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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20. 화요일
홍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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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몇몇 장소들을 오갈 때마다, 주로 자판기 커피가 나름 특출나게 맛있는 곳이 있구만 싶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한 군데는 포항 남부시장 영암도서관 커피 자판기이며, 다른 한 군데는 포항 환호동 청소년 수련관 커피 자판기. 바로 위의 사진의 것이다. 사람의 손길이 아니라 철저하게 기계의 힘으로 작동하는 건데 뭔 차이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분명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자판기용 커피 믹스를 뭘 쓰느냐의 차이. 바로 그것이다. 

알고 계시겠지만, 커피 자판기에 쓰이는 커피 믹스는 주로 동결 건조가 되어 있는 맥심과 분무 건조로 이뤄진 맥스웰 하우스다. 어차피 둘 다 한국에서는 동서식품이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동서천하'겠지만, 그나마 맥심 커피믹스가 포함된 자판기 커피를 보기도 힘들게 돼버렸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선 그렇게 자주 보이던데 이상하게 포항 시내에서는 발견이 잘 안 되더만. 개인적인 생각이다만, 포항의 종이컵 커피 자판기는 '분무 건조 커피믹스 천국'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커피믹스 제조기술은 전 세계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라고 하는데, 그건 아마 유지하기 힘든 동결건조 방식을 지금껏 고수하면서 만들어 오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시겠지만, 분무 건조와 달리 커피 액상을 추출한 후 급속도로 냉동시켜 건조하여 특유의 향과 맛을 날려버리지 않는 동결건조 커피믹스의 맛이 뛰어나다. 분무 건조 방식은 동결 건조 이전에 애용되던 것인데 일명 열풍 건조 방식으로도 불린다. 뜨거운 열풍을 통과시켜 수분을 증발시키고 커피 결정만 남게 하는 방법인데 동결 건조에 비해 커피의 맛과 향이 상당수 날아간다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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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출시된 한국 최초의 커피 믹스 맥스웰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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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한국 최초의 동결 건조 커피인 맥심의 출시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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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심(좌)과 맥스웰 하우스(우)의 커피믹스 내부.
(사진 출처: 이탈리코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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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심 커피믹스는 여전히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영혼의 파트너다.
동명의 잡지도 그렇다는데, 이걸 쓰면서 문득 저 때 커피믹스를 가지려다 장갑을 놔두고 갔던 의경은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궁금해졌다.
(출처: 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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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히 말하면 그냥 커피 믹스 두 봉 태워서 먹는 건데, 
정보석 형님이 "맥심 모카 골드 더블 샷!" 하니까 뭔가 있어 보이겠지를 노린 광고가 아니었나 싶다. 

실제로는 광고 보면서 "커피믹스 두 봉 태워 먹는 건데 더블 샷은 무슨.." 이라고 
중얼거렸기 때문에 적어도 나한테는 효과적이진 않았던 거 같다.
커피믹스에는 저 표현 별로 어울리지가 않아 보인다. 그냥 내 생각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난 동서식품의 커피믹스보다는 한국 네슬레의 네스카페 커피 믹스 취향이라는 점이다. (원래는 남양 프렌치 카페 커피 믹스 파였으나, 후에 그 회사는 볼드모트처럼 이름을 거론해선 안 되는 곳으로 변하고 말았지) 하지만 대부분 자판기가 동서 식품 커피믹스를 쓸 게 뻔하고, 설탕과 프림을 배제한 커피들의 맛은 다 전에 먹었던 것들과 비슷비슷했다. 맥스웰 하우스 건 특히 맛이 없었다. 설탕'만' 들어간 커피는 좋아하지 않는다. 들어갈 거면 프림이랑 같이 들어가든지, 아니면 들어가지 않는 게 제일 낫다. 그런데 두 장소에서 먹었던 '설탕 프림 커피'들의 맛은 꽤 신선했다. 난 한국 네슬레 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커피가 맛있어. 기계가 부어야 할 재료의 양을 기계답게 소름끼치게 잘 부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뭔가 특별한 레시피라도 있나?

