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5. 01. 09. 금요일

마사오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가 방영된 후 난리가 났다. 과거에서 현재로 소환된 대중문화-특히 가요계의 아이콘들은 그 때 그 시절의 향수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90년대 초중반 사회, 경제적으로 풍요한 시절의 정서를 낭만적으로 재생산해내는 데에까지 성공했다.


실로 그러하다. 90년대 후반 IMF로 나라가 처망하자 우리는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훈계도 처들었고 그동안 우리가 걸어왔던 발자취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되돌아보며 반성적 성찰을 할 틈도 없이 “다시 뛰자”고 채근 당해야 했다. 그런 일들이 있기 바로 직전까지 우리 사회는 행복했다. 문민정부의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숙청이라는 가시적 ‘민주화’와 함께 OECD 가입이라는 경제적 성과까지 겹쳐 사회 전반에 ‘희망’이 흐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사전적 의미에서의 젖과 꿀은 전혀 다른 곳에서 흐르고 있었다. TV 브라운관이 아닌 386 PC 모니터에서였다.


“우웨에에엨우에에에엨케엨ㅋ꿰에에엨에에엨~”이란 소리와 함께 우린 진정한 지구촌 공동체의 일원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인터넷과 통신은 얼마 전까지 해외여행조차 맘대로 갈 수 없었던 나라의 백성들에게 자기 집 안방에서 글로벌을 경험케 했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인간은 PC를 사고 인터넷 선을 연결하면 제일 먼저 포르노를 찾는다'는 뜻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말도 있다. '야동은 일본에서 만들고 한국에서 다운 받는다'는 말과 같다.


성인컨텐츠 강국인 일본 AV물이 ‘무릎과 무릎 사이’와 ‘어우동’, ‘애마부인’ 시리즈, ‘뽕’ 시리즈 등을 앞세워 이제 막 기지개를 펴던 한국 서브컬쳐 분야에 던진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무슨 예를 들어야 너네가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자전거를 타다가 벤츠를 타게 된 것이 아니다. 공중전화를 찾아 헤매다가 휴대폰을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라면만 먹다가 양장피를 먹게 된 것이 아니다. 


"인류가 불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는 뉴스그룹에 올라오는 KUKI 사진을 다운 받아 여배우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 배우의 영상을 검색해서 걸면 예상 다운로드 시간이 짧게는 18일, 길게는 1년 6개월이 걸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나 행복했다. 나는 꼴랑 18일만 기다리면, 길어봤자 내후년엔 드디어 KAORI의 거웃한 털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아 생전에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태어나길 잘했다며 부모님께 감사했다.


그 시절 그렇게 시작된 나의 ‘동영상 감별사’의 길을 되돌아보며 이 지면을 통해 독자제위들께 ‘토요일, 토요일은 자위다’(이하 토토자)를 선보이려 한다. 그 시대의 울림과 함께 호흡했던 이들은 그 시절의 감동을, 그 시절에 아직 정충이었던 아해들은 지금의 'TOKYO-HOT'과 '캐러비언도트코무'의 역사적 계보를 간접경험하며 내일도 계속 될 검색과 다운로드에 실천적 의지를 북돋기 바란다.



토토자.jpg





프롤로그


많은 이들이 큰 착각을 한다. 일본은 포르노가 당연시 되는 나라라고. 하지만 그 계통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2015년 현재 일본 AV계의 성과는 그야말로 피와 땀이 어린 ‘투쟁’의 결과임을 알게 된다. 7~80년대의 일본 성인컨텐츠, 이른바 핑크무비의 수위는 그 시절 우리나라의 에로영화보다 살짝, 아주 살짝 높으면 높았지 지금처럼 대단한 게 아니었다. 지금도 '노'모쟈이크(무수정無修正-uncensored)는 일본 현행법상 엄연히 불법이다. 일본 AV계도 80년대 후반 시장이 성장하는 전성기를 이루다 90년대 초반 버블붕괴와 함께 움츠렀다가 (이때는 심야TV 수위가 높았다.)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들어서야 대략 지금의 수준을 갖추게 된다. 인류 문명과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기리기리모쟈이크’나 ‘슈퍼모쟈이크’, ‘하이퍼모쟈이크’ 등이 잇따라 개발되며 레이블 간에 치열한 모쟈이크 도트 줄이기 전쟁이 한바탕 치러진 이후다. 그 전까진 수박만 한 도트의 모쟈이크와 콘돔을 사용한 페이크 (전문용어로 헛ㅈㅈ이라 한다.)가 당연시 되는 앗싸리 판이었다.


또한 우리나라는 90년대 초 중반 몇몇 알만한 사람들만 끼리끼리 하던 PC통신이 점차 대중화 하며 인터넷 기반이 넓어지던 시기였다. 또한 98년 O양 비디오 유출 사건이 터지며 대한민국 인터넷 인프라는 세계 최강의 속도와 저변을 자랑할 만큼의 폭발적인 성장을 인정받던 시기였다.


