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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9. 04.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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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전쟁사학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 꼽는 것이 바로 ‘건함 경쟁’이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가 야심차게 키워 낸 제국해군(Kaiserliche Marine)이 영국의 대영해군(Royal Navy)을 압박했고, 둘 간의 격차가 점점 줄어들자 결국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바다를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



란 말이 상식으로 통용되던 시절(지금은 ‘하늘’이 됐지만), 해군 건설은 곧 해외 투사력의 확보란 의미가 됐다. 그 당시 대영해군은 400년간 세계 최강을 자랑하며 전 세계 바다를 누볐다. 이런 해군을 기반으로 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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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대륙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던 영국


여담이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군사력이 단순히 ‘국방’만의 문제가 아니란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영국과 독일은 자신들만의 ‘국가전략’을 가지고 군사력을 육성했던 것처럼, 한 국가의 ‘국가전략’을 기반으로 군사력을 확보하고 이 군사력을 기반으로 국가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덮어놓고 ‘좋은 무기’를 사고, 남이 사기 때문에 우리도 사는 것이 아니란 소리다.


독일의 해군에 대한 투자는 집요했고, 치열했다. 육군 강국이었던 독일은 어느새 세계 2위의 해군 강국이 됐다. 영국과의 총 배수량 비에서는 2.2대 1의 차이를 보였지만, 전 세계에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는 영국으로서는 교역항로를 지키기 위한 병력을 빼야 했기에 독일로서는 ‘해 볼 만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아울러 독일이 다른 해군 강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인다면, 승부는 예측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만에 하나, 독일이 영국과의 일전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세계의 패권 판도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건함 사업은 영국의 세계 패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독일이란 도전자의 등장 앞에 챔피언은 건함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보통 이런 경우 챔피언의 생각은 가장 쉽고, 안전한 길을 찾게 돼 있다.



“도전자가 태세를 갖추기 전, 내가 아직 우위에 있을 때 공격을 한다.”



라는 것이다. 건함 경쟁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사이클이다.



미국 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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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는 새로운 ‘강자’를 목도하게 된다. 그 동안 국제 사회의 절대 강자였던 영국은 몰락의 징조를 보였고, 신흥 강자였던 독일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승자였지만, 프랑스 역시 깊은 상처 속에 신음해야 했다. 제국의 몰락이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세계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유럽이 몰락한 것이다. 그 빈자리를 치고 올라온 것이 신세계의 두 나라. 미국과 일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별로 보지 않았고(미국은 1917년이 돼서야 참전했고, 일본은 아예 유럽 전선엔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전쟁 기간 내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게 됐다. 누군가가 피를 흘리면, 누군가는 돈을 번다는 사실을 증명한 시간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전통적인 강자들이 몰락한 상황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이들은 저마다의 계산속을 가지고 향후의 국제체제를 고민하게 된다. 미국과 일본은 자신들이 국제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패권국가로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뭘 해야 할까?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이 바로 ‘군사력 확충’이었다. 인류사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법칙’.



“외교란 무력을 기반으로 했을 때 그 효용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무력의 기반이 없는 외교란 한낱 술자리 푸념만도 못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나라가 ‘미국’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직후의 미국을 보며, ‘순진하고 생각 없는 덩치 큰 동네 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일부는 맞는 말이지만), 아예 생각이 없는 나라는 아니었다. 아니,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재빨리 확인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의지와 행동력을 갖춘 ‘무서운 형’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대규모 파병을 통해 국제사회에 화려하게(!) 데뷔한 미국은, 곧 자신들의 한계를 확인하게 된다. 제대로 된 기관총이 없어 다른 나라에 기관총을 빌려와야 할 정도로 미국의 군비는 형편없었다. 막강한 자원, 엄청난 인구, 누구나 인정하는 폭발적인 잠재력이 있었지만, 국제사회에서 미국은 그때까진 첫발을 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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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그중 제일 첫머리에 올라간 것이 바로 ‘건함 계획’이었다. 세계의 패권은 바다에서 찾아야 하건만, 그때까지 미 해군의 규모는 열강의 해군이라 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1916년 미 해군은 8척의 주력함을 건조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2년 후 폐기된다.