실제로 청소년 수련관의 경우는 관리자의 얼굴을 지금도 한 번을 못 봤기에 알 수 없지만, 영암도서관의 경우에는 몇 시간의 잠복을 통해 맛난 커피의 비결이 뭘까 알아내려 한 적이 있었다. 사실 몇 번 다니다 보니 정해진 시간에 커피 자판기를 관리하러 누군가가 왔었기 때문이다. 그 날도 한 손에는 자판기용 커피믹스, 한 손에는 큰 물통을 들고 웬 부부가 와서 자판기의 문을 열었다. 내가 지켜보고 있는 쪽이 자판기 문에 가려지는 형국이라, 뭐가 그리 좋은지 하하 호호 웃으면서 농지거리를 주고받는 부부의 등이 들썩들썩 거리는 것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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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도서관 얘기를 하고 있는데 사진은 자꾸 청소년 수련관 커피 자판기를 게재하는 중.


영화에서나 상상한다는 180도 상상선을 긋고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 보기로 했다. 카메라를 자연스럽게 패닝하는 듯한 기분으로 두둠칫 두둠칫 거리며,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된다는 듯한 마음으로, 거의 투시하는 수준으로 부부의 속곳까지 보겠다는 마음으로 그들의 뒤로 갔다. 그러나 오래 보지는 못했다. 기계라면 온전히 관조하듯 담아내면 되지만 나나 그들은 사람인지라 그게 불가능하다.

사회의 발전은 사소한 행동에도 차별의 정서를 심어 놓았다. 문득 지켜보는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지 않나 싶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도 아이들은 청소시간 때 빗자루를 들고 쓰는 걸 좋아했지.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쓰레받기를 담는 역할은 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써댔다. 그저 누군가는 앉아있고, 누군가는 서 있을 뿐인데 사회는 서 있는 사람이 앉아있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구조에다 계급과 '인간의 수준'을 결정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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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서 있고 앉아있을 뿐인데 '난 고귀하고 넌 하찮아.'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후, 그 누구도 앉으려 하지 않는다. 설사 그럴 의도가 없다고 해도 앉아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행위는 마치 업신여김의 대명사처럼 되고 말았다. 혹시 그럴 의도가 없다 해도 이제는 기계가 아니고서야 그런 행동을 지속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거 자판기의 비밀을 캐내려고 한 건데, 자칫하다가 내가 바라보는 게 들키기라도 하면 요즘 시대에서는 멱살을 잡힐 게 뻔하군. 결국 나는 판단을 바꾸고 다시 자판기 문 옆으로 돌아가서 움찔움찔 꼼지락 꼼지락 들썩들썩하는 부부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문을 넘어서서 봤던 것을 복기해볼 때, 인상적인 부분이자 비밀의 핵심이라 할만한 게 있었다면 꼼꼼한 청소였다. 기본적으로 자판기의 메뉴가 율무차, 코코아 등등 분말 가루들이 물, 설탕, 프림 등과 섞여 만들어지다 보니 내부 기계에 그것들이 섞여진 채로 자연스레 끈끈허이 붙어있을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노즐이 찐득하게 붙어 있거나 막히는 경우가 많았다. 부부는 이것들을 모두 깨끗하게 닦아내고 있었다. 모든 자판기 커피 관리인들이 이렇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누군가는 그냥 폐수통을 치우거나 부족한 커피 믹스와 재료의 양을 채우는 선에서 멈추고 있을지 모른다. 자판기에 쓰이는 커피 믹스의 퀄리티가, 혹은 프림이나 설탕의 퀄리티가 다 고만고만 하다고 가정했을 때, 결국 커피 자판기의 퀄리티를 좌우하는 것은 이런 내부 청소가 아닐까 싶다. 커피 전문점의 커피 머신 청소와 비슷하게 말이다. 나와야 할 프림이나 설탕, 혹은 믹스가 노즐들이 엉키고 막혀서 적정량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상태의 커피 자판기가 의외로 많지 않을까. 혹시 더 좋은 자판기 커피 믹스를 쓴다면 모르겠지만, 그걸 90이라고 치고 나머지 10을 통해 가려진다면 그건 바로 기계 관리에서 나오는 것 같다. 말하자면, 결국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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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B, 엔알키노! 님의 <인터스텔라> 4컷 만화 중 '갑론을박' 편)