재밌는 것은 90년대 중반이 하필이면 일본 AV계 인디즈의 약진이 도드라진 시기였다는 점이다. 렌탈계(대여)보다 심의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셀계(판매)에 포진해 있던 인디 레이블들이 성장하며 수위가 높아짐과 더불어 시장 또한 들끓었는데 대한민국의 국운이 융성하려고 그랬는지 하필이면 딱 그 시절과 겹치게 인터넷이 대중화되고 지랄이었던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그렇게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90년대 대한민국 두루마리 휴지 판매고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배우들을 소환해 보자. (순서는 순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냥 떠오르는대로 적었음을 밝힌다. 배우의 생년월일과 몸매정보, 데뷔년도와 작품명 따위는 인터넷에 널렸으니까 검색은 너의 몫.)





토토자! 출연진 (순위 아님. 순위가 무슨 소용인가!)


1. 분코 카나자와 (文子, Bunko Kanazawa)


Bunko escolar (2).jpg


‘카나분’이란 애칭으로 불린 당 배우가 애처로운 눈망울과 앵두같이 작은 입술로 청순미를 질질 흘리며 짧은 팔,다리를 한껏 움츠리고 “센세~야메떼~”(선생님~ 이러시면 곤란해욧~)할 때 우리의 애간장도 함께 녹아 내렸다. 카나분은 교복이었고 교복은 카나분이었다. 계보적으로야 80년대 중반 업계를 주름잡은 히토미 고바야시를 비롯해 마리나 마츠모토, 레나 무라카미, 마이 아사쿠라, 아이 이이지마 등등이 있겠으나 90년대 후반, 우리나라 인터넷 기반이 대중화 하던 시기와 당 배우가 한창 활동할 때의 시기가 겹쳐 소위 ‘아다리’가 맞아 그 수혜를 고스란히 때려맞은 배우가 분코 카나자와 되시겠다.



2. 아이카 미우라 (三浦あいか, Aika Miura)


Aika_Miura.png


강해. 달동네 소녀가장처럼 당차게 생겼어. 이 언니한테 걸리면 부러질 거 같아. 스렌다 계열치고 이렇게 당차게 생기기 쉽지 않아. 그리고 KUKI에서 돌아댕기던 사진들도 청순미 풍기는 이미지가 아닌 개 줄을 목에 걸고 있거나 엉덩이를 카메라 렌즈에 접사한 사진들이 주류였지. 한마디로 '용병'이나 '조기축구회' 같은 이미지의 배우였다.



3. 마이코 유키 (夕樹舞子, maiko yuki)


Maiko Yuki.jpg


'깜찍하다’라는 우리말의 어원이 ‘마이코 유키’라는 학설이 있다. 마이꼬유끼->마이꼬유끼->마꼬윸끼->맛꼬윳킼(훗날 ‘마’가 묵음 처리되며)->잇코윳끼->꼿낏->까끽->ㄲㆍㅁ찍->깜찍... 뭐 이런 변천사를 겪었을 거라는 강력한 국어사적 추측이 있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 여튼, 너에게 눈이 있고 사리분별을 할 줄 아는 뇌가 있다면 마이코 유키가 그 시절 최강의 깜찍이였음은 부정치 못하리라.



4. 히토미 유키 (憂木 瞳, hitomi yuki)


hitomi-yuki-824-1.jpg


나카야마 안나(中山アンナ), 쿠도 아즈사(工藤あずさ)란 예명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데뷔와 활발한 활동은 90년대 초였으나 뒤늦게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단단한 고정 팬층을 확보한 저력있는 배우다. 광복을 맞은 김구 선생의 기분이 그러했을까. 4강 진출을 확정짓는 승부차기 슛을 성공시킨 홍명보의 기분이 그러했을까. 히토미 유키의 노모 버젼을 우연히 손에 넣었을 당시 내가 느꼈던 환희와 흥분은 내 인생의 어느 모멘텀을 넘은 기분이었다.

 

 

 

5. 마도카 오자와 (小まどか, madoka ozawa)


madokaozawa.jpg


하아... 그 때 그 시절을 논하면서 마도카 오자와를 논하지 않는 것은 삼국지를 논하면서 관우를 빼먹는 것과 같다. 더 말해 무엇하랴.



6. 셀리 요시노 (吉野サリ-, sally Yoshino)


sallyyoshino.JPG


AV계를 은퇴하고 스트리퍼 생활을 하다가 다시 컴백했다가 하는 행태는 마이코 유키랑 분코 카나자와랑 비슷하다. (지금 언급하는 배우들은 대부분 76~78년생들이다. 그리고 활동시기가 비슷해서 그런지 커리어의 흐름도 공통점이 은근히 많다.) 워낙 얼굴에 색기가 넘쳐나는 지라 나중에 노모 버전을 손에 넣었을 때 당연히 진즉 받았어야 할 채권을 뒤늦게 받는 기분이었다.



