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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2. 12. 목요일

산하









산하의 가전사


"가끔하는 전쟁 이야기 사랑이야기의 줄임말입니다.

왜 전쟁과 사랑이냐... 둘 다 목숨 걸고 해야 뭘 얻는 거라 그런지

인간사의 미추, 희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얘깃거리가 많을 거 같아서요."


from 산하







지금은 포비를 프로필로 쓰고 있지만 페북을 시작하고 2년 정도는 꺼벙이를 프로필로 걸어 두었었지. 머리에 땜통 자국을 하고 방학이라도 했는지, 변소청소라도 끝냈는지 새총을 들고 배꼽 내놓고 환호하는 꺼벙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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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니 땜통이 감자 같다.


나는 그 땜통이 왜 생겼는지를 기억하고 있어. 어느 날 이발비를 받아 이발소에 가던 꺼벙이가 무슨 일로 돈을 다 까먹고 10원 어치만 잘라 달라고 해. 그러자 이발소 아저씨가 딱 그 땜통을 내줬고 그 이후 꺼벙이의 땜통 자국에서는 머리가 자라지 않았어. 그 땜통이 꺼벙이의 상징처럼 됐지.

 

2010년 1월 30일 길창덕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 또래의 많은 사람들이 아련한 슬픔에 휩싸여 한 마디씩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들은 대개 유홍준 교수 이전에 <선달이 여행기>로 ‘문화유산답사’를 경험했고 <신판 보물섬>의 유쾌한 보물찾기에 동참했고 어머니들이 보던 여성중앙의 <순악질 여사>를 훔쳐 보며 키득거린 이들이고 무엇보다 꺼벙이와 꺼실이의 좌충우돌에 박장대소를 하며 데굴데굴 구들장을 굴러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지. 나 역시 그랬어.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 악착같이 간 이유는 외갓집에서 정기구독하던 소년중앙의 꺼벙이를 보기 위해서였으니까. 오래된 한옥이었던 외갓집의 벽장 속을 쥐처럼 파고들면서 꺼벙이를 만났더랬다.


세탁기가 있어 빨래도 대신 해 주고 전기밥솥으로 밥도 대신 해 주는데 왜 숙제를 대신 해주는 전기숙제기는 없냐며 가전 대리점을 찾아다니던 꺼벙이 모습에 공감하기도 하고 키 큰 친구와 농구를 이겨 보겠다고 신발에 스프링을 달고 뛰다가 멈추지 못하고 꺼벙이 살려를 울부짖는 모습에서 깔깔대기도 하고 꺼벙이의 아버지가 쿠웨이트인가로 전근가는 형식으로 마무리했던 꺼벙이의 마지막 회에선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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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벙이 마지막회


길창덕 선생은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만화가로 유명했고 1997년 경에 붓을 놓았으니 거의 40년을 넘는 만화 인생을 살았지. 그는 문하생을 별로 두지 않았다고 하고 주로 혼자 작업을 했다고 하는데 최고 25개의 잡지에 만화를 연재하면서도 펑크를 한 번도 내지 않은 괴력의 소유자였다고 하네. 그런데 그 만화의 원천은 바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해.


원래는 시사만화나 성인만화를 그렸지만 '내 만화로 아픈 사람들이 생기는 건 싫다'고 해서 아동만화로 길을 돌린지 얼마 안됐을 때 그는 한 고아원의 소녀로부터 편지를 받아. 아저씨의 만화 <재동이>를 너무 재미있게 읽고 있으며 고아원 친구들과 함께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하루 종일 즐거워했다는 내용이었지. 부디 더 재미있는 만화를 그려 달라는 당부와 함께. 길창덕 선생은 그 편지를 평생 간직했다고 해. “눈물이 핑 돌더라고. 만화 그리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어.” 본인의 회고다.