문득 움찔움찔 대는 부부의 등짝을 보며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터스텔라>가 생각났다. 극장에서 볼 때 에드먼즈 행성으로 가자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말하는 앤 해서웨이의 논리는 굉장히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사랑이야말로 시공간과 차원을 뛰어넘는 강력한 힘이니 닥치고 가자. 다시는 사랑을 무시하지 말라는 아우라가 느껴지는 듯한 그 말. 처음 극장에서 그 시퀀스를 볼 때는 본의 아니게 비웃음이 터지면서 "아.. 저기요. 지랄하지 마십쇼." 라는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사랑으로 관리된 자판기에서 꺼내 마시는 커피 믹스의 맛은 의외로, 상당히 특출났다.

그 부부들이 이 자판기 커피를 마실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뒤에서 봐도 그렇게 사랑이 넘쳐 보이는데 말이지. 내 생각으로는 두 사람은 본능과 사랑의 결과물인 서로의 정액과 질액, 쿠퍼액 등등을 핥아 먹기에도 바쁠 것이다. 하긴. 정액은 먹으면 피부가 좋아지고 불로장생의 효능이 있으며, 자궁 경부암을 치료하며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좋다고 한다. 스위스 등등 우리가 사대주의를 거리낌 없이 내뿜으며 숭배해 마지않는 유럽 굴지의 대학 교수가 발표한 것이지만, 또 참고로 그 교수의 이름이 '모짜렐라 슈나이저'라는 것이 밝혀졌고, 온라인상에서 그런 교수와 논문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허위사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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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뭐, 의지가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는 법이지. 일본의 AV 배우들을 비롯한 누군가는 지금도 충실히 먹고 있을 것이며 그걸로 세상의 누군가를 의롭게 하고 있을 것이다. 서로서로 사랑을 먹고 자라니 굳이 '이깟 자판기'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인데, 그들은 끝끝내 사랑으로 자판기를 관리한다. 부부의 자애로운 관리의 결과물을 가끔 내가 오다가다 하면서 먹고 있다. 보온병에 차 담아가는 거 깜빡하는 날에는 거의 무조건이라고 보면 된다. 커피가 든 종이컵을 한 손에 쥐고 의자나 계단에 앉아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인스턴트 음료는 설탕과 프림이 범벅이 되어 있어 노폐물로 점점 내 몸에 축적 된다. 머리로는 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몸에 계속 쌓일 테니 결국 저걸로 인해 나는 죽겠지. 그 생각을 하고 눈을 다시 내리깔아 보니 크아..이거는 정말 완전히 맹독 중에서 엑기스만 뽑아내서 만든 것만 같다. 비참해졌다. 그 부부는 오래 살 거고 나는 죽는가 보군.