7. 치아사 아오누마 (沼 ちあさ, Chiasa Aonuma)


chiasa aonuma.jpg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는 실제로 어떻게 생겼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시대의 미인상과 지금의 미인상은 그 기준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미인상은 존재할 것이다. 난 그런 미인상을 '치아사 아오누마'라 여긴다. 현대적 시선으론 약간 달덩이 같은 얼굴이지만 그렁그렁한 눈매를 내 영혼을 내리 꽂을 땐 일종의 신성모독 같은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미천한 내가 감히 대감마님댁 무남독녀 아기씨를 대하듯 죄스럽고 몸둘 바를 몰라 모니터 앞에서 팬티를 벗어도 돌아서서 벗곤 했다면 말 다한 거 아니냐.



8. 치사토 카와무라 (川村千里, chisato kawamura)


chisatokawamura.JPG


유카 미하라 (三原夕香, Yuka Mihara)라는 예명으로도 활동했다. 내 컴 모니터 바탕화면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을 장식했던 배우. 아즈미 카와시마와 더불어 내 2말3초를 점령했던 분. 내 이상형의 반은 치사토 카와무라요 나머지 반은 아즈미 카와시마였다고나 할까. 지금도 1년에 두 번은 이분의 작품을 꺼내어 감상회를 열며 마치 십수년 전 첫사랑과의 이별을 떠올리듯 실연의 달콤함을 곱씹고 자빠진 건 비밀.



9. 아즈미 카와시마 (川島和津, azumi kawashima)


azumi kawashima.jpg


남자가 모니터를 보며 머릿 속에서 온갖 추접한 짓거리로 유린하고 능욕하고 농락하는 대상이 바로 AV배우이다. 이건 어찌 보면 모자를 머리에 쓰고 신발을 발에 신는 것만큼 당연한 거다. 하지만 AV배우를 보며 그녀의 은퇴 후 행복을 빌어주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잘살았으면 좋겠는 애틋한 맘을 품기란 생각만치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역대 배우 중 그런 배우가 딱 두명이 있었나니, 바로 ‘아야카 오오이시’와 ‘아즈미 카와시마’이다. 꼴랑 3편(4편인가?)를 찍고 (공식적으론 8편인데 기존 촬영의 편집본이므로 실제 출연한 작품은 3편인가, 4편 밖에 안된다.) 은퇴한 것 또한 둘의 공통점. 소프트한 것만 찍은 것도 공통점. AV를 보며 자위를 하기 보단 사랑에 빠진 감정을 느끼게 해준 것도 공통점이라 하겠다. 정말... 언제 어디서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사... 사.... 사랑합니..... 어흙.

 

 

 

10. 미사 이케가미 (池上美沙, misa ikegami)


misa ikegami_1.jpg


위에서 언급한 치아사 아오누마와 더불어 근본이 비천한 나 같은 놈이 감히 옷깃이라도 스쳤다간 그 자리에서 벼락을 맞고 천벌을 받을 것 같은 요조숙녀, 금지옥엽 같은 느낌의 그녀. 쭉 뻗은 팔다리와 엄청 늘씬한 몸매에 기괴할 정도로 큰 골반과 가슴, 그리고 이율배반적으로 청순하고 깜찍한 얼굴. 그러므로 현실성을 결여한 듯한 몽환적 분위기. 그리고 노모 버전은 커녕 온전한 화질의 작품 찾기도 녹록치 않은 도도함과 그에 따른 안타까움까지. 태어나길 잘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 미사양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에필로그


어떠냐. 물론 누락되고 본의 아니게 놓친 배우들도 여럿 될 것이다. 이 지면에서 그 모든 배우들을 죄다 소환하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노릇. 허나 위에 언급한 여제들만으로도 그 때 그 시절을 떠올리긴 충분할 것이다. 90년대 중후반과 2000년대 초를 거치며 외환위기의 끄트머리에서 고통을 겪던 우리 국민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두루마리 소비를 촉진함으로써 내수시장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고마운 분들임을 우리는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겠다.


대저 복고의 시대다. 헌법기관이 기괴한 논리로 정당을 해산시키고 정권에 반하는 낙서를 하면 구속이 되며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닭이 듣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을 회상하는 것은 앞서도 이야기 했듯 가시적인 민주화와 경제적 성과들로 인해 그나마 그 시절엔 그래도 이 사회 전반에 ‘더 나은 내일’이라는 ‘희망’이 흘렀기 때문이다. 지금 그런 희망이 남아 있다면 굳이 십 수년 뒤로 테잎을 돌릴 필요가 없지 않냔 말이다. 


희망이 부재한 오늘. "토요일, 토요일엔 자위나 하자."


토토자.jpg


이상.






마사오

트위터: @masao8988


편집: 너클볼러

Profile
다가오면 찌른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