“8척으로 부족하다. 최소한 28척은 있어야 한다!”



국력에 걸맞는 군사력을 말했지만, 이건 누가 봐도 ‘패권’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다행히도(?) 상식적인 미 의회에서 이 28척 건함 계획은 거부됐다.



“지금 예산으론 28척의 건조는 어렵다. 16척으로 계획을 축소하라.”



16척으로 축소됐지만, 이 정도 수준이면 당대 어떤 강대국 해군과 붙어도 주눅 들지 않을 수준이었다. 비록 주력함 건조계획을 12척 축소했지만, 제정된 해군법령에 따라 미 해군은 1919년 7월까지 156척의 각종 군함을 건조하기로 한 상황이었기에, 1차 세계대전 직전의 독일 제국해군의 위상을 이미 뛰어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은 불안해했고, 전력 확충을 위해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미국은 ‘영일동맹’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


미국이란 나라는 신이 내려준 최고의 입지에 건국한 나라이다. 인접해 있는 두 국가인 캐나다와 멕시코가 있지만, 이들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둘 다 ‘미국 편’이다. 물론, 멕시코와는 소소한(?) 분쟁이 있었고, 캐나다도 ‘미친 척하고’ 미국 침공 계획을 준비한 적이 있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소소한 ‘뒷이야기’일 뿐이지, 국제정치적으로 봤을 때 이들은 미국과 함께 가야 할 존재들이었다. 설사 이들과 전쟁을 벌인다 하더라도 가뿐히 이들을 제압할 실력을 갖춘 게 미국이다.


미국을 공격할 수 있을 만한 국력을 지닌 국가들은 대서양과 태평양 밖에 있었고, 이들이 미국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미국을 상대하기 이전에 대서양과 태평양이란 ‘벽’을 넘어야 했다. 그들이 ‘고립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런 지리적 이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야기가 달라졌다. 세계의 강자로 급부상한 미국을 대적할 만한 ‘힘’을 지닌 국가가 대서양과 태평양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둘은 비슷한 ‘섬나라’였고, 둘 다 ‘해군강국’이었다. 만약 이들이 ‘러-일 전쟁’ 때처럼 힘을 합쳐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밀고 들어온다면, 미국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망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해군력 확충에 나섰다.



모든 걸 쥐어짜 낸 일본. 더 쥐어짜 낼 게 없었던 영국


러-일 전쟁으로 나락에 굴러떨어진 일본 경제를 살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채무국으로서 경제 불황과 긴축재정에 허덕이던 일본 정부에게 ‘유럽에서의 전쟁’은 그야말로 ‘복음’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그리고 이 ‘복음’은 군부에게는 ‘기회’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계속 확대됐던 일본 군부의 팽창을 막았던 유일한 장애물이 바로 ‘돈’이었는데, 그 돈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 해군은 러-일 전쟁 직후에 계획했던, 88함대 계획을 다시 들고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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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8척, 장갑순양함 8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건설하겠다는 이 야심 찬 계획 앞에 일본 정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러-일 전쟁의 상처를 이제야 복구하나 싶었는데, 일본 군부는 다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당시 일본 재정 상황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서가 하나 붙어야 했다.



“쥐어짤 수 있는 모든 걸 쥐어짜 내야 한다.”



1921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기 직전 해에 일본 국가 예산의 32%가 전함을 찍어내기 위해 투입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당시 가상 적국을 ‘미국’으로 정해놓은 일본과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일본이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공격해 올 것이란 전제 하에서 해군력을 확충하는 미국.


이 둘 사이에서 가장 난감해 했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영국이었다.


세계대전이란 급한 불은 껐으나 영국의 상황은 심각했다. 5년간의 세계대전으로 재정은 피폐해져 있었고, 기존의 함대를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미국과 일본이 건함 경쟁을 벌이고 있으니 영국으로서는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선 건함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영국은 기존의 함대도 축소해야 하는 상황이다. 제국은 이제 낙조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의 상황은 전쟁 시절보다 나아진 게 없었다. 아니, 국제정치학적으로 보자면 전쟁 보다 더 나빠져 있었다.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이후, 유럽 대륙은 전쟁 전의 이해관계로 돌아갔다. 프랑스는 친구라기보다 숙적에 더 가까웠고, 이탈리아는 지중해 내에서의 발언권을 높이겠다며 영국의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했다(지금도 이탈리아는 지중해 안에서는 패권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인지 적극적인 개입을 한다). 숙적이라 할 수 있는 독일이 무너지긴 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고, 지구 반 바퀴 저편에 있는 일본은 러시아가 무너진 뒤부터 그 효용이 모호한 ‘친구 아닌 친구’와도 같은 존재가 됐다.


