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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26. 월요일

김현진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나를 스쳐 간 당신의 몸, 

당신의 이마를 한때 어루만졌던 누군가의 손, 

아스팔트 위에서 사정없이 깎여나가던 누군가의 피와 살,

철탑에서 얼거나 타들어 가는 몸들, 

당신이 나를 낚아채 주길 바라면서 

숨죽여 뺨을 대 보았던 당신의 쇄골.


몸은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은밀한 삶을 알고 있다.

이것은 그 '몸'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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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의 몸살]헐리우드 액션

[김현진의 몸살]울지말아요, 다들

 

 

 





남자 둘을 위한 밥을 차렸다. 정성껏 장을 봐다 썰고 지지고 달달 볶았다. 아들과 남편을 먹였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태산 같은데 흥, 나는 아버지도 없다. 이건 다 남의 남편들이 먹을 밥이다. 뭣하러 이러고 있냐 하면, 그 남의 남편들이 평택 쌍용차 공장 굴뚝 위에 있는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창근 씨, 김정욱 씨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는 시사 팟캐스트 <김남훈의 과이언맨>에서 쌍용차 특집 방송을 하게 되어 <한겨레> 허재현 기자와 쌍용차 해고노동자 고동민 씨를 모시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결국 말미에 가장 궁금한 것은 '그래서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가'였다.


이창근님 트위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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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작가가 차린 밥상



자본주의 틀 아래 살면서, 나는 늘 최상의 연대는 입금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돈 만원 계좌에 던지고, 내 트위터에 알티 몇 번 하고, 페이스북에 '좋아요' 한 번 누르고 할 일 다 한 듯 마음이 편해지는 간편한 연대의 남루함도 늘 경계해야 한다고 믿는다. 늘 잘 놀다가도 어떤 이들을 생각하면 왈칵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것이 연대라고 믿는다. 그동안 내 힘겨움에 휩싸여 그렇게 살지 못했다. 그래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중 '굴뚝밥상'에 제일 마음이 갔다. 최근 일 년 정도 지방의 어느 대안학교에서 주방 봉사를 하면서, 밥 해먹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낯 안 나고 품 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던 차 밥 차릴 거리가 있다기에 기꺼이 그걸 하기로 했다. 굴뚝 위의 두 사람이 먹을 두 끼 식사를 매일매일 밧줄로 달아 올리는데, 해고자 가족이 그 밥 차림에서 일주일에 하루 한 끼라도 놓여나도록 토요일 저녁 식사를 차려 배달 가는 것이 '굴뚝밥상'이라 했다. 평택역에 내려 택시를 탔다. "쌍용차 공장 정문 앞에..." 라고 말하자마자 기사님이 "아, 그 데모하는 데요?"라고 받았다. 2009년에 와 본 평택 공장과 주위 풍경은 그리 변하지 않았지만 장기투쟁 현장의 어딘가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은 어디나 비슷했다. 2008년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뼈와 가죽만 남은 김소연, 유흥희 조합원을 보며 사람이 백 일을 굶었다고? 하고 정신이 멍해지던 기분은 까마득한 굴뚝을 올려다볼 때 다시 찾아왔다. 사람이 저 위에 있다고? 한 달이나 넘게? 2009년 이맘때의 용산 풍경도 같았다. 저기 사람이 있다고?


저기사람이있다.jpg


몇 년 전 시사주간지에 글을 쓰기 위해서 ktx 고공농성장을 찾았을 때는 보다 사실적인 취재를 위해 철탑에 올랐다. 사다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부터 농성장을 꾸려놓은 곳까지 올라가려면 슈퍼마리오처럼 재주를 부려야 했다. 대소변을 양동이로 달아 내려야 했기 때문에, 여승무원들은 아주 조금 먹었다. 몇 안 되는 남성 조합원의 운명으로 철탑에 올라가 있던 이는 등산용 로프로 철탑에 몸을 꽁꽁 묶고 있었다. 지독한 고소공포증 때문이라 했다.

 

"이게... 도움이 돼요?"


"그냥 기분상 도움이 되지 뭐~"

 

로프로 몸을 묶은 이는 덜덜 떠는데 옆에서는 코를 쓱 만지며 그냥 기분이라고 웃었다. 차마 울 수는 없어서 웃을 수밖에 없는 기분. 얄궂게도 KTX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철탑은 덜덜 흔들렸다. 보통 장기투쟁 농성장을 찾아갈 때는 담배나 몇 보루 사 가면 모두가 기뻐하는데, 여기는 젊은 여승무원들이 있지 않나 싶어 크리스피 크림 더즌 박스를 몇 개 지고 가서는 어째 미제의 똥물을 퍼다 나른 것 같아 머쓱해 있는데 자다 일어난 어느 여승무원이 눈을 비비며 반갑게 말하던 그 조그만 목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 크리스피 크림... 어제 XX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지금도 고공에 몇 사람들이 있다. 영하 10도까지 기온이 떨어지던 밤 오체투지를 했던 사람들이 있다. 유민아빠 김영오씨는 겨우 회복된 체중이 56KG라고 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제 몸을 깎아 가면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세상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아니, 제 몸을 깎아도 정말 죽을 때까지 깎아내야 들어 줄까 말까 하는 세상은. 아가씨들이 그까짓 도너츠도 못 먹고, 사람이 백 일을 굶어야 쳐다볼까 말까 하는 세상은. 좀더 불편해야 한다. 잘 놀다가도 왈칵 마음이 가야지 싶다. 그럴 때면 돈 만원 쏘고 알티도 하고 좋아요도 누르고 밥도 차리고 함께 가자. 어디로? 어디든 거기 말이다. '그 데모하는 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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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작가와 이창근 씨의 부인

 

 





김현진


편집: 나타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