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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당시 우리나라 최고층 빌딩에 입주한 세계적 유럽계 다국적기업에 입사한 패기만만한 젊은이가 있었다.


60년대 해병대 사병으로 복무했고 이등병 시절 신삥 소위들에게 경례를 하지 않아 홀로 수십 명의 소위들과 다구리 붙어 여군 내무반으로 도망쳤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의 패기. (경례를 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만 해도 해병대 이등병이 육군 소령과 맞먹던 시절이라 그랬단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깡이 있었다는 얘길 하기 위함이니 넘어가자.)

 

그런 젊은이가 당시 최고 수준의 봉급과 복리후생 첨단 수준의 근무환경을 갖춘 꿈의 유럽계 기업에서 일을 하게 되었단다. 본인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사람팔자 모르는거구나" 했다는데,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건지 근무하다 보니 이 꿈의 직장이라 불리던 곳에도 묘한 갈등이 있었고 결국 노동쟁의에 들어갔다고 한다. 내건 조건이라는 게 '(사측 나라의) 민족적 우월성을 나타내지 말 것', 뭐 지금 보면 싱겁기까지 한 조건이다.

 

그러나 70년대초는 전태일열사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고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분신하던 시절이었다. 저런 싱거운 노사분규가 먹힐 리 없었고 차츰 이탈하는 박쥐같은 인간들이 하나 둘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불타는 가랑잎 같은 성격의 젊은이는 사무실에서 사측 사람에게 주먹을 날리고 결국 저 신선놀음을 하며 다닐 수 있던 직장에서 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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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둑한 퇴직금을 받은 그는 1974년 4월, 그 돈으로 마포인지, 당인리인지, 어느 촌구석에 폐업한 소금창고를 빌려서 중고 고물 선반을 한 대 사다가 놓고 창업을 한다. 그의 이름은 '이창우', 회사이름은 '제세산업'이었다.

 

기계부품 가공사업을 몇 년 하다가 사업에 자신이 붙은 그는 시내에 사무실을 차리고 1977년 8월 무역업 등록을 하고 중동 수출바람에 힘입어 창업 4개월만에 천만 달러라는 수출실적을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당시 '원기업', '율산', '대봉그룹' 등과 함께 '앙팡테리블' 즉 재벌을 위협하는 무서운 아이들로 불렸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일본에서 컨테이너 선박을 사서 '제세엠비션호'라고 이름 짓고 해운업에 진출하고 '쌍미섬유', '진영전자', '대성건설'을 인수해 제세그룹이 된다. 


마지막으로 인수한 기업은 중동 건설시장 진출을 위해 탈세 혐의로 무너진 유수의 중견 건설업체, '대한전척'이었다. 당시 중동에서 제일 잘 나가던 이란의 테헤란 외곽의 신도시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성공하면 무려 4억 달러를 버는 건수였다. 지금 4억 달러라면 우습지만 1973년은 한일합섬이 단일 기업 사상 최초로 1억 불 수출 목표를 달성해 대한민국 모든 언론과 온국민의 찬사를 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제세가 인수한 다음 날 대한전척의 해외 건설면허가 취소된다. 그로서는 거금을 끌어모아 대한전척을 인수한 이유가 사라져버렸고 대한전척의 막대한 부채만 남았다. 자금난에 빠진 제세는 은행을 돌면서 구제금융을 요청했지만 모두 차갑게 거절당하고 맨주먹으로 창업 3년 만에 수백 억대의 자산을 축적했던 제세가 겨우 천백만 원수표를 막지 못해 부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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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기업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재벌 25시 3권의 표지. 

오른쪽 세 번째가 이창우.


그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제세그룹의 투명성은 수사관들이 감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사장! 우리가 수많은 경제사범들을 다뤘는데 이사장만큼 깨끗하게 사업한 사람이 없었소 대단하오! 나가면 우리를 못 본 체하지 말고 술 한 잔 사시오!"


"걱정마시오 나중에 힘들면 찾아오시오. 하다못해 경비로 취업시켜서라도 최소한 경찰 월급보다는 훨씬 많이 주겠소."


그러나 잘 나가던 기업의 추락에 신이 난 당시 언론들은 기사를 이렇게 때렸다. 


'시멘트 대신에 돌멩이를 위장수출한 사기꾼'


분위기는 급변했고 못 본 체하지 말라던 수사관들의 태도 역시 돌변했다고 한다. 


"이사장 미안하오.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어서..."


