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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1. 30. 금요일

문화불패 JINO








편집부 주


이 글은 '화불패에서 납치되었습니다.



JINO 님의 글은 1 더 납치될 시, 

삼진 아웃의 원칙에 따라 

딴지 필진으로 임명되어 강제 노역에 동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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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올린 글이 딴지 마빡에 올라가면서 '이러다 두 번 더 올라가 강제노역에 동원되면 어쩌지?' 하는 자뻑성 걱정(?)을 잠시 했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넋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사이 종교 관련 글을 계속 올려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으나 귀찮기도 하고, 시간이 없기도 해서 그냥 있었다. 그러다가 예전에 써놓은, 지금은 하드 디스크 깊쑤키 짱박혀 있는 글들을 그냥 저렇게 놔두면 뭐하나 싶어 그거라도 올려볼까 한다. 그 가운데 오늘은 '정치와 종교'에 관한 글을 수정 보완해서 이곳에 올린다.

 

 

오늘 다룰 주제는 ‘정치와 종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정치, 또는 권력과 종교의 관계’다. 이것이 총수 덕인지 아님 MB 가카 덕인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때 보다도 뜨겁다. 거기에 종교까지 가해지면 그 열기는 모르긴 몰라도 더 올라갈 것이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 여러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현실 속에서는 이미 오래전 부터 직접적으로 와 닿는 내용이지만, 한편으론 지금껏 제대로 정리된 적이 별로 없는 대표적 주제가 바로 '정치와 종교의 관계'다. 


전에 기독교계에서 19대 총선을 겨냥해서 기독교 정당을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이에 대한 대부분의 반응은 '욕'이었다.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거나 참여하는 것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아예 제도권 정치를 하겠다고 했으니 이건 욕을 자셔도 곱베기로 자시겠다는 상황.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2008년 촛불집회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용산참사 현장, 그리고 현재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 반대 투쟁, 밀양 송전탑 문제 등에 앞장서고 있는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과 가톨릭 수녀회 수녀님들에 대한 지지와 존경 그리고 찬사도 있어왔다. 나는 이 두 집단에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주체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엇일까? 역시 사안의 핵심은 정치와 종교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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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한 줄이 명문이다.


그렇다면 권력(정치)과 종교는 서로 어떤 관계여야 할까? 이런 규범적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우선 권력과 종교는 서로 어떤 관계인가 하는 점을 논해야 한다. 일본의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의 저서 <곰에서 왕으로: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의 한 부분을 잠시 인용하겠다.


 

"수장의 권의를 유지해 주는 것은 이성의 일종입니다. 반면 왕의 권력은 성대한 종교적 의식에 의해 연출되어야 합니다. 왕은 이성과 다른 종류의 힘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자연'의 소유였던 권력을 사회의 내부에 있는 왕이 체현하는 것이 왕권이므로, '대립하는 것의 일치'를 당당하게 연출할 수 있는 종교적 제의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왕의 권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중에서
 



원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나카자와 신이치가 시용한 '수장', '자연', '대립하는 것의 일치' 등의 개념이 가진 의미를 설명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고 그냥 재미있는 책이니 그의 책을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여기서는 그냥 왕권, 즉 권력, 그리고 그 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하는 행위로서 정치가 가진 종교와의 태생적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는 정도만 파악하면 되겠다.


근대 이후 많은 나라들에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하나의 원칙이 되었다. 1871년에 프랑스의 교육학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페르디낭 뷔송이 정교의 분리를 라이시떼(laicite)라고 칭했고 1905년 프랑스에서 최초로 정교의 분리에 관한 법률을 재정하면서 이것이 하나의 정식용어로 자리잡는다. 대한민국 역시 이 라이시떼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20조 1항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에 이어서 2항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된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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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약 15개국 정도가 라이시떼를 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라이시떼, 즉 정교분리의 원칙은 지켜질 수 있는가? 바꿔 말하면 정치와 종교는 과연 (완전히 혹은 완벽하게) 분리 될 수 있는가? 또 그런 적이 있긴 있었는가? 없었다면 앞으로는 가능한가? 라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다. 앞서 소개한 인용구가 암시하는 것처럼 라이시떼는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고 더 나아가 오히려 정치와 종교는 태생적으로 공생관계이며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이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바라보는 본인의 기본적 입장이다.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을 종교학적으로 다소 거칠게 요약하자면 권력이 종교에서 세속권력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좀 더 디테일하게 보자면, 그 사이에 정치 권력의 주도권이 종교와 세속권력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워 익히 아는 '교황의 아비뇽 유수'와 '카노사의 굴욕'이 그 대표적 예이며, 중세에서 근현대에 이르는 유럽 전체의 역사를 종교와 세속권력 간의 주도권 다툼이란 시각으로 푸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각자 하나의 커다란 세력이 되어서 서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이 종교와 세속 권력은 처음에 어떻게 출발했는가? 이것을 풀면 어째서 라이시떼가 성립 불가능한 개념인지가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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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황제가 성직자 서임권을 놓고 맞다이를 뜬 일명 '카노사의 굴욕'


종교와 정치는 일종의 공생관계다. 권력자의 통치가 그 국가에서 먹히려면 그 권력자의 권력을 정당화 해주는 강력한 통치체계가 필요한데 사실 여기에 종교만한 게 없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뭐 물론 그렇게 보고 싶으신 분도 있을 것이다.- 아소카 왕이 돈오점수하여 불교에 귀의한 것이 아니다. 콘스탄틴 황제나 아소카 왕 공히 권력투쟁을 통해 권력을 쟁취했고, 그렇게 권력을 얻고 난 다음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통치구조를 재편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기존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각각 기독교와 불교를 '체택'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나카자와 신이치의 책 한 대목을 인용하겠다.


