 사람 없는 산 속에 들어가서 일주일만 있다 오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까 싶다. 물론 이 모든 일이 옆에서 황소같이 일하는 만능 재주꾼 '구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신뢰의 값어치


'바람'의 회사에는 보통 흑인의 10배의 월급을 받는 네덜란드계 3세대인 마티아스라는 백인이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매니저급으로 모든 일을 관여하는 줄 알았더니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보아도 빈둥빈둥 거리는 것이 별로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나 '바람'이 요한네스버그 시내가 아니고 먼 곳으로 영업을 하러 갈 때는 흑인 운전사와 가지 않고 반드시 마티아스를 대동하고 간다. 남아공의 환경에 익숙해서 상황처리 능력이 있는 백인 젊은 녀석을 보디가드 겸 데리고 다니는 셈이다. 실제로 같이 다녀보니 나는 햇빛 아래에는 맥을 못 추는 체질이라서 틈만 있으면 손바닥만 한 그늘이라도 찾으려고 열심인데 마티아스는 땡볕에도 끄떡없이 몇 시간을 서 있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흑인들을 만나도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로 거리낌 없이 "Hi! bro!(brother의 줄임말)" 하면서 마치 흑인들 보다 제 녀석이 더 오래 아프리카에 살았던 것처럼 뻔뻔하게 다가서는 모습이 흑인들이 경계심을 풀면서도 오히려 두렵게 만들 것 같아 보였다.


(여담이지만 이 마티아스라는 친구는 하루에 왕복, 1,000Km 길을 오가며 일을 한다. 하루는 왕복 2차선 도로에서 중앙선을 넘어 끊임없이 앞차를 추월하며 운전을 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도로는 좁고 대형 트럭이 많이 다니는 아프리카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실제로 그는 그런 식으로 시속 150 Km 속도로 하루에 2,000 Km도 운전을 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더욱이 기가 막힌 것은 '바람'이 몸이 너무 피곤해서 견딜 수 없을 때 마다 타이 마사지를 받으러 가는데 마티아스를 데리고 다녔더니 단골 타이 마사지 아가씨와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참 화끈한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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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과 좀 친해진 다음에 별로 할 일 없이 건들거리며 다니는 것 같아 보여 "네가 하는 일이 무어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랬더니 장난스럽게 하는 말이 "돈 안 내는 놈 위협하는 것, 돈 안 내고 도망가는 놈 쫒아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마피아 마케팅이구나!" 했더니 낄낄거리며 웃었다. "언제부터 '바람'과 일을 하기 시작했느냐?"고 물었더니 '1998년 11월 8일'이라고 날짜까지 정확히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아니? 어떻게 날짜까지 기억하냐!"고 물었더니 그 날은 자기 생애에서 특별한 날이라서 기억을 한단다.


그가 말하는 특별한 사연은 이렇다. 아버지가 우체국장이라서 집안 식구가 모두 우체국에 일을 하는데(남아공에는 사설 우체국이 많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체국에서 일을 해보니 지루하고 장래성도 없어서 프랑스 외인부대에 지원을 했단다. 2일 간 신체검사를 받고 합격을 해서 입대하기 하루 전에 '바람' 부부가 함께 일을 하자고 해서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마티아스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도 가난했던 젊은 시절에 어떻게 프랑스 외인부대에 들어 갈수 있을까를 꿈꿨기 때문이다. IMF시기에도 허구적인 한국인 외인부대원 수기가 출판되어 외인부대 입대 붐을 낳아서는 간단한 불어와 적성시험을 대비한 외인부대 입시학원까지 생겼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외인부대는 언제나 희망 없는 남자들의 로망인 모양이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다 쳐도 마티아스가 회사의 상황으로 볼 때 별로 중요한 일은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직원의 10배를 받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중에 하도 궁금해서 '구름'에게 그를 써야 할 이유가 있는 거냐고 물어봤다. '구름'의 답은 마티아스가 고등학교 때부터 이웃에 살고 있어서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가족보다도 더 믿을 수가 있기 때문이란다. 한 마디로 옆집에 살고 있는 건달스러운 백인 청소년을 잘 길러서 평생 데리고 써 먹는다(?)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회사 통장에 이름이 같이 되어 있어서 마티아스가 마음만 먹으면 돈을 마음대로 인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다른 직원들이 하는 일을 하나도 할 수 없어도 신뢰 때문에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신뢰의 값은 이렇게 비싼 것이다! 그것이 남아공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기에 더더욱 희소가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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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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