한 번은 검사가 조서를 꾸미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 


"제세는 세상을 제패한다는 뜻인가?"


이때 잔뜩 냉소적이 되어버린 이창우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제미랄 놈의 세상이라는 뜻이오."


1978년 10월, 그는 구속되었고 1979년,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난다. 나와서 보니 제세산업은 공중분해되어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이창우는 여기에 굴할 사람이 아니었다. 1981년 그는 대한민국 정, 재계 특히 신문사 기자를 상대로 요즘 김구라 김용민은 명함도 못내밀 신랄한 막말 독설 저주와 육두문자를 넣어 '옛날 엣날 한 옛날'이라는 제목을 달아 책을 냈다. 표지사진은 자신이 수갑차고 끌려가는 장면을 넣었는데 이게 베스트 셀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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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표현 수위를 보여주고자 지금도 기억나는 대목들을 소개드린다.


데스크의 기사 압박은 심하고 쓸 건 없고... 제세산업 이창우 이놈을 엮어보자. 몇 년 전 대한민국 금융 사기의 원조사기꾼 '박*복'도 징역 10년 선고받았는데 이놈도 비슷하게 징역 살고 나와서 뭘 어쩌겠나? 대충 써서 넘기고 빨리 신촌 니나노에 가서 영자나 만지자. 

(당시 기자들의 생각이 이랬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써놓은 대목)


웃지 마라. 다른 신문 기자 놈들 너희도 똑같은 놈들이다. 베껴 쓴 게 아니라면 왜 전부 똑같냐? 돌멩이 위장 수출? 돌멩이 수만 톤을 어떻게 모으냐? 골목에서 짱돌 주워 모으면 수만 톤 되냐? 차라리 시멘트가 더 구하기 쉽고 싸다.


일제 시대 친일로 살아남은 너희들... 일본의 마이니치신문 아사히신문은 대본영 발표대로 써서 전황을 호도한 죄를 전후에 일본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죄했다. 너희는 뭐냐?


 

그는 글 말미에 이렇게 썼다.


"지금부터 내 이름을 넣고 기사 쓰면 쫓아가서 물어 죽이겠다."


그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이런 나라에서는 예비군훈련도 안 받겠다"라고 선언하고 마카오인가, 어딘가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그런 그를 오늘날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의 언론 환경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앞에 미처 소개하지 못한 이창우의 일화가 있다. 유럽계 기업을 그만 둘 때, 지사장인지, 본사에서 나온 책임자인지, 마지막 만남의 자리가 있어서 빌려 입은 트렌치코트의 깃을 세워 나름 폼을 잡고 나간 그, 묘하게 요즘 상황과 겹치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 금발의 책임자가 하는 (영어로) 말이,


"미스터리! 우리는 이번 사태에 대해서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유감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은 뭡니까?"


"아... 그게... 이게 미스터 리 당신이나 우리나... 양측 모두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다 보니... 서로 오해가... 유감이라는 뜻은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대인지뢰 폭발로 시작된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 대치국면이 북측의 '유감' 이라는 표현 하나로 해소되었다고 대한민국의 대부분 언론은 '정부가 확고한 원칙 아래 초지일관 강경 대처해서 항복을 받아냈다'라고 찬사를 쏟아내고 있다.


유감? 


내 기억에 이 용어는 70년대부터 대한 외교 언어로 일본 정부가 수없이 사용하던 용어다. 유감이 그토록 절실한 사과의 뜻이라면 왜 아베수상에게 지금 또다시 사과를 요구하나? 그리고 유감 표현은 DJ정부 시절 연평해전 직후 북한이 지금처럼 압박을 가하지 않고도 그들 스스로 썼던 표현이다.


그때는 '유감이 어떻게 사과냐?'라고 물어뜯고 의미 평가절하하던 언론이 왜 지금은 사과의 표현이라고 용비어천가를 불러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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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과를 받고 싶었다면 이창우 사장처럼 상대가 '유감' 어쩌고 하면 그 자리에서 확실하게 의미를 확인받아야 했다. 그가 글과 행동으로 보여준 여러 가지를 아직도 대한민국 기레기들이 새겨 들어야 될 것으로 사료되는 바, 딴지는 얼른 이창우씨를 수배해서 딴지 경제부장 고문 아무거로나 초빙하고 그의 글을 연재하길 바란다.


그의 육두문자 점철된 원조 딴지체스러운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만큼 대한민국의 지난 시대, 특히 그 시절의 경제부문의 흑막의 역사를 신랄한 딴지체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는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kuru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