"왕의 권력은 성대한 종교적 의식에 의해 연출되어야 합니다. 왕은 이성과 다른 종류의 힘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자연'의 소유였던 권력을 사회의 내부에 있는 왕이 체현하는 것이 왕권이므로, '대립하는 것의 일치'를 당당하게 연출할 수 있는 종교적 제의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왕의 권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 국가 그리고 야만의 탄생> 중에서
 


종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기존의 사회질서 또는 기존의 정치권력, 또는 기존의 종교권력이 고착화된 상황에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변혁적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이들은 대체로 다소 종교적 특색을 갖는다. 종교학에선 이들을 가리켜 섹트(sect)라 부른다. 이 섹트는 처음엔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역할한다. 우리가 흔히 ‘반골’이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하면 되겠다. 섹트의 단계에서 종교는 그 목표가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 및 개혁과 갱신을 포함하는 ‘차별화’다. 


그런데 이것이 규모가 커지게 되면 당연히 이 집단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할 필요가 생긴다. 그래서 그 내부에서 서열을 갖춘 관리체계가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섹트로 출발한 종교가 본래 하나의 운동(movement)에서 하나의 기구(institution)가 되면 이제는 또 하나의 새로운 목표 또는 필요가 발생하는데 바로 기구로서의 종교 그 자체의 존립이다. 그러자면 이제는 더 이상 그 사회의 저항세력이 되어선 안 된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그 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스스로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일단 존립 자체는 위협받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서 좀 크기 위해서는 권력의 비호가 필수다. 이와 관련해서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례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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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 부통령 = 장노 + 권사


아무튼 정리하자면, 권력자는 통치신념으로 종교가 필요했고, 종교는 생존, 발전을 위해 권력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권력과 종교가 서로를 통해 각각 정당성과 존재기반을 얻게 된다는 의미다. 종교는 죽음의 문제나 두려움 보다는 이렇듯 현실적 필요에 의해 생겨난다. 죽음의 문제와 관련해서 종교라는 개념이 생겨났다고 일반적으로 설명되어 왔지만, 죽음의 문제가 하나의 모티브는 될 수 있어도 이것만을 가지고는 종교가 실제로 사회 속에서 어떻게 생성, 발전하는 지 설명할 수 없다.

 

 

집단이 있다면 그 안엔 어떠한 형태로든 신앙체계, 또는 신념체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형태로든 관리체계가 있다. 다만 그 집단의 규모나 특성에 따라 이것이 나이브하거나 아니면 좀 더 체계적이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들을 각각 종교와 정치라 부른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정치체계가 있어왔고 또 존재해 왔다. 종교와 정치는 인간사회의 본질이고 이 둘은 상호의존적이고, 동시에 상호보완적이다. 종교는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해주고 정당성을 획득한 정치권력은 당연히 종교를 비호한다. 역대 대통령들이 정기적으로 국내 종교 지도자들을 청와대에 초청하는 것이 예의상 그러는 게 아니고, 개신교가 국가조찬기도회를 심심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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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서울' 정도는 봉헌해줘야...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정치가 종교로부터 벗어나 그 자체로 정당성을 얻기 위한 부단한 지적 노력이 있었고, 사회계약설도 그 결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계약설 같은 이론이 백만개가 나와도, 아님 사회계약설 할애비가 나와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무릇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인간으로서의 권리, 즉 인권, 기본적인 권리라고 해서 기본권이라고도 부르는 이 인권의 근거는 무엇일까? 도덕, 윤리의 근거는 무엇일까? 왜 사람은 선해야 하며, 남을 도와야 하며, 신의를 지켜야 하며 서로 사랑해야 하며 등등... 이 지점에서 결국 하늘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천부인권사상이 나온 것이고, 칸트도 잘 나가다가 어쩔 수 없이 도덕 윤리에 와서는 막판에 신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정치와 종교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는 되었다고 본다. 아님 말고. 암튼 정치와 종교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심지어는 근본적으로 하나라고 까지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럼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정치와 종교는 어떤 관계여야 할까? 이것은 기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질문이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다소 먼 길을 돌아서 왔다. 가치판단 이전에 사실판단이 먼저 있어야 한다. 정치와 종교가 이러이러한 관계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에 앞서, 현재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그 관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현상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또 다른 의미에서 현실적으로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 '종교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종교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등의 다양한 규범적 관계설정을 할 수 있다. 또 이런 기준으로 특별히 현 한국 개신교와 역대 정부를 평가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의 굳이 본인의 견해를 밝히자면 이렇다. 나는 정치와 관련하여 한국 개신교의 모습에 매우 비판적이다. 정치에 개입해서가 아니라 그 모양새가 후져서다. 종교의 정치참여 자체를 비판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종교라는 것이 본래 자신의 신념체계를 바탕으로 현실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또 거기에서 오는 가치체계를 현실세계에 구현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현실세계" 속엔 정치도 포함된다. 만약에 관여 자체가 문제라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역시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참여, 개입, 압력행사 등의 방법 자체도 비판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실 정치에 관여하고자 한다면 각자 가장 효과적이라 여기는 다양한 방법들이 고려될 수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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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렇게 정리해보겠다.


종교와 정치는 중국집의 짜장면과 짬뽕이다. 중국집의 사정에 따라 깐쇼새우나 샥스핀이 없을 수는 있어도 짜장면이나 짬뽕 중 하나가 없다는 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 전까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 이 집 짜장면 맛이 이따위냐 라고 할 순 있어도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왜 파느냐 라고 할 순 없는 것 아닌가? 우리가 종교의 정치참여를 비판할 때 그 질을 따져야지 정치참여 자체를 따지는 것은 이렇듯 문제가 있다는 것이 오늘의 결론되겠다.







문화불패 JINO


편집: 딴지일보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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