소재가 어디서 나오냐는 질문에 그는 '동네 아이들'이라고 대답했어.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 학교 갔다 와서 떠드는 모습, 찧고 까불다가 울기도 하고 까르르거리기도 하는 모든 모습이 길창덕 선생의 눈에 잡혔고 그 에피소드들은 꺼벙이로, 재동이로, 빵점도사로, 쭉쟁이로, 고집세로, 다부지로, 선달이로 현신하여 다시금 아이들을 웃기고 울렸어. 한 번은 당신의 따님이 어렸을 적에 재떨이를 좀 버리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더니 이 따님께서 재떨이까지 몽땅 버려 버리고 오셨더라네. 이 에피소드도 어김없이 만화에 실렸다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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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우리 세대가 그분에 공감하고, 또 직장인들이 <순악질 여사>에 열광했던 건 그만큼 삶과 일상의 세세한 혈을 귀신같이 찾아 웃음보의 침을 꽂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순악질 여사>에선 이런 에피소드가 기억나네. “여보 만원만 줘” 하는 남편에게 순악질 여사는 “그제도 만 원 어제도 만 원 오늘도 만 원 도대체 그 돈을 어디다 써요?” 하면서 한바탕 패대기를 치는데 기죽은 남편이 길을 걸으며 중얼거리지. “도대체 그 돈을 주기나 했어?” 아 이건 거의 글자 그대로 카드 압수당했을 때의 나였잖아.


길창덕 선생의 만화에 정치색은 별로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 언급한다면 너무나도 투철한 반공 의식이었지. 그분은 평안도 선천 사람이었어. 전쟁 전에 역무원을 하다가 1.4 후퇴 때 피난내려와 하사 계급으로 전쟁에도 참전하지.(전투를 한 건 아니었지만)


꺼벙이 에피소드 가운데에는 반공 글짓기를 아버지가 대신해 주는 게 있어. 그때 아버지는 소설가처럼 낙동강 전투를 써내리다가 전사한 상관을 그리면서 엉엉 울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악인은 별로 등장하지 않는 천진스러운 그의 만화에도 북한만큼은 여지없이 악마로 등장하지.


하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역사일 것 같아. 언젠가 그는 신문 기고에서 창씨개명한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조선인 교사에 대한 회고를 해. 일제 말엽의 조선인 교사였던 그는 수업 뒤 끝에 항상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압록강 건너 독립군들의 활약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고 해. '절대 비밀이야!' 눈 찡긋 하면서. 그런데 해방 뒤에 만났을 때 그 교사는 조선민주당에 가입했고 그 때문에 반공인사 표식이 붙은 듯해 골치가 아프다고 토로했다고 해. 길창덕 선생이 “또 절대 비밀이야 하셔야지요?” 하니 그 교사는 “일본인들이 다 간 마당에 내 나라에서 그러고 살아야 하느냐.”며 씁쓸해했다고.


1.4 후퇴 때 피난 내려온 그는 조선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창씨한 ‘덕부 선생’으로만 기억하는 옛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지. 하지만 그분보다 더 애타게 마음에 담았던 건 물론 어머니일 거야. 늘그막에 길창덕 선생은 이럴 줄 알았으면 피난 내려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간직해 오던 회초리를 태웠다고 하네. 그 회초리는 통일되면 어머니에게 가지고 가서 맞으려고 장만해 둔 거였다고 해. 하지만 어머니가 100세가 되던 2003년 더 이상은 살아 계실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불태워 버린 거지. 아마 불태우면서 노트 빽빽이 적어 놨다는 어머니에 드리는 시들을 읊조렸을지도 모르겠다.


분단.jpg


이산의 아픔과 전쟁의 소용돌이, 가난의 고통 속에서 그의 마음을 데울 수 있었던 건 바로 만화였고 그 만화의 원천인 아이들이었겠지. 앞서 얘기했던 고아의 편지처럼 '양지바른 곳에서 아저씨 만화를 보며 행복해 하는' 아이들. 그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담배 몇 갑을 죽자고 피워대며 만화를 그렸던 그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말 중의 하나인 이 글귀에서 오늘 내 마음이 멈추네. 


지족상락(知足常樂) : 만족함을 알면 항상 즐겁다. 


그래 어쩌면 그래서 꺼벙이는 빵점을 맞으면서도, 허구헌날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리고 온 동네 사람들을 골탕먹이면서도 마냥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쉽지만 어려운 ‘지족상락’의 의미를 만화 칸칸이 뿌려대면서 말이지.


오늘 가전사는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만 뭐...


어디 사랑이 남녀간 사랑 뿐이겠냐.


길창덕 화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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