그레이트 게임을 펼칠 때까지만 해도 체스판 위의 ‘말’이었던 일본이 자신의 발언권을 내기 시작했고, 어느새 제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제 영일동맹은 존재 자체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대서양 건너편에서 다음 패권을 노리는(?) 미국이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영토, 풍부한 자원, 엄청난 인구. 게다가 젊었다. 젊은 국가 미국은 활기차게 성장하고 있었다. 세계대전의 결과 잠재력만을 가지고 있던 미국이, 그 잠재력을 폭발시켰고, 스스로의 ‘힘’을 깨닫기 시작했다. 영국으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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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할 식민지는 그대로인데,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다. 이 라이벌은 아무 생각 없이(?) 수십 척의 전함을 찍어내겠다고 벼르고 있는 상황. 영국으로서는 이 무식한 라이벌을 진정시켜야 했다. 경쟁에 뛰어든다면, 영국은 망할 수밖에 없다. 그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서로 경쟁을 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시켜야 한다. 이런 고민을 하던 찰나에 ‘낭보’가 날아왔다.



순진한, 너무도 순진했던 미국


제1차 세계대전 최고의 수혜자였던 미국. 이때까지의 미국은 ‘순진’했다. 이상주의에 빠져있던 미국은 모략과 음모가 횡행하는 국제정치의 한가운데서도 자신의 ‘순수성’을 지켰다.


베르사이유 조약 1조가 그 증거이다. 우드로 윌슨은 평화원칙을 말하며, ‘국제연맹’의 창설을 주장했다. 웃기는 건 미국의 주도하에 만든 국제연맹에 정작 본인은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 상원에서 먼로 독트린(유럽 일은 유럽이 알아서 해라. 다만, 아메리카는 건들지 말라는 선언)을 이유로 국제연맹 참여를 거부했던 것이다.


듣기엔 좋은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 우드로 윌슨 개인의 이상주의의 결과라고 폄하해야 할까? 그러나 ‘고립주의’는 미국의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우드로 윌슨의 뒤를 이은 이가 그 유명한(?) 하딩(Warren Gamaliel Harding) 대통령이었다는 건 국제정치학적으로 보자면, ‘축복’이었다.



"전 대통령직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며 이 직책을 맡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하딩 대통령이 자신의 친구였던 버틀러(당시 컬럼비아 대학 총장)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중 일부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하딩이 1920년대 초반에 미국 대통령으로 있었다는 건 전 세계적으로 축복이었다(물론, 그 뒤의 ‘대공황’의 원인으로 그가 꼽힌 걸 보면 축복이 아니라 잠시 악운을 뒤로 미뤘다가 이자까지 쳐서 한꺼번에 터트린 인물이라 봐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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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사건과 수많은 스캔들(백악관에서 바람 피다 걸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금주법의 한가운데서 백악관에서 술판을 벌인 대담함. 대공황을 막을 기회를 날린 멍청함 등등 수많은 실책. 아니, 실책이 아니다. 그의 국정운영 기본 방침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게 신기하지만(그의 유일한 강점인 ‘얼굴’이 그를 대통령으로 올려놓았다.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대통령으로 나온 그를 보고, 여성 유권자들이 몰표를 줬다), 그의 대외정책은 인정해야 했다.


그는 전통적인 고립주의 노선을 지지했고,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에 다시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그의 공약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의 단초가 되는 ‘건함 경쟁’을 묵과할 수만은 없었다. 아이러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축조약을 성사시켰다는 것. 역사의 의외성이라고 해야 할까?


최악의 대통령은 자신이 역사에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세계 평화를 위한 워싱턴 회의를 선언하고, 열강들을 불러 모으게 된다.





*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http://hohodang.com/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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