커피를 바라보다 잠시 잊고 있었던 어어부 프로젝트의 신보 소식을 떠올렸다. <탐정명 나그네의 기록>이라는 앨범이다. 내가 군대 복무하고 있을 때 앨범을 만들어 콘서트를 하고 다니던데, CD 매체로 발매하는 건 거의 작년 말이나 올해 즈음에 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무척 아쉬운 앨범이라고 부를만하다. 좋은 줄도 모르겠고 박찬욱 감독의 <파란만장>의 도입부를 장식했던 '빙판과 절벽'은 그냥 그 작품 속에서 부른 버전이 더 듣기 좋았다. 나레이션을 맡은 문성근 목소리만 계속 듣다 말았다. 난 바로 전해에 어어부 프로젝트의 멤버인 백현진과 방준석이 장률 감독의 <경주>의 사운드트랙으로 불렀던 '사랑'을 더 좋아한다. 가끔 '사랑'의 가사를 보면서 느끼는 건데, 우리는 흔히 남녀 간의 애정 교류를 사랑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 곡은 잘 팔리기 위해서 제목을 맥거핀 삼아 저따위로 지어놓고, 실은 커피 자판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살고 있다. 하루를 산다는 건 곧 죽음을 향해 한 발짝 내딛는 길이다. 근데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종이컵에 커피 들고 앉아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자빠졌다. 내 정액을 먹어도 모자랄 판에, 별 상관도 없는 백현진의 노래 가지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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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가만있어봐. 내 정액을? 그래, 맞아! 내 걸 먹고 불로장생을 해야겠어! 맞어. 정액은 단백질이잖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어. 근데 생각해보니 바깥으로 배출되는 걸 다시 먹어봐야 또 나올 텐데. 이건 무슨 악독한 순환구조인가!? 꼭 나아질 기미가 없어 보이는 우리나라의 노동과 착취의 구조를 보는 듯한 느낌이군! 상관없어. 어차피 이 독약을 먹으면서 수명 단축을 재촉하는 이 절망의 시대에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당장 도서관 화장실로 뛰어가서 내 외눈박이 뱀과 한 판하는 거야! '

불현듯 성욕이 발동한 나는 마음속으로 '씨발 비켜! 존나 나는 오늘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를 외치며 (대놓고 외칠 자신은 없었다.) 도서관 화장실로 뛰어갔다. 나는 헉헉 거렸다. 헉헉거리는 입김의 색깔이 분홍색이었다. 굉장히 음란한 입김이었다. 나는 둘둘 거리는 휴지를 이빨로 찢고, 곧바로 바지춤을 내렸다. 허나 결국 인성이 먼저 말리는 바람에, 소변만 보고 치웠다. 커피가 일으킨 배뇨 작용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다행이다. 내겐, 나의 방이 있지 않은가. 자아가 가진 존엄성을 이런 식으로 훼손하는 행위는 인간으로서 적절치 못했다. 나는 소변 행위를 마친 뒤 깨끗하게 손을 씻어 손끝에 묻었는지 안 묻었는지 모르는 노폐물을 제거했다. 그리고 다시 앉아서 남은 커피를 마셨다. 

좋은 맛이었다. 포항시 전국에 배치된 자판기 커피가 모두 이 퀄리티라면 평생 마셔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디 프랜차이즈 커피집에 앉아 있었다면 본명이 아닌 닉네임으로 커피를 받는 서비스를 택한 채, 나무 탁자 위에 무럭무럭 김이 나는 커피를 마시지는 않고 카메라로 지속적해서 찍다가 어느 정도 마시고, 스마트폰 카톡 질에나 열중했을 텐데. 계단이나 건물 자체에서 마련된 의자에 앉아 마시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알고 이 아름다운 문학으로 승화시켜야 (시간 낭비를 덜 했) 겠다는 열정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나는 그 날도 인생의 낭비가 됐을 법한 일을 자기만족으로 승화시킨 채 별로 한 일도 없으면서 웃음을 머금은 채 잠이 들었다. 맛있는 커피 덕이다. 음. 위에서 줄기차게 언급한 사랑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결말 부에 이르고 보니 꼭 그거 덕분인지는. 그냥 커피가 위대한 거야.



p.s. 써놓고 보니 글이 무척 역겹다. 어쨌든 이 글의 결론은 혹시 포항에 오시게 되거든 영암도서관과 환호동 청소년 수련관의 자판기 커피를 한 번쯤 드셔 보시라는 의미다.







홍준호


편집: 딴지일보 나타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